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브라질의 독립 - 라틴 아메리카 독립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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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26회 작성일 16-02-07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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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목차

1. 라틴 아메리카의 건설과 식민 사회의 갈등

2. ‘프랑스 사상’과 라틴 아메리카의 독립 투쟁

3. 빛을 잃어가는 투쟁

4. 브라질의 독립

5. 에스파냐 식민지의 독립

6. 에스파냐 세력의 최후

라틴 아메리카 전쟁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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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표
전쟁 주체 에스파냐/아메리카 왕당파 vs 각국 독립세력/공화주의 세력
전쟁 시기 1804-1825
전쟁터 멕시코, 중앙아메리카, 남미 각 지역, 카리브해 일부
주요 전투 마이푸 전투, 카라보보 전투, 보야카 전투, 살타 전투, 카르타헤나 공방전, 오악사카 공방전, 아카풀코, 차카부코 전투, 구아나후아토 전투, 깔데론 전투


포르투갈의 식민지, 브라질




경제적으로나 인구의 규모로나 포르투갈의 식민지인 브라질은 에스파냐의 식민지보다 작았지만 브라질의 사회 구조는 에스파냐 식민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바다에 가까운 인구 밀집 지역에서는 대규모 사탕수수 농장과 목화 농장이 생겨났고 그 노동을 담당하는 것은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흑인 노예와 내륙에서 잡아들인 인디오 노예들이었다. 식민지가 커지기 이전인 1600년대부터 내륙에 대한 탐험이 이루어지면서 수많은 ‘탐험가’들이 내륙으로 파고 들었고 그들이 발견하는 땅마다 포르투갈 국왕의 ‘왕토(王土)’임을 선언했다. 이 때문에 실질적으로 통치는 못하더라도 이미 18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최소한 명분 상 포르투갈 왕의 브라질 땅은 지금의 브라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17세기 중반 개발이 지지부진하던 브라질의 내륙, 특히 미나스 게라이스(Minas Gerais) 지역에서 금맥이 발견되면서 해안가의 인구가 내륙으로 이동하기 시작했고 아마존강과 그 수많은 지류는 내륙개발에 필요한 고속도로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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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찍으로 얻어맞고 있는 브라질 노예.


브라질의 산업 중 가장 크게 성행한 것은 역시 사탕수수였고 브라질은 당시 프랑스령이자 최대의 사탕수수 재배지인 카리브해의 산살바도르에 이어 아메리카에서 두 번째로 큰 설탕 생산지였다. 이러한 브라질 산업의 노동력 인구가 늘어감에 따라 브라질에서도 혼혈인들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브라질의 혼혈인에는 에스파냐 식민지와 마찬가지로 메스티조와 물라토들이 있었지만, 정치적으로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다인종 혼혈인 파르도(pardo)들이었다. 다른 지역에서와 같이 파르도 혼혈인들은 브라질의 해안 도시에 모여 서비스업과 기술직에 종사하였고 백인 포르투게스(Portugues)들로부터 받는 차별에 매우 민감했다.

브라질의 광물과 설탕은 수출을 위하여 강을 따라 해안 도시로 옮겨져 수출되었다. 이 과정에서 헤시페(Recife), 살바도르(Salvador), 그리고 리우 데 자네이루(Rio de Janeiro)가 큰 도시들로 발전했다. 당시 브라질의 총 인구 2백만 중에서 반인 100만이 이 세 도시에 모여 살았다. 내륙은 해안에 비하여 인구가 적었지만 광업의 중심지인 미나스 게라이스 같은 경우 발달이 잘 된 편이었다.



독립 전쟁의 씨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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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형대에 오른 브라질 개혁가 티라덴테스.


아메리카의 다른 식민지들이 흔들리기 시작할 때 브라질은 오히려 호황을 누렸다. 예를 들어 서반구 최대의 설탕생산지인 산살바도르섬에서 반란이 일어나 노예제가 폐지되고 생산이 중단되자 브라질은 대체 시장으로 등장해 국제 설탕 시장에서 떼돈을 벌어 들였다. 18세기 말에 영국에서 의류 제조업이 발달하면서 브라질 산 면화에 대한 수요도 급증했다. 그러나 아무리 브라질이 다른 식민지에 비해 부유했다 해도 그 부는 식민 모국이 차지하는 양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했다. 다른 식민 모국과 마찬가지로 포르투갈 왕실 역시 브라질과 포르투갈 간의 무역과 운송에 대한 독점권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미국 독립과 프랑스 혁명 같은 대사건의 영향은 브라질에도 미쳤다. 1789년에 내륙의 광업도시인 미나스 게레이스에서는 정치적 음모가 ‘발각’되었는데 이를 주도한 인물은 파르도이자 민병대의 장교였던 티라덴테스라는 인물이었다. 티라덴테스는 빌라 리카 시(현 브라질 오루 프레투) 시장의 아들인 조세 마시엘이란 인물을 만났는데 영국 유학파인 마시엘은 영국의 발전과 브라질의 낙후성을 비교하며 한탄하였고 개혁 사상에 물든 인물들을 모아 조직(Inconfidencia Gerais)을 만들었다. 이중에는 작가이자 관리인 마누엘 코스타, 역시 관리인 토마스 곤자가, 그리고 사업가인 알바렝가 페이초토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미국의 독립 사상과 루소 등의 프랑스 사상가들에게 매료되어 있었으며 미국과 프랑스에서 개혁적인 사상을 도입해 브라질에 퍼뜨리고자 하였다. 이들은 반란을 일으켜 브라질을 공화국으로 만들고자 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티라덴테스는 사분형(四分刑, quartering)을 받고 죽는다. 그러나 티라덴테스와 개혁가들의 사상은 이미 리오와 헤시페 등의 도시에 널리 퍼져 있었다.

1807년 포르투갈 왕실이 프랑스군에 쫓겨 브라질로 망명하게 된다. 포르투갈 왕실이 브라질에 자리잡게 되자 보수파들은 뛸 듯이 기뻐하였고 포르투갈의 왕당파 끄리올로들은 왕실을 브라질에 잡아 두고 브라질을 제국(帝國)의 중심으로 만들려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왕실이 브라질로 옮겨오며 브라질의 개혁파와 독립파들은 위축 되는 듯 했으나 개혁에 대한 열망에 불타는 지식인들과 파르도 자유민들이 주축이 되어 음모와 반란을 일으킨다.



조앙 6세와 페드로 1세의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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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 국왕 조앙 6세. 체제수호에는 누구보다도 단호하였다.


당시 포르투갈의 국왕이었던 조앙 6세는 유약하고 우유부단한 인물로서 포르투갈로 돌아가려 하지 않았다. 자신을 왕으로서 극진히 모셔주는 리우의 분위기가 좋았다. 그의 아들인 페드로 왕자도 마찬가지였지만 왕비인 카를로타 조아키나(Carlota Joaquina)는 달랐다. 원래 에스파냐 공주 출신인 그녀는 브라질에 와있다는 사실을 견디지 못했고 포르투갈로 돌아가기 위해 애를 썼다. 그러나 조앙 6세는 요지부동이었고 오히려 브라질 왕당파들의 의도대로 브라질을 자신의 본국(本國)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1815년 조앙 6세는 포르투갈을 연합국(United Kingdom)으로 선포한다. 즉 포르투갈이 본국과 식민지가 아니라 포르투갈과 브라질이라는 두 개의 동등한 주체가 합쳐져 이루어진 나라라고 선언한 것이다. 이로써 포르투갈의 공식 명칭은 포르투갈, 브라질, 알가르베스 연합왕국(Reino Unido de Portugal, Brasil e Algarves)이 되었다. 개혁 운동이 아닌 왕의 선언에 의해 식민지 신세를 면하게 된 것이다. 물론 브라질을 인정해 주었다 하여 왕이 갑자기 개혁파가 된 것은 아니었다.

리오 델 플라타의 호세 산 마르틴이 페루 총독부의 에스파냐군을 연파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브라질은 다시 공화주의의 열기에 휩싸이고 유럽의 기업인들과 지식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던 헤시페에서는 이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공화주의 모임들이 무수히 조직되었다. 헤시페가 속해 있던 페르남부코 주의 지사는 이 모임들을 해체하고자 그 구성원들에게 대한 체포 명령을 내렸다. 수백 명의 개혁인사들이 체포되는 가운데 1817년 3월 6일에 주지사의 병력들에게 끌려가던 한 개혁파 군장교가 그를 압송하던 관리를 죽이고 그 병력들을 선동하여 ‘혁명’의 기치를 올린다. 그리고 놀랍게도 헤시페의 상류층과 가톨릭 사제들까지 이 봉기를 지지한다. 수년 간 퍼지고 있던 개혁사상은 헤시페의 상류층까지 물들인 것이었다. 봉기군은 페르남부코의 독립을 선포했으며 무엇보다도 새 나라는 왕국이 아닌 공화국임을 분명히 했다. 페르남부코의 소식을 들은 인근의 두 도시 역시 공화국 수립을 선포하고 혁명의 기치를 든다. 페르남부코의 '공화국‘ 정부는 육류에 대한 세금을 내리고 병사들의 급료를 올리는 등의 정책으로 민중과 군대의 지지를 유지한다. 아울러 공화국은 상인들을 약탈로부터 지켜주었는데 이는 자본의 유출과 무역의 중단이 야기할 수 있는 경제적 붕괴를 막기 위한 조처였다.

그러나 에스파냐 식민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던 페르난도 7세와는 달리, 조앙 6세는 바로 브라질에 있었고 왕권에 대한 도전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정규군과 민병대로 구성된 대군을 페르남부코로 보냈고 봉기를 무자비하게 진압하면서 아무리 유약한 군주라도 왕권을 쉽게 내려놓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다. 이렇게 페르남부코 공화국은 멸망하고 그 수장들은 모두 처형되거나 감옥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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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의 독립을 선포하는 페드로 1세.


브라질의 개혁열기를 겨우 없앴나 싶었을 때인 1820년, 포르투갈 본국에서는 개혁파에 의한 쿠데타가 일어나 절대 왕정에 대한 반대를 명확히 하고 대신 입헌군주제를 골자로 하는 개혁 헌법이 선포된다. 그리고 개혁 정부는 왕실이 브라질에 계속 있어야 할 명분이 없다며 리스본으로 돌아와 입헌 군주의 역할을 해줄 것을 종용했다. 이에 리스본으로 돌아갈 명분을 얻은 왕비는 리스본 행을 적극 주장했고 이윽고 1821년 조앙 6세와 그의 왕비 카를로타 조아키나는 포르투갈로 귀국한다. 조앙 6세는 페드로 왕자도 따를 것을 종용했지만 페드로는 거부했고 조앙 6세는 하는 수 없이 페드로를 브라질의 ‘섭정’으로 임명하고 떠난다. 하지만 페드로 왕자는 부왕이 떠나자 마자 자신의 야망을 드러낸다. 브라질 개혁파들의 요구사항을 상당부분 받아들이고 1822년 9월 7일, 브라질의 독립을 선포하고 입헌 군주이자 브라질 제국의 황제 페드로 1세로 등극한다. 브라질의 독립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브라질의 많은 정치 사회적 모순이 해결된 것은 아니었고 후에 입헌군주국에서 공화국으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많은 피를 흘리게 된다.

참고문헌

[The Cambridge History of Latin America Vol. 3], From Independence to 1870; Archibald Alison, [The History of Europe Vol. 14], From the Commencement of the French Revolution to the Restoration of the Bourbons; Timothy E. Anna , [Spain and the Loss of America]; John Charles Chasteen, [Americanos]; Paul K. Davis, [Besieged: 100 Great Sieges from Jericho to Sarajevo], [100 Decisive Battles]; Marc Ferro, [Colonization: A Global History]; J.B.Trend, [Bolivar and the Independence of Spanish America]




김성남 | 안보·전쟁사 전문가
글쓴이 김성남은 전쟁이 인간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가지고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미국 UC 버클리 동양학과를 졸업한 후 연세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국제학 석사를 받고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에 진학하여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 [전쟁으로 보는 삼국지], [전쟁 세계사] 등이 있으며 공저로 [4세대 전쟁]이, 역서로 [원시전쟁: 평화로움으로 조작된 인간의 원초적인 역사]가 있다.


발행2013.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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