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빛을 잃어가는 투쟁 - 라틴 아메리카 독립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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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79회 작성일 16-02-07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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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목차

1. 라틴 아메리카의 건설과 식민 사회의 갈등

2. ‘프랑스 사상’과 라틴 아메리카의 독립 투쟁

3. 빛을 잃어가는 투쟁

4. 브라질의 독립

5. 에스파냐 식민지의 독립

6. 에스파냐 세력의 최후

라틴 아메리카 전쟁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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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표
전쟁 주체 에스파냐/아메리카 왕당파 vs 각국 독립세력/공화주의 세력
전쟁 시기 1804-1825
전쟁터 멕시코, 중앙아메리카, 남미 각 지역, 카리브해 일부
주요 전투 마이푸 전투, 카라보보 전투, 보야카 전투, 살타 전투, 카르타헤나 공방전, 오악사카 공방전, 아카풀코, 차카부코 전투, 구아나후아토 전투, 깔데론 전투


시몬 볼리바르의 실패




시몬 볼리바르는 발렌시아를 굴복시키는 데 성공하지만 커다란 실수를 저지른다. 군사적 기지로서 구축해놓은 푸에르토 까바요(Puerto Caballo) 시 요새에 가두어놓은 왕당파 포로들에 대한 감시를 게을리 한 것이다. 1812년 6월 30일에 푸에르토 까바요에 갇혀있던 왕당파 포로들은 소홀한 감시를 틈 타 반란을 일으키고 요새의 무기고를 장악하는 데 성공한다. 이 때문에 요새는 포로들의 감옥이 아니라 말 그대로의 요새가 되어버렸고 왕당파 군인들은 무기고의 대포들을 이용해 푸에르토 까바요 시내에 포격을 가하였다. 이 때문에 전세가 뒤집혀 푸에르토 까바요의 공화국군은 궁지에 몰리게 되고 반란이 일어난 지 불과 나흘 만에 시몬 볼리바르는 불과 여덟 명의 동료들과 함께 도망치는 신세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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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자(Libertador) 시몬 볼리바르. 수많은 실패를 겪었으나 강력한 카리스마로 독립세력을 이끌며 남미 각국을 에스파냐 통치로부터 해방시킨다.


이는 다른 도시들의 비협조로 인해 ‘건국’ 작업에 난항을 겪고 있던 미란다의 베네수엘라 공화국에 중대한 타격이 되었다. 미란다는 차별 받는 파르도들에게 공화국군에 종군하면 자유를 주겠다고 약속하고 아울러 왕당파와 에우로페오들에 대한 공개 재판과 처형을 하는 등 공화국에 대한 지지를 살리려 하였으나 대중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지 못한 독립 운동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때까지의 독립 운동은 사실 에스파냐로부터 ‘독립’을 천명하는 독립 운동이라기보다는 잡다한 봉기와 운동의 집합이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누에바 에스파냐(멕시코)에서의 운동은 독립 운동이라기보다는 가난한 민중들에 의한 민란에 가까웠고 미란다의 베네수엘라 건국은 사실 지식인 엘리트에 의한 공화제(共和制) 설립 운동이었다. 미란다가 베네수엘라를 세운 것은 최종적인 목적이라기보다 다만 라틴 아메리카 전체에 공화제를 정립한다는 자신의 이상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을 뿐이었던 것이다.

꼬로(Coro) 시의 에스파냐군 사령관인 몬테베르데(Monteverde)가 카라카스 정부에 반대하는 군을 일으키고 각지에서 공화국에 반대하는 보수파들의 거병이 이어지자 미란다의 공화국 정부는 붕괴 위기에 처하게 된다. 이때 카디즈에서 제정한 헌법에 대한 소식이 들려오고 카디즈 의회가 국왕 페르난도 7세의 이름을 걸고 헌법에 보장된 권리를 약속하자 미란다의 공화국은 거의 유명무실해졌다. 미란다는 더 이상의 저항은 무의미하다 생각하고 몬테베르데와 비밀협약을 통하여 자신이 항복하는 대신 베네수엘라를 무사히 떠날 수 있게 하는 비밀 협상을 시작한다. 이 비밀협상을 알게 된 볼리바르는 분노하면서 미란다를 ‘배신자’로 규정하고 미란다를 사로잡아 몬테베르데에게 넘긴다. 이로써 누에바 그라나다의 독립운동은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다만 볼리바르는 미란다를 넘겨준 대가로 무사히 남미를 떠날 수 있었으며 그가 소유한 장원(莊園)과 막대한 재산에 대한 압류가 취소되었다. 라틴 아메리카를 공화국으로 만들려 하였던 이상주의자 미란다는 카디즈로 압송되어 감옥에서 쓸쓸한 최후를 맞이한다.



본격적인 독립 운동으로의 변화




한편, 페루에 대한 1차 공략에 실패한 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는 조용히 지도부 교체가 이루어진다. 부에노스아이레스 훈타는 이미 스스로를 1810년부터 리오 플라테 연합주국(聯合州國, Provincias Unidas del Rio del Plata)으로 칭하고 있었지만 아직 다른 국가로부터 공식적인 인정은 받지 못한 상태였다. 리오 플라테의 정치를 주무르다시피 하고 있던 베르나르도 리바다비아(Bernardo Rivadavia)란 인물은 극단적 공화주의자였고 성격도 극단적이어서 자신에게 온전히 찬동하지 않는 인물들은 철저히 배제했다. 이때 카디즈 의회를 이탈한 까를로스 알비아르와 호세 산 마르틴이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하면서 합중국의 판세는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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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 5페소 지폐에 그려진 산 마르틴의 초상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명망 있는 집안 출신이던 알비아르는 발이 넓었고 무엇보다 지역유지들에 대한 영향력이 상당하였다. 총독부 군대에서 장교를 지낸 산 마르틴은 군대를 조직하고 장악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준비도 없이 섣불리 민병들을 모아 페루를 공격하였다가 실패한 기존 인사들과 달리 산 마르틴은 도착한 후 불과 수 개월 만에 잘 훈련된 정예 기병대를 만들어냈다. 공화제의 이상에 충실하기는 했지만 리바다비아는 그 이상의 것이 없었다. 1812년 10월에 이르러 알비아르와 산 마르틴은 그 정치력과 군사력을 앞세워 리오 플라테의 정치를 장악하고 그 지역의 독립 운동을 주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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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고 신부의 처형이후 멕시코 봉기군을 이끈 호세 모랄레스.


한편 이달고 신부의 체포와 처형으로 지리멸렬되었던 멕시코의 민중 봉기는 메스티조인 호세 모랄레스의 지휘 하에 다시 살아난다. 이전 목표이던 쿠아우트라에서 힘없이 후퇴한 후 6개월간 남부 시에라 마드레(Sierra Madre del Sur) 산맥 지역에서 게릴라전을 전개하던 봉기군 사령관 모랄레스는 봉기의 거점을 마련하기 위하여 오악사카를 목표로 진군을 시작한다. 오악사카의 주교는 골수 왕당파였고 모랄레스를 악마로 묘사하는 등 봉기군에 대한 적대감을 숨기지 않았기에 봉기군에게 충분히 동기가 될만한 목표였다. 아울러 지역 도로의 교차로에 위치해있고 요새화된 도시라는 점에서 군사적인 이점도 상당했다. 오악사카의 총독부 병력도 이를 알고 있었으나 산에서 ‘도적질’이나 하고 있던 봉기군이 오악사카를 정면공격 하리라고는 생각지도 않고 있다가 모랄레스의 대군이 좁은 산길과 협곡을 통한 2주일의 강행군 끝에 1812년 11월 25일에 오악사카 앞에 나타나자 크게 당황한다. 요새 수비군은 한 때 대포를 쏘면서 강력히 저항하였으나 봉기군 지휘관 중 한 명인 과달루페 빅토리아(Guadalupe Victoria, 본명 José Miguel Ramón Adaucto Fernández y Félix)가 단신으로 성을 둘러 싸고 있던 해자를 건너면서 자신을 따르라고 병사들에게 종용하자 총공격이 이어졌고 오악사카는 불과 두 시간 만에 함락되었다. 모랄레스는 오악사카를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1813년에 자신이 장악하고 있던 지역의 대표들을 모아 칠판싱코 국민회의(Congreso de Chilpancinco)를 소집한다. 여기에서 봉기군은 ‘국민의 생각(Sentimentos de la Nacion)’이라는 문서를 채택하는데 누에바 에스파냐의 독립, 가톨릭의 국교화와 함께 삼권분립을 기본으로 하는 정부의 수립을 천명한다. 봉기가 민란을 벗어나 본격적인 독립 운동과 공화제 운동으로 변모하는 순간이었다. 무엇보다도 노예제의 폐지와 함께 인종을 불문하고 아메리카 태생의 모든 국민은 ‘아메리카노’로서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음을 분명히 하였다. 물론 기존의 보수파와 왕당파들이 이를 용인할 수 없었음은 불문가지였다.

그러나 여기까지였다. 모랄레스의 봉기군은 외부와의 원활한 교통로를 확보하고자 항구도시 아카풀코를 공략하고 점령하는 데 성공하지만 그 과정이 너무 오래 걸렸다. 그 와중에 전직 총독군 사령관인 깔레하스가 총독이 되었고 봉기군이 아카풀코 공략에 붙들려있는 동안 군을 재정비한다. 이전 미구엘 이달고의 봉기군을 격파하고 이달고를 죽이는 데 공이 컸던 깔레하스는 감히 왕실와 에스파냐에 도전하는 ‘천한 잡종’들에게 본 때를 보여주겠다며 모렐로스를 추격한다.



왕정의 복귀와 독립파의 패배




상황은 점차 독립파 세력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우선 지도부를 물갈이하고 재차 페루에 대한 원정에 나섰던 3천의 리오 플라테 군대는 1813년 2월 20일에 살타(Salta)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3400명의 페루 총독부군을 격파하면서 기세를 올린다. 6월에 벌어진 페케레케(Pequereque) 전투에서도 승리를 올리면서 현 볼리비아 지역으로 진격하나 10월 1일 현재 볼리비아에 있는 빌카푸히오(Vilcapugio) 전투에서, 그리고 11월 14일에는 아요후마(Ayohuma) 전투에서 페루 총독부의 호아킨 페주엘라(Joaquin Pezuela) 준장이 이끄는 에스파냐군에게 패하고 ‘북방원정군’이라는 거창한 명칭으로 기세 좋게 출발한 리오 플라테군은 패잔병이 되어 살타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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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타 전투를 묘사한 그림. 살타에서 승리한 리오플레테군은 볼리비아를 공격하지만 참담한 실패로 끝난다.


1814년에는 소위 반도 전쟁(Peninsular War, 이베리아 반도 전쟁)에서 영국-에스파냐 동맹군이 승리하고 프랑스군을 에스파냐에서 완전히 몰아내는 데 성공한다. 잠시 에스파냐왕이 되었던 조셉 보나파르트도 쫓겨나고 페르난도 7세가 에스파냐의 왕이 된다. 페르난도 7세는 카디즈 의회를 마음 속으로 인정한 일이 한 번도 없었고 왕위에 오르자마자 시계를 거꾸로 돌려 이루어진 모든 것을 카디즈 의회에서 이루어진 모든 것을 없애려 했다. 우선 시민의 기본적인 권리를 인정하고 의회민주주의를 골자로 하는 1812년 헌법을 무효화하고 왕실의 권위를 강조했다. 그리고 이베리아 반도 전쟁 당시 사실상의 정부로 기능하였던 카디즈 의회를 반강제로 해산했다. 이와 더불어 페루의 총독부도 본격적인 소탕작전에 나섰고 우선 현 칠레 산티아고에 세워진 훈타에 대한 대대적인 공략에 나선다. 노예제를 폐지하고 왕의 권한을 축소하는 헌법을 제정한 산티아고 훈타는 아일랜드계 이민자의 후손인 베르나르도 오히긴스(Bernardo O'Higgins)의 지휘 하에 페루 총독부/왕당파 군대를 맞아 선전하나 총독부군의 우세한 화력과 병력에 밀리며 고전하다가 1814년 랑카구아(Rancagua) 전투에서 결정적인 대패를 당하면서 산티아고 훈타는 해체되고 에스파냐는 다시 칠레 지역을 ‘회복’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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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코 고야의 페르난도 7세 초상화. 왕위에 복귀한 후 헌법을 폐지하고 왕실의 권위를 재확립하려 하였다.


이에 앞서 1812년 12월에 다시 카르타헤나(Cartegena)에 복귀한 볼리바르는 “카라카스의 한 사람이 누에바 그라나다 시민들에게 보냄‘이라는 제목의 선언문을 통하여 누에바 그라나다의 근본적인 문제는 왕정이라기보다는 부당하게 아메리카 땅에서 아메리카노들을 괴롭히면서 누릴 것은 다 누리고 있는 에우로페오라는 논리를 내세웠다. 미란다나 다른 혁명가들이 내세운 공화주의적 이상은 민중들에게 속된 말로 씨도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간파한 볼리바르는 그의 전쟁을 아메리카노들이 독립을 위하여 에우로페오들을 몰아내는 싸움으로 틀을 짰다. 그리고 에우로페오들에게는 당장 나가지 않으면 그의 군대에 의한 약탈이나 기타 가혹행위가 있어도 책임지지 않는다는 말과 함께 아메리카노들에게는 아무리 과거에 왕당파의 편에서 싸운 일이 있어도 용서한다는 내용이었다. 에우로페오들에 대항하여 죽을 때까지 싸울 것이라는 결의를 과시하였다.

볼리바르의 구호는 민중들의 호응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하고 이에 힘입어 제2 베네수엘라 공화국의 건국을 선포한다. 카르타헤나에서 출발한 볼리바르의 군대는 1813년 2월에 쿠쿠타(Cucuta)를 점령하고 현 베네수엘라 수도인 카라카스를 향해 쳐들어간다. 그리고 8월에는 카라카스에 화려하게 개선하였고 시민들로부터 해방자(Libertador)라는 칭호를 수여 받는다. 그러나 볼리바르의 제2공화국은 미란다의 제1공화국 만큼이나 불안한 기반 위에 있었다. 사실 ’해방자‘가 해방시킨 도시들은 누에바 그라나다의 몇몇 도시에 불과하였고 많은 지역은 아직 왕당파와 보수파들의 수중에 있었다. 왕당파와 보수파들은 베네수엘라 내륙에 있던 일종의 직업적 소몰이꾼들은 야네로스(Llaneros)들을 끌어 들여 공화국군을 공격한다. 야네로스는 아르헨티나의 가우초들과 마찬가지로 말을 타고 목장을 관리하고 인디오들과 싸우는 것이 생활화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말을 타고 싸우는데 익숙하였고 왕당파들에게 강력한 기마 전력을 제공해주었다. 이들은 에우로페오이기는 하지만 수십년간 야네로스로 살아온 토마스 보베스(Tomas Boves)란 인물의 지휘 하에 볼리바르의 군대와 싸웠고 볼리바르는 결국 보수파들에게 패하고 1814년에 제 2 공화국이 무너지면서 다시 도망치는 신세가 된다.

그리고 1815년에는 에스파냐에서 강력한 토벌군을 파견한다. 나폴레옹 전쟁에서 활약했던 노련한 정규병들이 왕당파 세력에 가세하면서 전황은 독립파에게 더욱 불리하게 된다. 결국 1815년 12월에는 베네주엘라 공화파/독립파들의 중심거점이라고 할 수 있는 카르타헤나마저 에스파냐군에 함락이 된다. 이에 앞서 1815년 11월에는 멕시코 봉기군 수장인 모랄레스가 테즈말라카(Tezmalaca)에서 패하면서 멕시코 봉기군은 거의 완전히 붕괴된다. 다만 모랄레스 휘하의 부장(副將)들이었던 과달루페 빅토리아와 비센테 게레로가 일부 병력을 수습하여 봉기세력의 명맥을 간신히 유지한다. 1816년, 에스파냐 식민지의 독립세력과 반왕파들은 거의 완전히 소멸되었고 리오 플라테를 제외한 아메리카의 에스파냐 식민지들은 다시 에스파냐의 통치하에 들어가게 된다.

참고문헌

[The Cambridge History of Latin America Vol. 3], From Independence to 1870; Archibald Alison, [The History of Europe Vol. 14], From the Commencement of the French Revolution to the Restoration of the Bourbons; Timothy E. Anna , [Spain and the Loss of America]; John Charles Chasteen, [Americanos]; Paul K. Davis, [Besieged: 100 Great Sieges from Jericho to Sarajevo], [100 Decisive Battles]; Marc Ferro, [Colonization: A Global History]; J.B.Trend, [Bolivar and the Independence of Spanish America]




김성남 | 안보·전쟁사 전문가
글쓴이 김성남은 전쟁이 인간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가지고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미국 UC 버클리 동양학과를 졸업한 후 연세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국제학 석사를 받고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에 진학하여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 [전쟁으로 보는 삼국지], [전쟁 세계사] 등이 있으며 공저로 [4세대 전쟁]이, 역서로 [원시전쟁: 평화로움으로 조작된 인간의 원초적인 역사]가 있다.


발행2013.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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