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비스마르크 해전 - 해상의 대학살, 비스마르크 해전 (1)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댓글 0건 조회 437회 작성일 16-02-07 08:38

본문















14548019199490.png




14548019201881



비스마르크 해전에서 공중 공격을 피하는 일본 수송선. 결국 침몰되었다.


 


 


목차


목차

1. 비스마르크 해전 (1943)

2. 비스마르크 해전 전투 전개

3. 비스마르크 해전의 결과

1943년 3월 2일부터 4일까지 남서 태평양 뉴브리튼 섬과 뉴기니 섬 중간의 비스마르크 해에서 일본 육군 병력 수송 선단과 호위 구축함대가 미군과 호주군의 대규모 항공공격을 받고 전멸하다시피 했었던 해전이 있었다. 수송선 8척이 모두 침몰했고 호위하던 구축함 8척중 4척도 격침당했다. 일본 육군과 해군 그리고 수송선의 민간인 선원 등 총 3,000명이 죽었다. 수상 전투력에 대한 항공 전투력의 우세함이 두드러진 해상 전투였다.

연합군 항공력의 대승리였지만 침몰 뒤 해상에 표류하던 일본 병사들을 항공기는 물론 어뢰정까지 투입하여 몰살시키다시피한, 제네바협정 위반의 비인간적인 전투 행위로서 후세 사가들로부터 두고두고 비판의 표적이 되기도 한 해전이었다. 일본은 이 비스마르크 해전을 잔인무비한 학살로 부르고 있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 중에 일본인들이 저지른 각종 전범 행위가 컸던터라 비스마르크 해전의 문제 있는 군사 행동들은 비교적 조용히 역사의 뒤 안으로 잠적한 상태다.



14548019204642


비스마르크 해전의 지도.
우측의 라바울을 출발하여 좌측의 뉴기니 라에로 이어진 굵은 선이 죽음의 항로다. 뉴기니 섬 아래쪽에 포트모르즈비(Port Moresby)도 보인다.



해전의 배경




1941년 12월 8일. 일본은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해서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 초전에는 기습 효과 덕분에 일본이 연전연승했지만 1942년 미드웨이 해전에서 대패한 뒤 공세가 꺾였었다. 미군은 그 해 9월 솔로몬 군도의 남단 과달카날에서부터 반격을 개시하였다. 과달카날의 쟁탈을 두고 미국과 일본은 육상과 해상에서 5개월간 피나는 전투(과달카날전투)를 벌였지만 결국 일본은 1942년 2월 과달카날에서 철수를 해야했다. 솔로몬 군도의 과달카날에서 철수한 일본은 제 2선 격인 남서쪽 뉴기니(New Guinea) 섬을 중시하게 되었다. 이 섬만은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 일본 군부의 각오였다.

1942년 1월 뉴기니 섬의 북부에 상륙한 일본군은 뉴기니 섬 중앙에 있는 오웬 스탠리(Owen Stanley) 산맥을 넘어 남쪽 해안에 있는 포트모르즈비를 점령하려 했으나 코코다 산로(山路)전투에서 방어하고 있던 호주군과 미군에게 격퇴되었다. 최남단 밀른 만의 상륙작전도 크게 피해만 입고 패배했었다. 과달카날의 승리를 등에 업은 미-호주군은 거세게 반격하여 부나를 탈환하고 북상하여 뉴기니 섬의 일본 거점 라에를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이의 방어를 위해서 절대적인 병력의 증파가 필요하였다.

당시 뉴기니 섬은 서부는 현재의 인도네시아 이리안 자야인 네델란드령 뉴기니였고 동부는 현재의 파푸아 뉴기니로서 당시는 호주 식민지였으며 지상 전투는 호주군이 주력으로서 싸우고 있었다.



14548019207119



유류를 수송하던 겐부마루가 불타고 있다.



양군의 전략




뉴기니 전선에 병력의 증파는 인접 뉴브리튼 섬의 라바울이 출발항이 되었다. 일본이나 중국 대륙에서 파견 된 병력들은 일단 라바울에 이동, 집결하였다가 연합군의 공군력이 제압하고 있던 위험한 비스마르크 해를 횡단하여 뉴기니의 북부 해안에 보내지는 해상 수송 방식을 취했다.

비스마르크 해전전부터 뉴기니에 보급품을 보내는 수송작전이 수행되었다. 1943년 1월 5일 라바울을 출발한 일본 수송선단이 뉴기니 섬의 웨와크(Wewak)로 향했다. 수송선단은 5척의 구축함이 호위하는 5척의 수송선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수송선에는 조선의 경성에 사령부가 있었던 일본군 20사단이 승선하고 있었다.

선단을 발견한 연합군은 100기가 넘는 항공력을 동원해서 공격, 한 척을 격침하고 한 척을 해안에 좌초 시켰지만 공격 작전이 무질서하게 행해졌고 폭격의 타격력이 부정확하여 일만여 명의 일본 병력은 대부분 뉴기니 섬에 상륙하였다. 1월 19일과 2 월에는 일본의 고속 수송선들이 뉴기니 웨와크와 라에에 피해없이 대병력을 상륙시켰다. 압도적인 제공권을 누리던 연합군에게는 아주 충격적인 실패였다.



14548019209493



비스마르크 해전 전인 1943년 1월과 2월의 성공적인 일본군 증파.


미국 5공군 사령관 조지 케니(George Kenney 1889~1977) 중장은 틀림없이 다시 나타날 선단만은 격멸하기로 다짐하였다. 케니 소장은 공격 실패 원인이 전략 부재, 훈련 부족, 폭격의 부정확성으로 판단하고 이에 대한 대비를 철저히 했다. 그는 무엇보다도 폭격의 정확성을 높이기 위해서 기존의 고고도나 중고도 폭격이 아닌 저고도 공격을 실시하여야 한다고 판단하고 이를 위한 공격기의 개조(B-25C 기수에 기총 보강 등)와 훈련을 철저히 실시했다. 해전 후에 밝혀 졌지만 폭격 정확성이 어느 정도 있다는 중고도 폭격의 명중율이 7.5%에 불과하였지만 저공 폭격의 명중율은 35%나 되었다.

그의 휘하에서 근무하던 호주 공군의 빌 게어링(Bill Garing 1910~2004) 대령의 조언은 비스마르크 해전 승리에 큰 도움이 되었다. 유럽 전선에서 실전을 경험한 그는 해상 공격의 전문가였다. 게어링 대령은 적에게 타격을 주기 위해서 여러 방면과 고고도와 중고도 저고도 등에서 크고 작은 항공 공격을 쉬지 않고 가해서 적을 혼란시키고 대공체계를 무력화 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비스마르크 해전을 보면 그의 조언이 공격 작전의 핵심이 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14548019213194



비스마르크 해전에서 저고도 투하 폭탄에 선미가 두 동강 나는 수송선 데이요마루. 갑판 위에 수송 병력들을 위한 천막이 설치되어 있다.



일본 수송선단 구성과 출항




1943년 2월 28일. 일본군 6,900명을 수송하는 8척의 수송선과 호위하는 8척의 구축함이 남태평양의 일본군 거점 라바울 항을 출발하였다. 일본 해군 제 81호 작전의 발동이었다. 선단의 목적지는 뉴기니 섬의 라에 항. 3월 3일 도착 예정이었다. 뉴기니 전선에서 호주와 미군의 거센 반격에 고전하고 있는 일본군에게 증원되는 일본 육군 51사단 병력들이었다. 사단장은 나카노 히데미쓰(中野 英光)장군이었다.

병력의 주력인 5,954명은 수송선으로 수송되었다. 수송선들은 아이오마루(愛洋丸 2,716톤), 겐부마루(建武丸 950톤), 교쿠세이마루(旭盛丸 5,493톤), 오이카와마루(大井川丸 6,494톤), 신나이마루(神愛丸 3,793톤), 다이메이마루(太明丸2,883톤), 데이요마루(帝洋丸 6,870톤), 노지마(野島 8,125톤)등 이었다. 8척의 수송선 중 겐부마루 만이 병력이 아니라 수천 드럼의 유류를 적재하고 있었다.

구축함들은 전투함이지만 958명의 병력을 수송했었다. 호위 구축함대 사령관은 기무라 마사토미(木村 昌福)제독이었다. 구축함들은 시라유키(白雪), 도키츠카제(時津風 2,066톤), 유키카제(雪風 2,530톤), 아라시오(荒潮 2,408톤), 아사시오(朝潮- 2,408톤), 아사구모(朝雲 2,408톤), 시키나미(敷波 2,080톤), 우라나미(浦波 2,080톤)의 8척이었다. 수송선단에 육군 병력만 승선한 것이 아니라 해군 수송선 노지마는 400명의 해군 육전대가 승선해 있었다. 육상의 항공전력 100기가 이 수송선단을 엄호하도록 배비(配備)가 되었다.





이미지 목록


1
14548019215529


2
14548019217834


5공군 사령관 조지 C 케니 중장. 제1차 세계 대전시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하여 독일 전투기 2기를 격추하였다. 그가 격추한 독일 조종사중의 한 명은 후에 히틀러 정권의 2인자가 된 국가 원수 헤르만 괴링이다.





기무라 마사토미(木村 昌福) 제독. 비스마르크 해전에서 당하긴 했지만 3개월 뒤 알류샨 열도 키스카섬 철수 작전은 짙은 안개를 이용하여 완벽하게 수행했다.





대기하고 있었던 미군과 호주군






14548019220629



우측의 라바울을 출발하여 좌측의 뉴기니 라에로 이어진 굵은 선이 일본 수송선단의 죽음의 항로다.


기무라 제독은 연합군에게 일본 수송선단이 뉴기니 북부의 마당 항으로 간다는 오판을 하게하고 또 연합군 항공 공격대가 뉴브리튼 섬을 가로질러 비행하게 함으로서 일본 전투기들이 조기 출격할 기회를 가질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북부 해안 코스를 택했다.
수송선단은 시속 7노트(13킬로)의 느린 속도로 항해했었지만 출항 하루 동안은 때마침 솔로몬과 비스마르크 해를 덮친 열대성 폭풍 때문에 미 호주 연합군들에게 발각되지 않았다. 수송선단에게는 천우신조와 같은 악천후였다.

한 설에 따르면, 이 선단은 그 해 1월 수송선단의 항해와 같이 라바울 항이 위치한 뉴브리튼 섬의 남부 해안을 따라 라에로 가려고 했으나 함대 사령관 기무라 소장이 이 악천후를 활용하기 위해서 뉴브리튼 섬 북부 해안을 따라 항해하기로 방침을 바꾸었다고도 말한다.

어쨌거나, 행운의 여신은 일본의 수송선단을 끝까지 지켜주지 않았다.





김창원 | 전사연구가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시라큐스 경영대학원에서 MBA를 취득했다. 장교로 군 복무, 기갑부대 전차 소대장을 지냈다. ‘울프 독’이라는 필명으로 전사와 역사를 다룬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 국방부 정책·정보 블로그(N.A.R.A.)에 기고하고 있으며, 저서로 [공격 마케팅]이 있다


자료제공

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



발행2013.01.22.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