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라틴 아메리카 전쟁 - 라틴 아메리카의 건설과 식민 사회의 갈등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댓글 0건 조회 391회 작성일 16-02-07 08:38

본문















14548019356251.png




14548019359144



칠레의 독립에 방점을 찍은 마이푸 전투.


목차


목차

1. 라틴 아메리카의 건설과 식민 사회의 갈등

2. ‘프랑스 사상’과 라틴 아메리카의 독립 투쟁

3. 빛을 잃어가는 투쟁

4. 브라질의 독립

5. 에스파냐 식민지의 독립

6. 에스파냐 세력의 최후

라틴 아메리카 전쟁 개요
14548019361456.jpg
개요표
전쟁 주체 에스파냐/아메리카 왕당파 vs 각국 독립세력/공화주의 세력
전쟁 시기 1804-1825
전쟁터 멕시코, 중앙아메리카, 남미 각 지역, 카리브해 일부
주요 전투 마이푸 전투, 카라보보 전투, 보야카 전투, 살타 전투, 카르타헤나 공방전, 오악사카 공방전, 아카풀코, 차카부코 전투, 구아나후아토 전투, 깔데론 전투


두 개의 아메리카




영어에서 'American'은 일반적으로 미국인을 지칭하는 단어로 쓰인다. 미국의 정식 명칭이 'United States of America'이기 때문에 미국인을 뜻하는 인칭(人稱, demonym)으로 정착한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America라는 단어 역시 ‘미국’의 줄임말이 되었다. 그러나 이는 옳다고 할 수 없다. 지리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아메리카’는 알라스카에서 티에라 델 푸에고(Tierra del Fuego)까지의 땅덩어리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이 땅덩어리에 사는 사람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모두 ‘American'이다.

아울러 ‘남아메리카’와 ‘북아메리카’는 두 개의 아메리카를 나누는 일반적인 기준이다. 이 기준에서는 알래스카에서 파나마까지가 ‘북아메리카’로 구분이 되고 콜롬비아 북단에서 티에라 델 푸에고까지가 ‘남아메리카’가 된다. 이는 지극히 단순한 지리적 기준에 의한 구분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북극권에서 남극인근까지 남북으로 길게 뻗어있는 땅을 무슨 기준으로 남북으로 나눈단 말인가? 남북아메리카를 가르는 파나마 남단은 도대체 무슨 기준으로 남북아메리카의 경계로 설정이 되었는지 필자의 생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메리카라고 불리는 땅덩어리가 두 개로 구분되어야 하는 것은 맞다. 그렇지만 그 기준은 지리적인 것이 아니라 문화적이다. 그리고 그 경계선은 미국과 멕시코 국경이다. 미국과 멕시코 국경을 기준으로 아메리카는 두 개의 판이한 문화권으로 나뉜다. 영어를 쓰고 영국에서 기원한 문화가 주축이 되는 앵글로 아메리카(Anglo-America), 그리고 오늘 이야기할 전쟁사의 주인공이자, 이베리아 반도의 문화와 언어가 주축이 되는 라틴 아메리카(Latin America)다.



라틴 아메리카의 건설






14548019363709



17세기에 이르러 아메리카 대륙은 에스파냐(노랑), 포르투갈(초록), 영국(파랑), 프랑스(빨강), 네덜란드(검정)등 유럽 국가들의 각축장이 되었다.


역사적으로 보자면 라틴 아메리카의 건설이 앵글로 아메리카보다 오래되었다. 오스만 제국에 의하여 동방무역의 길이 막히면서 유럽인들은 다른 방향에서의 돌파구를 모색했고 범선을 이용해 먼 바다로 나갔다. 유럽대륙에서 가장 서쪽에 위치해 동방무역에 불리했던 포르투갈이 1415년에 현재 모로코 북쪽의 세우타(Ceuta)를 점령한 후 이를 기점으로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돌아 인도양으로 진입하는 항로를 개발했다. 에스파냐도 1402년에 카나리아 제도를 시작으로 아프리카의 기니에 진출했다. 그리고 1492년에 콜럼버스에 의하여 유럽인들에게 아메리카 대륙의 존재가 알려지면서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간에 신경전이 벌어졌고 결국 1494년에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중재 하에 카보 베르데(Cabo Verde) 제도 서쪽 370해리를 기준으로 유럽 밖의 세상을 양분(兩分)하는 토르데시야스 조약(Tratado de Tordesilhas)을 맺고 본격적인 식민지 건설에 나선다.

1500년에 포르투갈 탐험가들이 브라질에 상륙하였고 1521년에는 에스파냐의 에르난 코르테스가 현재 멕시코를 지배하던 아즈텍 제국을 멸망시켰다. 1532년에는 역시 에스파냐의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카하마르카에서 잉카군을 학살하고 잉카의 황제들은 꼭두각시가 되었다. 1572년에는 에스파냐가 마지막 꼭두각시 잉카(황제)인 투팍 아마루를 죽임으로서 잉카의 황통(皇統)을 끊었고 남아메리카에 대한 본격적인 에스파냐의 식민 지배가 시작되었다.

에스파냐가 초기에 아메리카에 구축한 경제체제는 기본적으로 아메리카의 부(富)를 긁어모아 본국으로 보내는 구조였다. 이에 따라 수많은 아즈텍, 잉카와 함께 원주 문명의 황금유물들이 녹여져서 본국으로 보내졌다. 에스파냐는 이 돈으로 17세기 당시 유럽을 휩쓸고 있던 구-신교간 종교전쟁에 필요한 군대를 유지했다. 그러나 그 비용이 막대해 에스파냐 정부는 신대륙에서 들여오는 엄청난 양의 황금을 가지고도 몇년마다 재정파산을 되풀이했다. 결국 금을 녹여서 본국으로 보내는 식의 식민 경제는 오래 갈 수가 없었다. 새로이 점령한 영토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부를 약탈하기보다 실질적인 지배가 이루어져야 했다. 결국 에스파냐는 원하던 원하지 않던 간에 행정 체제를 구축하고 관리를 파견할 수밖에 없었다. 에스파냐는 대개 그 땅을 먼저 차지하는 인물을 지배자로 만드는 방식으로 늘려나갔다. 이렇게 진행된 아메리카 대륙에서의 영토 확장으로 인해 에스파냐는 18세기 중반에 북쪽으로는 현재 미국의 캘리포니아-오리건주 경계로부터 남쪽으로는 칠레의 산 카를로스(San Carlos)-파타고니아 중부에 이르렀다.



식민지 경제






14548019366009



원주민을 학대하고 있는 엔코멘데로


에스파냐의 관점에서 식민지배에 유리했던 점은 원주민들이 아즈텍과 잉카라는 중앙집권적 국가체제 아래서 생활했다는 것이다. 아즈텍과 잉카는 계급사회였으며 이 때문에 전쟁과 질병에서 살아남은 원주민들은 유럽인들이 새로운 지배자가 되는 상황에 순응했다. 아메리카를 차지한 유럽인들, 특히 에스파냐인들은 아메리카를 경제적으로 지배하기 위한 제도를 만들었는데 그 중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이 ‘엔코미엔다(encomienda)'였다. 이는 일종의 봉건제였는데 귀족이나 군인들에게 넓은 땅과 함께 그 안에 있는 원주민들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권까지 허용하는 제도였다. 다시 말하자면 원주민들로부터 공물을 제공받고 노역에 동원할 수 있는 권리까지 부여받은 것이다. 이들 ‘영주’들은 엔코멘데로(encomendero)라고 불렸으며 이러한 영지를 하사받는 대신 위기시에 왕실을 수호하고 원주민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킬 의무를 지고 있었다. 이들 영주들은 실질적인 사법권(私法權)을 지니고 있었기에 그 영지에 있는 원주민은 실질적으로 노예나 농노였으며 이들에 대한 폭행이나 심지어 살인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에스파냐 본국에서도 그 문제점을 지적하는 사람들이 나올 정도였다.

엔코미엔다 제도의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하여 레빠르티미엔토(repartimiento)라는 제도가 등장하였는데 이는 노동력을 정기적으로 공역(供役)의 형태로 징발하는 제도였다. 아즈텍과 잉카는 제국내의 제후들과 영주들, 그리고 부락들로부터 조공을 받는 시스템을 만들어놓았다. 에스파냐인들은 잉카제국의 공용어인 케추아어로 미타(mita)라고 불린 이 시스템을 참조하여 공역(供役)체제를 만든 것이다. 특히 멕시코와 중남미 지역에서는 원주민들을 각종 광산으로 동원하는데 이용되었다. 해마다 각지의 성인 남자 일곱명 중 한명은 광산으로 불려나가 고된 노동에 시달렸다. 물론 이들은 단순히 노동을 제공하는 형태여서 신분상으로 에스파냐인들의 노예는 아니었으며 자유민이었으나 에스파냐인들이 주는 일거리가 없으면 생활이 어려웠다는 점에서 에스파냐인들에게 실질적으로 복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에스파냐 식민지 모든 지역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었으며 페루지역에서는 엔코미엔다 제도가 보다 오랬동안 지속되었다.

한편 에스파냐의 확장 초기에 점령했던 카리브해에서는 담배와 사탕수수 등의 재배를 위한 장원들이 세워졌다. 유럽에서 건너온 질병에 의해 원주민의 수가 크게 감소하면서 에스파냐 지배자들은 노예상들을 통하여 아프리카에서 흑인노예들을 수입해 부족한 노동력을 충당하였다. 이후 카리브해 지역이외 에스파냐 식민지에서도 흑인노예들을 수입하여 농지, 광산, 공방에서 노동력으로 사용하였다. 이처럼 라틴아메리카는 철저히 수직화된 계급사회였고 그 경제는 본국을 위해 경제력을 생산하는 생산기지이자 본국의 물건을 소화할 수동적인 시장에 불과했다.

초기에는 어느 정도는 반독립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는 총독들과 지사들에 의하여 지배되었으나 식민지 전체에 대한 일관적인 법령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식민지 각지에서 행하여진 판결과 식민지를 관할하는 최고기관인 왕실 인디아 위원회(Real y Supremo Consejo de Indias)의 각종 결정을 모아 1680년에 인디아 법전(Recompilación de las Leyes de Indias)이 만들어지면서 에스파냐의 통치는 더욱 공고해진다.



다양한 혼혈인들의 탄생




라틴아메리카 식민사회의 계서성(階序性)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에스파냐말로 계급을 뜻하는 ‘까스타스(castas)'였다. 유럽 본토에서 들어온 에스파냐인, 전쟁과 질병에서 살아남은 아메리카 원주민,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잡혀온 흑인노예들이 같은 공간에 공존하게 되면서 혼혈인들이 생겨나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모든 제국들이 그렇듯 이 사람들 사이에 등급이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이 등급은 과연 얼마만큼의 에스파냐 혈통을 지니고 있느냐에 따라 결정되었다. 순수 에스파냐 혈통은 당연스럽게 상위계층이자 귀족이 되었고 나머지는 에스파냐인 조상과의 친연성(親緣性) 정도에 따라 사회 속에서의 자리가 결정되었다.

수많은 혼혈의 경우가 있을 수 있지만 에스파냐 식민사회의 구성원들은 크게 아홉으로 나뉠 수 있다. 가장 윗자리를 차지한 것은 에스파냐 백인들로 그 출생에 따라 뻬닌술라레스(Peninsulares, 이베리아 반도 출신이라는 뜻)과 끄리올로스(Criollos, 아메리카에서 태어난 에스파냐 백인)으로 나뉜다. 그 다음에는 에스파냐인과 아메리카 원주민의 혼혈로서 메스티조(Mestizo)와 까스티조(Castizo)가 있다. 메스티조는 순수 에스파냐인과 순수 원주민의 피가 반반씩 섞인 경우이다. 이 메스티조가 에스파냐 백인과 결혼하여 낳은 자식들이 까스티조이다. 즉 까스티조는 ¾ 에스파냐 백인 혈통에다 ¼ 아메리카 원주민 혈통인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다. 메스티조와 원주민이 아이를 낳게 되는 경우 이들은 촐로스(Cholos)가 되었고 에스파냐 남자와 흑인여자 사이에서 낳은 혼혈아들은 물라토(Mulato)가 되었다. 이외에도 원래의 아메리카 원주민인 인디오(Indio)와 아프리카 흑인들과 그들의 후손인 네그로(Negro), 그리고 흑인과 아메리카 원주민의 혼혈인 짬보(zambo)가 있었다.

물론 혼혈인들 역시 다른 혼혈인들과 혼인하여 자식을 낳았고 에스파냐인들은 어떻게 피가 섞였느냐에 따라 명칭을 부여하고 분류하려 들었다. 이러한 ‘분류법’은 통일되어있지 않았지만 가장 잘 알려진 것은 현재 멕시코 테포트조뜨란(Tepotzotlan)에 있는 누에보 에스파냐 총독부 박물관(Museo Nacional del Virreinato)에 전시된 18세기의 까스타스(계급) 분류도에는 혼혈의 유형이 16개로 나뉘어져 있다.



14548019368722



Museo Nacional del Virreinato에 있는 “까스타스(Castas)" 분류도.


에스파냐의 인종분류에서 특기할 만한 점은 이 분류 자체가 18세기에 에스파냐에 소위 ‘계몽사상’이 퍼지면서 인종들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려는 시도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분류법의 골자는 기본적으로 에스파냐인에 가까울수록 우수하며 멀어질수록 열등하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분류가 기존의 차별의식의 연장에 지나지 않음을 증명하여 준다. 아울러 당시 식민사회에서는 이러한 분류법에 따라 계급이 낮을수록 국가에 바치는 것, 노동과 공물 등의 세금이 높았다. 아울러 에스파냐인과 인디오들의 혼혈인들은 만약 에스파냐인들과 지속적으로 결혼하여 인디오 혈통이 옅어질 경우 3대를 지나면 대개 에스파냐인들로 간주되었지만 물라토 유형의 혼혈인 또는 짬보 유형의 혼혈인들은 혼혈의 유형과 관계없이 몇 대를 지나도 에스파냐인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끄리올로스와 본국의 대립




에스파냐 본국에서 뻬닌술라레스들의 지속적인 유입이 이루어지기는 하였지만 이민자들은 그 수가 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이 새로운 땅에 정착하면서 자식을 낳았고 이주민 2세대, 3세대가 등장한다. 이들이 바로 앞에서 언급한 ‘끄리올로스’이다.

라틴아메리카 식민사회의 최고 까스타(casta)로서 끄리올로스는 소수의 뻬닌술라레스들과 함께 귀족계층이 된다. 이들은 넓은 장원이나 광산을 소유하거나 유럽과의 무역을 독점하는 상인들로서 많은 부를 축적하고 에스파냐 식민사회를 종교적으로 장악한 예수회(Jesuits)와 결탁하여 공고한 네트워크를 형성한다. 그들의 부로 식민정부에 막대한 영향을 발휘하였고 돈으로 관직을 사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라틴아메리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는 또 다른 계층은 바로 가톨릭의 사제들이었으며 특히 끄리올로스 특권층의 비호를 받고 있는 예수회의 세력은 막강하였다. 예수회의 교회와 사원들 역시 많은 땅을 소유하게 되었고 식민정부의 관리들이 모든 곳에 신경 쓸 수 없는 상황에서 시골마을과 오지(奧地)에 파고든 교회는 각 공동체를 반(半)자치적인 종교적 영지로 삼다시피 하였다.

그러나 본국인 에스파냐에서 부르봉(Bourbon) 왕가가 등장하면서 제국의 운영에 대대적인 수술을 가하게 된다. 이미 총독에 의하여 다스려지고 있던 누에바 에스파냐(지금의 미국 서부, 멕시코 전체, 온두라스, 니카라과, 엘살바도르, 코스타리카)와 페루(페루, 칠레 북부, 볼리비아)와는 달리 조각조각 나뉘어져 있던 기타 영토를 통합하는 의미에서 이들을 관할하는 총독부들을 신설하게 된다. 현재 파나마와 콜롬비아, 그리고 에콰도르에 이르는 지역은 1717년에 누에보 그라나다 총독부(Virreinaito de Nuevo Granado)에 속하게 되었다. 누에보 그라나다는 6년후 폐지되었다가 1739년에 다시 부활한다. 1776년에는 브라질 남단(南端), 우루과이, 파라과이, 그리고 아르헨티나 북부와 파타고니아를 아우르는 리오 델 플라타 총독부(Virreinaito de Rio del Plata)가 만들어진다. 베네수엘라는 군령권을 가지고 있는 사령장관(capitan)에 의하여 다스려지는 사령부(capitania)가 되었다.

가장 큰 변화는 식민지 통치에 관하여 거의 전권을 가지고 있으면서 정부에 완전히 속하지도 않은 왕실직속기관인 왕실 인디아 위원회의 권한을 축소시킨 것이다. 1764년에 부르봉 국왕 카를로스 3세는 인디아 위원회로부터 행정권을 빼앗고 이를 신설된 정식 행정기관인 국가 인디아 장관부(Secretarío del Estado del Despacho Universal de Indias)에 주어 식민지 행정을 통일한 것이다. 아울러 식민지 관리들을 중앙에서 임명하여 파견하여 식민지 정부에서 과도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끄리올로 관리들을 견제하려 하였다. 이때 에스파냐 식민지 행정의 가장 기초적인 단위는 총독부 밑의 코레기미엔토(corregimiento)였으며 대개 토착 끄리올로 출신 관리들, 즉 꼬레기도레스(corregidores)가 행정권을 맡고 있었다. 카를로스 3세는 꼬레기도르 제도를 폐지하고 대신 인텐덴테(intedente)라는 자리를 만들어 이들을 식민지 각지로 파견하였다. 이들은 총독부에 속한 것이 아니라 국왕직속의 관리들이었고 끄리올로 출신 총독, 사령장관들의 권한을 약화시켰다. 아울러 이들을 통하여 에스파냐 본국정부는 총독부를 거치지 않고 바로 세금을 거둘 수 있게 되었다. 식민지의 고등법원(audencia)들에서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던 끄리올로 사법관들의 수를 줄이고 새로이 사법관들을 임명하였다. 새로이 임명된 사법관과 판사들은 모두 에스파냐 출신의 뻬닌술라레스였다. 합스부르크 왕가시절에 돈으로 사법관이 된 끄리올로들은 갑자기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부르봉 왕가는 아울러 ‘자유무역 칙령’을 내려 몇몇 항구와 그 상인들에게 집중되었던 무역권을 식민지 치하 모든 항구에 개방하였다. 이는 당연히 자신들의 특권을 당연시 하고 있던 끄리올로들의 반발을 불러오게 되었고 뻬닌술라레스 관리들과 끄리올로 상류층간의 갈등이 심해지면서 라틴아메리카 독립의 촉매제가 된다.

참고문헌

[The Cambridge History of Latin America Vol. 3], From Independence to 1870; Archibald Alison, [The History of Europe Vol. 14], From the Commencement of the French Revolution to the Restoration of the Bourbons; Timothy E. Anna , [Spain and the Loss of America]; John Charles Chasteen, [Americanos]; Paul K. Davis, [Besieged: 100 Great Sieges from Jericho to Sarajevo], [100 Decisive Battles]; Marc Ferro, [Colonization: A Global History]; J.B.Trend, [Bolivar and the Independence of Spanish America]




김성남 | 안보·전쟁사 전문가
글쓴이 김성남은 전쟁이 인간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가지고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미국 UC 버클리 동양학과를 졸업한 후 연세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국제학 석사를 받고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에 진학하여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 [전쟁으로 보는 삼국지], [전쟁 세계사] 등이 있으며 공저로 [4세대 전쟁]이, 역서로 [원시전쟁: 평화로움으로 조작된 인간의 원초적인 역사]가 있다.


발행2013.02.14.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