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히타이트 이집트 조약 - 고대 오리엔트의 평화를 가져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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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91회 작성일 16-02-07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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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한 번째 해에, 첫 번째 달의 스물한 번째 날에, 상 이집트와 하 이집트의 지배자이신 라우세르마 왕의 치세에, 태양에게 집권을 허락받으신 분, 태양의 아들이신 라메스 메리아멘, 영원한 삶을 사시며 영원히 존재하실 분, 아멘라-하르마추 신의 사랑을 받으시는 분, 멤피스의 프타 신, 아셰루의 여신 무트, 첸수네페르호테프의 가호를 받으시는 분, 호루스의 옥좌를 계승하신 분, 아버지이신 태양처럼 영원토록 빛나실 분의 치세에……”


이집트의 카르낙 신전 벽면에 새겨져 있는 약 40줄 가량의 문서는 이렇게 시작된다. 그 문서는 람세스 2세의 장례를 위해 건설된 라메세움의 벽에도, 아부심벨 신전에도 남아 있고, 그보다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옛 히타이트의 수도, 하투샤의 유적지에서 발굴된 점토판에도 남아 있다. 두드러지게 다른 점이 있다면 이집트의 문서는 ‘히에로글리프(Hieroglyph)’로 불리는 이집트 고유의 신성문자로 적혀 있고, 히타이트의 문서는 쐐기문자로 적혀 있다는 점, 그리고 히타이트 문서에는 이렇게 이집트 파라오를 찬양하는 미사여구로 시작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세기의 대결과 세계 최초의 평화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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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박물관(The British Museum)에 전시되어 있는 람세스 2세의 거대한 흉상. <출처: (cc) Mujtaba Chohan at en.wikipedia.org>



기원전 13세기. 서양문명의 뼈대를 이룬 그리스와 로마는 아직 모습을 찾을 수 없고, 동양에서도 고조선과 은나라 정도만 볼 수 있던 시절, 지금의 시리아와 터키 국경 인근에 있는 카데시(Qadesh)라는 마을 근처에서는 오리엔트 세계의 패권을 놓고 두 강대국이 일대 격돌을 벌였다. 그리고 갈등을 되풀이하던 끝에, 전투 이후 16년 만에 평화조약을 맺었다. 이는 오늘날 자료가 남아 있는 것으로는 세계 최초의 평화조약으로 여겨진다.

나일 강변의 비옥한 토지를 중심으로 세워진 이집트는 수천 년 동안 남쪽으로는 나일 강의 상류를 거슬러내려가 수단 지방으로, 북동쪽으로는 시나이 반도를 지나 아시아의 땅으로 영토 확장을 꾀해 왔다. 기원전 15세기에서 11세기까지의 ‘신왕국 시대’에는 아시아 땅에 대한 공략이 특히 활발하여, 팔레스티나와 레바논이 대체로 이집트의 영토였을 뿐 아니라 18왕조의 세티 1세 때는 아나톨리아까지 바라볼 수 있는 요충지인 카데시까지 손에 넣게 된다.

하지만 아시아에서도 강력한 종족과 국가가 잇달아 나타났으며, 그 중 하나가 아나톨리아에서 발생, 철제 무기와 뛰어난 기병대-전차병대를 앞세워 한때 오리엔트 아시아의 패자로 떠올랐던 히타이트였다. 히타이트의 눈에 이집트의 아시아 진출은 큰 위협이었다. 그리하여 무와탈리스 2세는 수도를 하투사에서 남쪽인 타르훈타사로 옮기고, 카데시를 회유하여 다시 히타이트의 땅으로 만들었으니, 이는 세티 1세의 아들이며 정복왕의 야심을 품고 있던 람세스 2세를 자극, 마침내 세기의 결전이 벌어지지 않을 수 없도록 한다.

카데시 전투는 기원전 1274년(? 1286년설 등 다양한 설이 있음), 람세스 2세가 4개 군단의 2만여 병력을 이끌고 카데시로 향하고, 무와탈리스가 5만의 병력으로 맞섬으로써 벌어졌다. 무와탈리스가 흘린 거짓 정보에 속은 람세스는 오론테스 강을 건너며 병력을 절반으로 분단시키는 실수를 저질렀다. 이 천재일우의 기회에 히타이트군이 기습 공격에 나서고, 람세스는 죽거나 포로로 잡힐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무와탈리스가 지나친 신중함으로 전력을 한꺼번에 투입하지 않고 있는 동안에, 이집트군의 후속 병력이 전장에 합류해 버렸으며 히타이트는 전투 초기의 압도적 우위를 더 이상 지킬 수가 없었다. 결국 람세스는 무사히 강을 건너 후퇴했고, 두 진영은 오론테스 강 양편에서 얼마간 대치하다가 각자 발걸음을 돌려 귀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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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를 공략하는 람세스를 2세를 묘사한 벽화.



이처럼 세기의 결전은 전투 면에서는 무승부로 끝났고, 전략적으로는 목표인 카데시 탈환에 실패한 이집트의 패배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람세스는 이를 자신의 영웅적인 승리로 미화하고 날조하여 선전했다. 그는 질래야 질 수 없는 자, “태양처럼 영원히 빛날”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당시는 지금처럼 매스컴이 발달해 있지 않았다. 그래서 나라 밖 저 멀리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백성들이 잘 모르게 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람세스는 마치 걸프전에서 “승리했다”고 허풍을 떨던 사담 후세인처럼 스스로를 영웅시하는 한편, 그 영웅담을 사실로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아시아로 병력을 보냈다. 히타이트는 그 도전을 매번 떨쳐냈지만, 그러는 사이에 정세가 바뀌어 가고 있었다.

무와탈리스는 카데시 전투 2년 만에 병사했으며, 왕좌는 그 아들인 무르실리스 3세가 이어받았다. 아직 나이가 어렸던 그는 아버지 때부터 정치적 영향력이 막강했던 숙부 하투실리스를 북부 지방의 총독으로 임명하여 왕궁에서 떨어트려 두려고 했다. 하지만 하투실리스는 기원전 1267년경에 쿠데타를 일으켜, 조카를 왕위에서 끌어내리고 하투실리스 3세로 등극했다. 그러나 아직도 무르실리스를 지지하는 세력이 만만치 않았으므로, 하투실리스는 조카가 자신에게 했던 그대로 무르실리스를 남쪽 지방의 총독에 임명해 내보내고, 암암리에 암살할 계획까지 세웠다. 이에 무르실리스는 이집트로 망명, 람세스 2세에게 의탁해 왕위를 되찾으려 했다. 이집트는 하투실리스를 히타이트 왕으로 인정하지 않으며, 또다시 전쟁을 일으키되 이번에는 무르실리스를 앞세워 ‘히타이트의 찬탈자를 징벌한다’는 명분까지 내세울 판이었다.

이렇게 곤란해진 하투실리스는 엎친 데 덮치는 격으로 아시리아의 압박까지 고민해야 했다. 신흥 강대국인 아시리아는 바빌로니아를 집어삼키고 시리아까지 치고 들어와, 서서히 쇠퇴기로 접어들고 있던 히타이트의 가장 강력한 위협이 되고 있었다. 앞에도 적, 뒤에도 적, 어찌할 것인가? 하투실리스는 마침내 결단을 내린다.



조약문에 담긴 왕들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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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타이트의 수도, 하투샤(Hattusa)의 유적. 현재 터키 북동쪽에 있다. <출처: (cc) China_Crisis at en.wikipedia.org>




“하티(히타이트)의 위대한 왕자, 하티시리(하투실리스)가 왕께 사신을 보내셨다. .....은으로 만든 판을 들고 온 사신들은...... 라우세르마 왕, 태양에게 집권을 허락받으신 분, 태양의 아들이신 라메스 메리아멘, 아버지이신 태양처럼 영원토록 빛나실 분...... 왕 중의 왕이시며, 그 뜻대로 세상의 모든 땅을 정복하실 수 있는 분께, 평화를 요청하였다.”


기원전 1258년(?)에 이집트의 피람세스로 찾아온 하투실리스의 사신은 글씨가 새겨진 은 판을 람세스에게 내밀었다. 바로 히타이트-이집트 조약(카데시 협정이라고도 한다)의 초안이었다. 하투실리스는 앞뒤의 적 중 하나와 화해하고 다른 적을 공동 대처한다는 합리적인 판단을 내렸다. 람세스도 이를 마다하지 않았는데, 아시리아에게 히타이트가 쓰러지면 자칫 이집트까지 그 말발굽에 짓밟힐지 모르고(그것은 그로부터 약 5백 년 뒤에 실현된다), 과장된 선전으로 백성을 현혹하는 일에도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람세스 입장에서는 아시아 정복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면 ‘히타이트가 간청한 평화를 너그러이 받아들였다’는 모습을 연출하는 식으로 신화에 마무리를 지을 수 있었다. 그래서 람세스는 이 조약문을 왕궁의 문서고에 처박아두지 않고, 신전 벽면에 보란 듯이 새겨 과시의 수단으로 활용했다. 그리고 히타이트본에는 없는 서문이 람세스를 극찬하는 내용을 담아 덧붙여지고, 본문의 표현도 약간 수정되어 히타이트본에서는 람세스와 하투실리스가 모두 ‘왕’으로 표현된 반면 이집트본에서는 람세스는 ‘왕’, 하투실리스는 ‘왕자’로 차등 있게 표현되었다. 하지만 조약의 본질적인 내용에는 차이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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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에 남아 있는 히타이트본 조약문. 1906년 터키 보가즈쾨이(Bogazköy)에서 발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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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카르나크 신전 벽면에 새겨진 이집트본 조약문. <출처: (cc) Gudrun Meyer at de.wikipedia.org>




“이제부터 영원토록, 평화와 우정이 함께할 것이다. ....이 협약에 따라, 이집트의 위대한 왕과 하티의 위대한 왕자는, 이제부터 서로를 적대시하지 않을 것을 신들께 맹세한다. ....하티의 위대한 왕자는 영원히 이집트의 땅을 침략하지 않으리라. 이집트의 위대한 왕은 영원히 하티의 땅을 침략하지 않으리라.”


상호불가침 원칙과 기존의 양국 국경선을 인정하는 원칙(이로써 결국 카데시는 히타이트의 영토로 굳어졌다)을 확인한 다음에는 쌍무적 방위동맹 원칙이 명시되었다.


“만약 어떤 적이 이집트의 위대한 왕, 라메스 메리아멘의 땅을 침범한다면, 그의 요청에 부응하여, 하티의 위대한 왕자는 그 적을 공격할 것이다. ....만약 어떤 적이 하티의 위대한 왕자의 땅을 침범한다면, 이집트의 위대한 왕, 라메스 메리아멘은 그 적을 공격할 것이다.”


이어서 두 국가의 중요 인물이나 도시가 배반하여 상대국에 망명 또는 투항할 경우, 양국은 이를 받아들이지 말아야 하며, 도망쳐 온 인물을 곧바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조항이 나온다. 그리고 이집트와 히타이트 땅에 존재하는 수 천의 신들에 대한 맹세의 문구가 나오는데, 이집트본에서는 웬일인지 그 뒤의 내용이 심하게 훼손되어 있다. 그래서 히타이트본을 보면, 하투실리스의 입장에서 매우 중요한 내용이 나온다.


“히타이트의 왕 하투실리스의 아들은 그의 아버지를 이어 왕위에 오를 것이다. 만약 그에 반대하는 무리가 있다면, 이집트의 왕 람세스는 그들을 징벌하고자 보병대와 기병대를 보낼 것이다.”


국제조약의 조항치고는 좀 어색한 이 내용은, 하투실리스가 람세스와 평화조약을 맺기로 결심한 이유가 국가의 안전 말고도 개인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서였음을 잘 드러낸다. 쿠데타로 조카의 왕위를 빼앗았으므로 늘 정통성 시비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또 누군가가 자신이 하던 그대로 손을 써서 쿠데타나 암살로 자신의, 또는 자신의 후계자의 왕위를 빼앗을지 모른다는 걱정이 늘 그를 따라다녔다. 그래서 앞서 망명자는 본국으로 송환한다는 조항을 두어 이집트에 피신해 있던 무르실리스를 다시 손에 넣고, 앞으로도 안심할 수 있도록 이집트의 힘을 빌리려 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 조약은 히타이트 쪽이 좀 더 아쉬워 맺은 조약이 되며, 하투실리스가 조약 체결 뒤에 막대한 지참금과 함께 맏딸을 람세스의 후궁으로 보낸 사실은 이 점을 뒷받침한다. 이로써 이 조약을 우상화에 더 잘 이용할 수 있게 된 람세스는 무르실리스의 송환은 끝까지 거부하면서도(따라서 조약을 일부 어긴 셈이다) 하투실리스가 무사히 권력을 계승할 수 있도록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그리고 조약에 명시된 대로 이집트와 히타이트는 다시는 전쟁을 벌이지 않았으며, 이후 히타이트가 지중해 쪽에서 나타난 “바다의 민족들”(그리스, 이탈리아인들의 선조라 여겨진다)의 공격을 받고 사실상 패망하는 기원전 1180년 무렵까지 오리엔트는 비교적 오랜 평화를 누린다. 이 평화조약과 이집트-히타이트 동맹이 아시리아에 확실한 억제 효과를 발휘했던 셈이다.



문명인의 방식으로 평화를 이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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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타이트의 부조에 묘사된 “열 두 신들의 행진” <출처: (cc) China_Crisis en.wikipedia.org>



히타이트-이집트 조약은 서문은 물론 협정문의 단어 하나하나까지 신중하게 합의, 선택되어 오직 하나의 판본만이 존재해야 하는 오늘날의 조약과는 달리 조약문의 표현에 아전인수적인 면이 있었다. 또 그것은 국가간의 협약이라는 성격과 군주간의 개인적 약속이라는 성격을 공유했으며, 그 내용 가운데는 부분적으로 끝내 지켜지지 않은 조항도(상대국 출신 망명자의 무조건적 송환) 있었다. 그러나 그 대부분은 오직 힘만이 정의라고 할 수 있던 고대 세계에서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오랫동안 준수되었고(이후 그리스나 로마의 조약들은 사정이 조금만 달라지면 파기되기 일쑤였다. 그런 모습은 현대에도 드물지 않다. 가령 1939년의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은 2년 뒤 독일이 소련을 공격하면서 깨졌다. 또 1990년대에 북한은 핵개발을 시작하여, 1991년의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깨트렸다), 두 나라는 물론 주변 국가들에게 오랜 동안의 평화를 선물했다.

그리고 그때까지의 ‘조약’들이 대체로 승자가 패자에게 일정한 요구를 이행토록 강제하는 종속조약이었던 반면, 이 조약은 평등한 주체가 상호인정ㆍ상호불가침ㆍ호혜평등 등의 원칙에 합리적으로 합의한 평등조약이었다. 그것은 오늘날의 국제정치에서도 존중되어야 할 원칙들을 담고 있으며, 따라서 이 조약문의 복제본이 유엔본부에 비치되어 있기도 하다. “주먹보다는 대화로”, “서로의 입장에서 생각하며 한 발짝씩 양보를”과 같은 문명인의 갈등 해결 방식이 까마득히 먼 옛날, 중동의 땅에서도 있었으며, 그에 따라 맺은 약속과 화해는 “서로의 땅에 존재하는 수 천의 신들”에 의해 영원히 보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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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규진 | 서울교육대학교 교수/역사저술가
글쓴이 함규진은 여러 방면의 지적 흐름에 관심이 많다. 정치학을 전공하여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주로 역사와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썼고, 인물이나 사상에 대한 번역서도 많이 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등 서로 대립되는 듯한 입장 사이에 길을 내고 함께 살아갈 집을 짓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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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도서
조약의 세계사 2014.12.22
고대부터 현대까지 64개의 조약으로 읽는 화해와 배신, 강압과 화합 그리고 진보의 역사.

‘지뢰는 과연 쓸모 있는 무기일까?’, ‘난징 조약은 불평등조약인가?’와 같은 흥미로운 물음을 던지며 세계사의 이면을 파고들어 역사와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을 넓힌다. 강화도 조약과 같이 우리 역사 속 조약부터 마스트리히트 조약처럼 생소한 조약, 고대의 히타이트-이집트 조약에서부터 현대에 체결된 리우환경협약까지 역사의 흐름을 바꾸고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계를 형성한 조약을 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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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2013.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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