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미합중국의 탄생 - 미국독립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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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01회 작성일 16-02-07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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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독립전쟁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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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표
전쟁주체미국(13주), 영국,
프랑스, 헤센(용병),
에스파냐, 네덜란드
전쟁시기1775~1783
전쟁터현재 미국 동부,
캐나다 온타리오/퀘벡,
서인도 제도 일부
주요전투렉싱턴/콩코드, 벙커힐, 롱아일랜드,
트렌턴, 사라토가, 몬마우스,
캠든, 사바나, 길포드 코트하우스,
요크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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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목차
1. 13 식민지의 불만2. 프렌치 인디언 전쟁과 식민지 억압
3. 미합중국의 탄생4. 연이은 전투
5. 유럽의 지원과 남부의 격전6. 요크타운의 승리
7. 전쟁의 여파

게릴라 전에 초전을 패한 영국군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은 패배했다. 전쟁사를 배운 사람이라면 베트남전의 결과를 보고 역사상의 아이러니라 할 것이다. 베트남의 게릴라들에게 패한 미국도 사실은 게릴라전으로 나라를 세웠기 때문이다. 영국으로 독립하려는 미국 사람들은 독립전쟁 시기에 영국의 정규군을 상대로 종종 게릴라 전술을 구사하며 치고 빠지는 전술로 적의 주력을 묶어두거나, 가랑비에 옷젖는다는 식으로 출혈을 강요하였다. 영국은 이 당시 다른 나라들과의 경쟁을 위하여 해군에 비하여 부족한 육군을 증강하던 중이었다. 그런 군대가 제식훈련도 못 받고 남는 시간에 총질을 연습하던 식민지의 촌놈들하고 싸워서 결국은 지고 미국에서 물러난 것이다. 미국이 게릴라전으로 독립을 쟁취했다니...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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렉싱턴과 콩코드 주민들에게 영국군의 접근을 알린 폴 리비어(Paul Revere).


1775년 4월, 보스턴에 주둔하고 있던 영국군 사령관 토머스 게이지(Thomas Gage)는 보스턴에서 35킬로미터 떨어진 콩코드에 새뮤얼 애덤스와 존 핸콕을 따르는 반군이 무기고를 마련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게이지 장군은 자신의 심복인 프란시스 스미스 중령에게 700명의 정규군을 주어 무기고를 파괴하고 반영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애덤스와 핸콕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스미스의 부대가 보스턴 밖의 찰스 강을 건너자 이를 발견한 폴 리비어는 말을 타고 근처를 돌아다니면서 ‘빨간 코트들이 온다(The Redcoats are coming)’라고 외쳤다. 영국군의 유니폼인 붉은 외투를 지칭한 말이다. 대부분의 인식과는 달리 폴 리비어는 홀로 밤을 달리며 영국군의 침공을 알렸던 것이 아니었다. 그는 매사추세츠에서 유사시 연락을 담당하고 있었던 수십명의 라이더(rider) 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라이더들의 급박한 목소리와는 달리 영국군의 진격은 지루하였다. 라이더들의 외침에 총을 들고 나와 잠을 설치고 있던 렉싱턴 지역의 민병대원들은 영국군이 오지 않자 근처의 술집으로 들어가 맥주를 마시고 잡담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이들이 서서히 기다림에 지쳐갈 새벽 4시경, 영국군이 마을 어귀에 다다랐다는 외침이 들려왔고 민병대원들은 서둘러 총을 들고 나갔다. 영국군이 렉싱턴에 다다랐을 때, 영국군 앞에서는 70명의 총든 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오와 열을 갖추어 선 것도 아니고 그냥 모여 웅성대고 있었다. 그러나 스미스의 부대는 이들을 위협으로 간주하고 발포했고 민병대원들도 반격을 하였지만 널리 트린 평지에서 정규군을 마주보고 하는 정식 전투에서 영국군의 상대가 될 리 없었다. 많은 민병대원들이 쓰러지고 18명의 사상자가 났다. 민병대는 흩어졌고 영국군은 렉싱턴을 지나 콩코드로 진군하였다. 그러나 민병대는 사실 무작정 도망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그들의 친구들이 영국군에게 총를 맞고 죽었다고 하며 싸우자고 하였고 이에 날이 밝자 주변에 살고 있던 4천명의 민병이 총을 들고 나온 상태였다.

영국군은 콩코드에 있는 여관에서 3문의 포와 소총 탄환 500파운드(약 220kg)을 발견하였다. 포대를 불태워 버리고 탄환은 강에 버렸다. 임무를 무사히 마친 영국군은 보스턴으로 회군을 시작하였지만 이들은 보스턴으로의 회군길이 그야말로 지옥도가 되리라는 것을 미처 알지 못하였다. 영국군은 돌아가던 중 콩코드 근처의 노스브릿지(North Bridge)에서 400명 민병의 습격을 받아 14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이후 대열을 바로 세우려는 장교들의 노력은 허사였고 영국군은 무질서하게 후퇴하기 시작했다. 수천명의 민병들이 삼삼오오 돌담 뒤에서, 나무 뒤에서, 바위 뒤에서 숨어 있다가 영국군을 공격하였고 그때마다 피해는 늘어갔다. 엉망이 된 영국군 대열이 보스턴에 돌아왔을 때 영국군 73명이 전사하고, 174명이 중상을 입었다. 아울러 29명이 행방불명이었다. 매사추세츠의 민병들은 렉싱턴을 제외하고는 전면전으로 싸우지 않고 철저히 게릴라가 되어 영국군을 격퇴한 것이다. 호되게 당한 영국군은 보스턴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고 민병대는 조지 워싱턴의 지휘하에 보스턴을 포위했다. 마침내 대륙의회는 1775년 6월 14일에 각주의 민병대를 통합하여 일명 대륙군(Continental Army)의 창설을 선언하였고 조지 워싱턴을 총 사령관에 임명하였다.


83명이 독립시킨 뉴잉글랜드



매사추세츠에서의 활약으로 민병들이 보스턴을 포위하고 조지 워싱턴을 사령관으로 모셨지만 민병들은 자신들의 소총에 필요한 화약을 휴대한 것 외에는 화약과 기타 물품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포위전에 필요한 대포 등의 대형화기도 없었다. 결국 민병들은 단순히 병력의 우세를 내세워 지리한 포위를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영국군은 이를 알고 인근의 벙커-힐에 주둔한 민병대를 공격하여 포위망을 뚫으려고 하였다. 민병대는 낮은 방벽 뒤에서 사격하면서 영국군에게 1000명의 사상자를 입히기는 하였지만 두 번의 일제사격 후 탄약이 소모되었고 영국군이 방벽을 넘어오면서 총검을 동원한 육박전이 벌어졌다. 결국 민병대는 벙커힐을 내주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벙커-힐 뒤에 2차의 방어선을 만들어 두었기에 포위망은 건재하였고 영국군의 공격은 무위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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벙커힐 전투 그림. 그러나 대형과 무기등의 그림은 사실과 다소 차이가 있다.


보스턴을 포위한 민병대에게 가장 큰 위협은 영국함선들의 함포 사격이었다. 중화기가 없던 민병대는 이에 맞서서 반격을 가할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벙커힐 전투 후에도 지루한 공방전이 이어졌다. 이때 보스턴 근처 코네티컷 주의 민병대장 에단․알렌이 허드슨 강(지금의 뉴욕시 앞을 흐르는 강) 상류에 있던 영국군 요새인 티콘데로가(Ticonderoga, 미국의 초기 이지스함 티콘데로가급의 이름이 여기서 나왔다)를 민병대원 83명으로 급습한다. 참플레인 호숫가 매우 구석진 곳에 위치하여 있어 누가 습격하리라고 생각지도 못했던 요새 지휘관은 나룻배를 타고 조용히 건너온 민병대원들에게 새벽에 기습을 받아 무장해제 당하였다. 이 민병대원들은 여세를 몰아 근처에 있던 작은 요새들인 크라운 포인트와 앤 요새(Fort Ann)도 점령하였다. 이 기습으로 민병대는 수십문에 달하는 대포와 역시 수십톤의 화약을 얻었다. 티콘데로가 요새에서 노획한 무기들은 보스턴을 포위하고 있던 민병대에게 전해졌다. 워싱턴으로서는 가뭄에 단비를 만난 격이었고 워싱턴은 포대를 만들고 영국함선들을 사격할 준비를 하였다. 만약 함선들이 격파당한다면 영국군은 유사시 꼼짝도 못하고 보스턴에 갇히게 될 것이다. 사태를 눈치 챈 토머스 게이지 장군은 워싱턴에게 협상을 제의한다. 만약 함선들을 포격하지 않으면 보스턴을 건드리지 않고 조용히 물러날 것이라고 하였다. 워싱턴은 민병대로서 보스턴 탈환을 위한 본격적인 시가전을 하기는 어렵다는 판단 하에 이를 수락한다. 1776년 3월 17일, 영국 함대는 병력을 태우고 캐나다로 후퇴하였고 식민지 민병대는 보스턴을 점령한다.

이후 뉴잉글랜드 (지금의 미국 메인, 버몬트, 뉴햄프셔, 매사추세츠, 로드-아일랜드, 코네티컷 등의 6개 주를 아우르는 지역)는 온전히 민병대에 의하여 접수가 되었다. 이 당시까지만 하여도 미국의 주들 중 가장 사람이 많은 곳이고 반영(反英)감정도 심했다. 한 마디로 독립운동의 중추가 되는 지역이었다. 뉴잉글랜드 지역을 장악하게 됨으로서 미국의 독립운동은 확실한 발판을 마련하였다. 독립전쟁중에는 중요한 전투들이 많았지만 뉴잉글랜드 민병의 게릴라전이 아니었으면 독립전쟁은 시작도 못했을 것이다.


오합지졸 대륙군과 조지 워싱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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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5년 당시 보스턴.


워싱턴이 보스턴에서 영국군을 쫓아낸 것은 아메리카로서는 상당한 성과였지만 민병대를 이끈 워싱턴은 오히려 상황이 어려워 질 것임을 알고 있었다. 일단 영국군을 단순히 몰아낸 것이지, 궤멸시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이때 워싱턴 휘하의 병력은 유럽군대와 비교하면 군대라고 할 수도 없었다. 영국군이 물러간 이유는 사실 운신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였다. 당시의 보스턴은 지금의 넓은 도시가 아니라 바다로 튀어나온 조그마한 반도를 꽉 채우고 있는 도시였다. 1775년 콩코드 전투 이후 압도적인 병력의 뉴잉글랜드 민병대는 보스턴에서 육지로 나오는 입구를 틀어막았고 영국군의 훈련이라던가 무기의 우위가 발휘될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게이지는 무리하게 싸우기 보다는 일단 후퇴하였다가 증원군을 얻어서 다시 오려고 하였던 것이다.

워싱턴은 이를 잘 알고 있었지만 그의 병사들과 대륙의회의 민간인들은 객관적으로 약세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승리가 따놓은 당상인 듯 생각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식민지민들의 생각으로는 영국 본국은 멀리 떨어진 식민지를 지키기 위하여 싸울 마음이 없고 만약 본격적으로 전쟁이 시작된다면 화의를 청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기나긴 전쟁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사실 보스턴에서의 승리가 그 약점을 가리고 있을 뿐 당시의 워싱턴 휘하에 형성된 ‘대륙군(Continental Army)’은 정규군으로서 결점이 한 두 개가 아니었다. 일단 대륙군은 여러 지역의 병력이 모인 ‘잡군’이었다. 민병대가 주축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각주가 주지사 휘하에 두고 있던 주군(州軍)인 자원병(volunteers)이 혼합된 형태였다. 워싱턴도 엄밀히 말하자면 버지니아주의 자원병 출신이었다. 아울러 대륙의회가 형성되면서 워싱턴 휘하에 모인 민병대를 ‘대륙군’으로 편성하였지만 이들은 한 번 입대하면 1년 싸우고 고향에 돌아가는 병력이었다. 아울러 이들은 병영(兵營)을 세운다던가 일렬로 서서 일제 사격하는 방법도 몰랐고 군진에 모여서도 변변한 화장실 하나 마련해놓지 않아 주변의 숲속이나 덤불속에 들어가서 용변을 보았기 때문에 군진 주변에는 언제나 똥냄새가 감돌았다. 워싱턴이 이들을 다그쳐 그나마 종대(縱隊)진군과 병영 설치가 가능해졌지만 전투지휘에다 군진을 유지하고 대륙의회와 주민들과 협상하여 보급품을 받는 것까지 워싱턴은 지휘관-행정장교-보급장교의 1인 3역을 해야했다.

워싱턴이 새로이 창설된 대륙군의 사령관이 된 이유는 그가 전투와 지휘경험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가 남부인 버지니아 출신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하였다. 사실 당시 독립운동은 뉴잉글랜드와 뉴욕, 펜실베이니아 등지의 전문직업인들과 상인, 도시민들에 의하여 주도되고 있었고 남부의 인사들은 상대적으로 소외되어 있었다. 아울러 남부에는 북부에 비하여 아직 영국 국왕에게 충성하는 왕당파의 비율이 상당히 높았다. 이 때문에 ‘남부’인 버지니아 출신인데다 대지주인 워싱턴에게 군권을 주는 것은 정치적으로 중요한 상징성을 지닌다.

1775년 7월에는 ‘무장의 원인과 필요성에 대한 선언(Declaration of the Causes and Necessity of Taking Up Arms)’을 발표함으로 자신들이 단순히 반란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정당한 이유에서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하여 무장하였음을 밝혔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의회는 완전한 독립보다는 자치를 목표로 왕인 조지 3세에게 식민지와 본국 의회간 중재를 요청하였고 7월 8일에 영국에 청원서를 보내면서 독립은 ‘최후의 수단’임을 분명히 하여 아직 타협의 여지가 있음을 천명하였다. 이른바 완전독립에는 아직까지도 회의적이었던 보수적 인사들을 대표하는 존 디킨슨(John Dickinson)의 ‘올리브 가지 청원서(Olive Branch Petition)’였다. 그렇지만 왕은 식민지의 청원서를 무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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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건파들은 Olive Branch Petition을 국왕 조지 3세에게 보내 마지막으로 국왕의 중재를 요청하지만 거절당한다.


한술 더 떠 영국국왕 조지 3세는 1775년 8월 23일에 식민지가 ‘반란’상태에서 돌입하였음을 알리고 자신의 관리들과 군인들, 그리고 ‘충성스러운 백성’들이 이 반란을 진압하는 데 힘을 보태줄 것을 명령하였다. 일부 영국 군인들은 왕의 명령을 너무 충실하게 이행하는 경우도 있었다. 1775년 10월 18일에 영국 군함 HMS Canceau의 함장은 현재 메인(Maine) 주의 팰머스(Falmouth)라는 작은 도시가 ‘용서할 수 없는 반란’을 일으켰다며 이 도시에 하루 종일 무차별 포격을 가하였고 포격이 끝났을 때 팰머스에는 서있는 건물이 없을 정도였다. 이러한 영국의 행동은 그나마 아메리카에 남아있는 온건파들의 입지를 더욱 곤란하게 만들었고 더 많은 주민들을 적으로 돌리는 결과만 낳았을 뿐이다.

정치적인 정당성도 확보하였고 보스턴을 포위하고 영국군을 몰아붙이고 있는 상황에 고무된 대륙의회는 베네딕트 아널드(Benedict Arnold)와 리처드 몽고메리(Richard Montgomery)의 지휘 하에 캐나다 공격을 감행하기로 하였다. 캐나다에도 영국 정부에 불만을 품고 있는(주로 프랑스인들) 자들이 많아 ‘자유’의 구호를 내세워 캐나다를 침공한다면 캐나다에서도 반영 봉기를 일으킬 수 있고 이들을 영국과의 전쟁에 끌어들일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대륙군은 한때 퀘벡의 관문인 생-쟝(Saint-Jean) 요새와 몬트리올을 점령하는 등 기세를 올렸으나 퀘벡에서의 주 전투에서 총독 가이 칼턴(Guy Carleton)이 지휘하는 수비군의 완강한 방어에 막히고 존 버고인(John Burgoyne)이 정규 지원병력을 이끌고 전장에 도착하면서 대륙군의 완패로 끝났다. 이는 그렇지 않아도 물적 인적으로 불리는 대륙군의 한정된 전력자산을 소모시키고 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군을 지휘한 경험이 있는 워싱턴은 원래 캐나다 공격에 회의적이었으며 캐나다 공격이 실패로 돌아간 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비록 지금 논란되고 있고 또 중요하다 간주되고 있지만 우리는 그 나라(캐나다)를 점령할 수 있다는 희망을 버려야 한다. 우리의 관심과 노력은 온전히 우리 땅에 대한 적들의 내침(來侵)을 막는데 두어져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너무 많았다. 특히 대륙군은 이렇다 할만한 해상전력이 전혀 없었던데 비하여 영국군은 배를 타고 어디에든 상륙하여 공격할 수 있었고 영국군은 이후 뉴욕을 기지로 하여 해군력을 최대한 활용하게 된다.


미합중국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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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국왕 조지 3세가 식민지민들을 반란군으로 규정함으로서 식민지민들은 독립이외에는 대안이 없어진다.


영국군이 절치부심하여 병력을 모으고 있는 동안 필라델피아에 있던 대륙의회는 영국왕이 13주의 청원을 끝내 거부하는 상황에서 더 이상 청원을 보내는 일은 무의미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러나 그러함에도 아직 선뜻 독립에 찬성하지 못하는 의원들이 많았다. 이들은 결국 독립을 주장하는 독립파와 여러 날을 두고 설전을 벌이게 된다. 이들의 논리는 본격적인 독립을 선언하게 되면 영국군에게서 지금까지는 비교할 수 없는 전면적인 공격을 받게 되고 신생국으로서 영국의 군사력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한다. 아울러 설사 어찌어찌 영국군을 물리친다 하여도 국력의 소모가 심하여 프랑스나 에스파냐같은 다른 유럽국가의 침공을 받아 금방 멸망하고 말 것이라며 독립을 반대하였다. 아울러 비록 악법 때문에 사이가 벌어지기는 하였지만 1776년 초기에도 식민지민 사이에서 완전독립을 주장하는 목소리는 높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13주와 영국은 단지 정치경제뿐만이 아니라 언어 문화적인 관계도 밀접하였고 무엇보다 자신들의 친족들이 아직도 살고 있는 영국으로부터 떨어져 나오는 것에 대한 무의식적인 거부감도 독립에 대한 장애물로 작용하였다.

자치와 독립사이에서 갈피를 못잡던 여론에 불을 지른 것은 1776년 1월 10일에 필라델피에서 출판된 [상식(Common Sense)]라는 조그마한 책자였다. 당시에는 익명으로 출간되었지만 그 저자는 놀랍게도 기존의 독립분자들이 아닌 토머스 페인(Thomas Paine)이라는 영국 이민자였다. 1774년 말에 영국에서 필라델피아로 온 전직 세무관리이자 코르셋 제조업자인 페인은 필라델피아로 이민한 직후 필레델피아의 공인(工人)들 사이에 만연한 독립사상의 영향을 받았고 곧 미국 독립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그가 배운 독립사상을 정리하여 [상식]이라는 책자로 정리한 것이다. 대륙의회를 구성하고 있던 사람들은 학자나 법률가, 기업가 등의 엘리트들로 구성이 되어있었고 이들은 대중이 이해할 수 없는 어려운 단어와 문장으로 독립사상을 논하였기 때문에 이들의 저술은 대중에게 널리 퍼지지 못하였다. 그러나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 생활하던 토머스 페인은 고전의 문구와 시적인 단어, 그리고 화려한 문장으로 수놓아진 ‘배운 자’들의 저술방식을 버리고 약 70장 정도의 짧은 책에 사회와 정부간의 관계, 왕권의 부당함, 13주의 현재 상황과 현안을 일반 대중도 읽을 수 있는 일상용어로 정리하였다. 성경에서 빌어온 비유와 직접적 어법으로 쓰여진 토머스 페인의 ‘상식’은 일반 대중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고 미국의 독립전쟁을 통틀어 독립사상을 고취시키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다. 사람들은 이를 통하여 ‘왕’이라는 존재가 그 통치를 원치않는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것이 얼마나 불합리한지 역설하였고 심지어 “왕정이란 우상숭배의 확산을 위하여 악마가 세상에 펼쳐놓은 것 중 가장 성공적인 것”이라는 극언까지 하면서 왕권 통치의 정당성을 총체적으로 부정하였다. 아울러 로크의 사상에서 빌어온 사회계약론을 들어 시민들의 요구에 부응하지 않는 권력은 곧 독재라고 주장하였다. 페인의 ‘상식’은 왕권에 대한 식민지 대중의 막연한 충성심, 그리고 영국에 대한 무의식적 향수를 그 근본에서부터 철저히 파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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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페인의 초상화. 그의 저서인 [상식]은 식민지민들사이에서 독립여론을 급격히 확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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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6년 발행된 [상식].



당시 아메리카 13주 전체를 대표하는 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대륙의회밖에 없었다. 대륙의회가 독립을 선언하려면 보다 광범위한 여론의 지지가 있어야 했는데 마침 ‘상식’의 출간이 독립에 우호적인 여론을 만들어준 것이다. 당시 대륙의회 외에도 각 주 의회가 있었고 도시와 마을마다 사람들이 위원회를 만들었는데 1776년 봄에 각 지방에서 독립에 대한 활발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약 90개의 자치 위원회들이 서로 앞다투어 그들만의 ‘독립선언’을 하고는 하였다. 주 의회들은 보다 조직적으로 움직였고 노스캐롤라이나가 대륙의회에 의원들을 파견하면서 1776년 4월 12일에 13주중에서 최초로 그 주를 대표하여 독립을 승인할 권한을 부여하였다. 이에 매사추세츠 의회가 주민(州民)들이 모두 독립을 지지한다는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버지니아 의회도 5월 15일에 독립지지 결의안을 발표하였다. 6월 7일에 버지니아 의회의 결의안이 대륙의회에 도착하자 대륙의회에서 격론이 벌어졌다. 여전히 남아있는 온건파들은 소위 중간주(Middle States: 메릴랜드, 델라웨어, 펜실베이니아, 저지, 뉴욕)들의 여론이 지지해줄 때까지 기다리자고 하였으나 중간주들도 재빨리 독립의 대열에 동참하였다. 6월 14일에 코네티컷주 의회가 독립지지를 천명하고 의원들을 파견하였다. 다음 날에는 뉴헴프셔와 델라웨어가 그 뒤를 따랐다. 뉴저지의 주지사이자 왕당파인 윌리엄 프랭클린(벤자민 프랭클린의 아들이다)은 반대하였으나 뉴저지 의회의 과격파들에 의하여 쫓겨나고 새로이 형성된 뉴저지 주정부는 6월 22일에 독립지지 표결을 위하여 의원들을 파견하였다. 메릴랜드 역시 6월 28일에 독립지지를 선언하고 의원들을 보낸다. 6월말에 이르러 독립을 늦추자는 소위 온건파들은 완전히 힘을 잃고 조용해졌다.

마침내 필라델피아의 대륙의회에 모인 주대표들은 토머스 제퍼슨, 존 애덤스, 벤자민 프랭클린 등에 의하여 작성된 독립선언문을 1776년 7월 4일 공식적으로 채택하면서 ‘아메리카의 13주’들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여 새로운 ‘합중국’을 만들기로 하였음을 선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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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대륙의회에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는 13주 대표들.


참고문헌: Paul K. Davis, [100 Decisive Battles],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01); Alexander Keyssar, [The Right to Vote: The Contested History of Democracy in the United States], (Basic Books, 2001); Piers Mackesy, [The War for America 1775-1783], (Bison Books, 1993); John C. Miller, [Origins of the American Revolution], (Boston: Little, Brown, 1943); Maurice Matloff (eds.), [American Military History: 1775-1902 - Vol. 1], (Conshohocken: Combined Books, 1996); Thomas Paine, [Common Sense], (Dover Publications, 1997); Max Savelle, [Seeds of Liberty:The Genesis of the American Mind], (Kessinger Publishing, 2005); The Library of Congress 'America During the Age of Revolution, 1764-1775'; National Park Service 'Guilford Courthouse'; National Park Service 'Yorktown'; www.battleofcamden.org 'Documentary History of the Battle of Camden, 16 August 1780';





김성남 | 안보·전쟁사 전문가
글쓴이 김성남은 전쟁이 인간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가지고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미국 UC 버클리 동양학과를 졸업한 후 연세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국제학 석사를 받고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에 진학하여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 [전쟁으로 보는 삼국지], [전쟁 세계사] 등이 있으며 공저로 [4세대 전쟁]이, 역서로 [원시전쟁: 평화로움으로 조작된 인간의 원초적인 역사]가 있다.


발행2012.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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