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젊은 황제들 - 북방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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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399회 작성일 16-02-07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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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표


북방 전쟁 개요

전쟁주체


러시아, 폴란드, 덴마크, 노르웨이, 작센, 프로이센, 영국 vs 스웨덴, 오스만튀르크

전쟁시기


1700~1721

전쟁터


러시아, 스웨덴, 폴란드 등 북동유럽

주요전투


나르바 전투, 프라우슈타트 전투, 골로프치노 전투, 폴타바 전투, 항코 해전





‘망나니 황제’의 야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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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제” 표트르 1세.



스웨덴의 카를 12세가 스톡홀름에서 머리에 왕관을 쓰고 있을 때, 러시아의 표트르 1세는 네덜란드의 조선창에서 망치를 휘두르고 있었다. 그도 이제 25세가 되는 청년이었으며,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고 술을 고래처럼 마셔서 ‘동방에서 온 야만인 군주’라는 쑥덕거림이 없지 않았다. 그가 서유럽을 순방하며 러시아 차르의 신분을 숨기고(그래도 알 사람은 다 알았지만) 조선술을 배운답시고 목재를 뚱땅거리고 있는 것도 괴상한 취미일 뿐이라고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 망치 소리야말로 러시아 사상 최대의 개혁의 전주곡이자, 스웨덴 제국의 종말을 예고하는 소리였을 줄이야.

표트르 1세는 카를 12세가 태어나던 1682년에 이복형 이반 5세와 공동 즉위했으며, 이복누이 소피아가 섭정을 맡았다. 왠지 복잡해 보이는 이 즉위는 6년 전에 즉위한 맏형 표도르가 병약하여 일찍 죽자, 차기 황위는 표트르에게 돌아가게 되었으나 이에 반대한 소피아가 무장봉기를 하며 황실을 온통 들쑤신 끝에 결국 그녀가 섭정을, 그녀의 동생 이반이 공동황제를 맡는 것으로 이루어진 묘한 타협의 결과였다. 그만큼 불안한 옥좌였고, 러시아의 왕권 자체도 스웨덴의 절대군주정에 비하면 기반이 허약했다.

아마도 자신에 대한 이복누이의 위협적인 시선을 따돌리기 위해, 표트르는 천한 출신의 또래들과 산과 들을 쏘다니며 ‘망나니짓’을 벌이는 것으로 한동안 소일했다. 하지만 그것은 심신을 단련하고, 세상을 다양하게 볼 줄 알고 어떤 사람하고나 어울릴 줄 아는 힘을 기르는 기회도 되었다. 그는 어느덧 군부를 중심으로 자신의 지지세력을 확보해 나갔고, 이복동생이자 공동황제인 이반마저 자기 편으로 만들었다. 결국 소피아는 마지못해 1689년에 섭정직을 물러났으며, 1696년에 이반이 죽자 명실공히 러시아의 유일한 지배자가 되었다.

러시아는 대대로 육지의 국가였고, 들에서 일하던 농부들을 하루아침에 전쟁터에 내몰아 싸우는 식이다보니 병력만 많을 뿐 오합지졸을 면하지 못했다. 그러나 친정 시작 직전에 호수에 ‘장난감 함대’를 띄워 모의 해전을 벌이고, 1693년에는 직접 배를 타고 북극해를 탐사했던 표트르는 바다야말로, 해군이야말로 러시아의 미래라고 생각했다. 그는 1696년에 지배권을 굳히자마자 모스크바에 해군본부를 창설하고, 귀족 자제들에게 네덜란드, 영국 등에서 항해술을 배워오도록 강제 파견했다. 그리고 이듬해(1697년)에는 자신이 직접 서유럽 방문단에 끼어서 여러 나라를 순방했으며, 특히 네덜란드의 조선창에서는 직접 망치를 들고 배 만드는 과정을 체험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는 또 영국에서는 당시 세계 최고로 불리던 영국 해군의 제도를 열정적으로 배웠고, 명예 제독의 칭호를 얻기도 했다. 그것은 유럽 순방 직전(1695~1696) 벌인 튀르크와의
아조프 전쟁에서 러시아군이 얼마나 약해빠졌는지를 똑똑히 보고 나서 생긴 절박한 심정도 한몫했던 열정이었다.

표트르는 1698년, 모국의 반란 소식에 18개월 만에 러시아로 돌아왔다. 소피아가 근위병대(스트렐치)를 선동해 일으킨 반란이었는데, 표트르가 돌아왔을 때는 이미 반란은 진압된 뒤였다. 그는 이복누이를 수도원에 종신연금시키고, 반란 가담자들을 잔혹하게 처형했을 뿐 아니라 구체제의 기득권이던 근위병대를 아예 해체해 버렸다. 그리고 궁정관료들에게 턱수염을 깎도록 하고, 새롭게 서구식 역법을 쓰며, 서구식 학교를 설치하는 등, 과감한 서구화 개혁에 착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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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의 ‘힘 좋은 왕’ 아우구스투스.



그런데 귀국하기 직전, 표트르는 폴란드의 왕이자 작센 선제후였던 아우구스투스 2세(Augustus II, 1670~1733)와 의미심장한 만남을 가졌다. 표트르보다 두 살 위였고 말편자를 맨손으로 부러뜨릴 만큼 힘이 장사여서 “힘 좋은 왕 아우구스투스”라는 별명을 갖고 있던(다른 의미로도 힘이 좋았다고도 한다. 그는 300명이 넘는 자녀를 두었다) 아우구스투스는 표트르와 죽이 잘 맞았다. 그는 표트르에게 이렇게 속삭였다. “우리 한 번 손을 잡고, 스웨덴을 혼내 주는 게 어떻소?” 표트르로서는 솔깃할 수밖에 없었다. 1617년에 잃은 발트 해 연안 영토를 되찾는다면 서유럽으로 나갈 바닷길이 열리고, 인근의 강대국들이 주는 위협에서 숨을 돌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아직 정비되지 못한 러시아의 군사력이 막강 스웨덴군을 꺾을 수 있느냐였는데, 아우구스투스는 ‘풋나기’가 왕위에 막 오른 이 기회를 노려야 하며, 덴마크까지 끌어들여 협공한다면 승산은 충분하다고 설득했다. 마침내 표트르는 이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귀국 후에 양쪽에서 적과 마주치지 않기 위하여 튀르크와 평화협상을 맺는 일에 공을 들였다. 1700년 1월,아우구스투스는 스웨덴에 전쟁을 선포했으며 덴마크와 함께 전선으로 나갔다. 표트르도 그해 7월에 튀르크와 30년 동안 서로 전쟁을 하지 않는다는 조약을 맺고, 곧바로 스웨덴과의 전쟁에 돌입했다. 북방전쟁(세베르나야 보이나)의 시작이었다.



전술의 천재는 전략의 둔재였나?



하지만 아우구스투스가 ‘풋나기’라고 비웃은 카를 12세는 침착하고 기민하게 움직였다. 표트르와는 달리 서구화는 기질을 퇴화시킨다고 여겨 궁중에서 프랑스어를 금지하고 서구산 수입 사치품도 금지했으며, 옥좌보다는 말 위에서 시간을 보내기를 즐겼던 그는 적의 허를 찌르며 해군으로 덴마크를 급습, 곧바로 수도 코펜하겐을 들이쳤다. 꼼짝할 수 없게 된 덴마크는 러시아가 전쟁에 막 뛰어들던 8월에 벌써 손을 들고 말았다. 다음 목표로, 카를은 11월에 폴란드군이 침공한 리보니아에 뛰어들더니 계속 진격하여 러시아군과 충돌했다.

당시 표트르의 러시아군은 옛 영토인 발트 연안의 잉그리아에 침입하여 나르바 요새를 포위 공략하고 있었다. 1700년 11월 19일, 카를이 이끄는 8천 명의 스웨덴군이 3만 5천(4만이 넘었다고도 한다)의 러시아군과 맞섰다. 당시 표트르는 후방의 문제를 처리하느라 카를이 도착하기 직전에 전장을 떠나 있었고, 프랑스 출신의 샤를 유진 드 크로아(Charles Eugène de Croÿ, 1651~1702)가 지휘를 맡고 있었다. 병력 면에서 상대가 되지 않는 전투였지만, 스웨덴군은 마침 매섭게 몰아치던 눈보라의 방향이 러시아군 쪽으로 부는 것을 틈타 적진에 돌격했다. 질서정연하게 밀고 들어오는 스웨덴군에게 아직 오합지졸을 면치 못하던 러시아군의 진영은 간단히 토막나 버렸고, 스웨덴군은 우왕좌왕하는 러시아군을 에워싸고 일방적인 살육전을 벌였다. 결국 약 1만의 사상자를 낸 러시아군은 항복했으며, 샤를 유진 드 크로아는 포로가 되어 스웨덴으로 잡혀갔다가 2년 뒤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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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바에서 승리한 스웨덴군.



이 빛나는 승리를 카를 12세는 제대로 이용하지 못하는 전략적 과오를 범했다는 게 대부분의 역사가들의 견해다. 나르바 전투한 번으로 러시아는 저항력을 상실했으며, 카를이 그대로 모스크바로 진격했더라면 러시아를 확실히 무릎 꿇렸으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카를은 말머리를 돌려 폴란드가 침공한 리보니아로 갔으며, 이후 약 6년 동안 폴란드와의 싸움에 골몰하느라 표트르가 세력을 재정비할 기회를 주고 말았다. 그러나 이런 평가는 다분히 결과론적이지 않은가 싶다. 당시 작센과 합병되어 있던 폴란드의 병력은 약 10만으로, 20만까지 동원할 수 있었던 러시아보다 수적으로는 적었으나 질적 수준은 월등했다(게다가 러시아는 단번에 총 병력을 동원할 수 없었고, 따라서 나르바 전투 한 번에 실질적으로 병력 공백 상태에 빠졌다). 게다가 러시아가 멀리 있는 위협이라면 덴마크와 폴란드는 눈앞의 위협이었다. 러시아를 공략하는 사이에 폴란드의 리보니아 점령이 굳어진다면 스웨덴군은 돌아갈 길이 막혀버릴 수도 있었다. 결국 카를의 회군 결정은 당시로서는 상당한 타당성이 있었으며, 애초에 리보니아를 잠시 놔두고 소수 병력만으로 러시아부터 공격한 것은 마치 후금명나라 와의 전쟁을 놓고 먼저 조선을 침략했듯 배후의 우환거리(그리고 약한 우환거리)를 미리 처리해 두자는 속셈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카를 12세가 미처 계산하지 못한 것은 표트르 1세가 자신 이상으로 강력한 용기와 지혜, 의지의 소유자였다는 사실, 그리고 러시아라는 나라의 저력이었다.


참고문헌 :
버나드 몽고메리, [전쟁의 역사](책세상, 2004); P. R. 파머-J. 콜튼, [서양근대사](삼지원, 1985); 김용구, [세계외교사](서울대학교출판부, 2006); 윌리엄 위어, [세상을 바꾼 전쟁](시아출판사, 2005); 크리스터 외르겐젠 외, [근대 전쟁의 탄생: 1500∼1763년 유럽의 무기, 전투, 전술](미지북스, 2011); 이에인 딕키 외, [해전의 모든 것](휴먼앤북스, 2010); 제임스 크라크라프트, [표트르 대제: 러시아를 일으킨 리더십](살림, 2008); 박지배, [표트르 대제: 강력한 추진력으로 러시아를 일으키다](살림, 2009); 이길용, “스웨덴의 근대발전사” [유럽연구].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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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규진 | 서울교육대학교 교수/역사저술가
글쓴이 함규진은 여러 방면의 지적 흐름에 관심이 많다. 정치학을 전공하여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주로 역사와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썼고, 인물이나 사상에 대한 번역서도 많이 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등 서로 대립되는 듯한 입장 사이에 길을 내고 함께 살아갈 집을 짓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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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2012.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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