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비스마르크 해전 전투 전개 - 비스마르크 해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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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63회 작성일 16-02-07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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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7기 편대. 미국의 B-17 폭격기는 비스마르크 해전에서 일본군에 폭탄을 퍼부었다.


 


 


목차


목차

1. 비스마르크 해전 (1943)

2. 비스마르크 해전 전투 전개

3. 비스마르크 해전의 결과

전투의 시작 – 3월 2일.




1943년 3월 1일 오후 15:00, 초계 비행을 하던 중폭격기 B-24의 조종사가 짙은 구름 아래로 숨바꼭질하듯 항해하는 수송선단을 발견하였다. 즉시 8 기의 B-17 폭격기가 출격했지만 더 나빠진 악천후로 선단을 발견하지는 못하였다. 다음날 3월 2일 새벽. 호주 공군의 A-20 보스톤 폭격기들 6기가 일본군 항공력을 사전에 감소시키고자 라에의 일본 해군 항공대 기지를 공격하였다.

그날 새벽 전날과 다른 B-24 초계기가 선단을 다시 발견하였다. 오전 10시, 어제와 같이 8기의 B-17기들이 즉시 출격하였고 이어서 추가로 20기가 다시 출격하였다. 폭격기들은 선단을 발견하고 고도 5,000피트 상공에서 1,000파운드 폭탄들을 대량 투하했다.

최초의 중폭격기 편대들은 병력 1,200명을 수송하던 교쿠세이마루를 격침하고 다른 두 척의 수송선 데이요마루와 노지마를 대파시켰다. 일본 구축함 유키카제(雪風)와 아사구모(朝雲)가 해상에서 표류하던 950명의 일본군을 구조하였다. 속도가 빠른 두 구축함들은 구조한 병력을 싣고 라에로 직행했다. 두 척은 그날 자정에 라에에 도착하여 병력들을 상륙시키고 다시 함수를 돌려 다음날 아침 선단 호위 임무로 복귀하였다.

두 척의 구축함이 자리를 비운 사이인 3월 2일 저녁 11기의 B-17이 다시 내습하였다. 한 척의 수송선이 경미한 파손을 입었다. 밤이 되자 함대를 미행하는 감시 임무를 호주 공군 11 비행단의 PBY 카탈리나 수륙 양용 정찰기가 미 공군으로부터 인계받았다. 카탈리나는 밤새 선단을 추격하면서 간격을 두고 조명탄과 폭탄을 투하하여 이들을 교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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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공군의 PBY 카탈리나(PBY Catalina) 수륙 양용 비행정.



수송선단에 뿌려진 불의 비 -3월 3일




이날 3월 3일은 사상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해상의 대살상극이 전개되는 날이었다. 죽음의 함정에 들어온 일본 수송선단과 호위함대를 쉴 새 없이 달려든 연합군 항공기들이 난타를 되풀이하여 바닷속으로 수장시키는 대공격이 하루 종일 실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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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3월 2일 뉴브리튼 섬 근해에서 교쿠세이마루가 B-17에 격침되었고 해협을 통과한 선단은 3월 3일 후온 반도 앞바다에서 난타당했다. 후온 반도 근해 라에 앞바다의 일본 수송선단을 공격한 항공기들은
포트모르즈비, 밀른만, 부나 등에서 출격하였다.


3월 3일 오전 3시경 선단은 호주 공군기지가 있는 밀른 만의 출격 가능 거리에 들어왔다. 호주 공군 브리스톨 보포트 뇌격기 8기가 어뢰를 싣고 이륙하였다. 그러나 해상에 악천후가 밀려와 단지 두 기만이 표적을 발견하고 어뢰를 발사했다. 그러나 두 발 다 명중하지 못했다. 수송선단은 이제 후온 반도를 돌아 남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제 목적지 라에까지는 단 80마일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이 해역의 일기는 양호하였다. 포트모르즈비의 굶주린 미국·호주 항공대의 90기가 사냥할 먹잇감이 거리 내로 드디어 들어온 것이다. 이들 조종사들은 수송선단 출현에 대비해서 2월 28일부터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대기하고 있었다.

연합군이 일 수송 선단의 공격 예정 위치는 케이프 와드헌트 해역이었다. 호주 공군 22 비행단의 A-20 기 22기가 먼저 라에의 일본 육상 해군 항공대 기지를 연속해서 강타했다. 라에 기지 공격은 하루 종일 파도처럼 되풀이되었다. 해상에서 접근해오고 있는 일본 선단을 공격할 연합 공군력의 측면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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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B-25 폭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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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A-20 공격기



그날 10시에 해역에 날아온 13기의 B-17들이 중고도에서 폭탄을 투하해서 호위함들과 항해 대형을 맞추어 가고 있던 수송선들을 사방으로 흩어지게 하였다. 투하하는 폭탄에 명중되지 않기 위해서 황급히 대피했던 선단 기동이 그런 결과가 가져왔지만 일본 선단은 다시 대형을 구성하지 못하고 흩어진 상태로 목적지로 각개 약진을 하는 방식을 취했다. 적의 폭격을 융통성 있게 피하기에는 좋은 항해 방법이었으나 각 함선에 장착된 대공화기를 효과적으로 집중 통제할 수가 없어 항공공격에 취약한 항해 대형이었다.

일본 선단은 필사적으로 일본 해군 항공대의 항공 지원을 요청했다. 미쓰비시 제로 전투기들이 상공으로 날아와 공중 엄호를 시작했다. 일본 선단을 격멸하려면 엄호하는 일본 전투기들을 그냥 둘 수 없었다. 연합군은 장거리 비행 능력이 뛰어난 P-38 라이트닝을 출격시켰다. 공중의 첫 번 대격돌에서 제로기 15기 격추가 보고되었고 P-38 3기가 격추되었다(격추된 P-38 조종사들 중에 적기 5기 이상을 격추한 에이스가 두 명이나 있었던 것이 미군에게 충격이었다). B-17 기총수들도 달려드는 제로기 5기를 격추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실제는 그 날 제로기의 손해는 7기가 확인 격추되었고 3기가 대파되었다.

한 B-17기가 제로기의 공격을 받고 대파되어 추락하자 승무원들은 낙하산으로 탈출을 했다. 일본 제로기들은 미군 승무원들이 공중에서 낙하 중일 때는 물론이고 해상에 표류 중일 때도 기총소사를 하였다. 이 만행은 공격 작전을 주도하고 있던 미 5공군 사령관 조지 케니 중장으로 하여금 해상에서 표류하는 일본군을 모두 전멸시키는 공격의 좋은 구실을 주게 된다.

B-25들이 3,000피트와 6,000피트 중고도의 상공에서 감행한 폭격은 일본의 대공화기들이 저고도의 상공을 비워두는 실수를 하게 하였다. 비어있는 저고도에 호주 공군 30 비행단 소속 13기의 보파이터(Beaufighter)들이 수면을 스칠 듯이 파고 들어왔다. 마치 전날 두 발의 어뢰를 발사한 보포트(Beaufort)기와 같은 어뢰 공격의 방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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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파이터(Beaufighter)기. 영국에서 개발한 쌍발 공격기로 단좌 조종석에 엔진이 기수보다 더 앞으로 튀어 나온 독특한 외형을 가졌다. 영하의 북극해에서 열대의 태평양 전선까지 넓은 지역에서 활약하였다. 호주군이 사용하던 보파이터기들은 호주에서 라이센스 생산한 것이다. 어뢰가 주무장인 보포트(Beaufort)기들을 기관포 및 기관총 위주의 무장으로 개량한 기종이다. 기수에 4문의 20mm 기관포, 날개에 6정의 구경 303 기관총 등을 장착, 화력을 강화했다.


보파이터는 보포트를 개량한 기종이라 멀리서 보면 차이를 알아보기가 힘들게 비슷하게 생겼다. 보파이터들은 그 전날 보포트들이 했듯이 마치 뇌격을 할 듯이 어뢰 투하에 최적인 낮은 고도와 코스로 접근했다. 감쪽같이 속은 일본 함선들은 적의 뇌격에 대응하는 전형적인 회피 방법으로 일제히 날아오는 보파이터 쪽으로 함수를 돌렸다. 그런 조함(操艦)행동은 달려오는 어뢰에 노출 면적을 최소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 함수를 돌린 수송선에 덤벼든 것은 어뢰가 아닌 기관포와 기관총의 가공할 타격력을 장비한 보파이터들이었다.

불운했던 수송선들과 호위 구축함들은 선수에서 선미까지 불벼락 같은 기총소사에 내맡겨진 신세가 되었다. 그들은 구축함들을 주요 목표로 노렸다. 구축함이나 수송선들의 대공포좌, 함교,그리고 갑판 위의 수병들과 수송 병력들은 소나기처럼 뿌려지는 총포탄들의 세례를 받았다.

3월 3일 오후 내내 미국과 호주의 공격대가 쉬지 않고 수송선단에 쇄도하였다. 호주 공군의 보파이터들이 소나기처럼 불줄기를 퍼붓고 지나간 뒤에 간발의 차이도 두지 않고 미군의 71비행단 소속 B-25 일곱 기가 750m 상공으로 내습해서 기총소사와 폭탄 투하를 했다.


물수제비 떠 날아오는 폭탄들




이 공격에 이어진 다음 공격은 저공을 노린 것이었다. 405 비행단 소속 다른 6기 B-25들이 마스트 높이의 저공에서 기총소사를 하고 폭탄을 투하했다. 이들은 함선에 직접 폭탄을 투하하지 않고 바로 앞 수면 위에 투하했다. 폭탄은 물수제비처럼 튀어서 함선 위에 명중하거나 측면을 들이 받고 가라앉다가 함선 바로 아래 수중에서 폭발하여 치명상을 주었다. 나중에 역사에서 유명해진, 비스마르크 해전 반도 폭격(反跳爆擊)의 첫 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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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공으로 덤벼드는 폭격기들을 피하는 수송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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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20기의 반도폭격. 1944년 뉴기니아 웨와크 근해



반도폭격(反跳爆撃, skip bombing)은 지중해에서 영국군과 독일군들이 먼저 개발하여 함선 공격시 사용했었다. 태평양 전선의 연합군은 1942년에 이 폭격 방법을 도입했었다. 공격기가 매우 낮은 60-80미터의 저공으로 함선에 육박해서 해면에 폭탄(2발 내지 4발)을 동시 투하하면 이 폭탄들이 물 위에서 튀어 함선에 명중 폭발하는 간접 타격 방법이다. 4-5초의 지연 신관이 장착되어 있고 물위에서 잘 튀도록 폭탄 머리는 뾰족하지 않고 둥글다. 물수제비 폭격이라고도 한다. B-17, B-25, A-20등이 반도폭격 전용 폭격기들로 활용되었다. 비스마르크 해전의 경우와 같이 반도 폭격이 있기 전 호주 공군의 기관포 사격 전문의 보파이터가 선도하면서 일본 함선의 대공포좌를 사전에 제압하는 합동 공격을 하기도 하였다.

연합군 공군은 이 공격 방법을 여러 번 연습하여서 숙달하였었고 포트모르즈비 항에서 종합 예행연습까지 했었다. 일본 구축함대 기함 시라유키(白雪)가 호주 공군의 기총 사격과 미 공군의 폭탄 투하 혼합의 공격 첫 제물이 되었다. 구축함장실에 있었던 모든 인원이 피해를 입었다. 라에 증파 수송선단의 호위함대 사령관 기무라 마사토미(木村 昌福) 제독도 기총탄에 부상을 입었다. 보파이터들은 함교를 주요 목표로 타격하였다, 함선 운용의 중추부를 없애버리기 위해서였다. 반도 폭격으로 투하한 폭탄 한 발이 후부 포탄 저장고에 명중하였다.포탄들은 한꺼번에 폭발하면서 함미가 날아가 버리고 함은 두 동강이 났다. 시라유키는 침몰했다. 부상을 입었던 사령관 기무라 소장은 가까스로 탈출하였다.

각 수송선박의 갑판에는 수송 육군 병력들이 가득하였다. 이들은 빠르게 접근해오는 연합군 공격기들을 피하지 않고 무리 지어 소총으로 대공사격을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폭격과 기총소사로 갑판 위의 병력들은 떼죽음을 당하였다. 생존 승조원들과 육군의 요원들은 구축함 시키나미에 구조되었다. 다른 구축함 도키츠가제[時津風]도 피격을 당해서 대파되어서 침몰했다. 역시 인원들은 구축함 유키카제(雪風)에게 구출되었다. 또 다른 구축함 아라시오(荒潮)는 피격당해서 방향을 잃고 맹목 항해를 하다가 수송선 노지마와 충돌하였다. 아라시오와 노지마의 인원들은 배를 포기하고 피신하였다. 노지마는 후에 재차 항공 공격을 받아 침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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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마르크 해전의 일본군 구축함대 기함 시라유키. 격침되었다.


14기의 B-25가 그날 오후 돌아와서 폭탄 공격을 가했다. 반도 폭격의 반복이었다. 17발의 폭탄이 명중했거나 선체에 피해를 주는 근접 명중을 했다. 14기의 폭격이 지나간 후에 일본 수송선단의 삼분의 일이 침몰했거나 침몰중이었다. 호주 공군의 보파이터들과 미 항공대의 B-25들이 지나간 무대에 미 항공대의 A-20 공격기들이 나타나서 공격을 하고 사라졌다. 연합군의 공격은 숨을 돌이킬 여유를 주지 않았다. B-17기들이 다시 고공으로 스쳐가며 폭탄을 투하했고 그 중 다섯 발이 명중했다. 오후 늦게 미군의 B-25 폭격기들과 호주 공군의 보스톤 폭격기들의 추가 공격이 있었다. 전투기인 P-38들이 폭격에 가담해서 1,000파운드의 폭탄과 연료 탱크를 투하했었다.


비참한 실패로 끝장난 81호 작전




오후 내내 연달아 가해진 항공 공격중에서 압권은 호주 공군의 보파이터들이 행한 기관포 공격(기총소사)이었다. 미 육군 항공대 B-25 폭격기 부조종사 가렛 미들브룩은 그가 지켜 본 호주 공군 보파이터 공격대의 기관포 공격을 이렇게 되살리며 이야기 했다. B-25기들은 보파이터들의 공격을 후속했었기 때문에 앞서 가한 기관포 공격들을 생생하게 지켜 볼 수가 있었다.

“보파이터들은 일본 함선에 육박하자마자 기관포문을 열었다. 기관포탄들이 작열하는 선상에서 회오리 바람에 휘말려 공중으로 솟구치는 막대기들 연상시키는 것들이 사방으로 비산(飛散)하고 있었다. 그 물체들은 공중에서 날아올라 뒤엉키다가 해상으로 떨어졌다. 나는 그것들을 바라보다가 그 물체들이 인간들이었음을 알고 몸서리가 쳐졌다."

호위에 나섰던 구축함 중에 노지마와 충돌하고 침몰한 아라시오에 이어 도키쓰가제, 아사시오들도 침몰하였다.
악몽의 3월 3일, 7 척의 일본 수송선들이 연합군의 쉴 새 없는 연속 공격을 받아 화재가 나거나 침몰되었다.
연합군의 대규모 항공 공격이 가해진 위치는 후온반도 최서단 핀샤펜 항 남서쪽 100km 해역이었다. 일본 해군의 제 81호 작전은 비참한 실패로 끝장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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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해군사에서 가장 유명한 구축함 유키카제. 수없는 해전을 겪고 살아남아 강운함이라 불렸다. 비스마르크 해전에서도 예외 없이 운 좋게 돌아왔다.


나머지 4척의 구축함 시키나미, 유키카제, 우라나미, 아사구모 등은 해상의 생존자들을 구조해서 라바울로 함수를 되돌렸다. 이들 생존 구축함들 역시 만신창이여서 라바울에서 구축함 하쓰유키(初雪)가 지원을 나와서 생존 인원 구조를 도왔다.





김창원 | 전사연구가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시라큐스 경영대학원에서 MBA를 취득했다. 장교로 군 복무, 기갑부대 전차 소대장을 지냈다. ‘울프 독’이라는 필명으로 전사와 역사를 다룬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 국방부 정책·정보 블로그(N.A.R.A.)에 기고하고 있으며, 저서로 [공격 마케팅]이 있다


자료제공

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



발행2013.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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