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노르망디 상륙작전 (5) - 노르망디 상륙 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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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42회 작성일 16-02-07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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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아가리 속으로(Into the Jaws of Death)’ 오마하 해변에 상륙하는 미군들


 


 


목차



목차

1. 노르망디 상륙 작전

2. 노르망디 양측 작전 계획

3. 노르망디 해상 작전

4. 노르망디 공수 작전

5. 노르망디 상륙 개시

6. 노르망디 작전의 결과

1944년 6월 6일 새벽 상륙 작전은 개시되었다. 이날 16만 6천명의 병력이 바다와 하늘로부터 프랑스 땅에 상륙을 하였다. 이중 73,000명은 미군, 61,715 명은 영국군이었으며 21,400명은 캐나다군이었다. 5,000척의 각종 함선과 195,700명의 해군 및 해상 지원 병력이 지원했었다.



오마하 해안-미군의 상륙지점



오마하 해안은 미군1 보병 사단과 2 보병사단이 상륙했다. 정면에는 강한 두 개 사단의 독일군이 기다리고 있었다. 연합군 정보 부서는 폭이 100 킬로 미터나 되는 이 해안을 방어하는 독일군은 원래 독일 716 사단 한개 뿐으로 판단했으나 상륙작전 개시 3개월 전 이 해변은 두 구역으로 양분되어 716사단은 캉 지구(Caen Zone)으로 이동 집중 배치되고 나머지 바이외 지구(Bayeux Zone)에는 새로 편제된 352 보병 사단이 전개되었다. 한 개 사단이 방어하던 지역을 두 개 사단이 배치된 것이다.

최근에 조직된 독일군 352 보병 사단은 소련 ‘해방’ 포로들 과 동부 전선에서 참전했던 독일 고참병과 막 소집한 신병 등으로 잡다하게 구성되어 있었다. 이 신편 사단 장교 중 50%는 전투 경험이 전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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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하 해변의 독일군 포대, 전차 포탑을 벙커에 설치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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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하 해변의 독일군 벙커, 두꺼운 콘크리트로 지은 단단한 요새. OmahaBeachBunker <출처 (cc) Etan J. Tal>


여기에 더해서 오마하 해안은 요새화 공사가 아주 정교하게 되어 있는 곳이었다. 벙커와 기관총 진지, 그리고 박격포 진지들이 해안을 조밀하게 수를 놓았으며 콘크리트를 부어 만든 요새들은 함포사격이나 항공 공격으로 파괴되지 않을 만큼 단단한 것들이었다.

동쪽 해변에 많이 노출된 모래톱으로 해서 상륙정들의 진행이 무척 지장을 받았다. 이 모래톱의 방해로 인해서 많은 상륙정들이 미리 예정했던 해안의 지점에 도달하지 못하고 동쪽으로 밀려 나가서 적 요새 바로 앞에 상륙하는 바람에 첫 1 파의 탱크와 보병 그리고 공병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오마하 해변에 상륙예정이었던 16 량의 전차 중 제대로 상륙한 것은 단 두 량뿐이었다.
공식적인 기록은 오마하 해안에서 첫 10분간에 벌어진 혼란을 이렇게 표시하였다.

상륙정의 상륙 램프가 내려지고 10분이 지난 뒤에 중대는 지휘 통제력을 잃고 무력해져서 작전을 제대로 수행할 수가 없었다. 중대의 전 장교와 부사관들이 모두 전사하거나 부상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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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연이 자욱한 가운데, 상륙 1파가 해안으로 다가가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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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륙정 안의 미군이 해안을 주시하고 있다.


해변에 설치한 상륙 장애물 중에 오직 몇 곳만 제거하여 상륙의 돌파구를 열었지만 많은 상륙정들에게는 혼란을 초래하게 하였다. 독일군은 방어하고 있던 차량 이동 가능 루트를 아예 봉쇄하여서 연합군 차량들은 해안에서 내륙으로 이동할 수가 없었다.

해안을 점령했지만 내륙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던 해안의 연합군은 해안 확보 두 시간 만에 계속 해변으로 밀려드는 상륙부대에게 차량을 적재한 상륙정은 잠시 해상 대기하고 보병만 상륙하라고 긴급 통보하였다. 나중에 원수가 된 오마르 브래드리 장군을 포함한 여러 장군들이 이 해안에 상륙을 하려고 하는 중이었다. 불리한 상황을 본 장군들은 이 해변을 포기할 것을 진지하게 검토하였다

그러나 이런 혼란 속에서 해안에 상륙했던 보병들 소부대들이 여기저기서 모여들고 서로 합쳐서 전투 부대들을 급조했다. 이 급조 부대들은 함포 사격과 생존한 탱크들의 화력 지원에 힘입어 적의 강력한 방어 거점을 사이를 뚫어서 적 후방으로 침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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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하 해변에서 발생한 부상자와 전사자들. 총 5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계속 증원되어 오는 보병들은 이 조그마한 돌파구를 확대해서 드디어 D-day 저녁 해안에 두 개의 작은 교두보를 만들 수가 있었다. D-day의 오마하 해안에서 상륙 총 병력 50,000명중 5,000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이 사상자들 대부분은 상륙 개시 수 시간 만에 발생하였다. 반면에 해안 요새 안에서 방어하던 독일군들에게는 훨씬 가벼운 1,200명의 사상자만 발생하였다.

힘들게 확보했었던 두 개의 교두보는 다음날 추가 병력의 증원에 힘입어 더 크게 확대되었다. 결과로 미군이 해안에서 D-day 첫날 달성하려고 했던 목표는 사흘이나 지난 D+3일에야 달성할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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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하 해변의 D-Day 오후의 모습. 독일군은 해변에 수많은 장애물을 깔아두었다.




프앙테뒤오크(Pointe du Hoc) 해안 -미군의 상륙지점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에 건설된 이곳의 포대(砲臺)는 제임스 얼 루더 중령이 지휘하는 2 레인저 대대에게 파괴 임무가 주어졌다. 그들의 임무는 야간에 미리 침투하여 상륙 직전인 오전 05:30에 로프와 사다리를 타고 절벽 꼭대기에 구축(構築)된 155mm의 해안포를 파괴하는 것이었다. 이 포대는 오마하와 유타 해안의 상륙지점을 동시에 포격할 수 있는 위협적인 능력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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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앙테뒤오크의 지도. 155mm 해안포가 설치되어 있다고 믿어 미군이 공격을 감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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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은 로프와 사다리를 타고 프앙테뒤오크의 절벽을 올라 공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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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레인저 부대가 이틀간의 전투 끝에 프앙테뒤오크 요새를 점령한 모습, 미국기와 독일군 포로의 모습이 보인다.


하지만 공격대는 이 가공할 포가 이미 철거되어서 조금 안쪽의 내륙으로 이동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레인저들은 포대가 비어있자 후방으로 이동하면서 탐색 작업을 벌여 이 포들을 찾아내어 파괴하였다.

그렇지만 포가 있었던 요새의 자리에는 아직 독일군 보병들이 있었으며 비록 포가 없었다 해도 이 포대는 외면할 수 없는 값어치를 계속 지니고 있었다. 만약에 그 빈 포대에 독일 포병 관측 장교가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오마하와 유타의 미군들에게 불의 비를 쏟을 화력을 후방의 포대에서 불러올 수가 있었다.

레인저들은 이틀간이나 유혈적인 전투를 벌여 60%의 병력 손해를 보았지만 이 요새를 점령하였다 점령 뒤 레인저 부대는 본대로 철수하여 합류하였다.



유타 해안-미군의 상륙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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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타 해안에 상륙하는 미군들. 독일군 저항이 적어 쉽게 상륙했다.


유타 해안은 노르망디 상륙지점에서 가장 서쪽에 위치해있었다. 미 육군 4사단이 상륙 공격을 했다, 이 해안 방어 독일군의 저항은 가장 가벼웠다. 상륙한 23,000병력에서 단지 197명만의 인명 손실이 발생했을 따름이다.

유타 해안에 상륙한 4사단 병력들은 강한 조류 때문에 남서쪽으로 휩쓸린 상륙정들이 자신들을 원 상륙 목표에서 상당히 떨어진 곳에 상륙시켰음을 알게 되었다. 이 지역의 독일군 방어는 아주 허술하였다. 상륙부대가 잘못된 지점에 상륙했던 것은 오마하 해안과 같았지만 독일군의 방어 상태는 정 반대였다.

4 사단은 루스벨트 대통령의 아들 루스벨트 준장이 지휘하고 있었다. 그는 자기 사단이 잘못 된 곳에 상륙했음을 알고 지체 없이 선언했다. 이 말은 매스컴을 타고 유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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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타 해안에 교두보를 확보하고 내력으로 진격하는 미군들


“우리는 바로 이 곳에서 전쟁을 시작할 것이다!”

4 보병 사단은 그대로 내륙으로 진공해 들어가서 이미 야간에 후방에 투하 되어있던 101공수 사단의 502와 506 공수연대와 연결될 수가 있었다. 이런 행운은 거의 우연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행운의 덕택에 4사단은 쾌속으로 진격하여 101 공수 사단과 연결하였고 더 나아가 다른 어느 사단보다도 신속하게 내륙으로 깊숙이 진격해 들어갔다. 잘못된 지점에 상륙은 했지만 결과로 본다면 4사단은 거의 완벽한 임무 완수를 했다.



소드 해안- 영국군의 상륙 지점



소드 해안의 상륙 작전은 새벽 03:00에 개시되었다. 상륙과 동시에 소드 해안의 방어시설과 포대에 공중 폭격이 가해졌었다. 해군의 함포 사격지원은 몇 시간 후인 07:30에 시작했다.

상륙 제 1 파는 07:30에 해안에 닿았다. 제 1 파 상륙 부대에는 13/18 후사르(Hussars) 기갑부대 소속의 구축 전차가 다수 있었고 그 뒤를 보병 8여단이 후속하였다. 소드 해안에 상륙한 영국 보병 부대는 비교적 피해를 적게 입어 인명 손실이 크지 않았다. 상륙 직후 전진을 개시한 영국군 상륙 당일 약 8km를 진격했다. 그러나 몽고메리 원수가 상륙과 동시 꼭 점령하라고 지시한 두어 개의 목표 점령에는 실패하였다. 특히 몽고메리가 꼭 점령하라고 지목한 캉(Caen)은 아직도 강력한 독일군의 손아귀에 들어있었다. 이 도시는 그 후 연합군의 되풀이 된 공격에도 불구하고 한 달 넘게 버티어 7월 20일까지도 점령당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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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드 해안에 상륙한 영국군 보병. 강한 독일군 사격에 몸을 낮추고 있다.


두 번째 2 파로 상륙한 부대는 로버트 준장이 지휘하는 제 1 특수 임무 여단의 코만도 부대였다. 이 부대에 자유 프랑스 부대가 배속되어 있었다. 이들은 자기들의 모국 땅에 첫 발을 내디디도록 배려되었다. 1 여단의 상륙은 언론에 보도되어 유명해졌는데 스코틀랜드 백 파이프 연주자인 빌 밀린(Bill Millin)이 선두에서 백 파이프를 연주하며 상륙을 선도했었기 때문이다. 1 여단에게는 위스트르앙(Ouistreham)에 있는 각각의 목표가 부여되어 있었다. 프랑스 군에게는 한 개의 보루(堡壘)와 카지노 점령이 목표로 주어졌다. 영국 코만도에게는 해안을 굽어보는 독일군 포대 점령이 주어진 목표였다. 프랑스 군이 가진 대전차 병기로는 단단하게 지어진 보루를 파괴하기가 거의 불가능했다. 그러나 카지노는 영국 센토 전차의 지원을 얻어 쉽게 점령했다.

영국군은 부여된 독일군 포대를 접근해보니 독일군들은 이미 포들을 챙겨서 다른 곳으로 떠난 후였다. 코만도들은 위스트르앙 지역의 소탕 작전을 보병 부대에게 인계하고 후방의 더 중요한 목표, 즉 공수 낙하한 6 공수사단과 연결하는 목표로 내륙으로 진격하는 본대로 귀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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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드 해안에 상륙 중인 영국군. 사진 앞쪽의 인물이 백파이프를 연주하는 빌 밀린(Bill Millin)이다.




주노 해안 -캐나다군의 상륙지점



주노 해안에는 캐나다군이 상륙하였다. 캐나다 군은 운이 없었다. 이 해안은 요새화 되어 있는 난공불락의 방벽이었다. 155mm 포들의 포대가 두 곳, 75mm 포대가 아홉 곳이었다. 해안은 기관총 진지들과 콘크리트 벙커, 그리고 오마하 해안보다도 두 배나 높은 방벽들이 해안을 뒤덮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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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노 해변에 당도하는 캐나다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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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이어 주노 해변에 상륙하는 캐나다군


캐나다군의 제 1 파는 상륙군 50%의 피해를 입었다. 이 피해는 5 곳의 노르망디 상륙 지점에서 두 번째로 높은 피해였다. 이런 난관에도 불구하고 캐나다 군은 해안에 상륙하여 교두보를 힘들게 확보하였다. 적의 강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캐나다 부대가 교두보를 확보하게 된 것은 탱크들의 괄목할 활약에 힘 입은 바가 컸다, 이들 기갑 부대는 때로는 보병보다 먼저 상륙해서 교두보 확보에 큰 공헌을 했다. 4대의 한 탱크 소대는 따르는 보병부대를 훨씬 앞질러서 돌격해가서 최종 목표에 도달했다가 보병들이 한 명도 후속하지 못한 것을 깨닫고 퇴로 차단을 우려해서 급히 철수하기도 하였다.

주요 목표였던 두 Douvre 레이다 기지는 요새화 되어 있어 며칠 동안 점령하지 못했다가 영국의 코만도 부대가 점령하였다. D-day 저녁까지 약 30,000명의 캐나다 부대가 상륙했으며 이중 선도하는 캐나다 3 보병 사단에게 7일과 8일에 독일 21사단, 12 SS 사단, 그리고 12 히틀러 유겐트 전차 사단 등이 반격해왔지만 격퇴해버리고 다른 해안 상륙부대보다 더 깊이 프랑스 내륙으로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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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군이 주노 해안에서 독일군 포로를 감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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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군이 상륙을 마치고 내륙으로 진군하는 모습




골드 해안- 영국군의 상륙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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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드 해안에 상륙한 영국군 병력이 내륙으로 진격하고 있다.


골드 해안에는 25,000명의 영국군 병력이 영국군 2 군 사령관 마일즈 뎀프시 중장의 지휘로 상륙하였다. 이곳 역시 잘 방어되고 있어 영국군은 상륙 단계에서 4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사상자 발생의 부분적 원인은 자력(自力)으로 물에 떠서 해안에 상륙할 수 있었던 M 4 셔먼 전차의 도착이 늦어진 것과 독일군들이 해안 마을을 상륙 저지 방어 시설로 요새화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국군 50 보병 사단은 격전 끝에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고 상륙에 거의 성공했다. 상륙 후 해안을 장악하고 있는 캐나다 부대를 제외하고 진격을 계속해서 그날 오후 바이외(Bayeux)시의 교외에까지 진격하게 된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D-day에 영국군 50보병 사단처럼 그 예정 목표에 근접했었던 부대는 운 좋게 주노 해안에 상륙한 캐나다 부대를 빼놓고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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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드 해안에 상륙하는 영국군 코만도 부대


50사단과 같이 상륙한 47코만도 부대는 코만도 부대중에 제일 나중에 상륙한 부대가 되었다. 그들은 골드 해안의 동쪽 La-Hamel에 상륙하였다. 47코만도 부대에 주어진 임무는 매우 복잡하고 위험한 것이었다. 상륙 후 내륙으로 빠르게 진입해서 오른쪽으로, 즉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16킬로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작은 어촌(Port en Bessin)의 후방을 기습하는 것이었다. 이 작은 어촌은 영국군 전선의 최우측에 있었는데 이곳은 절벽으로 감싸여 있어 대공 방어의 입지적 조건이 우수한 곳이었다. 이 안전한 해안에서 떨어진 유조선에서 송유관을 통해 석유를 육지로 반입하는 터미널이 설치되었다.




김창원 | 전사연구가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시라큐스 경영대학원에서 MBA를 취득했다. 장교로 군 복무, 기갑부대 전차 소대장을 지냈다. ‘울프 독’이라는 필명으로 전사와 역사를 다룬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 국방부 정책·정보 블로그(N.A.R.A.)에 기고하고 있으며, 저서로 [공격 마케팅]이 있다


자료제공

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



발행2012.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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