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에스파냐 식민지의 독립 - 라틴 아메리카 독립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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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504회 작성일 16-02-07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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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목차

1. 라틴 아메리카의 건설과 식민 사회의 갈등

2. ‘프랑스 사상’과 라틴 아메리카의 독립 투쟁

3. 빛을 잃어가는 투쟁

4. 브라질의 독립

5. 에스파냐 식민지의 독립

6. 에스파냐 세력의 최후

라틴 아메리카 전쟁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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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표
전쟁 주체 에스파냐/아메리카 왕당파 vs 각국 독립세력/공화주의 세력
전쟁 시기 1804-1825
전쟁터 멕시코, 중앙아메리카, 남미 각 지역, 카리브해 일부
주요 전투 마이푸 전투, 카라보보 전투, 보야카 전투, 살타 전투, 카르타헤나 공방전, 오악사카 공방전, 아카풀코, 차카부코 전투, 구아나후아토 전투, 깔데론 전투


독립전쟁의 대 반전




1816년 들어 에스파냐 식민지의 독립운동은 벼랑 끝으로 몰려 있었다. 누에바 에스파냐, 누에바 그라나다, 그리고 페루의 독립 세력은 모두 에스파냐의 반격에 밀려 패하고 거의 소멸되었다. 오직 리오 플라타만이 에스파냐에 맞서고 있었는데 에스파냐에서 왕위에 복귀한 페르난도 7세는 리오 플라테의 독립 세력마저 끝장내겠다며 카디즈에 2차 원정군을 소집하였다. 다른 지역에서는 저항은 물론 게릴라 활동도 변변치 않아 깔레하(누에바 에스파냐)와 아바스칼(페루) 등의 총독들은 ‘영웅’으로서 은퇴하여 조용한 말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라틴 아메리카 독립의 대반전은 리오 플라테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리오 플라테의 군사 책임자가 된 호세 산 마르틴은 리오 플레타군이 1813년에 上페루(Alto Peru, 현재 볼리비아)에서 참패한 직후부터 병력을 모으고 훈련시키면서 절치부심하고 있었다. 산 마르틴은 벨그라노가 이끈 오합지중 혼성군으로는 가망이 없다고 생각하고 제대로 된 정규군을 육성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아울러 산마르틴은 리오 플라테군의 기본 전략이 수정되어야 함을 역설하였다. 남미에서 에스파냐 세력의 중심이 되는 곳은 리마(Lima)를 비롯한 현재의 페루 지역이었고 리마가 주요 공략 대상이 되어야 하는 데는 이견이 없었다. 그러나 산 마르틴은 볼리비아 지역을 통한 페루에 대한 직공(直攻)은 일단 수백km의 광대한 고원을 넘어야 하고 티티카카 호수 인근의 데사구아데로강을 건너야 하기 때문에 통신과 보급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가장 좋은 방법은 칠레 산티아고를 1차적 목표로 하여 안데스 산맥의 가장 좁은 지점을 통과하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우선 칠레지역을 장악한 뒤 함선들을 준비하여 페루와 리마를 공략한다는 대전략을 세웠다. 일단 산 마르틴은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떠나 안데스 산맥의 동쪽 기슭에 있는 멘도자(Mendoza)로 옮기고 이를 전략적 거점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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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루과이의 국부(國父) 호세 아르티가스(Jose Artigas)의 초상.


다른 지역에서, 특히 페루 지역에서 독립세력이 소멸되면서 리오 플라테에게 힘을 보태 줄 수 있는 있는 세력이 전무하였기 때문에 이번에도 실패하면 리오 플라테마저 그 운명을 장담할 수 없었다. 산 마르틴이 주둔한 멘도자의 시민들은 산 마르틴의 군 육성계획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주었다. 그러나 정작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리오 플라테 정부는 산 마르틴을 도와줄 수가 없었다. 리오 플라테 건국에 참여하였던 호세 아르티가스(Jose Artigas)란 인물이 리오 플라테의 정부 수반인 알비아르가 전횡을 하고 있다며 자신의 휘하 주(州)들을 선동하여 리오 플라테에서 이탈하려 했기 때문이다.

아르티가스는 몬테비데오(Montevideo, 현 우루과이 수도) 출신의 끄리올로로서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으나 12세부터 가문소유의 농장에서 일하면서 가우초(목동)들의 생활방식에 매료되어 그들처럼 생활하였다. 청년기에는 아예 집을 떠나 소도둑질과 밀수를 하면서 파타고니아의 목장주들에게 위험 인물로 인식되었고 총독부의 지명수배를 받았다. 1800년대 초에 리오 플라테 지역에 영국의 침략이 임박해오자 총독은 그의 지명 수배를 풀어주는 대신 그의 부하들을 이끌고 총독부 민병대에 종군하게 하였고 아르티가스는 1807년 몬테비데오에 대한 영국군을 격퇴하는 과정에서 공을 세워 정식으로 대위가 된다. 그러나 에스파냐가 가우초들은 물론 아메리카노들을 차별하는데 분노하여 독립파에 가담하였고 1814년에 몬테비디오에서 최후의 리오 플라테 총독을 몰아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는 리오플라테가 19세기의 미국처럼 느슨한 연방제가 되기를 원하였으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엘리트들은 강력한 중앙정부 개념을 고수하였고 일부는 유럽에서 왕족을 들여와 군주제를 하는 것까지 고려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아르티가스의 몬테비데오 세력과 리오 플라테 정부와의 사이가 벌어졌고 결국 몬테비데오 세력은 리오 플라테에서 이탈한다. 몬테비데오 지역은 잠시 페드로의 브라질 제국에 점령 당하였다가 1825년에 우루과이라는 이름으로 독립한다.

어찌되었건 리오플라테 정부와 몬테비데오 세력간의 알력은 산 마르틴이 모든 것을 혼자 준비해야 함을 의미하였다. 다행히도 아직 정부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벨그라노가 산 마르틴에게 향하는 질시와 의심을 막아주었고 에우로페오 농장주들의 농장에서 풀려난 노예들이 앞다투어 산 마르틴에게 몰려들면서 산 마르틴은 상당수의 병력을 모을 수 있었다. 보수파 교회들의 농장을 압수하면서 빼앗은 노예와 농노들도 병사로 동원되었다. 이들 흑인 병사들은 별도의 부대로 편성되었는데 당시 리오 플라테의 법에 의하면 이들 흑인부대도 백인 장교가 지휘해야 했다. 비록 법을 완전히 바꾸지는 못하였지만 산 마르틴은 룰을 약간 바꾸어 흑 인병사들이 부사관까지 진급할 수 있게 했다. 랑카구아의 전투에서 패하고 리오 플라테로 피신해있던 칠레 병사들도 산 마르틴의 휘하로 몰려들었고 칠레의 무장투쟁을 지휘하였던 베르나르도 오히긴스 역시 리오 플레테군에 속하게 되었다. 비록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지원을 받지는 못하였지만 산 마르틴이 주둔해있던 멘도자의 시민들은 독립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생각에 산 마르틴을 환대하였고 산 마르틴의 정규군 육성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멘도자의 여인들은 빈부를 막론하고 가진 패물을 모두 군자금으로 내놓고 정규군의 군복을 만드는데 기꺼이 참여하여 수천 벌의 군복을 만들 수 있었다. 멘도자의 장인들은 도시 근처에 자연적으로 형성된 질산염을 채취하여 많은 양의 화약을 제조하였다. 교회들이 기부한 교회 종들은 용광로에서 녹여져 대포를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

리오 플라테 정부는 이미 실질적으로 에스파냐에서 독립한 상태였지만 이때까지 에스파냐와 연계를 끊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1816년에 투쿠만(Tucuman)에서 소집된 의원 대회에서 많은 진통과 격론 끝에 공식적으로 페르난도 7세의 신민(臣民)임을 부정하고 독립을 선언한다. 산 마르틴 본인은 국왕제의 폐지는 너무 극단적이라고 여겼지만 기본적으로 국가의 주권은 국민들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군주도 헌법에 의하여 그 권한이 제한되는 영국식의 입헌군주제를 이상적인 모델로 생각하고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절대왕정을 반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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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도자(Mendoza)에서 훈련중인 안데스 군단을 지켜보는 호세 산마르틴.




산 마르틴의 진격과 볼리바르의 승리




1816년 말, 드디어 산 마르틴의 정규군 조직 작업이 완료되었고 산 마르틴은 새로이 만들어진 군대에 ‘안데스 군단 (Banderos de los Andes)'이라 명명하였다. 그리고 1817년 1월에 공격을 개시한다는 계획을 세웠는데 이때가 남반구로서는 한 여름이어서 고원지대에도 얼음과 눈이 없기 때문이었다. 산 마르틴은 1월에 공식적인 출정식을 갖고 3일간 축제를 벌여 시민들과 병사들의 사기를 높인 다음 6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안데스를 넘어 칠레로의 진격을 시작하였다.

산 마르틴의 준비 기간이 길었기에 칠레의 왕당파들은 이미 안데스군단이 공격해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대비를 하고 있었다. 산 마르틴은 왕당파군을 정면으로 들이치기 보다는 최대한 기습을 하려 하였다. 산 마르틴은 군을 나누어 서로 다른 길로 가게 하였고 1813년 2월 12에 산티아고 인근의 차카부코에서 2500명의 에스파냐군을 만난다. 산 마르틴은 군을 나누어 협공하는 작전으로 차카부코의 에스파냐군을 완파한다. 이 전투에서 에스파냐군의 피해는 전사자만 500에 포로가 600명에 이르는 대승이었다. 이에 비하여 안데스 군단의 피해는 120여명에 불과하였다. 차카부코에서 대승을 거둔 안데스 군단은 지체 없이 산티아고를 점령하였다. 이에 콘셉시온(Concepcion) 방면에 있는 에스파냐군이 안데스 군단을 공격하였지만 4월 4일의 쿠라팔리후에(Curapalihue) 전투에서 패하고 격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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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데스를 넘고 있는 산 마르틴과 오히긴스.


에스파냐군의 잔인한 진압작전을 지켜보아야 했던 산타이고의 시민들은 안데스 군단이 대승을 거두자 산 마르틴을 환대하였고 안데스 군단은 산티아고에 입성하였다. 시민들은 1만 페소라는 거금을 모아 산마르틴에게 ‘용돈’이라며 전달하려 하였지만 산마르틴은 군공(軍功)으로 치부하는 것은 부정(不正)한 일이라 생각하여 받은 돈을 산티아고 공공도서관 건립비로 내놓았다. 산티아고 주교의 저택을 사령관 관저로 받았을 때도 화려한 은식기를 사용하기를 거부하였고 그에게 6천 페소의 연봉을 준다고 하는 것도 마다하였다. 그는 그러한 것을 누리는 대신 다음 작전에 대한 조직과 보급에 대한 업무에 집중하였다. 그러나 산 마르틴의 지나친 청렴은 대민(對民)관계를 악화시켰다. 시민들과 산티아고 원로들의 관점에서는 진정한 고마움의 표시로 주는 선물을 모두 거부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산 마르틴은 원래부터가 다소 딱딱한 성격이었고 아울러 지병(결핵)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피하였다. 그리고 각혈의 고통을 줄이기 위하여 가끔씩 아편을 복용하였기 때문에 정신이 온전치 못할 때가 많았고 이 때문에 더더욱 시민들 앞에 나서기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성정이 엄격하고 딱딱한 산 마르틴에 비하여 시몬 볼리바르는 속된 말로 ‘스타’로서 각광받는 것을 좋아했고 사람들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였다. 볼리바르는 제2 베네수엘라 공화국의 잔여 세력을 망명지인 아이티에서 만나 다시 베네수엘라를 공략할 계획을 세웠다. 베네수엘라의 흑인 노예들을 해방한다는 조건 하에 당시 아이티의 대통령이던 알렉상드르 페티옹(Alexandre Petion)의 지원을 받아 꾸이리아(Guiria)에 남아있던 독립 세력과 합류한다. 그러나 구이리아를 거점으로 천천히 진격하자는 그의 동료들과 달리 볼리바르는 베네수엘라 중부해안에 기습상륙을 고집하였다. 베네수엘라의 중심을 타격하여 보수파들을 지리멸렬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볼리바르의 고집은 그나마 독립파들에게 남아있던 병력을 전멸시키는 결과를 가져왔고 화가 난 그의 ‘동료’들은 볼리바르를 그대로 쫓아내고 상종도 하려 하지 않았다. 일설에 의하면 동료들은 부두에 막 내린 볼리바르를 칼로 위협하여 다시 배에 태워 쫓아 보냈다고 한다. 한때 ‘해방자’로 환대 받았던 볼리바르로서는 그야말로 대망신을 당한 것이다.

그렇지만 볼리바르를 싫어하는 인물들도 볼리바르의 지명도가 높은 것은 인정해야만 했다. 볼리바르의 이름으로 기치를 올려야만 사람들이 모이고 뭉칠 수 있기 때문에 볼리바르는 동부 베네수엘라의 독립파들에게 1817년에 다시 귀환 요청을 받았다. 이때 볼리바르를 부른 것은 마누엘 피아르(Manuel Piar)라는 파르도 지도자였다. 피아르는 토마스 보베스 사후 자신에게 동조하는 야네로스들을 모아 효과적인 작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피아르는 1817년 4월에 에스파냐군을 대파하면서 주가를 올리지만 앞으로 나서기 좋아하는 볼리바르는 피아르의 인기를 용납할 수 없었다. 1817년 독립군은 오리노코(Orinoco)강 유역의 앙고스투라(Angostura, 현재 베네수엘라 Ciudad Bolivar)를 점령하여 베네수엘라 중심부로 나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지만 볼리바르는 피아르의 승리 직후 잘했다고 몇 마디 칭찬한 후 피아르의 지휘권을 박탈하였다. 피아르는 당연히 앙심을 품었고 자신이 파르도여서 차별을 받는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다녔다. 대부분이 파르도였던 야네로스 기마병들이 술렁거리자 볼리바르는 즉시 피아르의 체포를 명했고 그를 총살하였다. 그리고 기마병들의 급료를 높이는 것으로 불만을 무마시켰다.

피아르의 처형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영국군 용병 800명이 베네수엘라에 도착하여 독립파와 힘을 합하였다. 사실 이들은 사상적인 이유보다는 나폴레옹 전쟁이 종식된 후 군대가 감축되면서 직장을 잃게 되자 용병으로 고용된 것이었다. 그러나 영국용병들은 기후와 환경에 제대로 적응을 못하여 전력에 그리 보탬이 되지 않았고 결국 볼리바르도 야네로스들을 더 많이 끌어들일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오리노코 평야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독립파 야네로스 부대의 수장인 안토니오 파에즈(Antonio Paez, 이후 볼리바르에 이어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된다)를 만난다. 거친 소몰이꾼인 파에즈와 귀족적 성향의 볼리바르는 의외로 죽이 잘 맞았고 파에즈는 볼리바르의 든든한 동료가 된다. 그리고 1819년에 볼리바르는 베네수엘라 동남부 앙고스투라에서 ‘정부’를 조직하고 각지의 ‘대표’를 불러 의회를 소집한다. 그리고 2월 16일 새로운 ‘그란 콜롬비아(Gran Colombia)' 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볼리바르의 정부는 대통령이 거의 전권을 가지고 있는 형태였다. 볼리바르는 새로운 나라에 수많은 인종과 부족들이 있고 이들은 에스파냐의 압제 밑에서 주권을 발휘해 본 경험이 없기에 당분간은 강력한 중앙정부와 지도자가 이들을 안정적으로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미국식의 연방제를 반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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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0년의 그란 콜롬비아.


볼리바르는 취임하자마자 누에바 그라나다의 수도라고 할 수 있는 보고타(현 콜롬비아 수도)에 대한 공략을 계획하였고 1819년 5월에 이를 실행에 옮겼다. 공격이 시작된 5월은 우기였기 때문에 보고타 남쪽의 평야는 거의 물바다가 되었고 인근은 강도 모두 불어나 있었다. 더군다나 보고타로 가려면 남쪽을 가로막고 있는 안데스 산맥의 끝자락을 넘어야 했다. 총독은 볼리바르의 건국과 거병에 대해서 듣기는 하였지만 우기의 불어난 강물을 뚫고 볼리바르가 공격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볼리바르가 거느린 야네로스들은 거친 환경에 익숙해있었고 8월에 보고타 인근에 나타났다. 힘든 진격이었지만 다행히 중간에 민중들로부터 숙식을 제공받으면서 보고타 바로 정면에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8월 7일에 보야카 다리(Puente de Boyaca)에서 에스파냐 총독군을 크게 무찌른다. 이때의 총독군은 대부분이 유럽에서 파견된 본국 병력이었으며 총독들은 이들을 등에 업고 독립파들을 소탕한다는 명분하에 지독한 탄압과 강권통치로 일관하고 있었다. 이전에도 아메리카노들과 에우로페오들의 사이는 좋지 않았지만 페르난도 7세가 본국 군대를 파견한 후 에우로페오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민중의 적이 되었다. 동시에 총독부와 싸우는 아메리카노 독립파들은 무조건 영웅으로 인식되었다. 보야카의 승리는 이러한 과정의 당연한 결과였고 볼리바르의 독립군은 누에바 그라나다의 수도인 보고타마저 점령하게 된다.



칠레와 페루의 독립




분위기와 기세로 움직이는 볼리바르와는 달리 산 마르틴은 철저한 준비 없이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다음 목표인 리마 공략을 위한 함선과 무기들을 준비하느라 산티아고에서 움직이지 않았고 이는 에스파냐 왕당파들에게 반격을 할 시간을 주었다. 아울러 1818년 2월에 칠레의 독립파들이 ‘독립’을 선언하면서 ‘통치’를 시작해야 했기에 준비는 더욱 지지부진하였다. 이에 왕당파들은 에스파냐 세빌랴 출신의 군인인 마리아노 오소리오(Mariano Osorio)를 중심으로 뭉쳐 산티아고의 안데스군단을 공격한다.

1818년 산티아고 인근의 칸차 라야다(Cancha Rayada)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7천의 안데스 군단은 5천의 에스파냐군의 야습을 받았다. 준비되기도 전에 기습을 받은 안데스군단은 300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1천명 이상이 싸움의 와중에서 실종되거나 탈영하였다. 산티아고를 회복한 후 처음 당하는 패배였고 한때 산 마르틴이 죽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산티아고를 떠나 멘도자로 가는 피난 행렬이 이어졌다. 그러나 산 마르틴은 오히긴즈와 같이 산티아고로 돌아와 군을 수습하였고 실종되거나 흩어졌던 병사들을 모아 군세를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군단이 지닌 대포들이 대부분 손상되어 이를 복구하는데 시간이 걸리게 된다. 한편, 에스파냐군은 비록 승리하기는 하였지만 역시 200명이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고 600명이 실종되는 등 피해가 상당하여 산티아고 공략과 회복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결국 이 전투로 결정된 것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칸차 라야다 이후 한 달도 지나지 않아 4월 5일에 양군은 마이푸 평야의 전투에서 다시 충돌하게 된다. 이 전투에서 양군은 약 5천의 동일한 규모였으며 이 전투에서 안데스군단은 1천의 전사자가 발생한 데 비하여 오소리오의 에스파냐군은 2천이 죽고 3천이 다치거나 포로가 되었다. 에스파냐군은 전멸하였고 마이푸의 전투로 인하여 칠레 땅에서 에스파냐 세력은 사실상 소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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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의 독립 운동을 이끈 베르나로도 오히긴스(Bernardo O'Higgins)


에스파냐군이 전멸한 후 산 마르틴의 페루 원정 준비는 빨라졌고 칠레의 정권을 잡은 오히긴스는 세금을 걷고 함선을 마련하는 등 독립군 지원에 총력을 기울였다. 새로이 창설된 칠레 해군을 이끌 해군 장교가 없어서 스코틀랜드 출신의 전직 영국해군 장교인 토머스 코크란(Thomas Cochrane)이 맡게 되었다. 비록 욕심이 많고 허영이 심했지만 코크란이 유능한 함장인 것은 사실이었고 그는 원정의 사전 준비 격으로 페루 해안에 대한 소규모 기습을 여러 차례 단향하여 페루의 병력을 붙들어둠은 물론 새로이 생긴 칠레 해군 병사들에게 전투 경험을 쌓게 하였다. 페루 총독부의 해군기지가 있는 탈카우아노(Talcahuano)에는 대규모 공격을 가하였고 해군 기지와 항구 주요시설을 전부 파괴하였다. 이로써 페루의 왕당파들은 칠레에 남아있는 왕당파에게 병력을 지원하지 못하게 되었고, 산 마르틴이 리마를 습격할 때 후방을 위협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거점을 없애버렸다.

이때 리오 플라테에서는 정쟁이 격화되면서 현 아르헨티나 북부의 투쿠만 의회 세력과 몬테비데오의 자유민연방세력(Liga de los Pueblos Libres)으로 분열되었다. 연방세력의 공격으로 인하여 투쿠만 의회가 거의 붕괴되다시피 하였고 리오 플라테 정부는 산 마르틴의 귀환을 종용하였지만 자신의 전략적인 목표가 더 중요했던 산 마르틴은 연방주의를 거부하라는 격문을 전달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연방세력에 밀린 리오 플라테 정부는 무너지고 이후 부에노스아이레스 이외에는 통치가 불가능해졌다.

리오 플라테의 상황이 어떻건 간에 산 마르틴은 자신의 목표를 위하여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이윽고 1820년 8월 20일에 산 마르틴인 23척의 함선에 선원을 제외한 병력 4100명, 말 800마리, 대포 35문과 소총 15000정을 싣고 발파라이소(Valparaiso) 항구를 출항하여 리마로 향하였다. 산 마르틴의 원정군은 페루 남부에 일단 상륙하여 총독부의 관리들과 협상을 벌였는데 총독부는 만약 해산하면 국왕 페르난도가 개혁적인 법안을 제정할 것이라고 하였지만 원정군은 일단 칠레와 페루의 독립을 인정하는 것이 모든 협상의 전제조건임을 강조하였고 협상은 곧 결렬되었다.

칠레를 잃었다고는 하지만 페루에는 여전히 23000의 병력이 있었고 칠레함대의 수병들을 포함하더라도 원정군은 6천이 채 되지 않았다. 그러나 산 마르틴은 본격적인 상륙 이전에 리마 인근의 원주민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독립에 우호적인 총독부 병력 일부가 원정군에 합류하면서 리마 공략의 발판을 마련한다. 이에 총독 페주엘라가 쫓겨나고 들라 세르나(Jose de la Serna)가 총독이 되어 다시 원정군과 협상하지만 재차 결렬되고 원정군은 리마를 포위하게 된다. 그러나 칠레에서 보내기로 한 추가 지원 병력은 칠레의 정쟁으로 인하여 오지 못하게 된고 원주민 반란이 의외로 신속하게 진압되자 산 마르틴은 외부 지원을 확보하려는 목적에서 볼리바르에게 지원을 요청하는 서신을 보낸다. 아울러 산 마르틴은 리마인근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게릴라 세력을 규합하고 자신의 원정군 병력과 함께 리마 가까이 포진하게 된다. 이때 총독이었던 세르나가 갑자기 휘하 병력을 거느리고 리마를 떠나게 된다. 궁지라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다른 지역에서 병력을 모으려는 의도였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리마에는 더 이상 총독이 없었고 원정군은 리마에 입성하게 된다. 페루에는 칠레와 달리 조직적인 정치세력이 없어 산마르틴은 1821년 7월 28일에 페루의 독립을 선언하고 그 대통령에 취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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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루의 독립을 선언하고 있는 호세 산마르틴.




이투르비데와 멕시코의 독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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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심가였던 이투르비데는 독립파와 힘을 합쳐 멕시코를 독립시키고 황제로 등극하나 나중에 쓸쓸히 물러나게 된다.


멕시코의 저항 세력은 1818년과 1819년에는 그저 명맥을 유지하기만 해도 다행일 정도로 그 힘이 약화되어있었다. 1818년 3월 6일에 비센테 게레로가 하우힐라(Jaujilla)를 잠시 차지하기는 했지만 오래 지키지 못하고 물러나와야 했다. 조그만 도시를 일시 점령한 것이 ‘성공’으로 간주될 정도로 저항세력은 심히 약화되어 있었다. 멕시코의 저항세력이 이렇게 심하게 약화된 까닭은 끄리올로 왕당파 군인인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Agustin de Iturbide)의 활약때문이었다. 이뚜르비드는 이달고 신부가 군사를 일으켰을 때부터 총독부의 장교로서 싸웠으며 그의 일기에 봉기군을 ‘도적떼’라고 쓸 정도로 멸시하였다. 이 때문에 봉기군을 상대로 싸울 때 매우 잔인했으며 잡힌 포로는 살려주지 않고 처형해버렸기 때문에 총독부에서 조차 그의 잔인함을 여러 차례 지적할 정도였다. 1810년에는 몬테 크루세스 전투에서 비록 패하기는 하였지만 용맹하게 싸운 공을 인정받아 대위로 진급한다. 이달고가 잡혀 처형된 후 1813년에 모렐로스의 봉기군이 바야돌리드(Valladolid)를 포위하고 있을 때 봉기군에 효과적인 기병공격을 전개하여 봉기군을 격퇴하고 바야돌리드의 포위를 푼다. 이 전투의 공으로 총독 깔레하로부터 치하를 받고 대령이 된다. 봉기군 수장 모렐로스의 숙적으로서 여러차례 전장에서 맞닥뜨리게 되며 1814년 1월 5일에 푸루아란(Puruaran, 현 멕시코 Turicato)에서 모렐로스가 지휘하는 봉기군에 또 다시 크나큰 패배를 안겨준다. 이 전투에서 봉기군은 6백이 전사하고 7백이 사로잡히는 참패를 당하고 기세등등하던 봉기군의 세력이 크게 꺾여 모렐로스는 수세에 처하게 된다. 결국 모렐로스는 이전의 군세를 회복하지 못하고 이투르비데에게 쫓기다가 결국 테즈말라카에서 다시 패배하고 체포되어 처형당한다.

왕당파 관점에서는 이투르비데만큼 유능하고 잘 싸우는 인물이 없었지만 이투르비데는 전투에서 승리한 후 자신이 관장하는 지역의 각종 사업과 이권에 개입하여 실질적인 독점권을 확보하고 아울러 적들의 재산을 약탈하는 등의 행위로 엄청난 개인적 부를 축적하였다. 아울러 총독부에서 금하고 있는 밀수에도 손을 대개 된다. 그리고 금전적인 부정은 차지하고라도 그는 1814년에 성 금요일(Good Friday)를 기념한다며 300명의 포로를 집단처형하였다. 그는 아울러 남성 전투원뿐만 아니라 봉기군의 아이들과 아내들까지 모조리 잡아들여 감금하고 사형(私刑)을 가하는 등의 행위로 악명이 높아져갔다. 심지어 군의 자금으로 쓰게 되어있는 공금까지 횡령했다는 소문이 나돌면서 총독부의 조사가 이루어졌고 이투르비데의 수많은 부정행위가 드러나게 되면서 1816년에 부정부패에 대한 처벌이 이루어진다. 총독 깔레하는 본보기 차원에서 이투르비데의 지휘권을 박탈하고 사령관직에서 해임시킨다. 다행히 이투르비데는 총독부와 왕당파들사이에 강력한 비호세력이 있어 그의 해임은 취소되었지만 이투르비데는 총독에 대한 앙심을 품게 된다. 그러나 그가 지은 죄가 많아 완전한 복직까지는 시간이 걸렸고 이투르비데는 1820년 11월에 다시 군에 돌아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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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센테 게레로. 이달고 사후 멕시코 독립군을 이끌었고 이후 멕시코 공화국의 2대 대통령이 된다.


이투르비데가 복직된 후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멕시코 시티 외곽지역에서 저항군을 이끌고 있던 비센테 게레로를 무찌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군을 이끌면서 정식 군사정치조직을 만들려고 했던 모렐로스와 달리 게레로는 철저히 게릴라 전술로 일관하면서 이투르비데의 토벌군을 괴롭혔다. 이투르비데는 게레로를 결전(決戰)으로 끌어들여 격파하려 하였지만 게레로는 이투르비데의 수에 말려들지 않았고 오히려 이투르비데가 방심할 때를 노려 이투르비데가 파견한 부대들을 격파하였다. 1821년 1월 2일에는 자포테펙(Zapotepec)에 게레로군이 있다는 말을 듣고 수백명을 파견하였으나 게레로의 매복작전에 말려들어 대패한다.

이 와중에 1820년에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에 자유주의 세력에 의한 쿠데타가 발생한다. 에스파냐의 쿠데타 세력은 페르난도 7세를 연금시키고 1812년 헌법의 회복과 의회의 재소집을 요구한다. 페르난도 7세는 할 수 없이 받아들이고 에스파냐에는 일시적으로 개혁정부가 서게 되었다. 본국에서의 쿠데타는 누에바 에스파냐(멕시코)의 왕당파 세력에게 진퇴양난의 상황을 만들었다. 국왕을 부정하고 헌법주의를 주장하는 자들의 명령을 듣기도 싫었고 헌법에 명시된 데로 저항군들을 에스파냐 시민들로 인정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왕정을 포기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투르비데 역시 아메리카노로서 에우로페오들의 차별의식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고 무엇보다 자유주의와 의회민주주의가 대세가 되어가는 듯이 보였다. 이를 막을 능력이 없는 페르난도 7세를 섬길 이유가 없으며 결국은 새로운 땅에 다른 왕을 세워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투르비데는 비센테 게레로에게 서신을 보내어 사면(赦免)을 조건으로 종전을 논의하자고 한다. 게레로는 자기는 죄인이 아니니 총독부의 사면 따위는 필요 없다고 하였지만 일단 독립을 위해서라면 만날 수는 있다고 하였고 둘은 2월에 이구알라(Iguala, 현 멕시코 게레로 주에 있다)에 만나 이구알라 강령, 또는 삼약 강령(三約綱領, Plan Trigaranta)를 발표한다. 삼장이란 가톨릭이 멕시코의 국교(國敎)가 되고 멕시코가 독립국이 되며 멕시코 시민들은 사회적 지위와 인종을 막론하고 평등하다는 것은 보장한 일종의 약법(略法)이었다. 그리고 이투르비데와 게레로를 군을 합치고 이 군대를 ‘삼약강령군(Ejercito Trigarante)'이라 명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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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우다드 데 메히코(멕시코 시티)로 입성하는 삼약강령군 (Ejercito de Trigarante).


물론 왕당파들이 모두 이투르비데와 함께한 것은 아니고 총독부와 왕당파들인 삼약강령군에 맞서서 싸운다. 삼약강령군(멕시코군)은 코르도바에서 에스파냐군을 격파하였고 이어 1821년 8월 21일에 아즈카포찰코(Azcapotzalco)에서 다시 에스파냐군을 대파하였다. 당시 누에바 에스파냐의 총독이었던 후안 오도노후(Juan O'Donoju)는 스스로도 자유주의자인데다가 무엇보다도 이미 멕시코에서 에스파냐의 운명이 기울었음을 알고 그 휘하 장병들의 목숨을 살리기 위하여 이투르비데 측과 협상을 개시한다. 그리고 1821년 8월 24일에 멕시코의 독립을 공식화하는 ‘코르도바 조약(Tratados de Cordoba)'에 서명한다. 그리고 9월 27일에 삼약강령군이 멕시코시티에 입성하면서 누에바 에스파냐 총독부는 종언을 고하고 다음 날 멕시코 제국이 선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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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공화국 초대 대통령 과달루페 빅토리아(Guadalupe Victoria).


이구알라 강령에 의하면 멕시코는 입헌군주국이 되어야 했기에 멕시코 건국세력은 페르난도가 멕시코로 와서 즉위식을 가져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투르비데는 페르난도가 에스파냐를 절대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투르비데는 페르난도가 올 때까지 멕시코를 잠시 맡겠다는 명분하에 ‘섭정’이 되었고 한편으로 이면에서 왕위를 차지하기 위한 공작을 벌였다. 그리고 어찌되었건 멕시코의 독립을 이끌었기 때문에 인기도 상당하였다. 결국 이투르비데를 왕위에 올리라는 여론이 높아졌고 이투르비데는 1822년 7월 21일에 황제가 된다. 그러나 공화주의자들은 이투르비데가 입헌군주제를 하겠다는 약속을 어겼다며 새로운 황제를 맹비난하였고 안토니오 산타아나(Antonio Lopez de Santa Anna)를 중심으로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삼약강령군의 일원으로 이투르비데와 손을 잡았던 게레로도 이투르비데의 신의없음을 비판하며 산타아나와 손을 잡는다. 당시 멕시코 제국의 일부였던 중앙아메리카 지역도 이투르비데의 등극을 반대하며 제국에서 이탈한다. 이에 산타아나는 이투르비데의 하야, 의회의 재소집, 그리고 완전한 공화정 수립을 요구하며 멕시코 시티로 진격하였다. 이투르비데는 이에 맞서 자신에게 충성하는 부대들을 보내어 싸웠으나 모두 패하고 결국 이투르비데는 1823년 2월 1일에 산타아나를 만나 그의 요구를 모두 수락하고 5월 11일에 가족과 함께 망명을 하게 된다. 저항세력이 그토록 열망하였던 ‘왕없는 멕시코’가 마침내 세워진 것이다. 그리고 집단지도체제 기간을 거쳐 헌법과 제도를 정비한 후 1824년 10월 10일에 과달루페 빅토리아(Guadalupe Victoria)가 멕시코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참고문헌

[The Cambridge History of Latin America Vol. 3], From Independence to 1870; Archibald Alison, [The History of Europe Vol. 14], From the Commencement of the French Revolution to the Restoration of the Bourbons; Timothy E. Anna , [Spain and the Loss of America]; John Charles Chasteen, [Americanos]; Paul K. Davis, [Besieged: 100 Great Sieges from Jericho to Sarajevo], [100 Decisive Battles]; Marc Ferro, [Colonization: A Global History]; J.B.Trend, [Bolivar and the Independence of Spanish America]




김성남 | 안보·전쟁사 전문가
글쓴이 김성남은 전쟁이 인간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가지고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미국 UC 버클리 동양학과를 졸업한 후 연세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국제학 석사를 받고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에 진학하여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 [전쟁으로 보는 삼국지], [전쟁 세계사] 등이 있으며 공저로 [4세대 전쟁]이, 역서로 [원시전쟁: 평화로움으로 조작된 인간의 원초적인 역사]가 있다.


발행2013.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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