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에스파냐 세력의 최후 - 라틴 아메리카 독립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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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502회 작성일 16-02-07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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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목차

1. 라틴 아메리카의 건설과 식민 사회의 갈등

2. ‘프랑스 사상’과 라틴 아메리카의 독립 투쟁

3. 빛을 잃어가는 투쟁

4. 브라질의 독립

5. 에스파냐 식민지의 독립

6. 에스파냐 세력의 최후

라틴 아메리카 전쟁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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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표
전쟁 주체 에스파냐/아메리카 왕당파 vs 각국 독립세력/공화주의 세력
전쟁 시기 1804-1825
전쟁터 멕시코, 중앙아메리카, 남미 각 지역, 카리브해 일부
주요 전투 마이푸 전투, 카라보보 전투, 보야카 전투, 살타 전투, 카르타헤나 공방전, 오악사카 공방전, 아카풀코, 차카부코 전투, 구아나후아토 전투, 깔데론 전투

누에바 그라나다의 붕괴




에스파냐 본국에서 일어난 쿠데타의 영향은 멕시코뿐만 아니라 누에바 에스파냐와 남미에도 느껴졌다. 5년 전인 1815년까지만 하여도 에스파냐는 반란을 사실상 종식시킨 것 같았다. 그러나 산 마르틴이 안데스를 넘어 칠레를 공략하고 볼리바르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오뚜기처럼 일어나 보고타를 점령한 후 에스파냐의 세력은 급격히 와해되기 시작하였다. 도처에서 반란과 봉기가 일어나면서 볼리바르의 공화국에 참여하였고 누에바 그라나다 총독부는 고립되어갔다. 한편, 이베리아 전쟁 당시 에스파냐 독립을 위하여 싸웠고 이제는 누에바 그라나다의 총독부 병력을 이끌고 있던 파블로 모리요(Pablo Morillo) 장군은 식민지 재정복 자체에 회의적이었다. 쿠데타 직후 새 정부로부터 볼리바르와 평화 협상을 하라는 지령이 오자 즉시 1820년 11월에 만났고 당분간 휴전을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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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보보 전투.


협상을 위한 휴전이었으나 완전한 독립을 목표로 하는 볼리바르는 에스파냐 세력과의 공존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전투는 다시 재개되었고 1821년 6월 24일, 카라보보(Carabobo, 현 베네수엘라 북부 카라보보 주)에서 볼리바르의 그란 콜롬비아 병력 8000명은 마지막 남은 총독부 병력 5000명과 격돌한다. 그란 콜롬비아군에는 파에즈의 야네로 기마병들을 포함하여 2500의 기병이 있었고 이들은 전투에서 결정적인 우위로 작용한다. 그란 콜롬비아군 사상자는 120명에 불과하였지만 총독군은 5천중 3천이 죽고 다치는 대패를 당한다. 나머지는 대부분 포로로 잡히고 인근 항구도시인 포르토 까베요(Porto Cabello)로 온전히 후퇴한 병력은 400명에 불과하였다. 이 여세를 몰아 그란 콜롬비아군은 카라카스를 점령하였고 한달 후에서는 마라카이보(Maracaibo)湖 전투에서 승리하며 11월에는 포르토 까베요까지 점령한다. 에스파냐인들은 그란 콜롬비아와의 협상 후 완전히 철수하였고 누에바 그라나다 총독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괴야낄 회동




산 마르틴이 리마를 점령하고 볼리바르가 카라보보에서 대승을 거둔 후 라틴아메리카에서 오직 현재 페루의 고원지대와 알토 페루(현재 볼리비아)만이 에스파냐의 땅으로 남아있었다. 남아메리카에서 에스파냐 세력을 무너뜨린 두 주역은 1822년 7월 26일에 에스파냐의 해군기지이자 조선소(造船所)가 있는 항구도시 과야낄(현재 에콰도르 Guayaquil)에서 만난다. 두 사람이 만났을 때 산 마르틴은 옛 잉카제국의 수도인 쿠즈코에 자리잡은 페루 총독 세르나를 공략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 산 마르틴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일단 싸움없이 리마에 너무 오래 머물게된 안데스 군단 병사들의 기강이 해이해지고 난동과 약탈이 심심찮게 발생하고 있었다. 칠레 해군을 지휘하여 안데스군단을 페루에 데려다준 코크란 함장은 봉급을 받지 못하자 함선들을 가지고 그대로 사라졌다. 건국의 이상이 아닌 ‘사업’으로서의 전쟁을 하는 용병의 한계였다. 아울러 산 마르틴의 동료이자 칠레의 독재자가 된 오히긴즈는 산티아고에서 거센 정치적 도전을 받아 그 정권이 흔들리고 있었다. 이 때문에 칠레로부터도 아무런 지원을 기대할 수 없었다. 그러나 산 마르틴은 무엇보다도 자신이 구상한 해방계획을 완수하고 싶었고 그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볼리바르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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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 볼리바르.


원래 산 마르틴은 과야낄을 점령하고자 하였으나 볼리바르의 수하인 26세의 청년장교 안토니오 수크레(Antonio Jose de Sucre)가 이미 점령을 한 상태였다. 볼리바르는 과야낄을 그란 콜롬비아에 포함시켰고 과야낄에서 그란 콜롬비아 대통령의 자격으로 산 마르틴을 맞았다. 후세에 과야낄 회동(Conferencia de Guayaquil)이라 명명된 이 모임에서 산 마르틴은 볼리바르에게 페루 고원에 있는 총독군을 공격하기 위한 병력지원을 요청하였다. 볼리바르는 원론적으로는 동의하였지만 산 마르틴이 기대하는 만큼 많은 병력을 주려 하지 않았다. 볼리바르의 반응이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자 산 마르틴은 심지어 페루원정 총사령관직을 볼리바르에게 제안하였고 자신은 그 지휘를 받겠다고 하였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임을 안 볼리바르는 이를 정중히 거절하였다, 그리고 산 마르틴인 페루를 입헌군주제 국가로 만들 수도 있다고 하였지만 뼛속까지 공화주의자였던 볼리바르는 이를 일언지하에 거절하면서 더 이상 라틴아메리카에 왕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맞섰다. 결국 산 마르틴은 자신이 원하는 것(전폭 지원)에 대한 확답을 얻지 못한체 그날 저녁 볼리바르가 주최하는 연회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큰 꿈이 좌절되었다는 생각에 산 마르틴은 도무지 연회가 즐겁지 않았고 술도 하지 않고 춤도 추지 않은 체 그날 밤 자신의 배로 돌아간다. 그리고 새벽에 출항하여 바로 산티아고로 향한다. 그리고 산티아고의 상황 역시 혼란스런 것을 목격하고는 가족을 데리고 유럽으로 향하게 된다. 남미의 독립 영웅이 스스로 전쟁을 포기한 것이다. 이제 싸움은 온전히 볼리바르의 것이었다.

어찌보면 에스파냐로서는 절호의 기회일 수도 있다. 1823년의 전황은 일단 왕당파에게 그다지 불리하지 않았다. 이해 처음 전투은 세로 데 파스코(Cerro de Pasco)에서 벌어졌는데 독립파가 승리하였다. 그러나 이카(Ica)지역에서 벌어진 전투에서는 왕당파가 승리하였고 왕당파는 토라타(Torata)와 모케구아(Moquegua)의 전투에서 고원으로 침투하는 독립파 병력을 연이어 격파했다. 그리고 현재 페루-볼리비아 국경인 푸뇨(Puno) 지역의 전투에서 독립군을 완파하면서 현재 볼리비아 행정수도인 라파즈(La Paz)를 점령한다. 산 마르틴이 페루에서 떠난 후 벌어진 정쟁(政爭)도 독립파의 발목을 잡았다. 대통령인 아구에로(Aguero)와 정적인 타글레(Tagle)는 서로를 반역자라고 부르며 페루 정부 내의 혼란을 부추겼다. 아구에로는 국회의원들을 쫓아내려 하였지만 의회는 도리어 그에게 국가반역의 죄를 물어 칠레로 추방하였다. 이에 볼리바르가 본격적으로 페루에 개입하였고 타글레는 아예 왕당파 쪽으로 붙어버린다.

상황이 이러하여 옛 총독인 세르나는 해안쪽으로 다시 진출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에스파냐 본국 개혁정부의 지지자인 세르나는 본국의 개혁정부가 무너지면서 골수왕당파인 올라네타라는 인물의 공격을 받는다. 결국 유리한 상황에서 에스파냐군내에 내분이 생긴 것이고 왕당파 지역의 경계를 경비하고 있던 병력들이 모두 집안 싸움에 동원되었다. 이에 볼리바르는 그란 콜롬비아군을 몰아 페루고원지대로 본격적으로 진입한다. 세르나의 지휘 하에 왕당파의 내분은 수습되고 고원지대로 진입하고 있던 수크레의 군을 다시 한 번 격파하지만 왕당파들은 내분에 너무 많은 힘을 소모하였고 외부지원의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이에 비하여 볼리바르는 대통령으로서 그란 콜롬비아의 국력을 총동원하여 전쟁을 수행하고 있었다.


아야쿠초 전투, 최후의 결정타




1824년 12월 9일에 약 8500의 그란 콜롬비아와 페루의 병력이 연합한 소위 ‘연합독립군’이 약 9000정도의 에스파냐 왕당파 병력을 아야쿠초에서 맞닥뜨리게 된다. 이 전투에서 왕당군은 약간 오르막에 포진하여 수비하다가 연합군이 진격해오자 오르막을 내려와 반격에 나섰다. 그러나 영국을 비롯한 외국 용병기병의 역격(逆擊)이 이어지면서 왕당군의 한쪽 날개가 완전히 무너졌고 왕당파 기병이 다시 공격을 하고자 하였으나 연합군 보병의 맹렬한 사격으로 돌격이 좌절되며 일제히 후퇴하였다. 연합군은 정면으로 총공격을 단행하여 전장에 남아있던 왕당군을 일제히 쓸어버린다. 오아당군은 무질서하게 후퇴하다가 더욱 큰 피해를 입게 된다. 전투가 끝났을 때 독립군의 사상자는 1천도 안되었지만 왕당군은 2천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3500명이 포로로 잡히면서 완전히 붕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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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야쿠초 전투도. 아래쪽이 왕당군, 위쪽이 독립군이다.


아야쿠초의 전투는 그야말로 결정타였다. 최후의 에스파냐 총독이 거느린 병력이 총체적인 붕괴 수준으로 대패한 것이다. 이제 독립군과 싸울만한 세력이나 병력은 어디에도 없었다. 고원지대에 몇몇 요새가 남아있기는 하지만 이들도 얼마 가지 않아 독립군에게 소탕되고 만다. 이 때문에 아야쿠초의 전투는 결국 라틴아메리카에서 에스파냐의 지배를 종식시키는 최종전투로 역사에 기록된다.


아메리카는 아메리카노들의 땅




에스파냐와 포르투갈로부터 독립했다고 하여 라틴아메리카의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예전보다 더한 정쟁과 반목이 이어졌고 한때는 독립의 영웅이었던 사람들이 편을 갈라 싸우기 시작하였다. 볼리바르가 세운 그란 콜롬비아는 여러 나라로 쪼개졌고 수십 년 후 파라과이와 아르헨티나/브라질이 큰 전쟁을 벌이게 된다. 빈부의 차이도 여전하였고 인디오들과 가난한 자들은 여전히 예전과 다르지 않은 차별을 받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라틴아메리카의 독립은 큰 의미를 지닌다. 유럽인들이 남북아메리카를 발견한 이래 아메리카를 식민지로 삼아 그들의 정치 경제 문화를 이식하였다. 유럽인들에게 아메리카는 분국(分國)이었고 자신들의 땅이었다. 그러나 유럽인들이 건설한 아메리카는 수백년이 지나면서 아메리카는 유럽과 서서히 다른 땅이 되어가고 있었고 사람들도 달라지고 있었다. 유럽인들과 다른 정체성이 생겨나면서 유럽인들의 지배와 멸시를 견딜 수 없었다. 분국과 식민지로서 차별이 당연시되는 상황을 고치고 싶었다. 북미의 아메리칸들이 먼저 유러피안들에게 맞서 독립하였다. 아이티의 흑인들도 독립하였다. 이를 중남미의 아메리카노들도 식민지배자들을 몰아내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고 목숨을 걸고 싸워 에우로페오(Europeo)들을 몰아냈다.

앵글로 아메리카 또는 라틴 아메리카의 그 누구도 아메리카의 형성에 유럽의 역할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유럽과 아메리카는 엄연히 다른 땅이 되었고 에우로페오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라틴아메리카가 독립했다고 당장 아메리카가 낙원이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후 발생하는 모든 문제는 아메리카노들이 스스로 해결해야하는 문제가 되었다. 라틴아메리카는 에우로페오들과 싸워 독립한 것은 단 한 가지를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바로 아메리카는 아메리카노들의 땅이며 에우로파(Europa)의 ‘가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참고문헌

[The Cambridge History of Latin America Vol. 3], From Independence to 1870; Archibald Alison, [The History of Europe Vol. 14], From the Commencement of the French Revolution to the Restoration of the Bourbons; Timothy E. Anna , [Spain and the Loss of America]; John Charles Chasteen, [Americanos]; Paul K. Davis, [Besieged: 100 Great Sieges from Jericho to Sarajevo], [100 Decisive Battles]; Marc Ferro, [Colonization: A Global History]; J.B.Trend, [Bolivar and the Independence of Spanish America]





김성남 | 안보·전쟁사 전문가
글쓴이 김성남은 전쟁이 인간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가지고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미국 UC 버클리 동양학과를 졸업한 후 연세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국제학 석사를 받고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에 진학하여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 [전쟁으로 보는 삼국지], [전쟁 세계사] 등이 있으며 공저로 [4세대 전쟁]이, 역서로 [원시전쟁: 평화로움으로 조작된 인간의 원초적인 역사]가 있다.


발행2013.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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