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유럽의 양쪽 끝 - 나폴레옹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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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49회 작성일 16-02-07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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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목차

1. 혁명이 낳은 영웅, 또는 괴물

2. 나폴레옹의 전성기

3. 제국의 불안

4. 유럽의 양쪽 끝

5. 독수리는 내리다

6. 세계사의 행진

나폴레옹 전쟁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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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표
전쟁 주체 프랑스 vs 영국,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 스웨덴, 스페인, 포르투갈
전쟁 시기 1803~1815
전쟁터 유럽 대륙, 카리브해
주요 전투 트라팔가 해전, 아우스터리츠 전투, 예나 전투, 프리틀란트 전투, 바그람 전투, 보로디노 전투, 라이프치히 전투, 워털루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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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 전쟁




1808년부터 시작된 ‘반도 전쟁’을 본래 나폴레옹은 별 것 아닌, 변방의 소규모 분쟁 정도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나폴레옹 본인이 나서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고, 1814년까지 이어지면서 나폴레옹 몰락의 중요한 원인이 된다.

스페인은 트라팔가 해전에서 프랑스 함대와 함께 영국과 싸웠을 만큼 1795년 이후 나폴레옹의 충실한 동맹자였다. 카를로스 4세의 총신이자 왕비의 애인이던 고도이(Manuel de Godoy, 1767~1851)는 프랑스의 영향을 받아 국정을 개혁하는 한편 포르투갈을 손에 넣으려 했다. 하지만 그가 주도해 맺은 1807년의 퐁텐블로 조약이 대륙봉쇄령을 강화하는 한편 포르투갈 공략을 빌미로 프랑스군을 스페인에 들이는 결과를 낳자, 스페인인들 사이에서는 날로 불만이 고조되었다. 결국 1808년 3월 17일의 아랑후에스 반란으로 고도이는 실각하고, 카를로스 4세는 페르난도 왕자(페르난도 7세)에게 양위했다.

5월 2일에는 마드리드에서 반 프랑스 민중봉기가 일어나 프랑스 군인들이 살해되었는데, 현지의 프랑스군은 잔혹한 진압에 나서 민중을 학살하고 포로들을 무더기로 총살했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반란 진압의 명목으로 군대를 파병해 아랑후에스를 점령하더니, 페르난도와 카를로스를 가둬 버리고, 꼭두각시 의회를 소집하여 조세프를 새 왕으로 옹립했다. 스페인인들은 바야흐로 민족주의의 불길에 휩싸였다. 스페인 전역에서 무장봉기가 일어나 프랑스 타도와 페르난도 복위를 부르짖었다. 프랑스인은 반도 전쟁으로, 스페인인은 ‘해방 전쟁’으로 부르는 전란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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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8년 5월 3일의 처형.” 반프랑스 폭동을 일으킨 마드리드 시민을 처형하는 장면을 그린 프란시스코 고야의 그림.


봉기에 참여한 스페인의 정규군은 군사력에서 별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이들과 합세한 민중의 지칠 줄 모르는 게릴라전과 영국의 적극적인 지원은 이 전쟁이 좀처럼 끝나지 않도록 했다. 7월에는 뒤퐁 장군이 2만 명의 프랑스군과 함께 항복하고(나폴레옹의 군대가 항복한 일은 사상 처음이었다), 조세프는 마드리드를 버리고 달아나 버렸다. 결국 나폴레옹이 10월에 20만의 병력을 끌고 직접 피레네 산맥을 넘었다. 그는 몇 주 만에 스페인군을 쓸어버렸고, 영국군도 밀어붙여 바다로 다시 내몰았다.

하지만 몇몇 전투에서 이긴다고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뿔뿔이 흩어진 적 병사들은 산속으로 들어가 게릴라전을 계속했고, 프랑스나 중부유럽과 달리 비포장 도로였던 스페인의 길로는 빠른 기동이 어려웠다. 일교차가 극단적으로 큰 날씨도 병사들을 진력나게 만들었으며, 무엇보다 현지 조달식의 보급이 곤란하다는 게 문제였다. ‘선 징발 후 지불’식으로 하려 해도 민족감정에 불타는 현지 주민의 협조를 얻기 힘들었고, 무엇보다 징발할 만한 물자 자체가 별로 없었다. 결국 프랑스군은 야만적인 약탈로 배를 채우려 했으며, 학살과 강간이 잇달았다. 이는 저항의 불꽃을 더욱 거세게 타오르게 하는 땔감이 되었다. 스페인 사제들은 “프랑스인과의 싸움은 성전이다. 프랑스군을 죽이면 살인죄가 되지 않고, 오히려 천국에 가게 된다”고 가르쳤다. 가혹행위는 증오가 증오를 낳으며 점점 심해졌다. 어느 마을에 들어선 영국군은 강간당한 뒤 사지가 잘린 여자들의 시체로 우물이 가득 메워져 있는 광경을 보았다. 다른 마을에는 프랑스 병사들이 토막난 채로 벽에 못박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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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이 이상의 짓을 어떻게?” 고야가 묘사한 전쟁의 참상.


결국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를 상대하기 위해 1809년 2월에 20만의 군대를 남긴 채 파리로 돌아갔으며, 1810년부터 웰링턴의 영국군이 포르투갈에 오면서부터 정규 전투에서도 스페인 쪽이 이기기 시작했다. 1812년 7월에는 마드리드가 웰링턴에게 떨어졌고, 1813년 6월의 비토리아 전투로 ‘스페인 해방’은 결정적이 되었다. 조세프는 맨몸으로 허겁지겁 달아났으며, 페르난도가 다시 왕위에 올랐다. 10월에는 웰링턴이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스로 돌입했다.

반도 전쟁은 나폴레옹에게 중요한 교훈이 될 수 있었다. 전 세계를 상대로 끝없이 전쟁을 할 수는 없는 일이며, 어느 땅에서나 자신이 세운 원칙대로 전투를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프랑스 민족주의로 국민 군대의 사기를 북돋웠다면, 마찬가지로 스페인인이나 독일인, 러시아인도 민족주의에 불타 그에게 맞설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한 것 같았다. 적어도 겉으로는.



러시아 원정




열이면 열, 전쟁사가들은 1812년의 러시아 원정을 나폴레옹 몰락의 직접 원인으로 꼽는다. 서쪽에서 영국, 스페인과 전쟁하고 있으면서 동쪽에서도 광대한 러시아를 상대로 원정을 감행한 일은 무모했으며, 오만과 과대망상이 빚은 결과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은 양면전쟁을 피하기 위해 벌인 일이라고 볼 수도 있다. 나폴레옹은 러시아의 저력을 부담스러워 했으며, 틸지트 이전부터도 늘 러시아와 화친하고 영국하고 싸운다는 방침을 전략의 기본으로 잡고 있었다. 하지만 화해했다가도 어느새 조약을 어기고 공격해오는 러시아에게, 나폴레옹은 아우스터리츠에서 오스트리아를, 예나에서 프로이센을 잠재운 것처럼 한번 결정적으로 본때를 보임으로써 러시아의 도발을 장기적으로 예방해야겠다는 생각도 품고 있었다. 최대한 빨리 러시아를 무릎꿇리고, 영국과의 전쟁에 전념하는 것이다.

러시아는 1807년에서 1810년까지는 북쪽에서 스웨덴, 남쪽에서 튀르크와 싸우느라 프랑스를 돌아볼 틈이 없었고, 영국과도 명목적으로는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이후 스웨덴과 평화조약을 맺고 영국, 튀르크와의 싸움도 멈추면서 나폴레옹이 세운 바르샤바 공국 쪽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이를 못마땅히 여기던 나폴레옹은 1810년에 영국이 대규모의 선단을 발트 해에 출입시키며 대륙봉쇄를 농락하자 분노하며 그 지역 일대를 무력 점령했는데, 그 중에는 러시아 황실과 막 사돈이 된 올덴부르크도 있었다. 여기에 분노한 알렉산드르 1세는 올덴부르크와 기타 독일 지역에서 철수하라고 통보했고, 나폴레옹이 불응하자 더 이상 대륙봉쇄령을 따르지 않겠다고 선언해 버렸다. 그리고 1812년 4월, 영국, 스웨덴과 더불어 대 프랑스 동맹을 맺었다.

나폴레옹은 대육군 35만에 동맹국 및 위성국들이 보낸 32만(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도 각각 3만, 2만을 보냈다)을 더하여 총 67만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러시아로 출발했다. 러시아에는 100만여 병력이 있었으나, 전국에 흩어져 있음을 감안하면 병력 면에서 별로 우위라고 볼 수 없었다. 그러나 1812년 6월에 니멘 강을 건너며 원정이 시작되었으나 2개월이 되도록 전투다운 전투를 해볼 수 없었다. 러시아군은 집결하여 자웅을 겨루기보다 후퇴하며 청야전술로 집과 밭을 불태우기만 했다. 보급대의 식량은 몇 주 만에 거덜났고, 현지 조달이 어려운 점은 스페인 이상이었다. 말먹이도 없어서 군마가 들판의 풀을 뜯다가 중독사하는 일까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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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모스크바에서 물러나는 나폴레옹.


마침내 8월 17일에 스몰렌스크 공방전이, 9월 7일에 보로디노 전투가 벌어졌다. 보로디노 전투는 모스크바까지 빼앗기면 안 된다는 러시아군의 생각에서 치러졌는데, 대포의 일제 사격을 중심으로 한 살육전 끝에 프랑스가 승리했지만 병이 심했던 나폴레옹은 후퇴하는 적군을 쫓을 기력이 없었다. 따라서 러시아군은 상당한 전력을 보전했는데, 숙의 끝에 더 이상의 결전을 하지 않고 청야전술과 동장군의 영향을 두고 보기로 했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9월 15일에 모스크바에 입성했지만, 다음 날 도시 전체가 화염에 휩싸이는 걸 보고 얼이 빠졌다. 그는 러시아인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자신이 마침내 ‘본때를 보여줬는데’ 강화 교섭에 나서기는커녕 자신들의 손으로 소중한 도시를 불사른단 말인가? 그는 폐허가 된 모스크바에서 한 달이나 머물며 알렉산드르의 연락을 기다렸으나 끝내 소식이 없자, 10월 19일에 모스크바에서 철수를 명령했다.

그때 나폴레옹의 군대는 14만 명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진정한 고난은 그때부터였다. 스페인에서처럼 러시아 농민과 병사들이 게릴라전을 벌이며 숙영 중인 병사들을 습격해 죽였다. 잠을 잘 수도 없다. 상상도 못해본 추위에 발가락은 동상에 걸려 떨어져 나간다. 식량은 언제나 부족하다. 병사들은 크렘린에서 노획한 금은보화를 몸에 지고 어그적거리다가 눈밭에 쓰러져 죽었다. 좀비처럼 휘청대며 걷는 그들의 동료들에게는 언덕 위에서 코사크들이 총알 세례를 퍼부었다. 쇠약해진 병사들은 전염병에도 저항하지 못했다. 최소한 6만 이상이 발진티푸스로 끝없는 설사를 하다가 죽어갔다. 11월 말에는 베레지나 강을 건너기 위해 공병대가 3개의 다리를 건설했는데, 가슴팍까지 얼음장 같은 물 속에 잠겨 하는 작업 자체가 수많은 생명을 앗아갔다. 마침내 다리가 완성되었다 싶자 러시아군이 공격해 왔다. 네(Ney) 장군과 빅토르 장군이 후위를 맡아 영웅적인 전투를 벌인 끝에 도하는 성공했지만, 그 뒤로도 강추위와 산발적인 습격은 그칠 줄 몰랐다. 12월 5일, 파리에서 쿠데타가 났다는 소식을 듣고 나폴레옹은 소수의 호위병만 데리고 혼자서 황급히 러시아를 빠져나갔다. 뒤에 남겨진 병사들은 “황제는 우리를 버렸다!”며 통곡했다. 그 숫자는 5만. 러시아로 진입할 때의 십분의 일도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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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퇴하는 프랑스군의 비참한 모습.


베빈 알렉산더(Bevin Alexander)는 예나 전투 이후 기고만장한 나폴레옹이 ‘나는 어떤 야전에서도 승리할 수 있다’고 믿었으며, 전처럼 기동전과 기습전에 의존하지 않고 병력과 화포 사격에만 의존해 전쟁을 치렀다고 보았다. 그러나 러시아 원정의 시점에는 이미 전과 같은 병력 운용은 불가능했다. 끝없는 전쟁으로 대육군이 많이 소모되어 신병이나 타국 병사들을 데리고 싸울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훈련 수준과 사기가 훨씬 떨어지는 집단을 자유롭게 부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 전력이 크게 줄어든 상황에서 스페인에서 불필요한 전쟁을 치르고, 그 교훈을 러시아에서 살리지 못했으며, 근본적으로 영국과 일정한 선에서 타협하지 않고 끝내 전쟁을 고집한 점이 그의 전략적 실책이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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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규진 | 서울교육대학교 교수/역사저술가
글쓴이 함규진은 여러 방면의 지적 흐름에 관심이 많다. 정치학을 전공하여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주로 역사와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썼고, 인물이나 사상에 대한 번역서도 많이 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등 서로 대립되는 듯한 입장 사이에 길을 내고 함께 살아갈 집을 짓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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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2012.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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