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독수리는 내리다 - 나폴레옹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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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18회 작성일 16-02-07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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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목차

1. 혁명이 낳은 영웅, 또는 괴물

2. 나폴레옹의 전성기

3. 제국의 불안

4. 유럽의 양쪽 끝

5. 독수리는 내리다

6. 세계사의 행진

나폴레옹 전쟁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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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표
전쟁 주체 프랑스 vs 영국,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 스웨덴, 스페인, 포르투갈
전쟁 시기 1803~1815
전쟁터 유럽 대륙, 카리브해
주요 전투 트라팔가 해전, 아우스터리츠 전투, 예나 전투, 프리틀란트 전투, 바그람 전투, 보로디노 전투, 라이프치히 전투, 워털루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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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치히에서 엘바 섬까지




나중에 세인트헬레나에서 나폴레옹은 “1813년부터, 나를 비쳐 주던 별이 빛을 잃었다. 고삐가 내 손에서 빠져나갔다”고 회상했다. 러시아 원정으로 나폴레옹의 대육군은 사라져 버렸으며, 그 기회를 놓칠 유럽 제국이 아니었다. 1813년 2월, 프로이센은 러시아와 동맹을 맺고 빼앗긴 프로이센 동부를 점령했다. 영국, 스페인이 가담하여 제6차 대프랑스 동맹이 이루어졌고, 마리 루이즈를 나폴레옹에게 시집보낸 오스트리아는 일단 중재를 맡았으나 나폴레옹이 타협안을 받아들이지 않자 동맹에 합류해 버렸다. 라인 동맹의 친프랑스 독일 공국들도 속속 동맹에서 빠져 대프랑스 동맹에 들어갔다. 나폴레옹은 스페인에서 일부 병력을 불러들이고 제국의 구석구석에서 병력을 긁어모아 24만의 병력을 마련했으나 옛 대육군에 비하면 오합지졸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를 따르던 18명의 원수들도 대부분 죽거나, 배신하거나, 충성심이 예전 같지 않았다.

이에 대항하는 동맹군은 50만이 넘었다. 그리고 나폴레옹의 약점을 최대한 노리는 식으로 공격해 왔다. 즉 병력을 하나로 모아 정면승부를 하기보다 여러 전선에서 번갈아 공격하며 나폴레옹의 병력을 소모시켜 나갔다. 이처럼 전력을 다하지 않는 힘빼기식 공격에도 쩔쩔매는 부하들 때문에 나폴레옹은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며 직접 방어를 해야 했다. 예전처럼 나폴레옹이 적들을 각개격파하지 못하고, 거꾸로 적들이 나폴레옹을 각개격파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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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치히 전투.


그러나 나폴레옹은 포기하지 않고, 라이프치히로 병력을 집결시켰다. 베를린이 위험해지면 동맹군이 결전을 시도하리라 본 것이다. 그 생각은 맞아떨어져서 10월 15일부터 ‘제국민의 전쟁’이라 불리게 될 라이프치히 전투가 시작되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 바르샤바, 작센, 뷔르템부르크군은 약 20만,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스웨덴군은 약 43만이었는데 작센과 뷔르템부르크는 전투 도중에 동맹군 편에 붙었다. 18일까지 전투가 이어지자, 프랑스 편에 남은 병력은 6만에 지나지 않았다. 수없이 죽고, 도망치고, 배신했던 것이다. 나폴레옹은 믿기지 않을 만큼 잘 싸웠다. 그러나 졌다. 그는 19일에 라인 강을 건너 후퇴했고, 라인 강 동쪽은 다시는 프랑스의 땅이 되지 않았다.

프랑스로 퇴각한 나폴레옹의 손에 남은 병력은 8만이 전부였다. 이미 남서부는 웰링턴군에게 유린되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징병을 해보려 했으나, 1812년에서 1814년까지 100만의 병력을 잃은 프랑스 국민은 이번만은 황제를 따르지 않았다. 바야흐로 ‘바람 앞의 촛불’이 된 나폴레옹을 두고 이번에는 동맹군 내부에서 의견이 갈렸는데, 프로이센과 러시아는 프랑스를 사정없이 짓밟기를 바랐던 반면 영국, 오스트리아, 스웨덴은 온건책을 주장했다. 영국은 프랑스가 완전히 무너질 경우 세력균형이 깨질 것을, 오스트리아는 마리 루이즈의 입장을 고려했으며 스웨덴의 베르나도트는 나폴레옹에게서 프랑스 왕위를 물려받을 심산이었다. 이들은 결국 라인 강과 알프스, 피레네 산맥을 기준으로 하는 ‘자연 국경’으로 프랑스의 국토를 축소하는 선에서 강화하자고 나폴레옹에게 통보했으나, 나폴레옹은 거절했다. 나중에서야 받아들이겠다고 마음을 바꾸었지만, 그 사이에 이미 동맹군 측에서는 강경론이 대세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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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위대에게 작별을 고하고 엘바 섬으로 떠나는 나폴레옹.


프로이센과 영국은 네덜란드로, 오스트리아는 스위스로 진입했으며 러시아와 나머지 병력은 라인 강을 건넜다. 18원수 중 하나로 나폴리 왕위에 앉아 있던 뮈라가 배신했고, 덴마크도 그 뒤를 따랐다. 파리에서는 탈레랑이 영국에 있던 루이 18세를 모셔올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나폴레옹이 직접 이끄는 병력도 전투력이 불충분했다. 2월 1일의 라로티에르 전투에서 마몽 장군은 병사들이 소총을 쏘지 않고 들고만 있는 걸 보고 왜 그러느냐고 하니, 소총 쏘는 법도 배우지 못한 채 전선에 끌려왔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 전투는 나폴레옹의 참담한 패배로 끝날 뻔 한 것을 마침 불어닥친 거센 눈보라가 막아주었다. 그래도 이 불세출의 장군은 2월 14일의 보샹 전투, 3월 13일의 랭스 전투 등에서 프로이센군 수 만 명을 쓰러트리는 등 불꽃을 튀겼지만, 이미 대세는 완전히 기운 채였다.

나폴레옹이 파리 외곽에서 싸우고 있는 동안 동맹군은 파리를 급습했고, 3월 31일의 몽마르트르 전투 이후 방어를 맡고 있던 마몽은 항복해 버렸다. 15만의 동맹군 병력이 파리로 물밀 듯 몰려들어갔다. 나폴레옹이 정신없이 달려왔지만 이미 늦어 있었다. 그는 다시 파리 탈환 작전을 짜려 했다. 그러나 4월 3일에 네와 베르티에를 비롯한 원수들이 명령 불복종을 표명하자, 결국 나폴레옹은 퇴위를 선언했다. 4월 12일, 동맹군은 나폴레옹을 엘바 섬의 영주로 임명하고 황제라는 칭호를 보유하면서 프랑스로부터 매년 연금을 받도록 한다는 결정을 통보했다. 그 다음 날, 나폴레옹은 자살을 시도했으나 약효가 떨어진 독약은 심한 고통만 주고 끝났다. 독약에게조차 버림받은 나폴레옹은 4월 20일에 근위대를 열병하고, 마차에 올라 엘바 섬으로 떠났다.



워털루에서 세인트헬레나까지




노병은 사라졌다. 그러나 죽지 않았다. 그리고 그 노병이 나폴레옹일 경우에는, 죽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의미가 있었다. 그는 처음에는 정말 야망을 접은 듯 고향인 코르시카와 이탈리아 반도 사이에 있는 작은 섬, 엘바를 다스리며 회고록을 쓰는 일에 전념하는 듯 했다.그러나 한때 전 유럽을 뛰어다닌 맹장, 전 유럽을 호령했던 최고통치자인 그가 이제 45세의 나이로 은둔 생활에 만족할 수는 없었다. 굴욕적인 평화는 그에게 더없는 고문이었다.

결국 1815년 2월 26일, 나폴레옹은 배를 타고 엘바 섬을 빠져나와 3월 1일에 프랑스에 상륙했다. 여기서 일종의 음모론이 있는데, 영국이 일부러 나폴레옹의 탈출을 유도했다는 것이다. 2월 23일에 엘바 섬의 감시자였던 영국의 캠벨 대령이 자리를 비웠고, 작은 나룻배도 아니고 120명이나 승선할 수 있는 여러 척의 범선인데 출항 준비를 하는 동안 들키거나 저지받지 않았으며, 엘바에서 프랑스까지 가는 동안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렇다. 영국은 프랑스를 다시 한 번 ‘합법적으로’ 유린하기를 바랐으며 따라서 나폴레옹을 이용했다는 해석이다.

어찌됐든 나폴레옹이 돌아왔다는 소식은 전 유럽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프랑스 정부는 그를 막으려 군대를 보냈지만, 가는 족족 옛 상관이자 주군이던 나폴레옹 앞에 고개를 숙이고 총을 거꾸로 잡았다. 그 사이에 동맹군에게 당한 수모, 그리고 복위한 루이 18세가 저지른 실정에 대한 반감도 작용하여, 파리 시민들도 나폴레옹을 환영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3월 19일에 루이 18세는 벨기에로 달아났으며, 그 다음 날 나폴레옹은 파리에 입성했다. ‘백일천하’가 시작된 것이다.

다시 권좌에 앉은 나폴레옹은 자신의 처지에 대해 망상을 품지는 않았다. 예전처럼 독재적으로 프랑스를 다스릴 수도 없고, 예전처럼 유럽을 벌벌 떨게 할 군사력을 갖고 있지도 않다. 그래서 그는 황제의 권한을 줄이고 여러 정파의 입장을 적당히 받아들인 새 헌법 부가조항을 만들어 국민투표에 붙였으며, 유럽 제국에게는 ‘전처럼 여러 나라와 전쟁을 하고, 위성국을 거느릴 생각은 없다. 다만 합법적인 프랑스 통치권을 되찾고 싶었을 뿐이다’라며 화해와 타협을 표명했다. 좀 더 일찍 그런 온건한 자세를 보였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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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링턴.


그러나 당연히 유럽은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빈에서 회담하여 나폴레옹을 “세계 평화의 적”으로 낙인찍고, 그를 타도하기 위해 힘을 모으기로 만장일치로 결의했다. 나폴레옹은 징집령을 내렸다. 60만을 목표로 했지만 어림도 없었고, 그럭저럭 24만이 모였다. 동맹군의 선봉은 영국의 웰링턴(Arthur Wellesley Wellington, 1769~1852)과 프로이센의 블뤼허(Gebhard Leberecht von Blücher, 1742~1819)였다. 그들은 각각 9만, 11만의 병력을 갖고 벨기에에 주둔 중이었다. 나머지 유럽 군대는 아직 전열이 정비되지 않았지만, 80만이 넘을 것으로 보였다. 나폴레옹은 선제공격으로 웰링턴과 블뤼허를 격파하여 위력을 과시하고, 러시아-오스트리아와 협상하든지 계속 공격하든지 하기로 결정했다. 그 상황에서 내릴 수 있는 가장 적합한 판단이었으나, 문제는 그가 이끄는 병력이 옛날처럼 과감한 작전을 펼칠 능력이 없다는 데 있었다. 나폴레옹 자신조차 전보다 자신감이 없었고, 건강도 눈에 보이게 나빠져서 툭하면 휴식을 취하곤 했다. 죽지 않았지만, 사라지지도 않았지만, 노병은 노병이었다.

1815년 6월 16일, 나폴레옹은 리니와 카트르브라 두 곳에서 적을 공격했다. 리니의 블뤼허와 카트르브라의 웰링턴은 패퇴했다. 이로써 서전을 승리로 장식하고 적을 분단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전투가 끝나고 보니 17만으로 출발한 나폴레옹군은 10만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전사도 많았으나 도망자가 더 많았다. 부르몽 장군은 아예 싸워보지도 않고 블뤼허에게 항복했다. 반면 적들은 그리 큰 피해를 입지 않은 채 물러났다.

이 때 전쟁의 승패를 바꿀 수도 있었을 기회가 두 차례 있었는데, 나폴레옹이 그것을 모두 놓쳐 버렸다는 분석이 있다. 첫째는 웰링턴이 카트르브라에 병력을 주둔시키고 자신은 혼자 브뤼셀의 무도회에 가서 한껏 놀다 들어왔는데, 그때 바로 지척까지 진군해 있던 나폴레옹군이 야습을 했다면 웰링턴군을 궤멸시킬 수 있었으리라는 것이다. 또 하나는 블뤼허를 리니에서 끝까지 추격하여 전멸시킬 수 있었고, 그랬더라면 웰링턴만으로는 워털루에서 버틸 수 없었을 터인데, 역시 이해할 수 없는 망설임으로 절호의 기회를 흘려 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차 하면 전투의 승패가 바뀔 수 있었으나 작은 우연이나 판단 착오로 그리되지 않은 예는 아우스터리츠에서도, 예나에서도 있었다. 전쟁이란 그런 것이다. 그리고 여러 가지 예상 밖의 변수가 나타나더라도, 웬만해서는 큰 흐름은 바뀌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만일 나폴레옹이 워털루에서 웰링턴을 털어 버렸다 해도, 다음이나 다음 다음 전투에서 똑같은 운명이 그를 맞이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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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뤼허.


나폴레옹은 브뤼셀로 진군하여 그곳의 웰링턴을 무찌르고 브뤼셀을 점령하고자 했다. 그러나 블뤼허가 끼어들지 않도록 그루쉬에게 일부 병력을 주어 뒤를 쫓게 했다. 그래서 자신은 7만여 병력으로 폭우를 뚫고 브뤼셀로 행군해 갔다. 마침내 6월 17일, 워털루에 태양이 떠올랐다. 본래는 태양이 뜨기 무섭게 나폴레옹의 대포 포탄들이 하늘을 뒤덮으며 영국군 진지로 날아갔어야 했다. 그러나 침묵. 간밤의 폭우 때문에 대포가 진창에 빠지기 때문에 해가 나고 땅이 굳어지기를 기다리기로 했던 것이다. 그래서 공격 시점이 오전 아홉시로 정해졌는데, 그 때에도 포격은 없었다. 나폴레옹 군대에서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지칠 대로 지친 나폴레옹이 잠깐 낮잠에 들었다가 그만 너무 많이 자 버리는 바람에 그렇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확인된 이야기는 아니다). 첫 포격은 열한시가 되어서야 시작되었다. 이 몇 시간 동안 블뤼허는 그루쉬를 일부 병력으로 붙잡아둔 뒤 전속력으로 워털루로 달려오고 있었다.

몽생장 농장을 중심으로 본진을 치고 3개 군단을 앞에 세워서 방어전을 벌이는 영국군에 대해 프랑스군은 크게 두 갈래로 돌파에 나섰다. 우구몽 농장과 라에이상트였다. 그러나 좀처럼 쉽지 않았다. 웰링턴은 보병들을 산개하여 엎드려 있게 함으로써 포격 피해를 줄이고, 병력을 상황에 따라 이리 보내고 저리 보태고 하며 완강하게 저항했다. 11시쯤 시작한 공략이 오후 네 시가 되어서도 먹히지 않자, 격분한 네는 독단적으로 기병대를 출격시켰다. 그러나 이 무모한 돌격은 진지 안에 꽁꽁 숨어 있던 영국군의 집중사격을 받고 허무하게 스러졌다. 오후 다섯 시를 넘어가자 프랑스군의 오른쪽에서 질풍처럼 달려오는 기병대가 일으킨 흙바람이 높이 일었다. 그루쉬인가? 아니었다. 블뤼허였다! 나폴레옹에게 여러 번 패했던 그는 이번에야말로 설욕하려고 벼르고 있었다. 프로이센군이 무통의 6군단을 강타하는 순간, 사실상 전투의 승패는 결정되었다.

하지만 하루 종일 공격받은 웰링턴의 군대도 이젠 기진맥진이 되어 있었다. 방어선의 일각이 허물어지려 했다. 네는 그 기회를 살리고자 마지막 돌격을 위해 근위대 병력을 내달라고 나폴레옹에게 외쳤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자신이 가장 믿고 아끼는 부대를 내주려 하지 않았다. 결국 오후 일곱 시가 되어서야 출격을 허락했지만, 너무 늦은데다 무질서한 돌격이었다. 그새 전열을 정비한 영국군은 돌진해오는 근위대를 침착하게 하나씩 쏘아 떨어트렸다. 나폴레옹군 최정예인 근위대까지 쓰러지는 모습을 보자, 공포가 전 병력을 엄습했다. 그들은 황제를 내버려두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나폴레옹은 포탄이 가까이에 떨어지기 시작했는데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전장에서 죽을 각오를 한 듯했다. 장군들이 그를 억지로 붙들어서 간신히 탈출시켰다. 이렇게 나폴레옹의 야망은 끝장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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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털루 전투.


노병은 다시 수명을 연장했지만, 영원히 사라져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이번 유배지는 대서양의 망망대해 한가운데 있는 세인트헬레나였다. 그리고 전처럼 한 섬의 지배자로서가 아니라, 주거지역 밖으로는 출입도 통제되는 명백한 죄수 신분으로서였다. 나폴레옹은 마지막 순간에 도망쳐서 미국으로 망명할 기회를 놓쳤다. 그리고 4년 7개월 동안 섬에서 살다가, 1821년 5월 5일, 52세의 나이로 숨졌다. “세느강 가에 나를 묻어 주게.” 그 유언은 19년이나 지난 1840년에야 겨우 이루어졌다.

참고문헌

버나드 몽고메리, [전쟁의 역사](책세상, 2004); 윌리엄 맥닐, [전쟁의 세계사](이산, 2005); P. R. 파머-J. 콜튼, [서양근대사](삼지원, 1985); 김용구, [세계외교사](서울대학교출판부, 2006); 베빈 알렉산더, [위대한 장군들은 어떻게 승리하였는가](홍익출판사, 2000); 이에인 딕키 외, [해전의 모든 것](휴먼앤북스, 2010); 조르주 보르도노브, [나폴레옹 평전](열대림, 2008); 그레고리 프리몬-반즈·토드 피셔, [나폴레옹 전쟁: 근대 유럽의 탄생](플래닛미디어, 2009); 제프리 우텐, [워털루 1815](플래닛미디어, 2007); 윌리엄 위어, [세상을 바꾼 전쟁](시아출판사, 2005); 존 키건, [정보와 전쟁](까치, 2005); 원태재, “러시아 침공 결정과정에 미친 나폴레옹 리더십의 문제점”[군사] 제52호. 2004. 8; 허광운·백두현, “작전술에 영향을 미친 인물 탐구: 나폴레옹, 1 : 작전술의 개념, 전쟁규모의 확대와 전투수행방법의 변화를 중심으로” [군사평론] 제385호. 2007. 2; 백두현, “작전술에 영향을 미친 인물 탐구: 나폴레옹, 2 : 프랑스 군의 개혁, 포병ㆍ전투근무지원의 발전을 중심으로” [군사평론] 제386호. 2007. 4; 이용재, “나폴레옹 : 신화와 반신화의 변주곡”[역사비평] 통권67호. 2004.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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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규진 | 서울교육대학교 교수/역사저술가
글쓴이 함규진은 여러 방면의 지적 흐름에 관심이 많다. 정치학을 전공하여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주로 역사와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썼고, 인물이나 사상에 대한 번역서도 많이 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등 서로 대립되는 듯한 입장 사이에 길을 내고 함께 살아갈 집을 짓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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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2012.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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