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프렌치 인디언 전쟁과 영국의 식민지 억압 - 미국독립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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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63회 작성일 16-02-07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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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독립전쟁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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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표
전쟁주체미국(13주), 영국,
프랑스, 헤센(용병),
에스파냐, 네덜란드
전쟁시기1775~1783
전쟁터현재 미국 동부,
캐나다 온타리오/퀘벡,
서인도 제도 일부
주요전투렉싱턴/콩코드, 벙커힐, 롱아일랜드,
트렌턴, 사라토가, 몬마우스,
캠든, 사바나, 길포드 코트하우스,
요크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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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목차
1. 13 식민지의 불만2. 프렌치 인디언 전쟁과 식민지 억압
3. 미합중국의 탄생4. 연이은 전투
5. 유럽의 지원과 남부의 격전6. 요크타운의 승리
7. 전쟁의 여파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 경쟁



영국이 중상주의 정책을 유지한 까닭은 다른 나라들과의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였는데 북미대륙에서 영국의 주요 경쟁국은 프랑스였다. 1700년대 중반까지 영국의 북미 식민지는 지금의 미국 동부와 카리브해의 자메이카, 플로리다 인근의 바하마 정도였다. 이에 비해 프랑스는 퀘벡 지역을 위시한 캐나다 동부와 현재 오대호 지역, 그리고 오하이오강과 미시시피강을 따라 현재 미국 오하이오에서 루이지애나주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본국만을 놓고 봐도, 농업생산과 인구에서 프랑스는 영국을 압도했다. 1700년대 중반 프랑스의 인구는 2천만을 넘었지만 영국은 580만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영국의 대규모 무역선단은 농업 생산에서의 불리함을 상쇄했다. 아울러 영국 함대는 프랑스, 에스파냐 등의 식민지를 자주 공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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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색: 프랑스령, 분홍색: 영국 13개 식민주, 보라색: 앤 여왕 전쟁 후 영국이 획득한 영토, 살구색: 스페인령. <출처: (CC)Pinpin at Wikipedia.org>


유럽에서는 오스트리아 계승전쟁이 끝나고 프로이센에게 망신을 당한 오스트리아가 복수를 위하여 군대를 키워 프랑스와 손을 잡고 프로이센을 치고자 했다. 이에 프로이센은 영국과 동맹을 맺었고 러시아와 에스파냐 등이 오스트리아 쪽에 가담하면서 결국 유럽은 물론 당시 유럽국가들이 가지고 있던 식민지 지역까지 휘말리는 대전쟁이 발생한다. 일명 ‘7년전쟁(1756-1763)’이다. 북아메리카에서는 영국세력과 프랑스+인디언 동맹세력이 서로 싸웠기 때문에 흔히 프렌치 인디언 전쟁(1754~1763)라고 불린다.


프렌치 인디언 전쟁과 조지 워싱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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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의 조지 워싱턴. 그는 버지니아군(Virginia Volunteers)의 일원으로 프랑스와의 전쟁에 참전한다.


7년 전쟁이 시작되기 전 북미에서는 이미 프랑스와 영국 세력간 소규모 충돌이 벌어지고 있었다. 사실 프랑스의 식민지는 영국의 북미 식민지보다 훨씬 넓었지만 북아메리카에 있던 프랑스인들의 수는 불과 7만에 불과했다. 그나마 5만 1000명이 캐나다에 몰려 살고 있었기에 나머지 식민지에 있던 프랑스인들의 숫자는 2만이 체 되지 않는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에 비해 13개 식민지의 인구는 백인만 106만이었고 흑인 노예와 자유민이 24만 2천명이었다. 130만대 7만, 무려 18대 1의 인구비율이었다. 적어도 북아메리카에서는 영국의 세력이 프랑스를 압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영국의 13개 식민지에는 잉글랜드를 포함하여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네덜란드, 독일지역, 스웨덴에서 이민자들이 몰려들었고, 경제활동이 활발해지며 인구가 급격히 늘기 시작했다. 결국 13개 식민지만으로는 늘어나는 인구를 감당할 수 없었고 서부 경계를 이루고 있는 애팔래치아 산맥 서쪽으로 영토를 넓혀야만 했다. 그러나 아무리 자신들이 인구 면에서 열세라 한들 프랑스는 영국인들의 움직임을 좌시하지는 않았다.

영국인들은 1750년대 애팔래치아 산맥을 넘어 현재의 오하이오 지역으로 슬금슬금 넘어오기 시작했고, 그 곳에 살고 있던 일부 원주민과 손을 잡고 몇몇 기지를 건설했다. 오하이오강 유역에서 영국 기지 건설을 총괄하고 있던 인물은 버지니아 출신의 지주이자 버지니아 민병대 대령인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이었다. 워싱턴은 1년 전 버지니아 지사(知事)인 로버트 딘위들(Robert Dinwiddie)의 명령으로 현재 오하이오주에 있는 르뵈프 요새에 가서 그 지휘관인 생-피에르(Saint-Pierre)에게 지사의 친서를 전달하면서 오하이오 지역의 권리는 영국에 있음을 주장했다. 그러나 생-피에르는 자신은 친서에 답할 권한이 없다며 워싱턴 더러 캐나다로 직접 갈 것을 요구하였고 자신은 명령에 따라 오하이오에 있는 것이며 물러날 뜻이 없음을 밝혔다. 워싱턴이 버지니아로 돌아가서 이를 보고하자 딘위들은 버지니아 민병대를 소집할 것을 명하였고 워싱턴으로 하여금 오하이오로 진격하게 하였다. 사실 이는 버지니아 식민지 의회의 승인도 묻지 않은 지사의 독단적 결정이었다.

워싱턴은 알레게니강(Allegheny)과 모논가힐라(Monongahela)강이 합류하는 지점(Forks of Ohio)에 요새를 짓기 시작하였고 프랑스는 이에 즉각 반응하였다. 프랑스 캐나다 식민정부는 프랑스계 캐나다인들과 원주민으로 구성된 500명을 보내 워싱턴의 민병대를 공격하여 몰아낸 다음 그 자리에 자신들의 요새를 짓고 이를 뒤켄느(Duquesne) 요새라 명명했다. 이에 영국인들은 오하이오에 대한 대대적인 작전을 준비했고 에드워드 브래덕(Edward Braddock) 장군 밑에 정규병과 민병대를 합쳐 2100명의 병력을 보내어 뒈켄느 요새를 빼앗으려 하였다. 워싱턴은 이전의 경험 때문에 브래덕 장군의 부대에 종군하였고 버지니아 부대를 다시 이끌게 되었다. 그러나 현재 펜실베니아 주 서부에서 벌어진 모논가힐라 전투에서 프랑스와 원주민 연합부대의 공격을 받아 전사자만 5백이 넘는 대패를 당하고 버지니아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1758년에 제임스 그랜트(James Grant)가 이끄는 750명의 영국 병력이 다시 오하이오를 공격하였으나 사상자 300명을 내면서 크게 패하였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전쟁의 여파가 크게 번져 캐나다 지역까지 전쟁에 휘말려 있었고 영국군이 캐나다와 프랑스 전진기지들 간의 보급로를 끊으면서 뒤켄느같은 전방 요새들은 버티기가 어려워졌다. 결국 프랑스군은 뒤켄느 요새를 포기하였고 영국군이 이를 점령한다. 영국이 점령한 뒤켄느 요새는 피트 요새(Fort Pitt)로 이름이 바뀌었고 이후 피츠버그(Pittsburg)가 된다. 영국은 마침내 애팔래치아 산맥을 넘어 오하이오 지역으로 본격적인 팽창을 시작할 수 있었다. 오하이오를 둘러 싼 영-불간의 싸움은 그렇지 않아도 좋지 않던 영-불 관계를 악화시켰고 결국 더 큰 전쟁의 도화선이 된다. 1759년 영-불 양국은 본격적으로 7년 전쟁에 돌입한다. 북아메리카에서의 영-불전쟁은 치열하게 전개되었으나 1759년 9월에 제임스 울프(James Wolfe)가 이끄는 영국군이 프랑스령 캐나다의 수도인 퀘벡을 함락시키면서 캐나다 전체가 영국으로 편입되고 북미에서의 주도권은 영국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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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츠버그.<출처: (CC)Filipe Forte at wikipedia.org>



대제국 운영을 위한 영국의 아메리카 착취



한편, 식민지 경제에 대한 영국의 착취는 계속되었다. 1759년, 영국의 추밀원(Privy Council)은 버지니아 지사에게 버지니아 식민의회에 상정되는 모든 안건에 ‘추밀원 승인시까지 발효되지 않는다’라는 조항을 삽입하게 하였다. 아울러 이 조항이 없는 법안은 이유를 막론하고 서명할 수 없다는 명령을 버지니아 지사에게 전달한다. 1761년에는 당시 식민지에서 성행하고 있던 밀수단속을 이유로 매사추세츠 관세청 관리들에게 무시로 가택과 물품창고를 수색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같은 해에 역시 추밀원이 식민주 지사들이 임명한 사법관과 기타 관리들을 왕의 권한으로 즉시 파면할 수 있게 하여 지사들의 자치권을 크게 제한하였다.

1763년에 7년전쟁이 종식되고 파리에서 영-불간에 강화조약이 맺어졌을 때 식민지민들은 변경에서 프랑스인들과 원주민들의 위협이 사라지게 되었다며 본국의 승리를 반겼다. 그러나 승리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영국 본국은 새로이 획득한 식민지 운영을 위하여 추가 재정이 필요하게 되었고 다시 식민지민들에게 각종 명목의 세금을 반강제로 걷기 시작하였다. 예를 들어 1763년에는 1733년 제정되었으나 한 번도 시행하지 않고 있던 설탕조례(Sugar Act)를 매우 강력하게 집행하였다.

영국정부가 결정적으로 식민지민들로부터 반감을 사게 된 원인은 바로 1764년에 영국 의회에 상정하여 통과된 일명 ‘아메리카법(American Act)’이었다. 새로이 획득한 식민지를 지키기 위하여 북아메리카 주둔 영국군의 규모를 늘리기 위하여 식민주들의 교역에 제재를 가하고 추가로 세금을 물리는 법안이었다. 문제는 병력의 증강규모와 주둔과 관련하여 식민주 정부의 동의가 필요 없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우리가 너희들을 지켜줄 터이니 비용은 너희들이 대라는 것이었다. 아울러 프렌치 인디언 전쟁에서 영국을 위해 싸운 식민지 출신 군인들은 새로이 증강되는 병력의 지휘관으로 임명될 수가 없었다. 본국을 위하여 열심히 싸우고 그 영광을 위하여 봉사했음에도 보상을 받지 못하고 게다가 새로이 군대를 늘리는데 돈만 대라니... 아무리 본국정부라도 지나친 처사라는 목소리가 높아져 갔다. 식민지민들은 새로운 세금이 재정되었으니 이에 대한 보상으로 교역에 대한 제재조치들이 풀리기를 기대하였으나 영국정부는 기존의 제재완화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었다.

본국정부가 이러한 강제적 조치들을 남발하기 시작하자 식민지민들은 이대로 가다가는 그들이 그나마 누려왔던 자치(自治)의 권리마저 언젠가 박탈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품게 되었다. 만약 영국 정부의 이러한 조치가 20-30년정도의 시간을 두고 점진적으로 이루어졌으면 그 파장이 최소화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1759년부터 1764년까지 5년의 짧은 기간 동안에 식민지민들의 생활에 직접적으로, 그것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법안과 조치들이 연쇄적으로 시행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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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정부의 인지(Stamp) 샘플도안. 영국정부는 식민지에서 발행되는 모든 출판물에 위와 같은 스탬프가 찍힌 종이를 쓸 것을 강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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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세 반대론자들이 그린 인지세 풍자 팸플릿의 도안.




인지세와 식민지민들의 반발



결정타는 1765년의 Stamp Act, 즉 인지세였다. 이 인지세 역시 북아메리카에 주둔하는 영국군의 주둔비용을 충당하기 위하여 제정된 세금이었다. 이 법안에 의하면 13식민지의 모든 출판물은 영국정부가 발행된 인지가 붙어있는 종이로 만들어야 했으며 이 종이는 런던에서 제조되었다. 인지세는 공문서에도 적용되었기 때문에 식민지 정부관료들 사이에서도 불만이 터져나왔다. 일부 물품에 붙는 관세와는 달리 인지세는 모든 출판물에 일괄적으로 적용되는 것이기 때문에 13식민지 전체가 크게 반발하였다. 비록 영국 의회에 의원을 보낼 수는 없었지만 13식민지 모두 앞다투어 대표들을 런던에 파견하여 의회에 인지세의 부당함을 알렸다. 그리고 1765년 10월에는 뉴욕에서 소위 ‘인지세 대회의(Stamp Act Congress)’를 열어 왕에게 보내는 청원서를 작성하였는데 여기서 ‘대의(代議) 없는 과세는 부당하다(No taxation without representation)’는 유명한 말이 등장하였다. 아울러 13식민주들은 일치단결하여 본국의 물품을 사지 않기로 하였다. 즉 식민지 전체가 불매운동에 참여한 것이다. 이 문서가 웨스트민스터에 도착하자 일부 의원들은 군대를 움직여 인지세를 강제로라도 시행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대다수의 의원들은 대변자가 없는 상태에서 자신들에 대한 세금이 부과되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식민지민들의 청원을 받아들여 인지세를 폐지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선언법(Declaratory Act)이라는 법안을 통과시켰는데 이 법안에 의하면 영국 의회는 식민지에 대한 법을 동의 없이 임의로 제정할 수 있었다. 결국 식민지 관점에서는 혹은 떼었지만 더 큰 혹을 붙이게 된 셈이었다.

설상가상으로 1765년에는 군대 숙영법(Quartering Act)도 제정되었는데 이는 지휘관들이 민간주택을 ‘징발’하여 휘하 병사들을 생활할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이었다. 당시 13식민지 주둔군의 본부는 뉴욕에 있었는데, 뉴욕주 의회는 이에 반발하였으며 폭력사태가 일어나 식민지민 한 명이 중상을 입는 일이 벌어졌다. 본국 의회는 뉴욕주 의회의 권한정지를 선언하였으나 뉴욕주 의회가 병사 숙영을 위한 비용을 부담하기로 결정하면서 사태는 잠시 일단락되었다.


자유의 아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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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아들들 (Sons of Liberty) 창설자중의 한 명인 매사추세츠 주 의원 새뮤얼 애덤즈(Samuel Adams)


영국이 자신들의 권리를 완전히 빼앗으려 한다는 인식은 널리 확산되었고 일부 식민지민들은 영국의 부당한 간섭을 막기 위한 조직을 결성하였는데 이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이 소위 자유의 아들들(Sons of Liberty)이다. 이 명칭은 영국의회에서 13식민지에 대한 강제적 조세를 반대하던 아일랜드 출신의 의원 아이작 베러(Isaac Barre)가 식민지민들을 Sons of Liberty라고 통칭한 데서 기원한다. 건국의 주체들을 영웅시하는 대중 역사서에서 자유의 아들들은 영국의 부당한 통치에 맞서는 거대한 지하조직으로 묘사되고 있으나 사실은 각 도시에 생긴 조그마한 반영(反英) 분자들이 다른 도시의 조직들을 ‘동지’로 부르면서 모두가 자유의 아들들이라고 한 것 때문에 생긴 이름일 뿐 체계가 있는 조직은 아니었다. 다만 이들은 각 도시에서 큰 나무를 골라 이를 자유나무(Liberty Tree)라 부르면서 유사시의 집회장소로 삼거나 인적이 드문 곳에 있는 건물을 골라 회합을 가졌다. 이들은 “No Taxation without Representation”이라는 구호를 채택하고 다른 도시의 소조직들과 연락을 하면서 다른 지역과 같이 본국의 부당한 법안과 조처에 반대하는 활동을 주도하였다.

비록 느슨한 연합체에 불과하였지만 ‘자유의 아들들’은 식민지 전체의 유력인사들을 하나로 모으는데 큰 역할을 하였고 이후 자유의 아들들 구성원들이 모여 독립전쟁을 주도한 대륙의회를 형성한다. 후일 2대 대통령이 되는 존 애덤즈, 앞서 말한 새뮤얼 애덤즈, 사라토가 전투를 승리로 이끈 베네딕트 아놀드(그러나 후일 미국을 배신한다), 대륙의회 의장을 역임하게 되는 존 핸콕(John Hancock), 변호사이며 버지니아에서 독립운동을 주도한 패트릭 헨리(Patrick Henry), 대륙의회 사무총장인 찰스 톰슨(Charles Thomson), 그리고 보스턴 지역에서 반영운동을 주도하는 폴 리비어(Paul Revere) 등 독립운동의 쟁쟁한 인사들이 모두 자유의 아들들에 그 이름을 올리게 된다.


국세 징수법과 보스턴 차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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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에 대한 세금을 강요하여 미국 독립전쟁을 촉발시킨 영국 수상 노스.


이외에도 1767년에는 재무장관 찰스 타운센드(Charles Townshend)의 국세 징수법(Revenue Act)으로 식민지로 들어가는 모든 수입품에 세금을 부과하기로 했다. 인지세는 식민지내에서 통용되는 물건에 대한 직접세이기 때문에 반발하였지만 수입품의 간접세에 대한 저항은 그리 크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아울러 기타 식민지에서 영국으로 수입되는 차에 대한 세금은 없애면서 미국으로 수입되는 네덜란드 차의 경쟁력을 깎아버리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식민지민들의 불만은 자신들의 의견이 영국 의회에 반영되지 않는 상태에서 세금을 때리는 것에 대한 것이었지, 그것이 직접세이건 간접세이건 상관없었고, 식민지민들의 불만은 더욱 높아질 수 밖에 없었다.

미국의 수입업자들은 영국 차에 대한 불매운동을 벌이고 차 밀수가 극성을 부렸다. 매사추세츠에서는 주지사 토머스 허친슨(Thomas Hutchinson)의 관할 하에 영국차 수입이 계속되었으나 반대파들의 압력에 주지사가 굴복하면서 영국차 수입이 중단되었다. 매사추세츠 주의회는 조지 3세에게 청원서를 넣으면서 다른 식민지들도 청원을 할 것을 종용하였다. 버지니아와 펜실베니아는 영국의회에도 청원서를 보냈지만 영국의회는 이를 거부하였다.

불매운동의 진원지인 보스턴에서는 민심이 흉흉하게 변하였고 1768년에 식민정부 관세청이 치안을 위하여 본국에 지원을 요청하면서 군함 롬니(Romney)를 보스턴으로 보낸다. 롬니의 선장은 도착하자마자 보스턴 청년들을 강제로 징발하여 승선원으로 만들면서 원성을 샀다. 그리고 1768년 6월에 존 핸콕 소유의 화물선인 리버티(Liberty)호를 밀수혐의로 나포하면서 보스턴은 거의 폭동분위기였다. 물론 존 핸콕은 재판에서 무혐의로 풀러났지만 이 법안에 대한 반대는 계속되었고 영국군인들과 보스턴 시민들간에는 소소한 충돌이 계속 일어났다. 마침내 이는 1770년 3월 5일의 보스턴 학살사건으로 이어진다. 흑인 청년 애턱스(Crispus Attucks)를 포함한 5명의 시민이 영국군의 총에 맞아 숨진 것이다. 참고로 이들은 모두 자유의 아들들 행동대원들이었다. 이후 타운센드의 예산법은 폐지되었다.

이후 3년뒤 1773년에는 영국의 창고에 차가 많이 쌓였지만 이를 팔길에 없어지자 유럽에 싼 값에 파는 대신 이를 식민지에서 처분하기로 하고 ‘차 법안(Tea Act)’를 통과시켰다. 문제는 이를 처분하면서도 식민정부 관료들의 급료를 만들기 위하여 세금을 그대로 유지시켰다는 점이다. 이미 차를 많이 수입하는데도 강제로 산더미같은 차를 사야하고 게다가 세금까지 물어야 하자 보스턴 시민들은 기다리고 있다가 보스턴 차 사건(티-파티)을 일으킨다. 주 의원이자 보스턴 유지인 새뮤얼 애덤즈는 대책회의를 열어서 차 세금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고자 하였으나 이 회의중 흥분한 대중들이 팔을 걷어 부치고 모두 뛰어나간 것이다. 애덤즈는 과격한 행동을 하지 말라며 이들을 막아보려 하였으나 허사였다. 결국 성난 군중은 보스턴 항구에 정박하고 있던 무역선 다트머스(Dartmouth), 일리노어(Eleanor), 비버(Beaver)에 강제로 올라타 이들이 싣고 잇던 324개의 차 상자를 모두 바다에 던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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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발행된 보스턴 차사건 기념 우표.



피할 수 없는 전쟁



영국정부는 보스턴 차사건을 일으킨 매사추세츠에 대한 징벌적인 법안인 소위 ‘참을 수 없는 법(Intolerable Acts)’을 통과시킨다. 차사건으로 인하여 동인도회사가 입은 손해배상을 강제한 보스턴 항구법(Boston Port Act), 매사추세츠의 관리들을 본국 정부가 직접적으로 임명할 수 있게 하는 매사추세츠 정부법(Massachusetts Government Act), 매사추세츠에서 식민정부 관리들이 여론이나 각종 이유로 인하여 공정한 재판을 받을 수 없다고 여기는 경우 지역을 옮길 수 있게 하는 재판운영법(Administration of Justice Act), 영국군을 주지사권한으로 어느 건물에나 묵을 수 있게 하는 더욱 강화된 숙영법(Quartering Act), 그리고 퀘벡 식민지의 영역을 넓혀 13식민지 일부를 퀘벡에 넘겨주는 퀘벡법(Quebec Act)이었다. 영국군이 13식민지에 주둔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러한 법안은 강제성을 띨 수 밖에 없었고 이 법안으로 매사추세츠를 고립시키고자 했다.

하지만, 영국 정부의 계산은 빗나갔다. 영국군대가 자신들의 동의도 없이 통과된 법안을 강제할 수 있다는 사실은 열성독립분자뿐만이 아니라 중간계층까지도 영국정부에 등을 돌리게 만들었고 결국 이에 반대하여 1774년 9월 5일에 첫 대륙의회(Continental Congress)가 열리게 된다. 이제 전쟁은 피할 수 없는 문제가 되었다. 각 주들은 민병대를 소집하기 시작하였고 영국은 민병대들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결국 1775년 4월, 식민지민들과 영국군 사이에 전투가 발생하였고 이는 미국 독립의 신호탄이 되었다.

참고문헌: Paul K. Davis, [100 Decisive Battles],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01); Alexander Keyssar, [The Right to Vote: The Contested History of Democracy in the United States], (Basic Books, 2001); Piers Mackesy, [The War for America 1775-1783], (Bison Books, 1993); John C. Miller, [Origins of the American Revolution], (Boston: Little, Brown, 1943); Maurice Matloff (eds.), [American Military History: 1775-1902 - Vol. 1], (Conshohocken: Combined Books, 1996); Thomas Paine, [Common Sense], (Dover Publications, 1997); Max Savelle, [Seeds of Liberty:The Genesis of the American Mind], (Kessinger Publishing, 2005); The Library of Congress 'America During the Age of Revolution, 1764-1775'; National Park Service 'Guilford Courthouse'; National Park Service 'Yorktown'; www.battleofcamden.org 'Documentary History of the Battle of Camden, 16 August 1780';





김성남 | 안보·전쟁사 전문가
글쓴이 김성남은 전쟁이 인간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가지고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미국 UC 버클리 동양학과를 졸업한 후 연세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국제학 석사를 받고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에 진학하여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 [전쟁으로 보는 삼국지], [전쟁 세계사] 등이 있으며 공저로 [4세대 전쟁]이, 역서로 [원시전쟁: 평화로움으로 조작된 인간의 원초적인 역사]가 있다.


발행2012.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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