전쟁과역사 전쟁 이후의 변화 - 영국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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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398회 작성일 16-02-07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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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표


영국 내전 개요

전쟁주체


잉글랜드의 찰스 1세와 왕당파, 의회파

전쟁시기


1642~1651

전쟁터


그레이트 브리튼 섬(주로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지역)

주요전투


에지 힐 전투, 에드월튼 무어 전투, 뉴베리 전투, 마스턴 무어 전투, 네이즈비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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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땅에서 ‘왕’이 없어지다



영국도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근대 이전에는 왕권을 절대시하는 왕들이 있었고 치열한 왕위 계승전을 겪었다. 이러한 경우 왕위에 올랐다가 폐위되는 왕들도 있었으며 오히려 순조롭게 왕위를 계승하는 군주는 드물었다. 그러나 제인 그레이(Lady Jane Grey, 1536?~1554, 그나마 제대로 왕 노릇을 해보지도 못하였다)를 제외하고는 14세기 이후 그 누구도 법정에서 죄인으로 지목된 적이 없고 더군다나 그 죄로 인하여 사형당한 경우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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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롬웰이 장기의회(Long Parliament)를 강제로 해산하는 장면. 크롬웰은 이후 호국경이 되어 강력한 독재를 실시한다.



그러나 1649년에 영국 내전이 종식된 후 왕은 실제로 사형을 언도 받고 목이 잘렸으며 영국 땅에서는 ‘왕’이 없어졌다. 대신 올리버 크롬웰이 ‘호국경(護國卿, Lord Protector)’이 되고 공화국(Commonwealth)이 수립되었다. 상원격인 귀족원(House of Lords)도 폐지되고 국교회도 사라졌다. 공화정부가 위협이라고 간주하지 않는 한 어떠한 형태의 교회를 나가도 무방하였다. 아울러 왕실, 교회, 그리고 많은 귀족들이 가지고 있던 땅이 몰수되었고 당시까지의 영국 역사 상 최대의 토지 재분배가 이루어졌다.

잉글랜드 ‘공화국’이 강력한 군대를 보유하게 되면서 2차 내전때 왕의 편을 들어 잉글랜드를 침공한 스코틀랜드의응징에 나선다. 스코틀랜드 의회도 찰스 1세의 사형을 스코틀랜드의 정통성에 대한 모욕으로 간주하고 잉글랜드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북진하는 잉글랜드군은 1650년 9월 3일에 데이비드 레슬리의 서약파 군대를 던바(Dunbar)에서 격파한다. 이윽고 스코틀랜드군은 찰스 1세의 아들인 찰스 2세를 중심으로 뭉치려 하였으나 위링턴 브릿지, 위건, 우스터 등지에서 잉글랜드의 신군에 연전연패한다. 특히 우스터에서의 대승으로 스코틀랜드는 완전히 힘을 잃고 스코틀랜드는 공화국의 권위에 복종하게 된다. 스코틀랜드는 사실 애초부터 왕에 반대하였다기 보다는 종교의 자유와 자치 때문에 일어선 것이었는데 왕이 성공회를 강요하자 이에 반대한 것뿐이었다. 이들은 어디까지 스코틀랜드를 위해서 싸운 것이었으며 공화국이 스코틀랜드를 치려하자 맞서 싸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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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바 전투의 올리버 크롬웰.



스코틀랜드를 복속시킨 공화국은 아일랜드를 침공하여 자치의회와 기관들을 없애고 1653년까지 전쟁을 벌여 독립세력을 소탕하고 아일랜드를 다시 잉글랜드의 통치하에 놓는다. 아일랜드에서 가톨릭 교도들의 땅은 모조리 몰수되고 내전에서 싸운 잉글랜드 군인들에게 재분배된다. 1641년에는 아일랜드땅의 약 60%가 가톨릭 소유였으나 1662년에는 불과 20%에 불과하였다. 아일랜드는 정치적인 독립은 물론이고 영국내전의 결과로 인하여 백성들의 땅까지 잉글랜드인들에게 빼앗겨 버린 것이다. 내전 이후 잉글랜드 ‘공화국’의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진행된 일련의 사건들을 별도로 ‘3차 영국 내전’이라고도 한다.



잔인했던 내전, 하나의 혁명으로 기억되어야



정치적으로는 백성들이 실력으로 들고 일어나 왕을 갈아치울 수 있다는 선례를 남겼다. 물론 다시 왕정복고가 이루어지기는 하지만 왕의 절대권력은 사라졌으며 이는 나중에 ‘명예혁명’을 통하여 영국의 왕이 되는 윌리엄 3세에 의하여 확인된다. 이때를 전후하여 발달한 정치사상, 즉 ‘사회계약론’과 로크등의 천부인권 개념은 이후 서구의 정치에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계몽주의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 정치적 계몽주의는 아메리카의 지식인들에 의하여 계승되고 그들은 이를 바탕으로 영국에 대한 독립을 선포하고 미합중국을 세운다. 그리고 영국에서는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가 한 정부아래 존재할 수 있다는 선례를 남기고 영국이 현재의 ‘연합왕국’으로 통합되는 전례를 마련한다. 영국의 내전은 잔인했지만 국가 통합의 전초가 되고 후일 민주사상의 태동을 가능케 했다는 점에서 하나의 혁명으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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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형 당한 찰스 1세의 관을 열어 보는 올리버 크롬웰.(전해지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제작된 것으로, 실제 그랬다는 증거는 없다)





참고문헌 : Barbara Donagan, “Atoricity, War Crime, and Treason in the English Civil War,” [The American Historical Review], Vol. 99, No. 4 (Oct., 1994) 1137-1168; Ian Gentles, “Why Men Fought in the British Civil Wars,” [The History Teacher], Vol. 26, No. 4 (Aug., 1993), 407-418; Leonard Hochberg, “The English Civil War in a Geographical Perspective,” [The Journal of Interdisciplinary History], Vol. 14, No. 4 (Spring, 1984), 729-750; Mark Stoyle, “English Nationalism, Celtic Particularism, and the English Civil War,” [The Historical Journal], Vol. 43, No. 4 (Dec., 2000), pp. 1113-1128; Charles Carlton, [Going to the Wars: the Experience of the British Civil Wars 1638-1651], (London: Routledge, 1992); Stanley D.M. Carpenter, [Military Leadership in the British Civil Wars 1642-1651], (London: Frank Cass, 2005); Anthony Fletcher, [The Outbreak of the English Civil War], (New York: New York University Press, 1981); John Kenyon and Jane Ohlmeyer (eds.), [The Civil Wars: A Military History of England, Scotland, and Ireland 1638-1660], (Oxford, UK: Oxford University Press, 1998); Conrad Russell, [The Causes of the English Civil War], (Oxford, UK: Clarendon Press, 1990); Paul K. Davis, [100 Decisive Battles: From Ancient Times to the Present],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01).





김성남 | 안보·전쟁사 전문가
글쓴이 김성남은 전쟁이 인간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가지고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미국 UC 버클리 동양학과를 졸업한 후 연세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국제학 석사를 받고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에 진학하여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 [전쟁으로 보는 삼국지], [전쟁 세계사] 등이 있으며 공저로 [4세대 전쟁]이, 역서로 [원시전쟁: 평화로움으로 조작된 인간의 원초적인 역사]가 있다.


발행2012.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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