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연이은 전투 - 미국독립전쟁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댓글 0건 조회 489회 작성일 16-02-07 08:35

본문















14548017559106.jpg




미국독립전쟁 개요

14548017560671.jpg

개요표
전쟁주체미국(13주), 영국,
프랑스, 헤센(용병),
에스파냐, 네덜란드
전쟁시기1775~1783
전쟁터현재 미국 동부,
캐나다 온타리오/퀘벡,
서인도 제도 일부
주요전투렉싱턴/콩코드, 벙커힐, 롱아일랜드,
트렌턴, 사라토가, 몬마우스,
캠든, 사바나, 길포드 코트하우스,
요크타운
관련링크통합검색 결과보기




목차

목차
1. 13 식민지의 불만2. 프렌치 인디언 전쟁과 식민지 억압
3. 미합중국의 탄생4. 연이은 전투
5. 유럽의 지원과 남부의 격전6. 요크타운의 승리
7. 전쟁의 여파

대륙군의 연이은 패배



영국군은 3만 2천의 대군을 모아 뉴욕을 향하여 다가왔다. 워싱턴은 이를 막기 위해 롱아일랜드에 병력을 배치하여 영국군이 뉴욕에 상륙하는 것을 막으려 하였다. 그러나 병력이 그렇지 않아도 부족하였던 워싱턴은 결국 길 하나를 무방비로 열어두었고 이 길을 영국군 사령관 윌리엄 하우(William Howe)의 본대가 무저항으로 통과하여 워싱턴군의 후방에 있던 베드포드 마을을 점령하고 워싱턴군을 포위하였다. 이와 함께 워싱턴군 앞에 있던 영국군도 총공격을 하였고 워싱턴군은 이내 브루클린 해안까지 밀렸다. 이때 하우는 참모들의 공격 진언을 무시하고 미군에 대한 공격을 중단하고 포위를 위한 방벽을 짓기 시작하였다. 자칫 잘못하면 벙커힐에서 수많은 사상자를 내었던 상황이 재현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우는 대륙군에게 배편이 없는 상황에서 그들이 독안에 든 쥐라고 다소 안일하게 생각하였으나, 워싱턴은 주변에서 모을 수 있는 배를 모아 수천의 병력을 맨해튼으로 철수시켰고 하우는 닭 쫓던 개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롱아일랜드의 패배로 인하여 뉴욕은 영국군의 공격에 완전히 노출되게 된다.



14548017571226



킵스 베이에 상륙하는 영국군.


대륙군의 패배는 계속되었다. 맨해튼으로 후퇴한 대륙군은 1776년 9월 15일에 킵스베이(Kip’s Bay, 맨해튼 23가와 34가 사이의 작은 만)에서 영국해군의 포격을 버티지 못하고 영국군의 상륙을 허용한다. 비록 9월 16일 할렘의 전투에서 영국군에게 패배를 안겨주지만 10월 18일에 펠럼에서, 그리고 10월 28일에 뉴욕 동부의 화이트플레인에서, 그리고 11월 16일에 맨해튼 북단인 워싱턴 하이츠에서 패하면서 뉴욕과 주변지역이 완전히 영국군에 넘어간다. 설상가상으로 허드슨 강을 통제하기 위하여 맨해튼 섬과 그 대안(對岸)인 뉴저지에 각각 세워진 요새인 포트 워싱턴(Fort Washington)과 포트 리(Fort Lee)를 영국군에게 빼앗겼는데 여기서 물자의 손실이 엄청났다. 포트 리에서 영국군이 노획한 대륙군 장비의 목록을 보자면 대포 146문, 포탄 12000발, 머스킷 소총 2800정, 머스킷 탄환 40만발의 무기류와 더불어 텐트와 각종 야영장비, 참호를 만드는 도구 다수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로써 뉴욕지역은 완전히 영국군에게 넘어갔고 전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기세 좋던 보스턴 전역 때와는 달리 대륙군이 불리하게 된 것이다. 영국군은 다시 보스턴을 공략할 수도 있고 새로이 대륙의회의 소재지가 된 필라델피아로 갈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큰 문제는 연이은 패배로 워싱턴의 명성이 땅에 떨어지고 병사들의 사기가 저하되었다는 것이다. 상당부분이 민병이라서 대개는 1년을 기한으로 복무하고 있다. 만약 이들의 복무기한이 끝나는 1777년 1월까지 승리를 거두지 못하면 병사들은 다 집에 가고 대륙군은 거의 해체나 다름없는 상황에 몰리게 될 것이다.



14548017582749



1776년에 발행된 3분의 1달러 지폐. 위조가 쉬워 인플레이션의 요인이 되었다.


롱아일랜드에서 1만을 헤아렸던 대륙군은 그동안의 패배에 따른 전사와 부상, 질병, 그리고 탈영 등으로 인하여 그 수가 급격히 줄었다. 1776년 크리스마스를 앞둔 상황에서 워싱턴의 ‘본군’은 불과 2400명이었다. 군의 병력이 줄어드는 것 이외에도 대륙군은 사실 총체적인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었다. 사실 이때 대륙의회는 1775년부터 새 화폐인 ‘대륙달러(Continental Dollar)’를 발행하였고 이를 13개주 지역 전체에서 쓰도록 하였지만 실질적으로 통용되지 않았으며 각 주마다 다른 화폐, 또는 신용장(Letter of credit)을 발행해 사용했기 때문에 다른 주로 가면 대륙 달러를 사용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아울러 대륙달러는 실제 자산(예를 들어 황금)으로 뒷받침 되지 않은 글자 그대로의 ‘종잇장’이었기 때문에 인플레이션이 심했고 찍는 곳도 여러 곳인데다가 도안도 통일되지 않아 위조가 쉬웠다. 예를 들어 전쟁이 끝난 직후 1 대륙달러지폐의 실제 가치는 1센트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한마디로 전쟁을 치르는 동안 그 가치가 1백분의 1로 하락한 것이다. 이 때문에 군대가 보급품을 구할 길이 없어 병사들은 몇 주일간 옷을 갈아입지 못하는 것은 다반사였다. 대개의 병사들은 엉덩이를 가리는 코트 밑에 무명으로 된 셔츠 하나 입고 담요 뒤집어쓰고 겨울을 났다.


트렌턴에서의 승리



이러한 상황에서 워싱턴은 뉴저지주의 주도인 트렌턴에 영국군에 고용된 독일 헤센(Hesse)용병들이 주둔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는다. 사실 전쟁으로 먹고 사는 용병들은 역사적으로 그 평판이 좋지 않다. 돈을 많이 주면 갑자기 편을 바꾸는 일도 많았고 많은 경우 열심히 싸우지도 않았다. 아울러 돈이 주어지지 않으면 갑자기 강도떼로 바뀌어 고용주의 땅과 백성을 약탈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그러나 헤센 용병들은 특히나 악명이 높았다.

워싱턴은 야간에 강을 건너 급습하기 하기로 하고 존․설리반과 너대니얼 그린 휘하에 부대를 둘로 나누었다. 그리고는 강을 건너가려고 하였지만, 문제는 헤센 용병들의 동태를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는 점이다. 만약 상륙했는데 혹시라도 정찰병에게 발각되기라도 하면 도강 중 가장 취약한 순간에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고, 기다리고 있다는 우리는 꼼짝 못하고 몰살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마침 워싱턴이 얼마 전 트렌턴으로 보낸 첩자인 존 허니맨(John Honeyman)이 강을 건너와서, ‘양키’들이 작전도 제대로 세우지 못했다는 소문을 퍼뜨렸더니 용병들의 대장인 요한 롤이 이를 그대로 믿고 집으로 들어가 잔다는 보고를 하였고, 대륙군에게는 천운으로 날씨가 좋지 않아 마을 밖으로 수시로 나오던 순찰대도 나오지 않았다. 이로써 대륙군은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었다.

대륙군은 델라웨어(Delaware)강을 건너기는 하였지만 강의 흐름에 밀려 트렌턴에서 상당히 먼 곳에 상륙하였다. 결국 트렌턴까지 한 5마일(8km)은 걸어가야 했다. 존 설리번의 부대는 남쪽으로 가고 나머지는 너대니얼 그린 장군 지휘 하에 북쪽으로 갔다. 북쪽으로 간 부대는 마침 돌아다니던 일단의 용병들에게 발각되었지만 그 용병들은 수십 명 밖에 없어 싸우지 않고 트렌턴으로 내뺐다. 용병들이 그린 부대를 맞아 트렌턴 바로 북쪽에서 싸울 준비를 하는 통에 트렌턴은 비었고 설리번 부대는 남쪽으로 열심히 행군하여 아침 8시쯤에 트렌턴에 빈 집을 털듯이 들어갔다. 갑작스런 기습에 놀란 용병들은 트렌턴 밖으로 열심히 달아났다. 트렌턴에 도착한 대륙군은 집과 거리에 장애물을 열심히 설치했다. 용병들은 사실 도망한 것이 아니라 재정비를 위하여 철수한 것이고 이윽고 용병들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14548017598115



트렌턴 시내에서 헤센 용병들을 격퇴하는 대륙군.


용병 대장 롤은 부대를 나누어 대륙군을 상대하려 하였다. 존 설리반 군을 맞아 대포를 끌고 나왔으나 용병 포병대는 이미 포대를 배치하고 기다리고 있던 대륙군 포병에 제압당했다. 용병대 보병 역시 시내를 가로질러 대륙군을 공격하려 하였으나 대륙군에 저지 당했다. 롤은 오른쪽으로 우회하여 대륙군의 후방을 치려고 하였으나 갑자기 세 방향에서 쏟아지는 대륙군의 사격에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대륙군이 승세를 점하자 일부 시민들도 나와서 용병들과 싸우기 시작하였다. 총체적인 반격에 맞닥뜨린 용병들은 피해를 견디지 못하고 근처의 과수원으로 후퇴하였고 사방에서 포위한 대륙군의 총격을 받자 결국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헤센 용병대의 피해는 사상 약 100여명에 1500명중 1천이 포로로 잡혔다.

이 전투는 규모는 크지 않지만 대륙군의 사기를 크게 진작시키는 효과가 있었으며 워싱턴은 어느 정도 유능한 지휘관으로서의 명성을 회복할 수 있었다. 이로서 대륙군은 대규모 소집해제로 인한 해체를 막을 수 있었고 다음 해에는 승리에 고무된 많은 인원들이 추가로 대륙군에 입대하면서 다시 병력을 충원할 수 있었다. 트렌턴에서 승리한 대륙군은 여세를 몰아 다음 전투인 프린스턴 전투에서 영국군 부대와 격돌한다. 트렌턴의 승리는 크리스마스에 대륙군의 사기가 떨어진 상태에서 이루어낸 것이라 많은 역사적인 관심을 받았고 이 때문에 다음 전투이자 트렌턴보다 보다 큰 승리였던 프린스턴은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게 되었다.

트렌턴이 대륙군에게 넘어갔다는 소식을 들은 영국군 대장 콘월리스(Charles Cornwallis)는 9천명을 이끌고 뉴저지에서 대륙군을 몰아내려 출동하였다. 콘월리스는 델라웨어강의 지류인 애선핑크 크릭(Assunpink Creek)에 있던 다리를 건너 트렌턴의 대륙군을 직접 공격하려 하였으나 소총병과 포대를 설치하여 이 다리를 지키고 있던 대륙군에게 3 차례 격퇴당하고 직접 공격을 포기하였다. 그러나 워싱턴은 콘월리스의 본군을 상대하는 것이 무리라 생각하고 근처의 프린스턴을 공격하기로 하였다. 콘월리스는 그의 부장인 마후드(Mawhood)를 프린스턴쪽으로 보내 프린스턴 수비대와 힘을 합쳐 대륙군을 막도록 하였다. 프린스턴으로 진격하던 머서(Mercer)와 세인트 클레어(St. Clair)의 대륙군은 영국군의 반격에 몰려 한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주하였으나 워싱턴이 직접 진두에 나서서 전투를 독려하였고 마침 다니엘 힛치콕이 뉴잉글랜드의 지원 병력을 이끌고 도착하면서 전투는 반전되었다. 포위를 우려한 영국군은 프린스턴의 한 건물로 후퇴하였으나 알렉산더 해밀턴의 포사격이 이루어지며 위기에 몰리자 백기를 올리고 항복한다. 이로서 대륙군은 뉴저지 대부분을 지킬 수 있었고 1777년 전반부에 영국군은 뉴저지 북부만 일부 점거하였을 뿐 왕당파들이 있는 남부로 진격할 수 없었다. 아울러 약 1만의 영국군이 뉴저지 북부에 머무르는 동안 민병대원들의 습격대상이 되었고 일명 '보급전쟁(Forage War)'이라 명명된 1월에서 3월까지의 게릴라전 와중에 1만의 영국 병력중 거의 1000명이 전사하거나 부상자가 되었다.



14548017608292



프린스턴 전투의 조지 워싱턴 모습.


비록 트렌턴과 프린스턴에서 승리하고 영국군을 뉴저지 북부에서 저지하여 필라델피아로의 진격을 막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대륙군은 게릴라전으로만 영국군의 발을 묶었을 뿐 정규전에서 영국군과의 정면충돌은 여전히 무리였다. 벙커힐 전투나 애선핑크 같이 방어벽을 쌓고 다가오는 영국군에 맞서는 전투에서는 잘 싸웠지만 야전에서의 정규전투에서는 훈련된 영국군의 사격술, 그리고 뒤이은 총검돌격에 혼비백산하여 흩어지기 일수였다. 비록 프린스턴 전투에서 승리하기는 하였지만 워싱턴의 독전과 뉴잉글랜드 지원병의 도착이전에는 영국군 지휘관 마후드 부대의 총검돌격에 몰려 정신없는 후퇴를 하고 있었다. 1777년 3월이 지나고 추위가 풀리면서 잠시 전투는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4월 13일에 바운드 브룩(Bound Brook)에서 전투가 벌어졌고 대륙군 지휘관 벤자민 링컨이 영국군의 기습을 받아 황급히 도주하기는 하였으나 전투는 소규모였고 사상자도 그리 많지 않았다. 승리를 한 영국군도 바운드 브룩이 지키기 어려움을 알고 군을 속히 철수시켰다.


버고인의 작전, 대륙군의 위기





14548017618316



1776-7년 당시 영국군 총사령관 윌리엄 하우.


전투는 6월에 재개되었다. 영국군 지휘관 윌리엄 하우가 약 1만 8천의 대군을 이끌고 주둔지였던 뉴 브런스윅(New Brunswick, 뉴저지에 있는 소도시)에서 나와 바운드브룩을 거쳐 소머셋으로 군을 이동시켰다. 이는 워싱턴의 본군을 유인하기 위한 기동이었으나 워싱턴은 속지 않았다. 하우는 6월 19일에 다시 급속 기동을 시작하였고 하우의 영국군을 놓치지 않으려는 워싱턴은 일부 부대를 보내어 추격하게 하고 나머지 부대를 이끌고 뒤를 따랐다. 하우는 이 추격대를 잡기 위하여 군을 매복시키고 이를 격파한 다음 우회기동하여 워싱턴의 본대를 잡으려는 계획을 세웠다. 영국군은 윌리엄 알렉산더의 대륙군 선봉대를 기습하여 피해를 입혔으나 워싱턴의 본대는 말려들지 않았고 결국 소규모 승리로 만족하는데 그쳤다. 그리하여 당시 대륙의회의 근거지이자 신생 ‘미합중국’의 수도였던 필라델피아를 함락하려던 하우의 계획은 무위로 돌아갔다.

하우는 사실 1776년 말에 본국정부에 증원군을 요청하면서 1만명을 북쪽으로 보내 뉴욕주 북부의 알바니를 점령하고 자신은 필라델피아를 공격하여 함락시키는 작전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본국이 이런저런 이유로 증원을 차일피일 미루고 아울러 워싱턴군이 계속 뉴저지에서 후퇴하면서 필라델피아에 가까워지자 미국 수도인 필라델피아를 쉽게 차지할 수 있다는 생각에 선(先) 필라델피아 공격, 후(後) 북방을 토대로 한 수정안을 본국에 보냈다. 이 수정안에 대해서 알게된 존 버고인은 남쪽에서 공격을 하는 것보다 북쪽 캐나다에서 허드슨강을 따라 알바니를 공략하는 것이 좋다는 건의안을 본국정부에 제출하였고 이를 1777년 2월에 식민지청 장관 조지 저메인(George Germain)이 받아들이면서 버고인의 건의안은 승인되었다. 왕당파가 많은 지역인 남부에 상륙하려는 영국군이 1776년 여름에 캐롤라이나의 찰스턴에서 격퇴당하면서 영국이 남부 공략을 잠정적으로 포기한 것도 이 작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영국군이 알바니를 점령하려는 이유는 이를 통하여 알바니에서 뉴욕까지 허드슨강 유역 전역을 장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버고인이 이끄는 본대는 참플레인 호수를 통하여 알바니를 공략한다. 부관인 세인트 레저(Barry St Leger)가 이끄는 부대는 세인트-로렌스강을 내려가 모하크강을 거슬러 올라 다른 방향에서 알바니를 공략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뉴욕에서 북상하는 영국군이 남쪽에서 알바니를 공격한다. 이로서 허드슨강을 장악하게 되면 영국은 소위 뉴잉글랜드 지역을 다른 지역과 분리시킬 수 있었다. 현재 메인 메사추세츠 버몬트 뉴햄프셔 코네티컷 로드아일랜드를 포함하는 지역인 뉴잉글랜드는 당시 미국에서 상공업이 가장 발달된 지역이어서 물자와 자본이 가장 많았고 아울러 독립운동의 진원지라고 할 수 있는 보스턴이 있어 독립파들중에서도 골수독립분자들이 모여있는 곳이었다. 영국군이 허드슨강을 장악하게 되면 뉴잉글랜드의 물자를 대륙군이 활용할 수 없게 되고 아울러 이념적인 지원도 끊기게 되면서 다른 지역의 독립운동은 사그라질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되면 영국은 고립된 뉴잉글랜드를 공략하여 ‘반란’을 조기에 종식시킬 수 있다.


전쟁의 전환점이 된 사라토가 전투



본국에서는 총사령관 하우에게 버고인의 작전을 위하여 북상군을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지만 하우는 필라델피아 공략을 이유로 완곡히 거절하였다. 사실 이때 워싱턴의 본대가 상당히 약해보였기에 필라델피아가 머지않아 떨어지리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버고인의 본대는 약 8000명이었는데 이중 4천이 독일용병들이었다. 아울러 버고인의 본대에는 인디언들도 종군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식민지민들과 싸우면서 그들을 잘 알고 있고 무엇보다도 지형지물에 익숙하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독립파나 왕당파를 가리지 않고 식민지민들의 미움을 받고 있었다. 따라서 뉴욕주 북부에 살고 있는 왕당파들 조차 인디언들이 대거 포함된 버고인의 부대에 종군하는 것을 꺼렸고 버고인으로서는 전술적인 효과가 확실치 않은 병력을 확보하기 위하여 보다 확실하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병원(兵員)들을 버린 셈이 된 것이다. 버고인은 1777년 6월말에 공격을 개시하였고 인디언 동맹들과 참플레인 호수에 만나 1775년에 에단 알렌에게 점령되었던 크라운포인트를 탈환하였다. 이어 티콘데로가 요새도 다시 영국군의 손에 떨어진다.

이때까지는 대부분 강으로 움직여 진격이 쉬웠으나 티콘데로가로부터 알바니까지는 육로로 이동해야 했고 도로사정이 좋지 않아 영국군의 움직임이 느려졌다. 대륙군은 그렇지않아도 열악한 도로에 일부러 나무를 쓰러뜨려 놓아 영국군의 진격을 방해하였다. 그러나 대륙군은 영국군과의 정면대결을 피하였고 9월초에 이르러 버고인의 본대는 목표인 알바니로부터 불과 20km 밖까지 진출하였다. 이때 버고인에게는 매우 실망스런 소식이 전해진다. 하우가 필라델피아 공격을 결정하면서 지원군을 보내지 않을 것이라는 편지가 도착한 것이다.





이미지 목록



14548017630935



허드슨강을 장악하여 뉴잉글랜드를 고립시키려 한 영국군 북부방면 사령관 존 버고인.





14548017641279



사라토가 전역 대륙군 사령관 호라시오 게이츠. 원래 영국 태생이었으나 대륙군에서 지휘를 맡았다. 그러나 지나친 신중함으로 결정적 승리를 그르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버고인은 수월하게 승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지만 클라우제비츠가 말하였듯이 모든 전쟁에는 ‘안개’가 드리워져 있어 그 어떤 것도 원래 의도했던 데로 흘러가지 않는다. 사실 앨버니까지 오는 길도 쉽지많은 않았다. 저지부대 역할을 하고 있던 대륙군의 쉴러 장군은 영국군이 도착하기 전에 마을마다 먹을 것과 물자를 치워버렸고 영국군은 맨몸으로 진군하기도 힘든 울창한 숲속은 길을 만들어가며 수레로 이동하여야 했다. 한 편 양동부대 역할을 맡겨 온타리오 호수 방면으로 보냈던 세인트레저의 부대는 대륙군 선봉대를 만나 승리를 하였으나 베네딕트 아놀드(Benedict Arnold) 휘하의 대부대가 몰려오자 먼저 동맹군으로 참전하고 있던 원주민 전사들이 부대를 이탈하였고 이로서 싸울 수 없게 된 세인트레저는 아예 전투를 포기하고 물자도 그대로 버려둔 체 캐나다로 도주하였다.



14548017651161



1932년에 그려진 베네딕트 아놀드의 모습. 허풍이 세고 변덕이 심하였으나 뛰어난 전술적 판단력으로 사라토가 승리의 주역이 된다.


사라토가에서 대륙군을 이끈 것은 게이츠(Horatio Gates)였지만 실제로 병사들을 이끌고 승리를 일구어낸 것은 베네딕트 아놀드였다. 코네티컷 출신의 아놀드는 보스턴 포위전 당시 대륙군에 입대하였는데 그의 주 목적은 공을 세워 이름을 드날리는 것이었다. 이기적이고 허영이 심하고 자기중심적인데다 변덕이 심하여 성격적인 측면에서 남과 어울리기는 힘든 인물이었다. 그는 사라토가에 앞서 작전을 놓고 사령관인 게이츠와 심하게 다투었으며 이 때문에 전투중에 게이츠에 의하여 직위해제 당하였다. 그러나 적어도 독립전쟁중 대륙군에서 아놀드만큼 병사를 잘 이끄는 사람도 없었고 전장에서 전술적인 판단력은 상당히 뛰어났다. 그는 에단 알렌이 티콘데로가 요새를 점령할 때 같이 있었고 1775년 대륙군의 캐나다 공격때 참전하였다. 대륙군이 패하고 후퇴할 때 그 후위를 지켜 본대의 안전한 철수를 가능케 하였다. 아울러 챔플레인 호수를 지키면서 1776년에 소형 함선 15척으로 영국의 전함 25척을 맞아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한다. 그러나 그의 호수비로 1776년에 허드슨강으로 진출하려 했던 영국군의 진격은 1777년까지 지연된다. 아울러 사라토가 전투에 앞서 세인트-레저 휘하의 양동부대를 패퇴시킨다.

세인트-레저의 후퇴를 모르고 있던 버고인은 전장 근처 베닝턴에 대륙군의 물자창고가 있다는 말을 듣고 독일 용병들을 보내 이를 탈취하게 하였다. 이에 놀란 버몬트주 의회는 즉시 민병대를 소집하고 프렌치 인디언 전쟁의 베테랑인 존 스타크(John Stark)에게 지휘를 맡긴다. 1777년 8월 11에 베닝턴 인근에 도착한 바움(Baum)의 용병 650명, 그리고 인디언 전사와 영국 소총병으로 구성된 800병력은 그레그(Gregg)휘하의 민병대 선봉과 부딪혔고 이에 바움은 민병대와 전면전을 벌이려 하니 지원을 바란다는 서신을 전령에게 들려보낸다. 이에 버고인은 브레이만(Breyman) 휘하에 약 550명을 편성하여 보낸다. 본격적인 전투는 8월 16일에 벌어졌는데 바움은 근처 하천의 다리 근처에 방벽을 설치하고 인근의 고지에 진지를 만들어 민병대를 격퇴하려 하였다. 민병대의 수가 2천이 넘어 브레이만의 지원병이 도착하기 전에 시간을 벌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민병대장 스타크가 용병들의 저항에 고전하고 있던 민병들을 독려하면서 진두지휘하였고 일부 부대를 나누어 고지의 측면과 후방을 공격하게 하였다. 용병들은 탄약이 떨어질 때까지 싸웠으나 결국은 항복할 수 밖에 없었다. 때마침 브레이만의 용병 지원부대가 도착하여 민병대를 기습하는 바람에 상당한 혼란이 빚어졌으나 워너(Seth Warner)이 이끄는 또 다른 민병대가 전장에 도착하면서 베닝턴 전투는 대륙군의 승리가 되었다.

용병들이 베닝턴 공격에 실패하고 세인트-레저의 부대까지 전투에서 이탈하면서 버고인의 작전은 큰 차질을 빚게 되었다. 조공(助攻)이 좌절된 데다가 민병대가 용병대를 통쾌하게 꺾는 것을 본 버몬트와 뉴욕 북부의 주민들이 총을 들고 나와 민병대의 수는 급격히 불어났다. 아울러 버고인 부대 소속의 원주민 전사가 제인 멕레이(Jane McRae)라는 젊은 여자를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인근 주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하였다. 만약 이 전사를 처벌할 경우 원주민들이 편을 바꾸어 적이 될 것을 두려워한 버고인이 결국 처벌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멕레이는 버고인 휘하의 왕당파 병사와 약혼한 사이였기 때문에 인근의 왕당파들마저 버고인에게 등을 돌렸다. 결국 버고인은 아무런 지원도 기대할 수 없었고 자신에게 남은 6천의 병력으로 작전을 성공시켜야 하는 부담을 안게 되었다.

더 이상 기다릴 이유를 찾지 못한 버고인은 앨버니 공략에 나서기로 하였다. 이미 대륙군은 게이츠의 지휘하에 앨버니로 가는 길을 막고 있는 베미스 고지(Bemis Heights)에 진지를 구축하고 영국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영국군의 공격은 8월 19일에 시작되었는데 버고인의 목표는 베미스 고지 옆에 있는, 보다 높은 야산을 점령하고 이를 이용하여 대륙군 진지를 포격하는 것이었다. 버고인 휘하의 여단장 사이먼 프레이저(Simon Fraser) 부대는 옆의 숲을 이용하여 조용히 움직였고 버고인의 부대는 대륙군 진지 정면으로 움직였다. 리데젤(Riedesel) 휘하에 남아있는 독일 용병들은 보급품을 호송하면서 허드슨강을 타고 움직였다. 때가 되면 세 부대가 모두 모여 대륙군을 일제히 공격하려 하였다.

게이츠는 이미 감제고지를 차지하고 유리한 위치에 있으니 굳이 영국군을 공격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였으나 아놀드는 대륙군이 숲속에서의 소규모 전투 경험이 많다는 점을 들어 진격하고 있는 영국군을 요격하려 하였다. 게이츠는 전군을 움직여 영국군을 쳐야 한다는 아놀드의 말을 들어주기를 주저했다. 결국 아놀드 휘하의 부대만으로 영국군을 공격하는 것을 허락하여 주었다. 공격에 나선 대륙군 부대중 다니엘 모건의 총병들이 프레이저 부대를 발견하고 이에 총격을 가하였다. 아울러 아놀드의 뉴햄프셔 부대도 공격에 가담하였다. 이들은 프레이저 부대 선봉에 서있던 캐나다 병사들과 원주민 전사들은 흩어졌으나 대륙군은 이들을 섣불리 추격하다 영국군 후속부대의 반격에 격퇴되고 말았다.

프레이저의 강력한 반격에 대륙군은 잠시 주춤했으나 프레이저의 부대는 너무 앞으로 나와있었고 뒤따르고 있던 본대와의 거리가 크게 벌어지고 말았다. 아놀드는 이를 알아채고 재빨리 그의 부대 일부를 이동시켜 프레이저 부대와 영국군 본대사이의 공간을 들이쳤다. 뒤이어 아놀드의 후속 부대들이 도착하면서 본대의 측면에 있던 영국군 21 보병대대가 견디지 못하고 후퇴하였고 이 때문에 옆에 있던 영국군 제 62연대가 대륙군 사격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이때 영국군 20연대가 총검돌격으로 대륙군을 일시 물러나게 하면서 62연대는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겨우 벗어날 수 있었지만 본대의 상황은 여전히 매우 불리하였다. 아놀드는 사령관 게이츠에게 영국군 본대에 결정타를 날릴 수 있는 지원병을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고 수세에 몰린 버고인 역시 뒤따르고 있던 리데젤에게 전령을 급파하여 구원을 요청하였다.

게이츠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놀드의 요청을 무시했지만 리데젤은 버고인의 요청에 즉각 부대를 움직여 아놀드군의 측면을 들이쳤다. 이로서 본대는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아놀드 부대 역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이때 게이츠가 신속하게 지원군을 보내어 독일용병들이 도착하기 전 버고인의 부대를 쳤다면 영국군 본대는 견디지 못하고 무너졌을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게이츠는 부하의 재능을 시기하였거나 아니면 지나치게 신중했던 탓에 완승의 기회를 놓친 것이다. 대륙군의 완승으로 끝날 수 있던 프리먼즈-팜(Freeman‘s Farm)의 전투는 양쪽에 많은 사상자를 남긴 무승부로 끝나고 말았다.

다음 날에 버고인의 참모들은 전날의 전투 때문에 대륙군의 배치가 엉망이 되었으니 대륙군이 전열을 재정비하기 전에 공격해야 한다고 하였으나 버고인은 피해가 너무 크다고 생각했는지 참모들의 제안을 묵살하였다. 버고인은 이때 대륙군이 후방에서 영국군 보급선단을 나포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 아예 전투를 포기할 뻔했으나 남쪽에서 헨리 클린턴이 이끄는 영국군이 북진을 하고 있다는 보고를 듣고 포기하려는 마음을 거두었다. 그러나 클린턴의 북진은 너무 느렸고 이 와중에 게이츠의 대륙군은 주변에서 병력이 계속 몰려들면서 10월에 이르러 1만 2000까지 늘어났다. 이에 비하여 버고인의 군은 독일 용병들까지 합쳐도 4000명밖에 남지 않았다. 결국 버고인은 더 이상 기다리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여기고 베미스 하이츠에 포진한 대륙군을 공격하기로 한다. 버고인의 목표는 대륙군이 차지한 고지 서쪽의 다른 고지를 차지하는 것이었다. 영국군의 움직임은 대륙군 경계병들에게 포착되었고 다니엘 모건의 부대가 즉시 반격에 나섰다. 이어 아놀드의 부대도 가세하였고 수적인 열세에 처한 영국군은 뒤로 물러나기 시작하였다.

이 와중에서 영국군 공격을 지휘하던 연대장 프레이저가 모건의 총병들에게 저격을 받아 치명상을 입는다. 브레이만은 수비진지 한 곳을 점령하였으나 이 마저도 대륙군의 반격에 밀려난다. 버고인군은 다시 강가의 진지로 원위치할 수밖에 없었다. 막심한 피해를 입은 버고인의 본군은 원래 진지보다 조금 더 위쪽 안전한 위치로 옮겼으나 대륙군은 틈을 주지 않고 추격해왔다. 영국군이 위기를 모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진지를 포기하고 공격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는 티콘데로가 요새로 전면적 후퇴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버고인은 클린턴의 군이 가까이 왔으리라 기대하여 이를 기다리기로 하였고 기다리는 사이 대륙군은 버고인의 군을 겹겹이 에워쌌다. 클린턴의 군은 약 80km 남쪽까지 진출하여 있었으나 민병대의 거친 저항에 북진을 포기하고 뉴욕으로 회군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일이 벌어지는 동안 클린턴과 버고인의 군은 전혀 연락을 취하지 못하고 있었다. 영국군의 전령들이 모두 중간에 대륙군에게 잡혀 처형당했기 때문이다. 결국 10월 17일, 탈출의 가능성도 없고 보급품이 모두 바닥난 버고인의 군은 게이츠에게 항복하고 만다.



14548017663050



사라토가에서의 패전 이후 게이츠(푸른 군복)에게 항복하는 존 버고인(붉은 군복).


참고문헌: Paul K. Davis, [100 Decisive Battles],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01); Alexander Keyssar, [The Right to Vote: The Contested History of Democracy in the United States], (Basic Books, 2001); Piers Mackesy, [The War for America 1775-1783], (Bison Books, 1993); John C. Miller, [Origins of the American Revolution], (Boston: Little, Brown, 1943); Maurice Matloff (eds.), [American Military History: 1775-1902 - Vol. 1], (Conshohocken: Combined Books, 1996); Thomas Paine, [Common Sense], (Dover Publications, 1997); Max Savelle, [Seeds of Liberty:The Genesis of the American Mind], (Kessinger Publishing, 2005); The Library of Congress 'America During the Age of Revolution, 1764-1775'; National Park Service 'Guilford Courthouse'; National Park Service 'Yorktown'; www.battleofcamden.org 'Documentary History of the Battle of Camden, 16 August 1780';





김성남 | 안보·전쟁사 전문가
글쓴이 김성남은 전쟁이 인간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가지고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미국 UC 버클리 동양학과를 졸업한 후 연세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국제학 석사를 받고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에 진학하여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 [전쟁으로 보는 삼국지], [전쟁 세계사] 등이 있으며 공저로 [4세대 전쟁]이, 역서로 [원시전쟁: 평화로움으로 조작된 인간의 원초적인 역사]가 있다.


발행2012.10.26.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