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유럽에서의 전쟁 - 7년 전쟁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댓글 0건 조회 419회 작성일 16-02-07 08:34

본문















14548016800558.png



상품 정보



14548016811350.jpg





개요표


7년 전쟁 개요

전쟁주체


프로이센, 영국, 포르투갈 vs 오스트리아, 프랑스, 러시아, 스웨덴, 스페인, 작센, 무갈제국

전쟁시기


1756~1763

전쟁터


독일, 북아메리카, 서인도 제도, 남아메리카, 인도, 아프리카

주요전투


로스바흐 전투, 로이텐 전투, 쿠네르스도르프 전투, 퀘벡 전투, 아바나 전투, 라고스 해전, 키브롱 해전





‘세 여인’에게 포위된 프리드리히







14548016819571




프로이센 포위동맹을 성사시킨 오스트리아의 외상, 카우니츠.



프리드리히 2세의 악수, 그것은 1756년 1월에 전격적으로 웨스트민스터 조약을 맺고, 영국과 동맹국이 된 것이었다. 조건은 프로이센이 슐레지엔의 영유권을 승인받는 대가로 러시아 대신 하노버를 지킨다는 것으로, 영국은 하노버에 관해 프로이센을 가장 우려하고 있었기에 그 당사자와 동맹을 맺는다면 굳이 러시아를 파트너로 삼을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영국은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대립에서 대체로 오스트리아를 편들어 왔기 때문에 이것은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충격의 목소리는 빈의 벨베데레 궁 뿐 아니라 베르사유 궁에서도 터졌다. 당시 프랑스는 영국과 17세기 말부터 아메리카 식민지 주도권을 두고 대립해오다, 1754년에는 전쟁에 돌입해 있었다(“프렌치 인디언 전쟁”. 그래서 “7년 전쟁”이 아닌 “9년 전쟁”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아무리 하노버 문제에 국한된다지만 프로이센이 영국과 동맹을? 아마 프리드리히 2세는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알력이 워낙 뿌리깊기에 그런 행동을 한다 해도 프랑스가 친 프로이센에서 친 오스트리아로 돌아서지는 않을 거라고 믿었던 것 같다. 그러나 오산이었다. 오스트리아는 이미 오스트리아 계승 전쟁이 끝났을 때부터 ‘프랑스-프로이센, 영국-오스트리아라는 전통적 동맹구도를 깨고 프랑스와 손을 잡아야 한다’는 방침을 세우고는 프랑스와 몰래 접촉해오고 있었다.

외무대신 카우니츠(Wenzel Anton Fürst von Kaunitz-Rietberg, 1711~1794)가 “동맹의 전복” 계획이라고 부른 그 계획은 이제 바로 프리드리히의 행동 덕택에 마침내 결실을 보게 된다. 1756년 5월, 베르사유에서 프랑스-오스트리아 동맹이 성사된 것이다. 오스트리아는 기존의 상트페테르부르크 동맹도 재확인하고 스웨덴까지 끌어들여(1757년), 오스트리아-프랑스-스웨덴-러시아가 동서남북으로 프로이센을 포위하는 구도를 완성했다. 이 ‘카우니츠 동맹체제’는 프리드리히를 개인적으로 증오해온 러시아의 엘리자베타(Elizabeta Petrovna, 1709~1762) 여제와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 그리고 프랑스의 루이 15세(Louis XV, 1715∼1774)를 손아귀에 넣고 있던 그의 정부, 퐁파두르 부인(Marquise de Pompadour, 1721~1764)의 합작품이라 하여 ‘세 여인의 동맹체제’라고도 불렸다. 여기에 또 작센을 비롯한 다수의 독일 영방국들이 가담했다

이번에는 포츠담의 상수시 궁에서 경악의 외침이 터져나왔다. 프로이센을 코앞에서 포위하고 있는 주변 4강에 비해, 멀리 떨어져 있는 동맹국 영국은 별로 믿을 만하지도 않았으므로 더욱 공포를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2세는 무릎을 꿇기는커녕, 도리어 선제공격으로 나왔다. 그런 공세 전략은 전쟁 내내 일관되었으며, 그가 믿었던 것은 프로이센 자체에서 여러 대를 걸쳐 갈고 닦은 군사력, 그리고 ‘이왕 싸울 수밖에 없다면 선수를 치는 게 낫다’는 신념이었다.



기동력과 결단력으로 기적을 창조하다



1756년 8월 24일, 프리드리히가 직접 지휘하는 프로이센군이 남쪽에 인접한 작센을 침공함으로써 7년 전쟁(독일에 국한해서는 제3차 슐레지엔 전쟁)이 시작되었다. 작센은 6주 만에 손을 들었다. 오스트리아군하고는 10월 1일, 로보지츠에서 처음 격돌하여 승리했지만 큰 성과는 없었다.

도무지 총인구로는 8천만이 넘고 병력으로도 30만이 넘는 동맹체제에 4백만의 인구와 12만의 병력으로 맞선다는 것은 자살행위처럼 보였다. 사실 4강이 합심하여 프로이센 타도에 힘을 모았던들 승패는 일찌감치 결정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각자의 목표만 좇을 뿐 연합군다운 모습을 보여주는 일이 드물었다. 여기에 프로이센군의 저력, 프리드리히의 불굴의 의지와 탁월한 지휘능력, 그리고 우연이라는 요소가 덧붙여져 이 절망적인 전쟁의 결과는 많은 사람의 예상을 뒤엎게 된다.





14548016830899




콜린 전투 모습을 그린 그림



1757년 가을까지는 콜린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가 승리하고, 프랑스는 하노버로, 러시아는 동프로이센으로, 스웨덴군은 베를린 근교까지 쇄도하여 프리드리히의 운명은 바람 앞의 촛불처럼 보였다. 그러나 연말에는 극적인 반전이 있었다. 11월 5일, 오스트리아와 프랑스 합동군을 프리드리히가 작센의 로스바흐에서 대파하고, 다시 한 달 뒤에는 슐레지엔의 로이텐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한 것이다.

로스바흐에서는 전장을 길게 돌아서 프로이센군을 기습하려던 오스트리아-프랑스군의 기동을 알아차린 프리드리히가 길고 가늘게 행군 중이던 적의 앞을 기병대로 틀어막고, 다시 보병대로 행군대형을 풀지 못한 채로 엉거주춤하던 적 대열을 난도질하며, 마지막으로 적의 전진을 막은 기병대가 다시 우회 진격하여 적의 본진을 격파하는 식으로 몇 시간 만에 두 배가 넘는 적을 완파했다. 적군 5천 명을 살상하고 5천 명을 포로로 잡은 반면 프로이센군의 희생은 5백에 불과했던 완승이었다. 이렇게 신속 정확하게 “뱀의 머리를 부수고” “뱀의 몸통을 토막치고” “뱀 소굴을 짓밟을” 수 있었던 것은 유럽 최고이던 프로이센군의 엄격한 규율과 훈련 수준, 거기에 프리드리히의 지휘능력이 합쳐짐으로써 발휘된 놀라운 기동력과 집중 타격력의 성과였다.





14548016841883




로이텐 전투도.



한 달 뒤의 로이텐에서는 일이 반대로 진행되었다. 진격해 오는 8만의 오스트리아군과 정면 충돌하게 된 프리드리히는 적의 눈길을 돌릴 일부 부대를 전진시키고는 상당수의 병력을 크게 뒤로 돌려, 전장을 우회하여 적의 측면을 습격하게 했다. 프로이센군에게는 다행히도 그 지역은 그들이 여러 차례 훈련을 했던 땅이었기에 지형을 훤히 알았고, 따라서 들키지 않고 멀리 행군하여 느닷없이 적의 배후에서 나타날 수 있었다. 잠시 넋이 나갔던 오스트리아군은 그래도 수적인 우세를 믿고 천천히 후퇴하며 반격을 노렸으나, 기습 부대는 총신이 닳아빠지도록 쏘고 또 쏘아 적군이 전열을 정비하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았다. 그들의 탄약이 결국 동났을 즈음 후속대가 도착했고, 기습 부대는 전우들이 던져준 탄약통을 받고는 이내 다시 쏴대기 시작했다. 결국 도무지 전열을 가다듬지 못한 채 계속 피해만 입고 있던 오스트리아군은 총퇴각을 결정했다. 로이텐 전투도 대승이었으나, 이번에는 프로이센군의 사상자도 6천에 달했을 만큼(오스트리아군은 약 1만) 힘든 싸움이었다. 나중에 나폴레옹은 이렇게 말한다. “로이텐 전투는 기동력과 결단력이 낳은 걸작이다. 로이텐 전투 단 하나만으로도, 프리드리히는 불멸의 명장으로 남을 것이다.”

로스바흐와 로이텐에서 잇달아 승리함으로써 패색이 짙던 프로이센의 기세는 다시 올랐고, 그동안 자금 지원만 할 뿐 병력은 별로 보태 주지 않고 있던 영국도 생각을 고쳐먹고 상당수 병력을 독일로 보내왔다. 프리드리히는 1757년이 끝날 즈음, 브레슬라우도 함락시킴으로써 오스트리아에게 거의 빼앗겼던 슐레지엔에서 다시 우위를 잡았다. 분통이 터진 마리아 테레지아는 로이텐에서 패배한 자신의 제부, 로렌의 샤를(Charles Alexander, 1712~1780)을 해임했다.



프리드리히, 죽기로 결심하다



1758년에는 독일에 상륙한 영국군이 하노버에서 결정적으로 프랑스군을 패퇴시켰다. 이를 계기로 프랑스는 점차 유럽 전장에서 손을 떼게 되는데, 적을 확실히 격파할 자신이 없는 데다 북아메리카에서의 상황이 점점 급박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로써 서쪽의 위협은 사라졌지만, 프로이센의 상황은 다시 나빠져 가고 있었다. 문제는 러시아군이었다. 슐레지엔을 가로질러 오스트리아군을 쫓고 있던 프리드리히에게 러시아군이 슐레지엔 북동부로 진입했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그는 급히 방향을 돌려 러시아군과 격돌했다. 그러나 러시아군은 방어력이 만만찮은데다 무엇보다 프로이센에 비하면 거의 무한한 듯 보이는 병력을 자랑했다. 프로이센군은 서서히 지쳐 갔으며, 프리드리히는 보병 전력의 큰 감소를 포병대를 개량해서 보강하고, 우수한 기동력을 선제공격에 쓰는 대신 회피와 역습에 쓰는 식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갔지만 아무래도 역부족이었다. 1759년 8월, 쿠네르스도르프에서 그는 그만 냉정을 잃고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에게 섣부른 공격을 가했다가 뼈아픈 참패를 당했다. 코사크 기병대의 손에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 했던 그는 “4만 8천의 아군 중 3천 명만이 살아남았네. (......) 나는 이제 나의 베를린 시민을 도울 힘이 없네. 솔직히 말하면, 내게는 아무 것도 없다네. 나는 조국의 멸망을 볼 때까지 살아 있지는 않을 걸세.”라고 그를 따르던 장관에게 자살을 암시하기까지 했다.





14548016856226




쿠네르스도르프 전투에서 코사크 병사들에게 좇기는 프리드리히 2세.



이 절대절명의 위기는 승리한 적군이 어이없게도 작센으로 발걸음을 돌리는 바람에 ‘조국의 멸망’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전황은 여전히 불리했다. 프로이센군은 아무리 정예라지만 너무 적었고, 적은 너무 많았다. 프리드리히는 언제든지 쓸 수 있도록 독약을 담은 목걸이를 건 채, 스스로 최전방에서 말을 달리고 고함을 치며 병사들을 독려했지만 한계는 가까워지고 있었다. 1761년에는 유일한 동맹국인 영국마저 잃었다. 이제 그만 슐레지엔을 포기하고, 오스트리아와 화해하라는 영국의 종용을 프리드리히가 완강히 거부한 결과였다. 이제 파멸은 예정된 듯했다. 오직 하나만이, 프리드리히가 “우리 브란덴부르크 가문의 기적”이라고 부르게 되는 뜻밖의 사건만이, 이 드라마를 반전시키기 위해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참고문헌 :
버나드 몽고메리, [전쟁의 역사], 책세상, 2004; P. R. 파머-J. 콜튼, [서양근대사], 삼지원, 1985; 김용구, [세계외교사], 서울대학교출판부, 2006; 크리스터 외르겐젠 외, [근대 전쟁의 탄생: 1500∼1763년 유럽의 무기, 전투, 전술], 미지북스, 2011; 이에인 딕키 외, [해전의 모든 것], 휴먼앤북스, 2010; 앨런 브링클리, [있는 그대로의 미국사], 휴머니스트, 2011; 조길태, [영국의 인도 통치 정책], 민음사, 2004; 하마우즈 데쓰오, [대영제국은 인도를 어떻게 통치하였는가: 영국 동인도회사 1600~1858], 심산문화, 2004; 김형률, “7년전쟁(1756-1763)과 18세기 유럽의 세력 균형” [상명사학], 1995; 김상태, “프리드리히 2세의 외교정책의 이념과 실제” [서양사론], 1985.





14548016857773

함규진 | 서울교육대학교 교수/역사저술가
글쓴이 함규진은 여러 방면의 지적 흐름에 관심이 많다. 정치학을 전공하여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주로 역사와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썼고, 인물이나 사상에 대한 번역서도 많이 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등 서로 대립되는 듯한 입장 사이에 길을 내고 함께 살아갈 집을 짓는 것이 꿈이다.

저자의 책 보러가기
|
인물정보 더보기


발행2012.09.28.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