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발트 해에 지다 - 북방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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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03회 작성일 16-02-07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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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표


북방 전쟁 개요

전쟁주체


러시아, 폴란드, 덴마크, 노르웨이, 작센, 프로이센, 영국 vs 스웨덴, 오스만튀르크

전쟁시기


1700~1721

전쟁터


러시아, 스웨덴, 폴란드 등 북동유럽

주요전투


나르바 전투, 프라우슈타트 전투, 골로프치노 전투, 폴타바 전투, 항코 해전





숙적과 아들의 죽음



폴타바 전투로 사실상 전쟁의 대세는 결판났다. 하지만 아직 전쟁이 끝나려면 12년이 더 흘러야 했는데, 복잡한 문제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카를이 패주한 다음 리보니아와 잉그리아를 어렵지 않게 석권한 표트르는 아우구스투스를 다시 한 번 폴란드 왕좌에 앉도록 했다. 아우구스투스는 러시아, 덴마크와 반 스웨덴 동맹을 복원하는 한편, 자체적으로 폴란드에 절대군주정을 수립하려 했으나 귀족층의 반발에 부딪쳤다. 결국 그는 한때 이용하려 했던 러시아의 후원에만 기대는 허울뿐인 왕권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튀르크로 도망친 카를 12세를 추방하라는 요청에 튀르크가 불응하자, 표트르는 힘으로 해결하기로 하고 튀르크로 공격해들어갔다. 하지만 1711년 7월에 프루트 강변에서 대패하고 마는데, 앞서 카를이 자신의 군사력을 과신하고 적국 내부의 호응 세력을 과신하여 실패했듯 이번에는 표트르가 튀르크군을 과소평가하고 튀르크 영토 내의 기독교 계통 주민들의 호응을 과신했기 때문에 빚어진 결과였다. 튀르크군에게 포위된 표트르는 결국 프루트 조약에 서명했으며, 그에 따라 앞서 아조프 전쟁에서 획득한 영토를 모두 튀르크에게 반환하고, 폴란드에 간섭하지 않으며, 카를 12세의 안전을 보장하기로 했다. 잘 나가던 표트르의 굴욕적인 패배처럼 보였으나, 어떤 면에서는 그에게 다행이었다. 만족한 튀르크가 더 이상 북방전쟁에 개입하기를 그만두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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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에서 본국으로 운구되는 카를 12세의 시신.



실망한 카를 12세는 1714년에 혼자 말을 타고 유럽을 가로질러 스웨덴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먼저 노르웨이를 병합한 다음 러시아에 복수하려 했지만, 1718년, 노르웨이의 프레딕스텐에서 총을 맞고 36세의 나이로 숨진다(전사인지, 배반자의 총에 맞은 것인지는 불확실하다). 표트르는 젊은 숙적의 죽음을 듣고 유쾌했을까?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심정은 복잡했을 것이 틀림없다. 바로 그 해, 불과 넉 달 전에, 그는 황태자 알렉세이(Alexei Petrovich Romanov, 1690~1718)의 죽음도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아들이자 후계자이면서도 부왕의 서구화 정책에 반대해왔다. 그러다 결국 쿠데타까지 꾸민다는 소문이 돌고, 알렉세이는 오스트리아로 달아났으나 표트르의 사면 약속에 귀국했다가 의문사를 당한 것이다. 일부 소문처럼 표트르가 직접 아들을 암살한 것은 아닐지 몰라도, 표트르 1세는 이반 4세 (Ivan IV, 1530~1584)처럼 자신의 피붙이이자 후계자에게 믿음과 애정을 심어주지 못했고, 끝내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1718년, 표트르는 자신이 일으킨 제국의 걸림돌이 밖에서나 안에서모두 사라짐을 보았으나, 내부의 걸림돌은 본래 디딤돌이 되어야 했던 것이다.

한편 반 스웨덴 동맹이 우세해 보이자 사태를 예의 주시하던 다른 열강들도 ‘스웨덴 때려잡기’에 뛰어들었다. 1713년에는 프로이센이, 1715년에는 하노버-영국이 동맹에 가담했다. 이들의 공세로 1715년과 1716년에 포메른, 스틀라스룬트, 비스마르 등 북독일 지역의 스웨덴 영토가 함락되었다. 이로써 30년 전쟁에서 스웨덴이 거둔 성과가 대부분 사라지고 말았다.



‘스톡홀름을 파괴하라!’



튀르크에서 한 차례 혼이 나기는 했지만, 표트르의 기세는 여전히 등등했다. 그는 이제 남쪽 걱정을 접고 북쪽에서 전력으로 스웨덴을 몰아붙이기로 하고, 1714년에 핀란드를 침공했다. 선봉은 발트 함대였다. 전쟁 초기에 쓸모없음이 입증된 기존 함대를 과감히 버리고 1708년부터 건조하기 시작한 발트 함대는 북방의 환경에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설계된 1260척의 갤리선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함대는 1714년 7월 27일부터 8월 7일까지 핀란드의 항코 반도 연안에서 스웨덴 함대와 대접전을 벌였다. 스웨덴군은 용감하게 싸웠으나 15대 1에 달하는 수적 열세를 극복할 수는 없었다. 배들을 촘촘히 붙여 밀집방진처럼 만들고 철통수비에 임한 스웨덴 해군을 발트 함대는 처음에는 35척, 두 번째는 80척, 세 번째는 95척으로 들이쳤으며 세 번째 공격에서 적의 기함을 격침시키고 적장을 포로로 잡았다. 이로써 러시아의 제해권이 확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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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코 해전.



이제 러시아군은 거침없이 핀란드로 쇄도했으며, 곧 그 땅의 대부분을 점령했다. 그리고 1719년 7월에는 핀란드의 해군 기지에서 270척 규모의 함대를 출동시켜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을 공략했다. 이 함대는 스톡홀름 인근에 2만 6천의 러시아 육군을 상륙시키고는, 스스로는 스웨덴 해안을 돌며 마을이고 항구고 보이는 대로 짓부수고 불태웠다. 수없이 많은 스웨덴 민간인들이 죽고, 강간당하고, 이재민이 되었다. 스톡홀름 길목의 스테케트에서 결사전을 벌인 끝에 간신히 수도가 유린되는 일은 막았지만, 이제 카를 12세 대신 왕위에 오른 엘레오노라 (Ulrika Eleonora, 1688~1741) 여왕에서부터 귀족들, 병사들과 일반 평민들까지, 생각은 한가지였다. ‘우리는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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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를 침공한 러시아군.



1719년부터 하노버-영국 및 프로이센과 스웨덴의 평화협상이 진행되었고, 북독일에서 급격히 세력균형이 무너지는 것을 우려한 프랑스의 영향력 행사 덕분에 스웨덴은 상실했던 비스마르와 포메른 북부를 되찾았다. 하지만 프로이센은 포메른 남부를 갖고, 하노버-영국은 브레멘을 차지했다. 1720년에 영국, 프로이센, 그리고 덴마크와 평화조약을 맺은 스웨덴은 열강들 사이에 은근히 강성대국이 된 러시아를 경계하는 흐름이 생겼음을 눈치채고 특히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를 꼬드겨 반 러시아 동맹을 모색하기도 했지만, 실패했다. 결국 1721년 8월 30일, 핀란드의 니스타드에서 러시아와 스웨덴 사이에 니스타드 조약이 맺어짐으로써 북방전쟁은 끝났다. 러시아는 스웨덴에 핀란드를 대부분 반환했지만, 잉그리아, 리보니아, 그리고 핀란드 동부의 일부를 차지했으며 이후 이런 저런 식으로 스웨덴 내정에 간섭할 빌미도 마련했다.


참고문헌 :
버나드 몽고메리, [전쟁의 역사](책세상, 2004); P. R. 파머-J. 콜튼, [서양근대사](삼지원, 1985); 김용구, [세계외교사](서울대학교출판부, 2006); 윌리엄 위어, [세상을 바꾼 전쟁](시아출판사, 2005); 크리스터 외르겐젠 외, [근대 전쟁의 탄생: 1500∼1763년 유럽의 무기, 전투, 전술](미지북스, 2011); 이에인 딕키 외, [해전의 모든 것](휴먼앤북스, 2010); 제임스 크라크라프트, [표트르 대제: 러시아를 일으킨 리더십](살림, 2008); 박지배, [표트르 대제: 강력한 추진력으로 러시아를 일으키다](살림, 2009); 이길용, “스웨덴의 근대발전사” [유럽연구].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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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규진 | 서울교육대학교 교수/역사저술가
글쓴이 함규진은 여러 방면의 지적 흐름에 관심이 많다. 정치학을 전공하여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주로 역사와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썼고, 인물이나 사상에 대한 번역서도 많이 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등 서로 대립되는 듯한 입장 사이에 길을 내고 함께 살아갈 집을 짓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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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2012.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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