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유럽의 지원과 남부의 격전 - 미국독립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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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48회 작성일 16-02-07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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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독립전쟁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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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표
전쟁주체미국(13주), 영국,
프랑스, 헤센(용병),
에스파냐, 네덜란드
전쟁시기1775~1783
전쟁터현재 미국 동부,
캐나다 온타리오/퀘벡,
서인도 제도 일부
주요전투렉싱턴/콩코드, 벙커힐, 롱아일랜드,
트렌턴, 사라토가, 몬마우스,
캠든, 사바나, 길포드 코트하우스,
요크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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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목차
1. 13 식민지의 불만2. 프렌치 인디언 전쟁과 식민지 억압
3. 미합중국의 탄생4. 연이은 전투
5. 유럽의 지원과 남부의 격전6. 요크타운의 승리
7. 전쟁의 여파

프랑스, 미국의 손을 들어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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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자민 프랭클린. 대륙의회의 대표로서 파리에서 프랑스의 지원을 호소하였다.


만약 트렌턴 전투가 꺼져가는 독립의 열기를 다시 살린 전투였다면 사라토가는 일대 전환점이라 할 수 있다. 사실 7년전쟁에서 영국에 패한 프랑스와 에스파냐는 이 전쟁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대륙의회의 수뇌부는 이러한 사정을 모르지 않았고 노련한 정치가이자 외교관인 벤자민 프랭클린이 1776년부터 대륙의회의 대사로서 프랑스 파리에 상주하면서 프랑스 왕실과 대신들에게 미합중국에 대한 지지를 ‘로비’하고 있었다.

프랑스의 친 미국파들은 왕실과 정부에 미국의 편에 서서 전쟁에 개입할 것을 적극적으로 주문하였는데 이는 혹시 미국에서의 전쟁을 통하여 국제정치적인 이득을 취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물론, 미국을 이용하여 영국에게 앙갚음을 하자는 계산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국제정치가 언제나 그렇듯이 프랑스 역시 지는 싸움에 끼어들고 싶지는 않았다. 1777년까지 미국은 영국군을 상대로 몇몇 전투에서 승리하였지만 사실 승리도 소소한 승리였고 그나마도 승리보다 패배가 많은 편이었다. 아울러 뉴욕을 점령당하고 대륙의회가 있는 필라델피아도 상시적으로 위협을 받는 등 객관적으로 볼 때 군사적으로 미국이 불리한 상황이었다. 사라토가 전투는 이러한 상황을 일거에 역전시켰다.

우선 전쟁을 통틀어 영국이 세운 가장 거시적이고 획기적인 전략을 좌절시켰다는 것이다. 허드슨강을 장악해 독립전쟁의 ‘엔진’이라고 할 수 있는 뉴잉글랜드를 고립시키면 미국 독립운동은 그 동력을 상실하는 것이다. 아울러 캐나다 쪽 영국 병력을 본격적으로 활용함으로써 미국 내 영국군의 전력을 크게 증강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라토가에서 대륙군의 승리는 영국군의 전략을 무위로 돌림은 물론 캐나다 병력을 거의 궤멸시킴으로써 북미에서 영국이 활용할 수 있는 병력을 반으로 줄였다. 아울러 미국이 단지 소규모 기습전이나 게릴라전이 아니라 유럽식의 회전(會戰)에서 영국의 대규모 정규군을 꺾을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특히 프랑스인들을 고무시킨 것은 대륙군이 존 버고인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것이었다. 유럽에서 프랑스군과 싸워 여러 차례 공을 세운 역전의 지휘관인 버고인을 꺾은 대륙군의 승전 가능성을 확인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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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미국 지원이 결정된 후 미군에 종군한 라파이예뜨 후작 (Marquis de Lafayette). 이 때문에 ‘두 나라의 영웅'로 불리게 된다.


결국 프랑스는 1778년 2월 신생 미합중국과 동맹조약을 맺고 다음 달인 3월에 영국에 선전포고를 한다. 프랑스는 곧이어 미국 정부에 대규모 차관을 제공하였고 프랑스의 군선과 상선들이 미국으로 많은 물자를 실어 나르게 된다. 프랑스로부터 돈과 물자가 들어오면서 1년 기한의 민병과 의용병에 의존하던 대륙의회는 병사들에게 급료와 함께 군복 등의 물자를 지급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미군에 절대적으로 부족하던 대포 등의 중화기를 주문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프랑스와의 동맹은 프랑스의 해군력이 동원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영국군의 상륙 작전과 함포 작전을 그저 손 놓고 바라볼 수 밖에 없던 미 대륙군에게 이는 천군만마나 다름 없었다. 이제 영국군의 본거지인 뉴욕조차 완전히 안전하다고 볼 수는 없었으며, 영국은 혹시라도 프랑스가 영국 본국에 대한 상륙작전을 감행할 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대규모 증원군을 파병할 수 없었다.

프랑스와 미국 간의 동맹이 성사되자 영국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던 에스파냐 역시 1779년에 영국에 선전포고를 했고 1780년에는 영국이 미국을 몰래 도와주고 있던 네덜란드를 상대로 선전포고하면서 네덜란드 역시 미국의 편을 들어 전쟁에 끼어들게 된다. 프랑스와 기타 유럽 국가들의 개입으로 미국독립전쟁의 성격 자체가 변하게 되었다. 단순히 식민지와 영국 본국간의 ‘내전’이 아닌 ‘국제전쟁’이 되었고 아울러 신생 미합중국이 프랑스와 에스파냐 등으로부터 정식 국가 인증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오합지졸을 정규군으로, 프로이센 교관 폰 슈토이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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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센 출신의 군인 프리드리히 벨헬름 폰 슈토이벤. 오합지졸이었던 미군을 훈련시켜 강군은 만든다.


프랑스의 물적인 도움도 중요했지만 대륙군을 단순히 민병과 자원병의 모임이 아닌 체계화된 정규군으로 만드는 데는 독일에서 건너온 한 군인의 존재가 결정적이었다. 현재 독일 마그데부르크 출신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폰 슈토이벤(Friedrich Wilhelm von Steuben, 1730~1794)은 프로이센군 참모부에서 장교로 복무한 사람으로, 프로이센이 감군에 들어가면서 실직을 하게 된다. 이후 생활이 곤궁해 빚에 시달리던 그는 프랑스 국방장관 꽁뜨 드 생제르망의 소개로 전문 군인을 찾고 있던 미합중국 사절 벤자민 프랭클린을 통해 미국으로 가게 된 것이다.

1777년 9월에 그가 미국에 도착하였을 때는 아직 미국의 대륙군이 사라토가에서 대승을 거두기 전이었고 전황은 미국에게 상당히 불리했다. 뉴저지의 영국군이 본격적으로 서진(西進)하면서 대륙의회는 필라델피아에서 철수해 보다 서쪽인 요크(York, Pennsylvania)로 피한 상황이었다. 폰 슈토이벤은 대륙의회 의원들에게 당분간 무급으로 대륙군에 봉사하겠다고 했고 1778년 2월 23일에 밸리-포지(Valley Forge)에서 겨울을 나고 있던 워싱턴을 찾아가 자신이 배치를 받았음을 ‘신고’하고 곧바로 병사들의 훈련에 착수했다. 사실 폰 슈토이벤은 영어를 할 줄 몰랐고 통역관을 옆에 달고 다니면서 그가 프랑스어로 병사들에게 말을 하면 이를 영어로 통역하게 했다고 한다. 아울러 그는 당시 워싱턴 휘하에 있던 알렉산더 해밀턴 대령과 나다니엘 그린 장군의 도움을 받아 훈련교범을 만들었고, 이를 본 워싱턴이 폰 슈토이벤의 교범을 정식 교범으로 채택하기도 했다.

당시 대륙군에는 진을 치는 법, 심지어 구보하는 법도 모르는 병사들이 태반이었다. 슈토이벤은 워싱턴 부대에 들어오자마자 군영의 배치와 위생에 대대적인 수술을 가해, 계급에 따라 천막을 설치하는 원칙을 정하고 화장실이란 개념을 도입했으며 병사들의 식사를 준비하는 주방과 화장실은 군영의 반대편에 각각 설치하게 했다. 또한, 폰 슈토이벤은 소위 120명의 ‘모범부대’를 만들어 각종 훈련 항목을 가르치고 이들로 하여금 병사들을 훈련시키게 했다. 현대식으로 말하자면 부사관들을 육성한 것이다. 유럽의 전문군인으로서 폰 슈토이벤의 가장 중요한 기여라 할 것 같으면, 대륙군에 당시 유럽 정규군의 기본 항목 중 하나인 총검술을 도입한 것이다. 민병 출신들은 사격은 생활을 통해 익히고 있었지만 총검술과 같은 정규 전술에는 취약한 경우가 많았는데 폰 슈토이벤은 전열(戰列)을 형성해 일제사격하는 정규사격방식과 함께 총검을 이용한 돌격과 격투술 역시 훈련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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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마우스(Monmouth) 전투 장면. 미군이 수비진지에 의존하지 않고 영국정규군과의 야전에서 맞서 비등하게 싸웠다.


이러한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1778년 6월에 벌어진 몬마우스(Monmouth)의 전투에서 영국 정규군과 격돌한 미군은 훈련 받은 대로 대오사격하고 질서정연하게 움직였으며 무엇보다도 상황이 불리하다고 명령도 없이 후퇴하는 현상이 없어졌다. 아울러 영국군의 총검돌격을 맞아서도 물러서지 않고 용감히 싸웠다. 폰 슈토이벤이 오합지졸들을 강군으로 변모시킨 것이다.

미국독립전쟁에 대한 폰 슈토이벤의 기여도가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는 비록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폰 슈토이벤이 당시 민병대의 집합에 지나지 않았던 대륙군을 미합중국의 정규군으로 변모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패배로 기록된 남부의 격전



북쪽에서 허드슨강을 장악하는 대전략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영국군은 뉴욕에 있으면서 위싱턴군을 견제하는 데 주력할 뿐 별반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당시 워싱턴은 뉴욕 근처 뉴저지와 버지니아에서 움직이고 있었는데, 뉴욕을 공격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약간의 움직임으로 뉴욕의 영국군을 견제하여 영국군 사령관이 된 신중한 클린턴을 묶어두려 한 것이다.

한편, 북쪽에서의 성과가 지지부진하자 영국은 전쟁을 미국 남부로 옮겼다. 상대적으로 대륙의회와 대륙군의 영향력이 강하지 않고 왕당파들이 많은 남부 공략에 나선 것이다. 하지만, 비록 왕당파들이 많았지만 이들이 영국군을 지지할 것인가의 여부는 확실치 않았다. 왕당파들이 본국을 지지할 것이라는 주장을 한 사람들은 전쟁 초기 독립파들에게 쫓겨 런던으로 피신한 왕당파들로, 이들은 남부로 돌아가 자신들의 재산을 되찾을 생각에서 남부 왕당파의 지지를 과장해 런던 정부에 지속적인 압력을 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의 말을 믿은 영국은 군을 미국 남부로 돌려 대대적인 공략에 나섰고 아치볼드 캠벨이 1778년 12월에 조지아주의 사바나에 상륙해 함락하고, 오거스틴 프레보스트(Augustine Prevost)의 지휘 하에 조지아주 오거스타를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남부에 있던 대륙군의 사령관은 사라토가에서 싸웠던 벤자민 링컨이었다. 그는 일단 부대를 사우스 캐롤라이나의 찰스턴에서 끌고 나와 캠벨의 움직임을 견제하고자 했다. 프레보스트는 캠벨에 대한 링컨의 견제를 풀어주기 위하여 1779년 2월에 소규모 부대를 보내 대륙군을 공격하게 했고 링컨도 이를 요격하기 위한 부대를 보내면서 보우포트(Beaufort)에서 격돌하게 된다. 보우포트의 전투는 무승부로 끝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링컨은 캠벨의 움직임을 막지 못했고 캠벨의 군은 오거스타를 점령하는 데 성공한다. 영국군의 성공이 이어지면서 처음에는 회의적이었던 왕당파들이 영국군 휘하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캠벨은 한달도 안 되는 기간 동안 1천명의 왕당파 병력을 모을 수 있었다.

영국군의 오거스타 점령 이후 전황은 미국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었고 영국군은 전쟁을 수월하게 진행시킬 수 있었다. 노스캐롤라이나에서 링컨이 보낸 독립파 민병대 1천명이 존 애쉬의 지휘 하에 조지아주로 들어오면서 오거스타 인근의 다른 민병대와 합류하고자 했고 캠벨은 이를 막기 위해 오거스틴 프레보스트의 동생인 마크 프레보스트(Mark Prevost)에게 군의 지휘를 맡긴다. 마크 프레보스트는 1779년 3월에 브라이어 크릭의 전투에서 애쉬의 민병대에 갑작스런 반격을 가해 거의 전멸수준으로 대파한다. 링컨은 직접 오거스타를 공격하고자 군을 이끌고 찰스턴을 떠났지만 찰스턴을 지키라고 남긴 부하 모울트리(Moultree)가 갑자기 들이닥친 오거스틴 프레보스트의 군을 맞아 싸우지 못하고 황망히 찰스턴 시내로 후퇴하면서 급히 회군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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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바나 탈환에 나선 미/불 연합부대. 그러나 이 탈환전은 참담한 실패로 끝난다.


1779년에는 미군과 프랑스군이 힘을 합쳐 사바나를 탈환하려는 작전이 전개되었다. 대륙군 남부 사령관 링컨의 부대와 프랑스 부대가 합류하고 바다에서 데스텡이 이끄는 프랑스 함대가 보조를 맞추기로 되어있었다. 그러나 이 작전은 영국의 완승으로 끝났다. 전투가 끝났을 때 영국군의 사상자가 60여명이었던데 비해 미/불 연합군은 9백명이 넘었다. 프랑스 함대가 영국군 요새를 포격해 약화시킨 뒤 육상병력이 공격하는 작전이었지만 영국군이 구축한 요새가 의외로 튼튼해 포격에 잘 버텼다. 데스텡은 포격이 실패하였음에도 육상병력의 공격을 종용했고 미/불 연합 부대의 공격은 격퇴당한다.

영국군이 사바나를 지키는 데 성공하자 영국군 사령관 클린턴은 그 여세를 몰아 찰스턴에 대한 공격을 시도하게 된다. 링컨은 남은 병력을 이끌고 찰스턴으로 돌아와 그 수비를 담당하게 된다. 3월 29일에 시작된 찰스턴 포위전은 두 달을 끌게 된다. 영국 함대가 찰스턴 항구를 봉쇄해 보급을 끊고 병력 1만이 찰스턴을 에워쌌다. 벤자민 링컨은 약 5000의 병력으로 찰스턴 시를 지키고 있었다. 포위된 미군을 구원하기 위한 시도도 있었지만 실패하고, 결국 버틸 수 없게 된 링컨은 1780년 5월 12일에 영국군에 항복했다. 찰스턴은 독립전쟁 중 미군이 겪은 최악의 패배라고 할 수 있다. 이때 항복한 병력도 매우 많았으며, 무엇보다 미국땅에 영국이 마음 놓고 병력을 들여놓을 수 있는 대규모 항구가 영국군에 장악된 것이다.

남부에서 영국의 목적을 어느 정도 이룬 클린턴은 뉴욕으로 떠나고 찰스 콘월리스가 미국 남부 주둔 영국군의 사령관이 된다. 한편 남부에 있던 대륙군의 잔여병력은 찰스턴 함락후 사세가 기울었음을 인정하고 북쪽으로 후퇴하는 수밖에 없었다. 콘월리스 휘하의 바나스터 타를턴(Banastre Tarleton)은 이를 추격해 미군을 크게 무찌른다. 이때 타를턴이 미군과 민병 포로들을 학살하였다는 소문이 돌았고 이 때문에 미군은 그의 이름인 Banastre에 빚대어 그에게 ‘피투성이 반(Bloody Ban)’이란 별명을 붙였다고 한다. 타를턴은 혁명전쟁 중 미군이 가장 증오하는 인물이 되었고 이후 ‘이게 타를턴의 자비(Tarleton's Quarters)다’는 미군의 전투 구호가 되었다. 이후 몇몇 전투에서 대륙군이 영국군을 꺾었을 때 그들은 적이 항복을 청해도 ‘이게 타를턴의 자비다! 받아라!’라고 외치며 항복하려는 영국군을 무참히 살해했다고 한다.


너대니얼 그린,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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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츠의 해임 이후 남부에서의 미군 사령관인 된 너대니얼 그린. 퀘이커 교도였으나 미국의 군인으로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다.


1780년 8월 16일에 영국군의 북진을 막으려는 호라시오 게이츠의 미군과 콘월리스의 영국군이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캠든에서 충돌하게 된다. 왕당파들의 병력지원이 신통치 않아 영국군의 규모는 2100명에 불과했지만 게이츠는 가까운 노스캐롤라이나와 버지니아의 민병대에다 1500의 정규군을 합쳐 약 3700의 병력을 보유해 수적으로도 우위에 있었고 대포의 수도 영국군보다 많았다. 그러나 막상 전투에 돌입하고 보니 미군의 좌측에 있던 민병들이 영국 정규군의 정면에 위치하게 되었다. 물론 미군 정규군도 영국 정규군이 아닌 왕당파 지원병들과 맞서게 되었지만 왕당파는 정규 전투경험이 있어 미군 정규군의 공격을 버텨낸 반면 미군을 따라온 민병대가 영국 정규군의 공격에 그대로 허물어진 것이다. 미군은 이 전투에서 전사자만 1천이 넘는 대패를 당한다. 이 전투로 영국군은 다시 기세가 크게 올랐고 미군을 지휘한 호라시오 게이츠는 사라토가를 승리로 이끌었다는 위명에도 아랑곳없이 사령관직에서 직위 해제되는 수모를 당한다.

직위 해제된 게이츠를 대신하여 너대니얼 그린(Nathanael Greene)이 남부에서 미군의 지휘를 맞게 되었지만 그린 휘하에는 훈련된 병력이 적었고 전체 규모도 이전의 남부 주둔군에 미치지 못했다. 그는 영국군과 정면대결하기 보다는 영국군을 따라다니면서 기습하거나 영국군을 도발해 유인한 뒤 잠깐 전투를 벌인 다음 빨리 후퇴하는 방법을 썼다. 병력의 소모를 막는 동시에 영국군을 지치게 하려는 히트 앤 런 전술이었다. 그는 북쪽에서의 증원군과 주변에서의 지원병들이 몰려들기를 기대하며 1780년 말에서 1781년 초에 이르는 수개월 동안 계속해 영국군과 소규모 전투를 벌였다. 그린의 군은 약 15차례 영국군과 싸우면서 한 번도 속시원히 이긴 전투가 없었지만 영국군도 속시원히 이기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린의 지연 전술과 더불어 프랜시스 마리온(Francis Marion, 1732~1795)의 게릴라전은 영국군을 더욱 지치게 만들었다. ‘늪지대의 여우’라 불린 마리온은 사우스 캐롤라이나로 이민 온 프랑스 위그노인들의 후손이었다. 그는 지형지물에 익숙한 점을 이용해 일부 흑인까지 포함된 수십 명의 민병으로 영국군에 대한 정찰을 하고 소규모 부대와 보급행렬에 기습을 가하는 등 영국군을 괴롭혔다. 화가 난 영국군이 그를 잡으려 하면 그는 늪지대 사이에 난 지름길을 통해 영국군을 따돌렸다. 그의 별명이 된 ‘늪지의 여우(Swamp Fox)'는 그를 소탕하라는 임무를 맡아 그를 잡으려다가 번번히 놓친 타를턴이 ‘저 놈의 늪 여우는 악마도 못 잡을 거다’라고 푸념한 데서 나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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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의 다니엘 모건 준장이 칸나에 전투와 유사한 포위작전으로 악명 높았던 바나스터 타를턴의 군을 대파한 카우펜스(Cowpens) 전투도


그린의 계산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그린은 지속적으로 병력을 충원 받으면서 병력이 4천명까지 늘었지만 콘월리스는 이곳 저곳을 지키려고 병력을 분산시킨 까닭에 그의 본대는 약 2천으로 줄어있었다. 아울러 그의 본대는 본격적으로 싸우지 않고 철저히 지연전술로 일관하는 그린의 부대를 쫓아다니느라 매우 지쳐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100명 정도의 별동대를 이끌고 주변을 소탕하러 나갔던 타를턴의 부대가 1월 17일에 카우펜스(Cowpens)에서 미군 다니엘 모건(Daniel Morgan) 준장의 유인 작전에 말려들어 300명의 사상자를 내고 나머지는 포로로 잡히는 참패를 당한다. 타를턴의 대패는 그렇지 않아도 병력이 궁한 콘월리스 부대에 크나큰 부담을 안겼다.

이래저래 상황이 풀리지 않던 차에 콘월리스는 1781년 3월 현재 노스캐롤라이나 남부의 딥 리버(Deep River) 근처에 포진해 있던 중 대륙군이 현재 노스캐롤라이나주 그린스보로(Greensboro)의 길포드 코트하우스(Guilford Courthouse)에 모여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동한다. 도망만 다니던 그린을 칠 기회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그린은 이미 콘월리스의 움직임을 알고 있었고 수비진지를 견고히 구축하고 영국군의 도착을 기다렸다. 그는 일부러 진격을 멈추고 영국군과의 결전을 기다렸던 것이다.

전장에 도착한 영국군은 다음 날에 미군을 공격했지만 수비진지에서 빗발치는 총탄에 공격이 좌절되었다. 이에 영국군은 약간 방향을 틀어 우측에 있던 미군 제 2선을 공격하였다. 어느 정도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지만 숲 속에서 이루어지는 미군의 저격에 고전하며 공격은 답보상태를 면치 못했다. 이때 수비진지를 지키고 있던 미국 정규군과 민병대가 합동으로 돌격해 영국군을 몰아냈다. 영국군은 얼마 후 재차 공격을 시도했고 다시 미군과 난전이 벌어졌다. 이때 그린 휘하의 윌리엄 워싱턴(William Washington)이 자신의 부대를 거느리고 영국군을 우회하여 영국군의 뒤를 치면서 영국군은 위기에 몰렸다. 자신의 군이 자칫하면 패배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에 콘월리스는 후방에 남은 포병들에게 무차별 사격을 명했다. 이 포격으로 영국군의 사상자가 많이 발생하였지만 미군의 공격도 주춤했고 이때 타를턴이 기병을 이끌고 미군의 우측을 공격하여 많은 피해를 주었다. 그린은 승리를 따내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되자 언제나 그렇듯이 지체 없이 후퇴했고 이 때문에 길포드 코트하우스의 전투는 대개 영국군의 승리로 기록된다. 그러나 영국군의 승리는 상처뿐인 영광이었다. 4천의 미군 병력중 사상자는 250명 정도였지만 영국군 사상자는 2천명중 550명이었다. 불과 90분 정도의 짧은 시간에 병력의 4분의 1이 죽거나 다친 것이다.

남은 1500명의 병력으로 남부에서 영국군의 작전은 불가능하였다. 콘월리스의 영국군 본대는 그린의 정규군은 커녕 각 지역의 민병대를 상대하기에도 어려울 정도로 병력이 줄어있었다. 이를 두고 한 영국의 전쟁반대론자들은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나오는 피루스(Pyrrhus)왕이 “이런 승리를 두 번 다시 하면 나는 완전히 망한다”라고 한 말을 빗대어 “그런 승리를 다시 한다면 영국군은 파멸하고 말 것이다”라고 비꼬았다. 콘월리스에게 남은 선택은 결국 버지니아로 북상하여 필립스 장군과 미국을 배신한 베네딕트 아놀드의 군과 합류하는 방법 밖에 없었다. 콘월리스가 북상하면서 미군은 다시 남부를 장악하게 되고 영국의 남부군은 경각에 처하게 된다. 그러나 길포드 코트하우스에서의 치열한 싸움은 독립전쟁을 사실상 종결 짓는 요크타운 전투의 전주곡에 불과했다.

참고문헌: Paul K. Davis, [100 Decisive Battles],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01); Alexander Keyssar, [The Right to Vote: The Contested History of Democracy in the United States], (Basic Books, 2001); Piers Mackesy, [The War for America 1775-1783], (Bison Books, 1993); John C. Miller, [Origins of the American Revolution], (Boston: Little, Brown, 1943); Maurice Matloff (eds.), [American Military History: 1775-1902 - Vol. 1], (Conshohocken: Combined Books, 1996); Thomas Paine, [Common Sense], (Dover Publications, 1997); Max Savelle, [Seeds of Liberty:The Genesis of the American Mind], (Kessinger Publishing, 2005); The Library of Congress 'America During the Age of Revolution, 1764-1775'; National Park Service 'Guilford Courthouse'; National Park Service 'Yorktown'; www.battleofcamden.org 'Documentary History of the Battle of Camden, 16 August 1780';





김성남 | 안보·전쟁사 전문가
글쓴이 김성남은 전쟁이 인간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가지고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미국 UC 버클리 동양학과를 졸업한 후 연세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국제학 석사를 받고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에 진학하여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 [전쟁으로 보는 삼국지], [전쟁 세계사] 등이 있으며 공저로 [4세대 전쟁]이, 역서로 [원시전쟁: 평화로움으로 조작된 인간의 원초적인 역사]가 있다.


발행2012.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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