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요크타운의 승리 - 미국독립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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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77회 작성일 16-02-07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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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독립전쟁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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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표
전쟁주체미국(13주), 영국,
프랑스, 헤센(용병),
에스파냐, 네덜란드
전쟁시기1775~1783
전쟁터현재 미국 동부,
캐나다 온타리오/퀘벡,
서인도 제도 일부
주요전투렉싱턴/콩코드, 벙커힐, 롱아일랜드,
트렌턴, 사라토가, 몬마우스,
캠든, 사바나, 길포드 코트하우스,
요크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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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목차
1. 13 식민지의 불만2. 프렌치 인디언 전쟁과 식민지 억압
3. 미합중국의 탄생4. 연이은 전투
5. 유럽의 지원과 남부의 격전6. 요크타운의 승리
7. 전쟁의 여파

버지니아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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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서니 웨인.


1781년 5월에 영국의 남부 방면 사령관 콘월리스가 캐롤라이나 지역을 떠나 버지니아에 도착했을때 그의 휘하 병력은 1400명에 불과하였다. 캐롤라이나와 조지아 지역은 다시 미군이 차지했다. 콘월리스는 일단 버지니아만이라도 독립파들로부터 확실히 떨어뜨려 놓자는 결정을 내리고 베네딕트 아놀드의 3600병력을 인수하고 뉴욕의 본부로부터 2천의 병력을 추가로 지원받아 약 7천의 병력을 거느리게 되었다.

한편, 버지니아에서 미군을 지휘하고 있었던 라파예트의 군은 그리 많은 편이 아니었다. 라파예트의 병력은 3천 정도였고 전투경험이 많지 않은 민병들이 다수 섞여있었다. 라파예트는 불리한 상황이 호전될 때까지 전투를 피했고 콘월리스는 병력의 우위를 십분 활용하여 다수의 별동대를 활용하여 버지니아 각지를 약탈하고 공략했다. 한달 쯤 지나 앤소니 웨인(Anthony Wayne) 준장이 정규군을 이끌고 도착했고 윌리엄 캠벨이 전투 경험이 많은 민병대를 이끌고 오면서 라파예트의 병력은 약 4000까지 불어났다.

뉴욕의 영국군 총사령관 클린턴으로부터 포츠머드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은 콘월리스는 6월 20일에 별동대를 불러들였다. 영국군은 7월 4일에 옛 제임스타운 인근의 제임스 강을 건너게 되었고 라파예트는 이를 노려 영국군을 공격했다. 양군은 7월 6일에 그린스프링에서 만났고 콘월리스는 이동하는 척하면서 뒤에 매복부대를 남겨둬 미군을 함정으로 끌어들였다. 앤서니 웨인이 500의 병력을 이끌고 들어갔다가 영국군의 일제공격을 받았다. 웨인의 무모함으로 인해 패전할 뻔한 것을 라파예트가 신속히 개입하면서 승부는 나지 않았다. 양측 모두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라파예트와 콘월리스는 이후 본격적인 결전을 하려 하지 않았다. 영국군은 요크타운으로 이동하였다.


요크타운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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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과 함께 요크타운 전투 승리의 주역이 된 로생보 백작(Comte de Rochambeau). 프랑스 육군의 원수이면서도 워싱턴에게 지휘권을 양보하여 지휘계통의 혼란을 막는다.


한편 북쪽에 있던 워싱턴의 본군은 로샹보(Rochambeau)가 이끄는 프랑스군과 뉴욕시 북쪽에서 만나 군을 합쳐 연합부대를 형성했다. 로샹보는 군 경력이 40년에 이르는 노련한 지휘관이었고 관록이 상당했지만 늘 워싱턴에게 지휘를 양보했다. 군 통수권의 분열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합부대를 형성한 후 작전을 논하는 자리에서 워싱턴은 영국군의 본영이 있는 뉴욕을 치는 것이 전쟁을 빨리 끝낼 수 있는 방법이라 주장했다. 미/불 연합군이 뉴욕의 영국 본군의 세 배이니 지금까지는 단순히 ‘위협’에 지나지 않았던 뉴욕 공격을 감행하기에 충분하다고 여긴 것이다. 로샹보는 점잖게 반대하면서 머지 않아 카리브해의 프랑스 식민지에서 드 그라스(De Grasse) 제독이 지휘하는 함대가 올 것이니 힘을 합쳐 다른 곳에서 큰 전투를 감행하는 것이 낫다고 했다. 워싱턴은 고집을 피웠지만 참모들의 반대로 생각을 거두었다. 이어 8월에 드 그라스가 보낸 서신이 도착했는데 29척의 함선이 버지니아 해안으로 항해할 것이며 10월 중순까지 머무를 수 있다고 했다. 드 그라스는 워싱턴에게 버지니아로 내려와 합동작전을 펴자고 했고 워싱턴이 이에 동의하면서 미/불 연합군은 버지니아로 이동하게 된다.

버지니아에서는 콘월리스가 그린스프링 전투 이후 포츠머드에 도착해 포츠머드에서 승선을 기다리고 있다는 서신을 클린턴에게 보냈다. 그러나 3일후 클린턴은 이전의 명령을 취소하고 콘월리스에게 대기할 것을 명했다. 클린턴은 콘월리스가 있는 요크강과 제임스강 사이의 해안이 항구를 만들기에 적합하다는 것을 들어 콘월리스로 하여금 인근의 요크타운으로 이동한 후 도착하자마자 항구를 만들라는 지시를 한다. 얼마 후 포츠머드에 영국 수송선들이 도착하였고 콘월리스와 4500 병력은 수송선들을 타고 8월 1일 버지니아 중부 해안의 요크타운에 도착한다. 한편 바나스터 타를턴은 자신의 기마대와 함께 육로로 출발해 8월 7일에 요크타운에 도착한다. 8월 22일에는 포츠머드에 남아있던 잔여병력이 모두 요크타운에 도착한다. 그러나 병사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살 떨리는 전투의 공포 대신 6주간의 고되고 지겨운 노동이었다. 사령관 클린턴이 명령한 진지 구축과 항만 건설에 나서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군사시설을 짓기 위한 군대의 노동은 고대 이집트, 로마, 중국 등 시기와 지역을 막론하고 일반적인 현상이었지만 그 노동을 담당해야 하는 병사들의 고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8월 31일에 요크타운의 진지공사현장에 있던 한 병사는 쓰기를:




지금 이곳은 강을 향한 포대(砲臺)를 만들고 육지쪽의 방벽을 만드는 고된 노동의 연속일 뿐이다


요크타운에서의 진지구축이 끝나기도 전에 워싱턴의 본대를 포함한 미/불 연합군은 8월 19일에 로드아일랜드주의 뉴포트(Newport)를 떠나 버지니아로 진군을 시작한다. 허드슨 강 유역을 지키기 위해 남겨둔 수비대를 제외한 7천의 병력이 길고 긴 진군을 하는 동안 워싱턴은 미/불 연합군의 목표가 뉴욕임을 암시하는 가짜 명령서를 여러 차례 발송한다. 이 명령문의 일부는 뉴욕에 있던 영국군 사령관 클린턴의 손에 들어갔다. 사실 이는 미/불 연합군의 진짜 목표가 요크타운이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한 연막전술이었다. 이 연막전술은 상당한 효과를 발휘하면서 클린턴은 혹시라도 뉴욕을 빼앗길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뉴욕에 계속 웅크리게 된다. 앞서 언급한 콘월리스군의 이동은 사실 워싱턴의 연막전술 때문에 빚어진 일이었다. 뉴욕에 대한 위협 때문에 콘월리스군을 북쪽으로 이동시키기 위하여 포츠머드에 오라했다가 프랑스군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음을 감지하고 콘월리스에게 버지니아에 그대로 있으라고 한 것이다.

워싱턴군의 진격은 9월 초 약간의 차질을 빚는다. 필라델피아에 도착한 미군병사들이 즉시 그 달의 월급을 받기 전에는 떠날 수 없다며 불만을 표시한 것이다. 대륙의회가 재빠르게 병사들의 급료를 지급하면서 사태는 일단락되었고 마침내 9월 5일에 드 그라스의 함대가 버지니아 해안 인근에 도착했다는 전갈이 왔다. 드 그라스는 태워온 3200병력을 하선시켰고 이들 병사들은 근처에 있던 라파이예트의 군에 합류한다. 프랑스 병사들을 내려놓은 드 그라스는 북쪽으로 이동해 체서피크만(Chesapeake Bay) 북쪽 지역에서 워싱턴의 병사들을 실어 날랐다. 워싱턴은 본격적으로 전투를 치르기 이전에 그의 고향인 마운트 버논에 들른 다음 다시 버지니아로 향한다. 워싱턴은 9월 14일에 버지니아주 북쪽 윌리엄즈버그에 도착했고 많은 사람들의 환영을 받으면서 미/불 연합군의 지휘권을 인수하였다.


해전에서 결정된 영국군의 운명



프랑스 함대가 체서피크만에 들어왔다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정보였다. 드 그라스가 8월에 카리브해를 떠나 버지니아로 향할 때 카리브해 지역 영국함대 사령관인 로드니(George Brydges Rodney)제독은 사무엘 후드 소장에게 14척의 함선을 주고 드 그라스를 추격하게 하였다. 어디로 가는지 알기 위함이었다. 8월 25일에 체서피크만의 입구에 도착한 후드는 프랑스 함선들이 보이지 않자 다른 곳으로 갔다고 생각하고 바로 뉴욕으로 향한다. 사실 후드는 프랑스 함대보다 오히려 일찍 도착했기 때문에 프랑스 함대를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뉴욕에는 유럽에서 지원물품을 수송하는 미국선단을 봉쇄하는 역할을 하고 있던 뉴욕방면 함대 사령관인 토머스 그레이브스(Thomas Graves) 소장이 머물고 있었다. 후드가 자신의 함대를 그레이브스 휘하 5척의 전열함(Ships of the Line)과 합치면서 영국군의 전력은 19척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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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서피크만 해전(海戰)을 묘사한 그림. 왼쪽이 프랑스 함대, 오른쪽이 영국함대이다.


한편 로드아일랜드 뉴포트에 있던 프랑스 함대 지휘관 드 바라 생 로랑(De Barras Saint-Laurent)은 체서피크만에 도착했다는 드 그라스의 연락을 받고 8척의 전열함, 4척의 프리기트함, 그리고 요크타운의 영국군 진지를 공격하는데 필요한 공성장비를 실은 18척의 수송함과 함께 체서피크만을 향하여 항해를 시작하였다. 드 바라는 움직임을 숨기기 위하여 먼 바다로 나가 체서피크만까지 기존항로를 크게 우회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드 바라의 함대가 출항한 것을 알게 된 영국군은 드 바라가 향한 곳이 체서피크만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문제는 프랑스 함대, 특히 드 그라스 함대의 규모에 대한 정보가 없다는 것이었다. 후드가 연락을 위해 체서피크만에 남겨둔 영국의 소형함 2척이 드 그라스 함대의 도착으로 체서피크만 안에 갇혀버리면서 전혀 연락을 취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다만 당시로서는 거함이었던 전열함이 19척이나 있었고 이전에 프랑스와 에스파냐 함대에 거둔 승리의 역사를 생각하면서 승리를 자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함대가 막상 체서피크만에 도착하여 보니 프랑스 함대는 그들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대규모였다. 드 그라스의 함대에는 대함인 전열함만 28척에다 각종 소형함들까지 있어 영국군은 자칫 잘못하면 중과부적으로 패할 수도 있었다.

1778년 9월 5일 체서피크만 입구에 있던 프랑스 함대는 오전 10시경에 수평선위에 영국함대가 나타나자 즉시 닻을 걷어올리고 전투에 대비하였다. 프랑스는 체서피크만의 입구를 사선(斜線)으로 막는 전열(戰列) 대형을 취하였다. 프랑스 함대의 끝에는 물위로 나온 무수한 모래톱이 있어 영국함대가 프랑스 함대를 우회해 체서피크만으로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영국함대가 체서피크만으로 들어가려면 프랑스 함대를 돌파하여야만 했다. 오후 2시경에 양 함대가 대포의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가면서 함포전이 시작되었다. 지휘를 맡은 그레이브스는 전투에 들어가면서 전기(Battle flag)를 올리고 있었는데 이럴 경우 모든 함대는 일렬로 정렬하여야 했고 어떤 경우에도 대열이탈이 금지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상황은 수적으로 열세인 영국함대에 불리해져 갔다. 영국함선 Terrible號의 경우 직격탄을 여러발 얻어맞아 침몰직전까지 몰렸고 Intrepid號는 무려 65발의 포탄을 맞아 배가 그야말로 걸레짝이 되었다. 또 다른 전열함인 Shrewbury號는 함장이 전사하고 홀수선 아래쪽에 다섯 발의 직격탄을 맞아 역시 침몰위기에 몰렸다. 영국함대의 후위는 아직 포의 사정거리 밖이어서 그레이브스의 함선들을 도와주지 못하고 있었다. 만약 전기가 내려지고 자유전투가 허락되면 얼마든지 대형을 풀고 전투에 뛰어들 수 있었지만 그레이브스는 전투시의 혼란 때문인지 배틀플래그를 내리라는 명령을 내리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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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서피크만 해전 함선 배치도.


얼마 후 그레이브스는 깃발을 바꾸었는데 하나는 직렬(直列, Line ahead), 즉 적 함대에 천천히 다가가 모두 일제히 평행대형을 이루라는 신호였고 또 하나는 접전(接戰, Close Action) 즉 최대한 빨리 다가가 포사격거리에 진입하는 즉시 임의로 측면으로 돌아 발포하라는 신호였다. 상호 모순되는 두 신호 때문에 영국함대는 혼란에 빠져 함대가 유기적으로 싸우지 못하고 산발적으로 싸울 수밖에 없었다. 오후 6시 30분경 해가 지기 시작하였고 자신의 함대가 불리한 상황에 처한 것을 감지한 그레이브스는 뒤로 잠시 물러날 것을 명하였다. 두 함대는 해안에서 다소 멀리 떨어진 곳에서 수 일간 서로를 노려보면서 기회를 노렸다. 이 와중에 먼 바다를 돌아온 드 바라의 함대가 재빨리 체서피크만으로 진입해 물자와 대포등을 육군에게 전달하고 드 그라스의 함대와 합류했다. 이로써 드 그라스의 함대는 드 바라의 선단이 합류하며 전열함이 30척이 넘게 되었고 영국함대는 완전히 수적인 열세에 처하게 되었다. 결국 그레이브스는 열세를 인정하고 함수를 돌려 뉴욕으로 철수를 명하였다. 프랑스 함대가 참으로 오랜만에 영국해군을 꺾은 전투였고 바다에서 콘월리스의 군단을 지원할 수 있었던 함대가 철수함으로써 콘월리스군의 운명은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요크타운 포위전과 콘월리스의 항복



9월 14일에 윌리엄즈버그에 도착한 워싱턴이 지휘하게 된 병력은 미국 대륙군 8800명과 프랑스군 7800명을 합쳐 16600명이었다. 여기에 각지에서 모여든 민병 3천명이 합류했다. 요크타운 내에 포위된 콘월리스의 병력은 영국군 6000여명과 독일용병 1000여명을 합쳐 약 7000이었다. 체서피크만 건너 델라웨어주 글로스터(Gloucester)에 포진한 타를턴이 1000명을 거느리고 있었지만 체서피크만이 프랑스 해군에게 장악된 상황에서 타를턴의 병력은 콘월리스를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비록 진지을 단단히 지어놨다고 하지만 외부의 지원이 끊겨 고립무원이 된 콘월리스의 군은 사실 어떻게 이길 수 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버틸 수 있느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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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크타운 전투에서 싸우는 프랑스군.


부대편성을 마치고 서로 역할을 정한 미/불 연합군은 9월 26일에 추가로 공성무기와 물자를 전달받고 9월 28일에 윌리엄즈버그에서 출발하여 요크타운을 포위한다. 포위군은 넓은 반원의 형태로 요크타운을 포위하고 참호를 파면서 포위망을 좁혀간다. 영국군이 만약 이때 외곽에서 아직 채 집결하지 않은 연합군을 공격하였다면 각개격파 형식으로 많은 피해를 입혀 좀 더 오래 버틸 수도 있었으나 콘월리스는 병력의 집중을 이유로 9월 29일에 대부분의 병력을 시내로 불러들였으며 다만 미/불 연합군을 막기 위하여 일부 병력을 요크타운 밖의 고지에 포진시겼다. 9월 30일에 프랑스군이 요크타운 서쪽방면에 있는 영국군 고지진지를 공격하였으나 많은 사상자를 내고 격퇴되었다. 콘월리스가 병력을 불러들인 이유는 요크타운에 처음 도착하였을 때 클린턴이 5천의 지원군을 약속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콘월리스는 병력을 최대한 아끼려고 하였고 전투 초기에 접전을 피한 것이다.

초전에서 소규모 전투이후 지리한 참호전이 재개되었고 워싱턴의 병사들은 마침내 10월 6일에 요크타운을 정면에서 바라볼 수 있는 평행참호(Parellel Line)를 구축하고, 보유하고 있는 62문의 대포를 이용하여 영국군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콘월리스의 군 역시 62문을 가지고 있었지만 남부에서의 작전중 이동이 잦았기 때문에 많은 수송수단이 요구되는 중포(重砲)가 거의 없었다. 영국군의 중포는 24파운드 1문이 유일하였고 나머지는 이곳저곳에서 잡다하게 끌어모은 중소화포였다. 프랑스는 비록 해군력에서 영국에 뒤질지 몰라도 화포 개발에 상당한 공을 들였으며 이 때문에 프랑스 화포는 성능과 사거리면에서 영국군 포를 압도하였다. 미/불 연합군은 24 파운드 중포만도 30문이었고 추가로 20문의 18파운드 캐논을 가지고 있었다. 아울러 중포이외에도 54문의 박격포를 가지고 있어 영국군이 구축한 방벽을 넘겨 포탄세례를 안겨줄 수 있었다.

드디어 10월 9일에 영국군 진지들에 대한 연합군의 포격이 시작되었다. 포탄은 영국군이 구축한 각 진지는 물론 요크타운 시내 콘월리스의 사령부 근처에도 떨어지면서 영국군의 혼을 빼놓았다. 영국군 포병은 반격하려 하였지만 연합군의 포격은 쉬지않고 계속되었고 그렇지 않아도 부족한 영국군 포들이 파괴되어 영국군은 더욱 심한 열세에 처하게 되었다. 10월 11일에 워싱턴은 제 1 평행참호에서 약 400미터 나간 지점에 다시 평행참호를 구축했는데 이 옆쪽에 영국군이 지키고 있는 고지 2개가 있었기에 이를 차지해야 요크타운에 대한 본격적인 공격을 할 수 있었다. 10월 14일에 워싱턴은 이들 진지에 대한 야습을 감행하였다. 한 곳은 400명의 미군이, 다른 고지는 400의 프랑스 병사들이 공격을 맡았다. 미군의 야습은 완전히 성공하였고 프랑스군 공격은 장애물 때문에 약간의 어려움이 있었으나 이내 고지를 점령하는데 성공하였다. 콘월리스는 위기를 타개하고자 다음 날 미군이 지키는 고지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였으나 프랑스군이 신속하게 구원을 오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미군의 포격은 더욱 심해졌고 그렇다고 하여 프랑스 해군이 지키고 있는 바다로 탈출할 방법도 없었다. 식량도 떨어지고 있었고 계절이 가을로 접어들면서 날씨는 추워지고 있엇다. 콘월리스의 영국군에게 구원의 손길은 없었다. 클린턴이 약속한 5천의 지원병은 끝내오지 않았다. 결국 콘월리스는 패배를 시인하고 10월 17일에 연합군에 항복의사를 전달한다.

콘월리스는 항복을 하면서도 여러 가지 조건을 달아 영국군의 병력을 보존하고자 하였다. 그는 일단 무장해제하고 미국 땅에서는 싸우지 않는 조건으로 일종의 ‘사면’을 요청하였으나 워싱턴은 이에 단칼에 거절하고 영국군이 이제는 포로 신세이며 따라서 무조건 항복할 것을 요구하였다. 10월 19일에 영국군은 요크타운에서 행진대열로 나와 연합군 병사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무기를 모두 내려놓고 항복한다. 이 행렬을 이끈 영국군의 찰스 오하라(Charles Ohara) 준장은 워싱턴 대신 로샹보에게 군도(軍刀)를 내어주는 항복의례를 하고자 하였다. 패자로서 항복할 지언정 ‘반란군’인 미군의 장군보다는 그래도 유럽인에게 항복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로샹보는 오하라의 군도를 받기를 거절하였고 오하라는 할 수 없이 워싱턴에게 군도를 내밀었다. 워싱턴은 오하라의 오만함을 응징하는 차원에서 군도를 받지 않았다. 결국 오하라는 워싱턴의 부장(副將)인 벤자민 링컨에게 군도를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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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월리스의 항복.


이 뒤로도 카리브해와 플로리다, 그리고 당시 미국의 서부 변경이었던 오하이오 지역에서 소규모 전투가 계속되었으나 요크타운에서의 패배는 13주에 대한 영국의 지배가 끝났음을 의미하였다. 클린턴과 콘월리스는 패배에 대한 책임을 놓고 서로를 비난하며 원수가 되었다. 그러나 클린턴은 이미 겁쟁이로 낙인찍혔고 미국과의 전쟁을 그르친 자로 인식되어 그 명예가 땅에 떨어진다. 이와 반대로 콘월리스는 계속하여 군에 남았고 이후 인도로 파견되어 군공을 세운다. 영국에서도 계속되는 전쟁에 사람들이 지쳐갔고 국가재정에 대한 부담도 늘어만 갔다. 사라토가에서 북부의 영국 병력이 꺾였다면 요크타운 전투는 13주 남부에서 영국의 세력이 소멸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뉴욕에 있는 클린턴의 병력은 온전한 편이었지만 이제 기타 병력이 모두 패한 상황에서 클린턴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도 없었다. 아울러 요크타운의 대패 소식이 영국 본국에 전해지면서 전쟁을 주도하였던 노스(Lord North) 내각은 붕괴되었다. 결국 프랑스의 중재로 협상이 열리고 1783년에 파리협상에서 영국이 미국을 국가로 인정하면서 ‘미합중국’이란 나라가 탄생한다. 다음은 파리조약의 10항목 중 제 1항의 내용이다

                                                                      제 1 항

영국의 국왕폐하께서는 다음의 연합된 주들 ― 뉴햄프셔, 매사추세츠 베이, 로드아일랜드와 프로비던스 지역, 코네티컷, 뉴욕, 뉴저지, 펜실베이니아, 델라웨어, 메릴랜드, 노스캐롤라이나, 사우스캐롤라이나, 그리고 조지아 ―을 자유 주권 독립을 겸한 국가로 인정하고 국가로서 합당한 대우를 한다. 그리고 국왕폐하와 그 자(子)와 손(孫)들은 이 연합주들과 각 부분들에 대한 통치와 자산(資産)과 영토상의 권리 일체를 포기한다.

참고문헌: Paul K. Davis, [100 Decisive Battles],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01); Alexander Keyssar, [The Right to Vote: The Contested History of Democracy in the United States], (Basic Books, 2001); Piers Mackesy, [The War for America 1775-1783], (Bison Books, 1993); John C. Miller, [Origins of the American Revolution], (Boston: Little, Brown, 1943); Maurice Matloff (eds.), [American Military History: 1775-1902 - Vol. 1], (Conshohocken: Combined Books, 1996); Thomas Paine, [Common Sense], (Dover Publications, 1997); Max Savelle, [Seeds of Liberty:The Genesis of the American Mind], (Kessinger Publishing, 2005); The Library of Congress 'America During the Age of Revolution, 1764-1775'; National Park Service 'Guilford Courthouse'; National Park Service 'Yorktown'; www.battleofcamden.org 'Documentary History of the Battle of Camden, 16 August 1780';





김성남 | 안보·전쟁사 전문가
글쓴이 김성남은 전쟁이 인간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가지고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미국 UC 버클리 동양학과를 졸업한 후 연세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국제학 석사를 받고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에 진학하여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 [전쟁으로 보는 삼국지], [전쟁 세계사] 등이 있으며 공저로 [4세대 전쟁]이, 역서로 [원시전쟁: 평화로움으로 조작된 인간의 원초적인 역사]가 있다.


발행2012.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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