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나폴레옹의 전성기 - 나폴레옹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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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66회 작성일 16-02-07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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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혁명이 낳은 영웅, 또는 괴물

2. 나폴레옹의 전성기

3. 제국의 불안

4. 유럽의 양쪽 끝

5. 독수리는 내리다

6. 세계사의 행진

나폴레옹 전쟁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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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표
전쟁 주체 프랑스 vs 영국,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 스웨덴, 스페인, 포르투갈
전쟁 시기 1803~1815
전쟁터 유럽 대륙, 카리브해
주요 전투 트라팔가 해전, 아우스터리츠 전투, 예나 전투, 프리틀란트 전투, 바그람 전투, 보로디노 전투, 라이프치히 전투, 워털루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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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팔가의 바다에 해는 지고




아미앵 조약에 따른 영국과의 평화는 처음부터 불안 요인을 품고 있었다. 그 내용에 따라 프랑스는 혁명 이후 획득한 모든 영토의 지배권을 인정받았고, 따라서 그 중 영국군에게 점령되어 있던 영토에서는 영국군이 지체 없이 물러나야 했는데 몰타에서만은 꼼짝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프랑스는 이 명백한 조약 위반을 계속 항의했으나 영국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나폴레옹이 아미앵 조약 직후 튀르크와 맺은 평화협정이 인도 및 이집트에 대한 영국의 이익을 위협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러시아, 덴마크 등 북방 국가들이 영국에 맞서 동맹을 결성했고, 거기에는 나폴레옹의 입김이 작용했으리라는 의심이 다분했다. 나폴레옹은 신대륙에서도 세력을 확장하고 영국을 압박하려고 했다. 상실했던 루이지애나를 1800년에 스페인에게서 되찾고, 1802년에는 처남인 샤를 르클레르를 사령관으로 하는 원정군을 보내 아이티와 뉴올리언스를 점령하도록 했다(하지만 이 원정은 실패했으며, 곧 영국과의 전쟁이 재개되면서 자금의 압박과 미국이 영국과 합세할 위험 때문에 1803년에 루이지애나를 미국에 팔아버리게 된다).

결국 1803년 5월, 영국은 선전포고 없이 프랑스 선박을 나포함으로써 조약을 깨고 전쟁을 재개했다. ‘나폴레옹 전쟁’의 시작 시점을 어디로 볼 것인지는 역사의 난제 중 하나인데, 대체로 이 때를 잡고 있다. 그러나 이후 약 2년 동안은 이렇다 할 전개가 없었다. 나폴레옹에게 이미 여러 번 당한 대륙 국가들이 사태를 관망하는 한편, 영국은 독자적으로 프랑스를 침공할 육군이, 프랑스는 영국 해군에 맞설 해군이 미비했기 때문이다. 특히 프랑스는 7년 전쟁에서의 참패에다 대혁명 시기에 많은 장교들의 망명, 처형, 병사들의 훈련 부족 등이 겹치며 도저히 영국을 넘볼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1804년에 황제가 되었을 뿐 아니라 1805년에 이탈리아의 왕이 됨으로써 오스트리아, 러시아 등을 자극, 끝내 1805년 8월에 제3차 대프랑스 동맹이 이루어지게끔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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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팔가 해전 상황. 붉은색 화살표가 돌격하는 영국 함대. 오른쪽의 푸른색 선박은 프랑스, 검은색은 스페인 선박이다. <출처: (CC)pinpin at Wikipedia.org>


그래도 나폴레옹은 자신만만했다. 2년 이상의 유예 기간 동안 루이지애나를 팔아 받은 돈을 포함한 거액의 군비를 퍼부으며 전력 증강에 힘썼기 때문이었다(하지만 애석하게도, 존 풀턴이 제안했던 증기선, 잠수함, 어뢰 등의 개발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불로뉴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그곳에 영국 침공 작전을 총지휘했다. 해군도 이제는 영국과 맞서볼만 하다고 여겨졌지만, 그래도 진짜 승부는 육군으로 걸 수밖에 없다고 본 그는 프랑스 함대가 영국 함대를 유인하여 붙들어두는 동안 10만의 육군을 영국에 상륙시킨다는 전략을 세웠다. 빌뇌브(Pierre Villeneuve, 1763~1806)가 이끄는 함대는 1805년 봄, 영국 함대를 찾아 대서양을 헤매고 다녔으나 성과가 없었다. 이후 대프랑스 동맹 결성 소식을 들은 나폴레옹은 영국 침공을 일단 포기하고는 불로뉴를 떠나 동쪽으로 갔는데, 그 사이에 빌뇌브는 넬슨(Horatio Nelson, 1758~1805)과 격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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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팔가 해전에서 넬슨이 피격되는 장면.


이집트 원정에서 나폴레옹의 기를 꺾었던 호레이쇼 넬슨은 프랑스 해군이 남부 이탈리아 쪽으로 항진하고 있음을 알고 출격하여 그들을 쫓았다. 1805년 10월 21일, 스페인 남쪽의 트라팔가 곶 앞에서 두 함대는 만났다. 넬슨의 함대는 27척, 프랑스 함대는 33척이었다. 당시의 해전은 아직 갑판에서의 백병전이 남아 있기는 해도 함포 사격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었고, 그것은 군함의 급수에 큰 차이가 없는 이상 더 많은 배를 보유한 쪽이 유리하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넬슨은 함대를 둘로 나누어, 열을 지어 항진해 오는 빌뇌브 함대의 측면 두 곳을 송곳처럼 파고들었다. 프랑스군은 열심히 포를 쏘았으나, 한 줄로 서서 바람을 한껏 받으며 전속력으로 다가오는 영국 배들을 효과적으로 공략하지 못했다. 영국 함대는 곧 프랑스 함대를 세 토막으로 잘라버렸고, 이어서 재빠르게 기동하며 분단된 프랑스 함대를 두들겨 부수기 시작했다. 수적 우위를 살리지 못한 프랑스군은 포술과 실전 경험에서의 열세에다 당황함까지 겹치며 파멸했고, 영국 함대는 단 1척도 잃지 않으며 적선 22척을 격침 또는 나포했다. 비록 넬슨이 난전 중에 저격당해 쓰러졌지만, 이 해전은 영국이 나폴레옹의 군화에 짓밟힐 위험을 뿌리뽑았을 뿐 아니라 나폴레옹 전쟁의 양상을 크게 바꾸었다. 이제 영국 상륙작전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된 나폴레옹은 대륙 봉쇄령으로 영국을 말려 죽인다는 전략으로 생각을 바꾸고, 이를 밀어붙이는 과정에서 스페인, 러시아와 싸울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아우스터리츠의 언덕에 해는 뜬다




바다에서는 좌절했지만, 육지에서는 나폴레옹의 영광이 바야흐로 최고조에 이르고 있었다. 1805년 9월, 오스트리아군이 이탈리아, 바이에른, 티롤의 세 방향에서 약 17만의 병력을 동원한다는 소식을 들은 나폴레옹은 영국 상륙을 위해 해안에 주둔시켰던 22만의 병력(이는 ‘대육군(La Grande Armee)’이라 불렸다)을 이끌고 동쪽으로 진군했다. 세 병력이 합치고, 러시아군과도 합세하기 전에 격파할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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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름 전투 후 나폴레옹에게 항복하는 오스트리아군.


바이에른으로 침공해온 오스트리아군 7만 2천 명은 나폴레옹의 효과적인 기만 전술과 빠른 기동, 그리고 훨씬 앞서는 전투력에 밀려 울름 전투에서 약 6만이 쓰러져 버렸다. 이로써 무방비 상태가 된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은 11월 11일에 함락되었다. 그러나 프란츠 황제(Franz II, 1768~1835)가 이끄는 나머지 오스트리아군은 알렉산드르 1세(Aleksandr I, 1777~1825)의 러시아군과 합류에 성공했고, 그리하여 9만 명의 규모가 된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 앞에서 당장 움직일 병력이 7만에 불과했던 나폴레옹은 트라팔가의 패전과 파리의 소요, 그리고 프로이센마저 적진에 합류할 가능성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잘못하다가는 파멸할지도 모를 위기에서 나폴레옹은 기만전술을 썼다. 일부러 자기 군대의 우익을 약화된 듯 보이고는, 이를 무너뜨리려 덤벼드는 적을 아우스터리츠까지 끌어들인 것이다.

12월 1일, 아우스터리츠 평야에 도착한 연합군은 전장을 내려다볼 수 있는 플라첸 고지에 진을 쳤다. 그것을 바라보던 나폴레옹은 “내일 저녁이 되기 전까지 저들은 내게 굴복할 거야”라고 말했으며, 그 말대로 되었다. 적을 고지에서 끌어내리고 분열시키는 게 관건이라고 본 그는 다시 허허실실의 계략을 써서 자신의 우익이 불안해 보이도록 했다. 다음 날 아침 6시, 계략에 걸려든 러시아군이 고지에서 내려와 공격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러나 허약해 보이던 프랑스군의 우익은 완강히 저항했을 뿐 아니라, 거꾸로 러시아군을 격파하고 분쇄해 버렸다. 이를 지켜보던 나폴레옹은 술트 장군이 이끄는 주력군에게 플라첸 고지로 진격을 명했다. 아침 8시 경, 기록에 따르면 그동안 계속 먹구름 낀 날씨였던 하늘에서 서광이 비치고, “아우스터리츠의 태양이 찬란히 빛났다.” 쏟아지는 아침 햇살 사이로 나폴레옹의 병사들은 함성을 지르며 고지 위로 돌격했고, 허를 찔린 연합군은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결국 고지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이것으로 나폴레옹의 작전은 성공했다. 고지를 빼앗으며 적군을 둘로 분단시키고, 다시 이들을 포위하여 섬멸한다는 이중 포위 작전. 그것이야말로 한니발이 칸나에에서, 카를 12세가 프라우슈타트에서 본보기를 보였으며 얼마 전에는 바로 넬슨이 나폴레옹군을 상대로 트라팔가에서 성공한 작전이었다.

전투는 오전 내내 치열하게 계속되었으나, 오후 들어서는 이미 승패는 결정되고, 연합군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도망치느냐만 남아 있었다. 남쪽 길로 달아나던 병사들은 얼어붙은 호수를 뛰어서 건넜는데, 이를 본 프랑스군의 대포가 불을 뿜자 얼음이 쩍쩍 갈라지며 병사들이 물고기 밥이 되었다. 이 광경에 넋이 나간 남은 병사들은 줄줄이 항복해 버렸다. 연합군 사상자 2만 6천, 프랑스군 사상자 8천 5백. 완전히 기가 죽은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황제는 강화를 요청하려 나폴레옹을 찾아왔으며, 알렉산드르는 돌아가도 좋다는 나폴레옹의 말에 얼른 꽁무니를 빼버렸다. ‘세 황제의 대결’은 이렇게 끝났으며, 평생 거둔 승리 중에도 가장 빛나는 승리에 만족한 나폴레옹은 “병사들이여, 짐은 그대들이 자랑스럽다!”고 연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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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스터리츠 전투.




프리드리히에게 경의를 표하다




12월 20일에 체결된 프레스부르크 조약에서 오스트리아는 기존의 이탈리아 북부를 완전히 포기할 뿐만 아니라 베네치아와 나폴리까지 포기했으며, 독일 지역에서도 바이에른, 뷔르템베르크, 바덴을 독립시키고 나폴레옹의 영향권에 들도록 했다. 그리고 신성로마제국을 프란츠 이후까지 지속시키지 않는다는 데도 합의했다(1806년, 그가 신성로마 황제에서 퇴위함으로써 마침내 천 년 역사의 신성로마는 공식적으로 끝났다). 러시아도 뒤이은 조약에서 시칠리아가 프랑스의 영향권에 드는 데 동의했다. 영국에서는 반나폴레옹주의자 윌리엄 피트 수상이 사망하고 나폴레옹 숭배자로 알려진 폭스가 내각을 맡았다. 이로써 제3차 대프랑스 동맹은 와해되었으며, 나폴레옹은 한시름 놓을 수 있을 듯했다.

그러나 최강의 적, 영국이 아직 바다 건너에 버티고 있었으며, 동쪽에서도 새로운 적이 고개를 들었다. 바로 전통의 육군강국 프로이센이었다. 프레스부르크 조약에서는 프로이센도 참여하여 영국 왕실의 발원지인 하노버를 차지하며, 대신 뇌샤텔과 클레베를 나폴레옹에게 넘기는 조건에 합의했다. 그러나 그것이 영국과의 원치 않던 대립을 불러왔을 뿐 아니라 영토 확장 면에서도 최선이었는지 의문이 남던 가운데, 1806년 7월에 바이에른, 뷔르템베르크, 바덴을 비롯한 친프랑스적인 남서부 독일의 16개 공국이 ‘라인 동맹’을 결성하고 나폴레옹을 동맹의 맹주로 추대하자 베를린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8월에 프로이센은 영국과 손을 잡고는 서쪽으로 군대를 출동시켰다. 여기에 러시아와 스웨덴, 작센도 가담함으로써 제4차 대프랑스 동맹이 이루어졌다.

이에 대항해 16만의 대육군을 이끌고 나선 나폴레옹은 프로이센군과 산발적인 전투 후, 10월 24일 예나에서 본격적인 격돌을 했다. 프로이센군은 세 갈래로 병력을 운용한 반면, 나폴레옹은 여섯 갈래로 운용하면서 훨씬 빠르고 다양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밤을 새워 미리 고지에 집결시켜 둔 대포들이 프로이센군의 머리 위로 끊임없이 불을 뿜었다. 결국 견디지 못하고 퇴각하던 프로이센군은 후방의 아우어슈타트에서 미리 대기 중이던 프랑스군에게 가로막혔다. 프로이센군 7만이 쓰러지고 1만이 포로로 잡혔으며, 장군 1명(브라운슈바이크)이 전사했다. 이로써 7년 전쟁에서 프리드리히 2세의 프로이센군에게 프랑스군이 겪었던 치욕은 깨끗이 청산되었고, 프로이센의 수도 베를린이 나폴레옹에게 떨어졌다. 프리드리히 2세의 무덤을 방문한 나폴레옹은 부하들에게 “모자를 벗게! 이 분이 살아계셨다면 우리는 여기 얼씬도 할 수 없었을 거라네.”라고 말했다. 지형을 최대한 활용하는 대담한 기동전술에 능하며, 솔선수범하는 자세와 검소함으로 얻은 병사들의 신뢰를 또 다른 무기 삼아 더 많은 병력과 싸워 이기곤 했던 프리드리히를 나폴레옹은 누구보다 존경하며 본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국가전략적 판단에서는 프리드리히의 교훈을 배우지 못한다.

프로이센이 손을 들자 작센이 대프랑스 동맹에서 이탈했으며, 북독일의 여러 공국들도 프랑스 편에 붙었다. 이제 남은 것은 러시아였다. 두 군대는 서로의 힘을 조심하며 틈을 엿보다가 해가 넘어갈 때가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격돌했는데, 1807년 2월 7일~8일의 아일라우 전투는 악천후 속에서 양 쪽 다 큰 사상자를 낸 무승부로 끝났다. 하지만 이로써 잘 하면 나폴레옹도 무찌를 수 있겠다고 자신감을 얻은 러시아군은 아우스터리츠를 전후한 신중한 자세를 벗어나 적극적으로 나섰다. 러시아가 나폴레옹을 밀어붙이면 그 자체로 영광일 뿐 아니라, 주저앉은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을 다시 일으킬 수도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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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틀란트 전투.


그러나 6월 14일, 나폴레옹은 프리틀란트에서 러시아를 참패시켰다. 2만 5천의 사상자를 낸 러시아는 기가 껶였고, 알렉산드르 1세는 나폴레옹과의 타협을 결심했다. 6월 25일, 두 사람은 틸지트에서 만나 반영국 동맹을 맺고 유럽의 서쪽은 프랑스가, 동쪽은 러시아가 지배한다는 원칙에 합의했다. 이로써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에게 분할되어 있던 폴란드 는 러시아에 떼어준 일부를 제외하고는 ‘바르샤바 대공국’으로 독립하면서 또 하나의 프랑스 위성국이 되었다. 프로이센은 거액의 배상금과 상당한 영토 상실을 강요당하여, 한동안 중부 유럽의 강국 대접을 받을 수 없는 입장이 되었다. 이것으로 ‘나폴레옹 제국’은 거의 완성된 것처럼 보였다. 오직 칼 한 자루로 세운 제국, 근대세계 최대 최후의 정복국가의 모습이었다.

참고문헌

버나드 몽고메리, [전쟁의 역사](책세상, 2004); 윌리엄 맥닐, [전쟁의 세계사](이산, 2005); P. R. 파머-J. 콜튼, [서양근대사](삼지원, 1985); 김용구, [세계외교사](서울대학교출판부, 2006); 베빈 알렉산더, [위대한 장군들은 어떻게 승리하였는가](홍익출판사, 2000); 이에인 딕키 외, [해전의 모든 것](휴먼앤북스, 2010); 조르주 보르도노브, [나폴레옹 평전](열대림, 2008); 그레고리 프리몬-반즈·토드 피셔, [나폴레옹 전쟁: 근대 유럽의 탄생](플래닛미디어, 2009); 제프리 우텐, [워털루 1815](플래닛미디어, 2007); 윌리엄 위어, [세상을 바꾼 전쟁](시아출판사, 2005); 존 키건, [정보와 전쟁](까치, 2005); 원태재, “러시아 침공 결정과정에 미친 나폴레옹 리더십의 문제점”[군사] 제52호. 2004. 8; 허광운·백두현, “작전술에 영향을 미친 인물 탐구: 나폴레옹, 1 : 작전술의 개념, 전쟁규모의 확대와 전투수행방법의 변화를 중심으로” [군사평론] 제385호. 2007. 2; 백두현, “작전술에 영향을 미친 인물 탐구: 나폴레옹, 2 : 프랑스 군의 개혁, 포병ㆍ전투근무지원의 발전을 중심으로” [군사평론] 제386호. 2007. 4; 이용재, “나폴레옹 : 신화와 반신화의 변주곡”[역사비평] 통권67호. 2004.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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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규진 | 서울교육대학교 교수/역사저술가
글쓴이 함규진은 여러 방면의 지적 흐름에 관심이 많다. 정치학을 전공하여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주로 역사와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썼고, 인물이나 사상에 대한 번역서도 많이 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등 서로 대립되는 듯한 입장 사이에 길을 내고 함께 살아갈 집을 짓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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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2012.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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