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인도에서의 전쟁 - 7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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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91회 작성일 16-02-07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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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표


7년 전쟁 개요

전쟁주체


프로이센, 영국, 포르투갈 vs 오스트리아, 프랑스, 러시아, 스웨덴, 스페인, 작센, 무갈제국

전쟁시기


1756~1763

전쟁터


독일, 북아메리카, 서인도 제도, 남아메리카, 인도, 아프리카

주요전투


로스바흐 전투, 로이텐 전투, 쿠네르스도르프 전투, 퀘벡 전투, 아바나 전투, 라고스 해전, 키브롱 해전





‘회사’들의 전쟁



북아메리카에서 영국 식민지, 프랑스 식민지, 인디언들이 오래 싸워왔듯 인도에서는 영국 동인도 회사, 프랑스 동인도 회사, 무굴제국과 여러 독립적 영주들이 싸워왔다. 1600년에 수립된 영국 동인도 회사는 엘리자베스 1세에게서 인도 무역 독점권을 인가받았고, 주로 벵골(오늘날의 방글라데시와 인도의 서벵골주) 지역에 근거지를 갖고 사업을 벌였다. 그러나 4년 늦게 수립된 프랑스 동인도 회사는 보다 남쪽의 타밀 지역에 근거지를 만들더니, 17세기 후반부터 영국과 무력충돌까지 벌이기 시작했다. 18세기로 들어서며 프랑스가 인도인들 일부를 정규군으로 체용해 ‘세포이 부대’를 만들자 영국도 따라했는데, 1746~1748년, 1748~1754년에 각각 인도인 부대와 인도 영주들의 힘을 빌리며 전쟁을 치렀다. 이를 각각 ‘1차 카르나타카 전쟁’, ‘2차 카르나타카 전쟁’이라 하는데, 1757년부터 전개된, 7년 전쟁의 일환으로 여겨지는 전쟁은 ‘3차 카르나타카 전쟁’이기도 하다.



캘커타의 블랙홀



당시 벵골은 명목상 무굴제국의 영토였으나, 그 지배자인 나와브(태수)는 본래 무굴제국이 파견한 지방관이면서도 델리의 황제에게 세금 한 푼도 내지 않고, 독자적인 법률을 만들어 사실상의 벵골 왕처럼 군림했다. 그런데 1756년에 새로 즉위한 나와브, 시라지 웃 다울라(Siraj-ud-daula, 1728?~1757)는 몹시 잔혹한 데다 반영국적인 인물이었다. 그의 경쟁자를 영국이 은근히 밀고 있었던 데다가 즉위한 뒤에도 공물이라든가 뭐든가를 바치며 허리를 굽히지 않았기 때문인데, 동인도회사 입장에서는 나와브가 벵골의 주인 행세를 하는 것도 동인도회사와의 무역을 통해 획득한 부에 근거하는 것이기에 자신들 쪽에서 그처럼 숙이고 들어갈 까닭이 없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생각일 뿐이었다. 시라지 웃다울라는 영국인들에게 단단히 악감정을 품었고, 유럽에서 7년 전쟁이 발발하면서 인도에서도 프랑스와의 대결이 재연될 전망이 일자 동인도 회사는 캘커타의 윌리엄 요새를 보강하기 시작했는데 나와브는 그것을 허용할 수 없으니 당장 공사를 중지하라고 통보했다. 하지만 영국이 이를 거절하자, 진노한 시라지는 ‘블랙홀’을 열었다.

블랙홀이란 윌리엄 요새 내부의 작은 감옥을 뜻하는 것이었다. 불미스러운 행동을 한 동인도회사 소속 병사들을 가둬두는 용도였는데, 자주 쓰이지는 않았다. 그런데 시라지는 1756년 5월에 캘커타로 5만 명의 병력을 보내 동인도회사 소속 또는 그밖의 영국인들을 체포했다. 일부는 달아났으나, 146명이 포로로 잡혔다. 시라지는 그들을 블랙홀에 모조리 집어넣으라고 했다. 그런데 그 감옥은 원래 5, 6명을 수용하도록 설계된 것이었다. 그런 크기에 146명을 휴지 구겨넣듯 집어넣었다는 일은 너무도 상식을 뛰어넘는 이야기라서, 지금은 과장일 거라고 추정되지만 수용인원을 훨씬 넘어서는 사람을 가두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결국 여성 1명을 포함한 약 40여 명이 눌리고 깔려서 사망했으며, 생존자는 시체와 한 치의 틈도 없이 맞붙어 있어야 했다. 시체들이 압력으로 터져서 내장이 흘러나오기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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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이브. 개인적으로 추문이 많았으나 유능한 인물임에는 틀림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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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지 웃 다울라.



블랙홀 사건은 영국인들을 경악시켰고, 경악은 분노로, 분노는 전쟁을 요구하는 함성으로 바뀌었다. 동인도 회사 사원으로 2차 카르나타카 전쟁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로버트 클라이브(Robert Clive, 1725~1774)가 이끄는 군대가 벵골로 급파되었는데, 그들은 캘커타를 쉽게 점령했다. 무력이 아니라 요새 지휘관에게 뇌물을 써서 거둔 성과였다. 당황한 시라지는 영국의 앙숙, 프랑스에게 도움을 청했다. 클라이브는 1757년 3월에 프랑스 세력권인 샹데르나가르를 점령하고, 6월에는 시라지의 도읍인 무르시다바드 인근의 플라시 평원에서 적군과 맞섰다. 클라이브군은 3천, 시라지군은 약 7만이었는데 양쪽 모두 대부분 인도인이고 영국인과 프랑스인은 각각 몇십 명 뿐이었다. 아무튼 수적으로는 상대가 되지 않았던 이 싸움은 상당히 싱겁게 클라이브의 승리로 끝났다. “하늘과 사람이 합쳐서 이룬 일”이었다. 전투 도중 전장에 비가 쏟아졌고, 이후 짙은 안개가 꼈는데 안개 때문에 진격이 원활치 않다 보니 포격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시라지군의 대포는 정비를 잘 하지 못해서 비에 젖은 이상 발사가 거의 불가능했다. 그래서 일방적인 포격전이 된 것이 첫 번째 승인이었으며, 시라지군의 참모장 미르 자파르(Mir Jafar, 1691~1765)를 비롯한 여러 지휘관들이 클라이브에게 뇌물을 받고는 제대로 지휘하지 않은 것이 두 번째 승인이었다. 시라지는 달아났다가 미르 자파르의 부하들에게 붙잡혀 처형되었고, 미르 자파르가 새로운 나와브가 되었다. 그는 곧 영국의 꼭두각시로 전락했으며, 이를 계기로 영국의 인도 지배는 동인도 회사에서 영국 정부로 주도권이 넘어가고, 그 형태도 교역이 아닌 식민지배로 바뀌어 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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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시 전투 후 클라이브와 미르 자파르의 만남.



따라서플라시 전투는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화가 되는 결정적 전투였다고 평가되고 있으나, 7년 전쟁의 인도 전역에서는 그렇게까지 중요하지 않았다. 결국 프랑스군의 주력을 영국이 꺾을 수 있는지가 관건이었는데, 1760년에는 완데와시 전투가 벌어져 영국군이 프랑스군을 결정적으로 격파한다. 이로써 ‘3차 카르나타카 전쟁’은 사실상 결판이 났고, 그 뒤로는 산발적인 전투가 이어졌을 뿐이었다.


참고문헌 :
버나드 몽고메리, [전쟁의 역사], 책세상, 2004; P. R. 파머-J. 콜튼, [서양근대사], 삼지원, 1985; 김용구, [세계외교사], 서울대학교출판부, 2006; 크리스터 외르겐젠 외, [근대 전쟁의 탄생: 1500∼1763년 유럽의 무기, 전투, 전술], 미지북스, 2011; 이에인 딕키 외, [해전의 모든 것], 휴먼앤북스, 2010; 앨런 브링클리, [있는 그대로의 미국사], 휴머니스트, 2011; 조길태, [영국의 인도 통치 정책], 민음사, 2004; 하마우즈 데쓰오, [대영제국은 인도를 어떻게 통치하였는가: 영국 동인도회사 1600~1858], 심산문화, 2004; 김형률, “7년전쟁(1756-1763)과 18세기 유럽의 세력 균형” [상명사학], 1995; 김상태, “프리드리히 2세의 외교정책의 이념과 실제” [서양사론],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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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규진 | 서울교육대학교 교수/역사저술가
글쓴이 함규진은 여러 방면의 지적 흐름에 관심이 많다. 정치학을 전공하여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주로 역사와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썼고, 인물이나 사상에 대한 번역서도 많이 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등 서로 대립되는 듯한 입장 사이에 길을 내고 함께 살아갈 집을 짓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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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2012.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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