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북아메리카에서의 전쟁 - 7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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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17회 작성일 16-02-07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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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표


7년 전쟁 개요

전쟁주체


프로이센, 영국, 포르투갈 vs 오스트리아, 프랑스, 러시아, 스웨덴, 스페인, 작센, 무갈제국

전쟁시기


1756~1763

전쟁터


독일, 북아메리카, 서인도 제도, 남아메리카, 인도, 아프리카

주요전투


로스바흐 전투, 로이텐 전투, 쿠네르스도르프 전투, 퀘벡 전투, 아바나 전투, 라고스 해전, 키브롱 해전





4강이 할거하는 신대륙



북아메리카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대결은 이미 17세기부터였다. 1689년부터 1697년까지 ‘윌리엄 왕 전쟁’이, 1701년부터 1713년까지 ‘앤 여왕 전쟁’이 이어졌으며, 앤 여왕 전쟁에서 프랑스가 대패하고 노바스코샤와 뉴펀들랜드 등 상당한 영토를 할양한 뒤에는 한동안 잠잠했으나, 1744년부터 1748년까지 다시 ‘조지 왕 전쟁’이 벌어졌다.

당시 북아메리카는 4대 세력이 할거하는 태세였다. 스페인은 멕시코뿐 아니라 텍사스와 뉴멕시코 등 지금 미국의 남서부와 플로리다를 차지하고 있었고, 그 북쪽으로는 루이지애나와 캐나다를 보유한 프랑스가 13개 식민주와 프랑스에게서 새로 빼앗은 북방 영토를 가진 영국과 맞서고 있었으며, 그들이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하는 땅에 흩어져 살던 인디언들 중에는 이로쿼이 연맹의 세력이 가장 강대했는데, 모호크, 세네카, 카유가, 오논다가, 오네이다 5부족이 연합한 이들은 허드슨만에서 미시시피 강까지 프랑스령을 종단하는 지역에서 무시 못할 힘을 과시했다.

프렌치 인디언 전쟁은 1749년, 이로쿼이와 영국이 힘을 합치는 일을 두려워한 프랑스 쪽에서 오하이오 계곡에 새로운 요새를 구축하면서 촉발되었다. 이후 영국과 프랑스는 군비경쟁을 벌이면서 점점 긴장을 고조시켜 갔으며, 마침내 1754년에, 유럽에서의 전쟁보다 2년 먼저 전쟁이 발발하는데 그 첫 국면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미국 초대 대통령이 될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1732~1799)이었다. 영국 식민지군의 청년 장교였던 그는 오하이오의 프랑스 요새들을 정찰 및 공략하려 버지니아에서 출발했으나 니세서티 요새에서 프랑스군에게 패배하고 항복하고 말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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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색: 프랑스령, 분홍색: 영국 13개 식민주, 보라색: 앤 여왕 전쟁 후 영국이 획득한 영토, 살구색: 스페인령





유럽의 명장들, 신대륙에서 대결하다



전쟁의 초기 국면은 프랑스의 우세였는데, 본토의 정규군이 아니라 식민지에서 모집한 군대인 영국군에 비해 프랑스군은 수는 적어도(총인구 수로 볼 때 프랑스 식민지 인구는 영국 식민지의 10분의 1도 되지 않았다) 정예였으며, 이로쿼이 연맹을 제외한(그들도 일단 영국 편에 서기는 했으되, 프랑스와 정면 대결은 되도록 피했다) 거의 모든 인디언들이 프랑스 편에 붙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인디언들이 반영, 친프랑스의 자세를 보인 것은 프랑스인들이 인디언의 문화를 관용하고 수용했으며, 프랑스인에 비해 영국인들의 토지 욕심이 더 지독했던 점이 원인이었다. 프랑스에서는 1756년에 오스트리아 계승 전쟁의 명장 몽칼름(Louis-Joseph de Montcalm-Grozon, 1712~1759)이 이끄는 원군을 보냈는데, 몽칼름은 캐나다 방면군 총사령관으로서 영국의 오스위고 요새와 윌리엄 헨리 요새를 함락시켜 명장의 이름값을 했다(윌리엄 헨리 요새가 함락되었을 때 몽칼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프랑스편이던 알곤킨 족이 영국군 포로와 민간인을 무참히 학살했는데, 이 사건은 제임스 쿠퍼의 소설 [모히칸 족의 최후]에서 극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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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몽칼름 장군



영국군 쪽은 내분 양상마저 보였다. 영국 본토의 입장과 식민지인들의 입장 차이가 갈등의 주 원인이었다. 1757년에 새로 영국 국무장관이 된 윌리엄 피트(William Pitt, 1708~1778)가 식민지 주민들에게 강제징용령을 내리고, 군사용으로 쓰게끔 민간의 집이나 물자를 대가 없이 징발하도록 조치하자 식민지인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결국 1758년에 다급해진 피트가 징병권을 식민지 의회에 넘기고 징발한 물자는 합당한 대가를 지불하도록 함으로써 사태는 진정되었다.

그리고 승리의 바람은 영국 쪽으로 불기 시작했다. 피트는 1758년에 대규모의 영국 정규군도 아메리카로 보냈으며, 그 중에는 제프리 앰허스트(Jeffery Amherst, 1717~1797), 제임스 울프(James P. Wolfe, 1727~1759) 같은 뛰어난 장군들도 있었다. 두 사람은 세인트로렌스 강 북쪽에서 출발해 프랑스령 캐나다의 요새들을 하나씩 무너뜨려 나간다는 작전을 세웠다. 이들은 7월에 루이스버그 요새를 점령했고, 얼마 후에는 뒤켄을 함락시켰다. 한편 몽칼름은 카리용 전투(티콘데로가 전투)에서 고작 4천의 군대로 1만 6천의 영국군을 무찌르고 카리용 요새를 점령하는 위업을 달성했지만, 병력 지원이 뜻대로 되지 않아 소수 병력만 남겨 놓고 물러나자 요새는 이듬해에 앰허스트에게 재점령되고 만다.

그리고 몽칼름은 프랑스령 캐나다의 핵심인 퀘벡 방어에 나섰다. 제임스 울프가 이끄는 8500명의 영국 정규군이 루이스버그에서 퀘벡으로 접근 중임을 보고받은 몽칼름은 세인트로렌스 강을 타고 내려오다가 세인트찰스 강으로 갈라지는 쪽에 돌출된 북쪽 구역에 방어력을 집중했다. 영국군은 윌리엄 왕 전쟁과 앤 여왕 전쟁에서도 같은 루트로 퀘벡을 점령하려다 실패한 적이 있었고, 그때 그들이 상륙할 만한 지점은 북쪽뿐이라는 결론이 났던 것이다. 만일 영국군이 세인트찰스 강을 따라 더 남하해서 상륙하려 한다면, 북부의 보포르 방어선과 강 반대편의 포인트 레비에서 십자포화를 받고 궤멸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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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리용 전투에서 승리한 몽칼름과 병사들.



하지만 울프는 포인트 레비 쪽의 수비가 허술함을 꿰뚫어보고, 그곳을 먼저 공략하여 프랑스군이 밀집된 퀘벡 북부를 정면으로 겨누게 했다. 그리고 포인트 레비의 엄호사격을 받으며, 영국 선단은 프랑스군의 사격을 뚫고 세인트찰스 강을 타고 내려가 퀘벡 남쪽에 상륙해 버렸다. 수비력을 북쪽에 집중시킨 탓에 남쪽은 힘없이 무너졌으며, 몽칼름은 이제 북쪽으로 기세등등하게 쳐올라오는 영국군과 에이브러햄 평원에서 맞붙어 싸울 수밖에 없었다. 다급해진 그는 섣부른 일제돌격 명령을 내렸다가 영국군의 침착한 사격에 유능한 부하들을 잃었으며, 이어진 전투에서 화력, 병력, 사기에서 모두 앞선 영국군은 프랑스군을 압도했다. 몽칼름 본인도 치명상을 입고 달아났는데, 영국군은 승리했으나 울프 장군이 저격당해 전사하는 바람에 진격을 멈췄다. 몽칼름도 하루 만에 부상을 이기지 못하고 숨졌다. 영국군은 퀘벡 성벽을 겹겹이 포위하고는 인정사정없이 포격을 가했으며, 사흘 후인 1759년 9월 18일에 퀘벡은 항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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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프 장군의 전사.



퀘벡 전투로 북아메리카에서 영국의 승리는 굳어졌으며, 1759년 11월에는 프랑스 함대를 영국 함대가 키브롱 만에서 공격하여 철저히 분쇄함으로써 프랑스가 아메리카로 지원군을 보낼 수도, 영국 본토를 직접 공격할 수도 없게 함에 따라 프랑스는 더 이상 역전의 기회를 꿈꾸지도 못하게 되었다. 결국 고립무원이 된 북아메리카의 프랑스군은 1760년 9월, 몬트리올에서 앰허스트의 영국군에게 항복했으며 그것으로 프렌치 인디언 전쟁은 사실상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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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브롱 해전도.




참고문헌 :
버나드 몽고메리, [전쟁의 역사], 책세상, 2004; P. R. 파머-J. 콜튼, [서양근대사], 삼지원, 1985; 김용구, [세계외교사], 서울대학교출판부, 2006; 크리스터 외르겐젠 외, [근대 전쟁의 탄생: 1500∼1763년 유럽의 무기, 전투, 전술], 미지북스, 2011; 이에인 딕키 외, [해전의 모든 것], 휴먼앤북스, 2010; 앨런 브링클리, [있는 그대로의 미국사], 휴머니스트, 2011; 조길태, [영국의 인도 통치 정책], 민음사, 2004; 하마우즈 데쓰오, [대영제국은 인도를 어떻게 통치하였는가: 영국 동인도회사 1600~1858], 심산문화, 2004; 김형률, “7년전쟁(1756-1763)과 18세기 유럽의 세력 균형” [상명사학], 1995; 김상태, “프리드리히 2세의 외교정책의 이념과 실제” [서양사론],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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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규진 | 서울교육대학교 교수/역사저술가
글쓴이 함규진은 여러 방면의 지적 흐름에 관심이 많다. 정치학을 전공하여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주로 역사와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썼고, 인물이나 사상에 대한 번역서도 많이 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등 서로 대립되는 듯한 입장 사이에 길을 내고 함께 살아갈 집을 짓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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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2012.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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