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제국의 불안 - 나폴레옹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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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398회 작성일 16-02-07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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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목차

1. 혁명이 낳은 영웅, 또는 괴물

2. 나폴레옹의 전성기

3. 제국의 불안

4. 유럽의 양쪽 끝

5. 독수리는 내리다

6. 세계사의 행진

나폴레옹 전쟁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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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표
전쟁 주체 프랑스 vs 영국,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 스웨덴, 스페인, 포르투갈
전쟁 시기 1803~1815
전쟁터 유럽 대륙, 카리브해
주요 전투 트라팔가 해전, 아우스터리츠 전투, 예나 전투, 프리틀란트 전투, 바그람 전투, 보로디노 전투, 라이프치히 전투, 워털루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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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그 승리의 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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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하작전을 수행 중인 나폴레옹의 병사들.


그렇다면 나폴레옹의 군대가 연전연승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먼저 대혁명 이후 형성된 ‘국민의 군대’가 가진 저력을 들 수 있다. 러시아를 제외하면 유럽 최대였던 프랑스의 인구는 그만큼 많은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는데, 전에는 26만이었던 것이 혁명으로 국민개병제가 실시된 후로는 1백만이 넘는 병력이 가능해졌다. 양적인 면에서만 충실해진 게 아니었다. 그때까지 유럽에서는 소수의 상비군만 유지하고 대규모 전쟁은 용병을 모집해서 치르곤 했는데, 애국심이 전혀 없는 용병은 봉급 지급이 늦거나 조금만 전황이 불리해지면 탈주하곤 했다. 그러나 국민의 군대는 내 나라, 내 고향을 지킨다는 신념에 불탈 수 있었다. 또한 문벌 귀족에만 장교를 한정하지 않음으로써 재능과 출세욕이 충만한 인재가 속속 나타났다. 나폴레옹 자신도 그런 예였으며, 그를 보좌한 18명의 원수들 상당수가 평민 출신이었다. 가령 란(Jean Lannes, 1769~1809)은 레겐스부르크 전투에서 상황이 어렵자 “나는 일개 척탄병이었다가 원수까지 되었다. 지금도 나는 병사로서 싸우고 있다!”고 외침으로써 단숨에 사기를 진작시켰다.

그 다음으로 7년 전쟁에서 고배를 마신 프랑스가 이후 시도한 여러 군사개혁 성과를 나폴레옹이 계승하고, 확충했음을 들 수 있다. 먼저 ‘사단’이라는 새로운 편제가 개발되었는데, 종전의 군대가 동원된 지역별 또는 기병, 보병 등 각 병과 별로 부대를 이루고 있던 반면 이 사단은 기병, 보병, 포병, 지원병과 등이 하나로 묶여 독자적인 작전이 가능하도록 한 단위였다. 국방개혁가 기베르(Guibert de Nogent, 1053~1124, 나폴레옹은 청소년 시절 그의 책을 탐독했다)가 1772년에 처음 제시하고, 총재정부의 카르노(Lazare Nicolas Marguerite Carnot, 1753~1823)가 1794년에 편성 계획을 세웠는데 처음으로 실전에 배치된 것은 1796년에 나폴레옹이 이탈리아 원정을 떠날 때였다. 사단은 군대를 여러 갈래로 운용하면서도 독자적 작전이 가능하기에 군대의 한 쪽이 무너져도 다른 쪽이 분전하면 역습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또한 한 병과가 완전히 격파, 차단됨으로써(가령 포병대나 병참지원대) 전체 군대의 작전능력이 심각하게 저하되는 일도 방지했다. 나폴레옹은 전체 병력 규모가 커지면서 1804년 이후 여러 사단을 통합한 군단 편제를 신설했다.

또한 ‘참모부’가 새로 만들어졌다. 참모부는 징병에서 군사훈련, 병력 운용, 무기 생산 등 전쟁 수행에 필요한 제반 업무를 총괄하는 조직으로, 전시만이 아니라 평상시에도 존재하면서 전쟁을 준비함으로써 충실한 준비 태세를 갖출 수 있도록 했다. 프랑스에서는 1776년에 처음 특별참모부가 편성되고, 179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발전했는데 나폴레옹은 이탈리아 원정 때 베르티에(Louis Alexandre Berthier, 1753~1815)를 참모장으로 하는 일반참모부를 설치한 후 계속 운영했다. 프로이센은 1806년에 나폴레옹에게 참패를 당한 다음 군사개혁에 절치부심했는데, 그 일환으로 창설한 일반참모부가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승리하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

병참 부문에도 개혁이 있었다. 식량을 비롯한 군수물자의 보급 문제는 장거리 원정에 항상 따르는 골칫거리였다. 병사들이 각자 식량을 휴대하게 하면 행군 속도가 느려졌고, 보급대를 따로 두면 적에게 보급로가 끊기거나 보급대가 뒤쳐져 버릴 위험이 있었으며, 현지 약탈에 의존할 경우 군기가 문란해지고 주민의 저항이 완강해졌다. 나폴레옹은 병참 임무를 각 군단 및 사단에게 분배하고, 기본적으로 현지 조달에 의존하되 약탈이 아니라 ‘일단 징발해서 사용하고, 그 대금을 나중에 지불한다’는 방식을 채택했다. 덕택에 그의 군대는 빠른 기동력을 발휘하면서 보급로 차단 걱정을 덜 수 있었다. 여기에는 기술 쪽의 개혁도 힘을 보탰다. 나폴레옹은 1800년에 프랑스 최고의 과학기술자들을 모아 ‘산업장려협회’를 세우고 전쟁에 필요한 기술을 개발하도록 했는데, 거기서 나온 가장 성공적인 혁신이 쉽게 부패하는 식품을 오랫동안 보존시키는 병조림, 오늘날의 통조림의 원조였다. 또한 대포 관련 기술도 발전하여, 그리보발(Jean-Baptiste Vaquette de Gribeauval, 1715~1789)이 1780년대에 개발한 더 가볍고 정확하며 기동력이 좋은 대포가 표준 장비로 채택되고, 기마포병대, 근위포병대 등 여러 병과에 의해 일반포탄 말고도 산탄, 유탄, 유산탄 등 여러 기능의 포탄을 쏘는 세계 최강의 포병대가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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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보발이 개량한 대포 설계도.


그리고 나폴레옹의 카리스마와 작전능력을 들 수 있다. “내가 만나본 어떤 인물도 그를 따라갈 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는 최근 1천 년 동안 최고의 천재였다”고 회상한 프랑스 외무장관 탈레랑(Charles-Maurice de Talleyrand-Périgord, 1754~1838, 비록 그는 자신과 프랑스의 이익을 내세워 그를 배신하지만)의 말대로, 그를 직접 만나본 사람은 그의 매력에서 헤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국민의 군대는 한 번 사기가 진작되면 무섭게 싸우지만 반대의 경우에는 ‘억지로 끌려나왔다’는 생각에서 오히려 용병보다 못할 수도 있는데, 나폴레옹은 약졸을 강병으로 바꾸는 마법을 부릴 수 있었다.

또한 그는 전쟁을 전력 대 전력의 승부로 보지 않고, 전력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사용해 적의 싸울 의지를 꺾는 게임으로 생각했다. 그는 기동력을 발휘해 적진을 갈라놓은 다음, 적 전력의 중심지를 찾아내 그 한 점에 전력을 집중하는 식으로 싸웠다. 말하자면 격투기에서 나비처럼 날며, 상대의 급소를 벌처럼 찌르는 식이다. 그렇다면 자신보다 훨씬 덩치가 크고 힘이 센 상대도 무릎꿇릴 수 있는 것이다. 병사들에게 120퍼센트의 힘을 내게 하는 카리스마, 전력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기동력과 집중력의 발휘, 그것은 알렉산드로스나 한니발, 프리드리히 2세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는 명장의 자질이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그들보다 몇 배나 되는 병력을 지휘했고, 병력을 둘이나 셋이 아니라 여섯, 일곱으로 나눈 다음 적시에 하나로 모아 타격하는 신적인 지휘능력을 선보였다. 그런 능력을 극대화하고자 그는 포병을 최대한 활용하는 한편 보병을 종전의 횡대 편성 대신 종대 편성으로 바꾸었는데, 앞 대열은 적의 사격에 그대로 노출된다는 문제점이 있어도 기동력이 향상되고 죽기로 결심하고 싸우는 감투정신이 북돋아졌기에 더 빠르고 강한 돌파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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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사들을 사열하는 나폴레옹.


그래서 나폴레옹은 전 유럽을 상대로 싸우면서도 대승을 거듭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약점은 있었다. 기본적으로 그의 존재 자체가 구체제 왕국들에게는 목에 걸린 가시일 수밖에 없는데, 나폴레옹은 적을 전멸시키기보다는 주전력만을 격파함으로써 당장의 싸울 의지를 꺾는 방식을 되풀이했다. 따라서 적은 일단 그에게 무릎을 꿇었다가도 얼마 지나지 않아 ‘추진력을 얻어’ 다시 일어나 싸움을 걸고는 했다. 또한 그런 나폴레옹의 싸움 방식은 대규모 승부 자체를 피하면서 게릴라전과 청야전술로 압박해 오는 적, 러시아나 스페인 같은 적을 상대로는 효과적일 수 없었다. 또한 프리드리히 2세가 독일 지역만을 전장으로 삼는다는 원칙을 지켰던 반면, 그는 스웨덴의 카를 12세처럼 사방팔방 멀리까지 원정을 다녔으며 따라서 아무리 풍부한 전력이라도 결국 한계에 이르고, 끝날 줄 모르는 전쟁에 국내의 인내심도 바닥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약점 때문에, 그리고 본래의 장점을 갈수록 살리지 못하게 되는 상황 때문에, 나폴레옹은 결국 몰락한다.



계속되는 승리, 영광 뒤의 불안




“왜 1807년의 강력한 제국으로 머물지 않았던가?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이 무기력해졌고 러시아는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다. 유럽 전체가 나폴레옹에게 복종하고 파리를 수도로 섬겼다. (......) 이제 이 인물은 끝없는 자만심을 가지게 되어 새로운 승리를 얻지 않고는 스스로가 하찮게 느껴지게 되었다. 매년 새로운 정복과 날로 더 대담한 시도를 해야만 만족할 수 있었다.”

[나폴레옹 평전]을 쓴 조르주 보르도노브는 이렇게 한탄했지만, 사실 나폴레옹도 틸지트 조약 이후 되도록 전쟁을 피하려고 애썼다. 그는 오스트리아를 달래기 위해 1808년에 에어푸르트에서 메테르니히와 회담했고, 이듬해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일으킨 오스트리아를 격퇴한 다음에는 조세핀 황후(Joséphine de Beauharnais, 1763~1814)와 이혼하고 1810년 3월에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의 마리 루이즈(Maria Luisa, 1791~1847)와 재혼했다. 조세핀이 후계자가 될 아이를 낳지 못하는 점이 기본 문제였고 본래는 러시아 황실에서 신부를 얻으려던 것이었지만, 유럽에서 가장 유서 깊은 가문인 합스부르크 가의 사위가 됨으로써 ‘말뼈다귀’로서의 자신의 평가를 개선하고 오스트리아의 적개심을 누그러뜨리려는 계산도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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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2세(로마왕)를 돌보는 나폴레옹의 두 번째 황후, 마리 루이즈.


그러나 그는 가장 근본적인 적대자, 영국과는 화해할 뜻이 없었다. 1806년 점령한 베를린에서 발표한 칙령에 따른 대륙봉쇄령은 영국뿐 아니라 유럽 각국을 경제적으로 힘들게 했다. 프랑스에서도 상공업자들을 중심으로 불만이 높아졌으며, 봉쇄령을 뚫고 밀무역이 무성해지자 1809년에는 영국과 특별히 무역할 수 있게 해주는 특허장을 발행했는데 그것이 프랑스 상인들에게만 주어진다 하여 나머지 유럽의 분을 돋우었다. 그런 대륙봉쇄령 강요의 연장선상에서 1807년 영국의 동맹자 포르투갈을 제압한 다음, 스페인까지 노려 친형 조세프(Joseph Bonaparte, 1768~1844)를 스페인 왕으로 앉히고, 이에 반발하는 스페인인들을 제압하고자 1808년부터 ‘반도 전쟁’을 벌이게 된다. 그리고 영국이 포르투갈에 상륙하며 반도 전쟁에 끼어들고, 오스트리아가 여기에 호응함으로써 제5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이 일어났던 것이다.

당시의 나폴레옹은 병력을 대거 스페인으로 보낸 상태라서 오스트리아와 싸우기가 버거웠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지휘관들의 오판 등을 이용해 서전에서 힘겨운 승리를 계속 거두고 다시 한 번 빈을 점령했다. 그러나 5월 22일의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에서는 다뉴브 강이 범람하여 다리가 끊기는 바람에 병력이 양분된 상황에서 적의 맹공을 받아 한때 패색이 짙었으나, 가까스로 무승부를 만들 수 있었다. 한편 티롤에서도 반란이 일어났고, 러시아와 프로이센도 언제 적으로 돌아설지 모르는 상황이라 전망은 한때 매우 어두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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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람 전투를 앞둔 나폴레옹과 막료들.


그러나 7월 5일의 바그람 전투에서 나폴레옹은 분전 끝에 승리를 거머쥐었다. 모양은 아우스터리츠와 비슷하게 고지에 포대를 설치하고 중앙 돌파를 시도하는 식으로 이루어졌지만, 그때보다 프랑스군의 결집력은 약했고(모자란 병력을 이탈리아나 독일의 병사들로 채운 상태였다), 오스트리아군의 전투력은 강했다. 나폴레옹은 결국 불세출의 카리스마까지 동원해 승리할 수 있었다. 비가 쏟아지고 벼락이 내리치는 가운데 이 전장에서 저 전장으로, 조금만 불리해 보이는 지점이면 직접 달려가 저격당할 위험도 무릅쓰며 일선에서 병사들을 독려했던 것이다. 아무튼 값을 많이 치른 승리였다. 오스트리아군 3만 5천을 쓰러트렸지만 프랑스군의 사상자도 2만에 달했다. 란과 라잘 원수가 전사했다. 나폴레옹의 옛 연인인 데지레 클라리와 결혼했고, 그 덕에 원수까지 오른 셈이던 베르나도트(Jean Bernadotte, 1818~1844)는 전투 중에 명령을 어기고 제멋대로 후퇴했다. 그를 용서한 나폴레옹은 얼마 후 그를 스웨덴 왕으로 앉혀 주기까지 했으나, 베르나도트는 곧바로 칼을 거꾸로 쥐고 반 나폴레옹 전선에 가담했다. 스페인의 전쟁은 끝이 안 보이고, 티롤의 반란은 일단 진압되었으나 곧 재발했으며, 독일 전역에서 크고 작은 반란이 계속되었다. 프랑스 국내에서조차도 암살 시도와 쿠데타 시도가 적발되고, 탈레랑과 푸셰는 물밑에서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합스부르크 가의 새신랑이 된 나폴레옹은 신혼의 단꿈에 잠길 처지가 아니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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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규진 | 서울교육대학교 교수/역사저술가
글쓴이 함규진은 여러 방면의 지적 흐름에 관심이 많다. 정치학을 전공하여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주로 역사와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썼고, 인물이나 사상에 대한 번역서도 많이 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등 서로 대립되는 듯한 입장 사이에 길을 내고 함께 살아갈 집을 짓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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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2012.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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