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베르됭 조약 - 근대 서유럽의 테두리가 그려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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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99회 작성일 16-02-07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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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왕께서 승하하신 뒤로 저 ‘로타르’가 나와 내 아우를 파멸시키려 무슨 짓을 했던지! 우리를 뒤쫓으며 어떤 학살을 저질렀던지! (……) 우리는 그에게 이겼으나, 형제애와 기독교인의 자애에 따라 그를 뒤쫓아 파멸시키려 하지 않았다. 다만 그가 범한 일에 대해 배상을 요구했을 뿐. 하지만 그는 하느님의 심판에도 굴하지 않고 나와 내 아우를 공격하기를 멈추지 않고 있다…….”

842년, 서유럽을 제패하고 카롤링거 제국을 세웠던 샤를마뉴(Charlemagne)의 손자 두 사람이 스트라스부르에 모였다. 그리고 숙의(熟議: 깊이 생각하여 충분히 의논함) 끝에, 형인 루이(루드비히)가 먼저 동생인 샤를(카를)과 두 사람을 따라온 병사들 앞에서 이렇게 엄숙히 연설했다. 그가 말을 마치자 샤를이 똑같은 말을 했는데, 다만 루이는 게르만어로, 샤를은 로망어(라틴어의 방언으로, 프랑스어의 전신)로 똑같은 내용을 말했다. 다음에는 다시 루이의 차례였다.


“하느님의 사랑과, 기독교 나라와, 우리 모두의 안녕을 위하여, 오늘부터 나는, 하느님이 주신 지혜와 힘으로써, 내 아우 샤를을 전적으로 도울 것이다. 그것은 형제로서 마땅히 할 일이며, 그가 나를 똑같이 도울 수 있게 해주는 일이다. 나는 내 아우 샤를에게 해가 될 수도 있는 협약은 ‘로테르’와 결코 맺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맹세했는데, 이번에는 로망어였다. 앞서 로타르(Lothair)라고 불렀던 그들의 형이자 공동의 적의 이름도 로테르(Lothaire)가 되었다. 다시 샤를이 형이 말한 내용을 그대로 따라하며(다만 ‘내 아우 샤를’ 대신 ‘내 형 루드비히’라고만 고쳐서) 앞서와는 반대로 자신이 게르만어를 썼다. 그리고 두 사람을 따라온 병사들은 이들의 맹세가 반드시 지켜지도록 돕겠다고 각자의 언어로 서약했다. 연설문, 맹세문, 서약문 모두는 로망어와 게르만어, 그리고 라틴어로 작성되어 후세에 남겨졌다.



영웅이 떠난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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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2년, 베르됭 조약에 앞서 체결되었던 스트라스부르 맹약문. 카롤링거 왕조의 두 형제, 독일왕 루이와 샤를 사이에 맺어진 이 맹약은 2개 국어로 읽히고, 3개 국어로 남겨졌다.



그들은 왜 한 집안의 형제이면서 똑같은 말을 2개 국어로 번갈아 하고, 3개 국어로 남기는 번거로운 일을 했는가. 그리고 왜 똑같이 형제이며 기독교도인 로타르(로테르)를 상대로 하느님과 형제애를 운운하며 싸울 것을 맹세했는가? 그 까닭은 베르됭 조약을 예비했다고 볼 수 있는 이 ‘스트라스부르 맹약’의 역사적 의미와 연관되어 있었다.

814년, 샤를마뉴가 죽었다. 당시 그의 프랑크 제국은 동서로 엘베 강에서 피레네 산맥까지, 남북으로 지중해에서 발트해까지 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제국의 실체는 겉보기만큼 부강하지는 않았다. 황제가 직접 세금을 거둘 수 있는 땅은 수도인 아헨(Aachen) 일대에 불과했으며, 제국을 운영하는 수입은 이슬람-비잔티움 사이의 중계무역에서 주로 나왔다. 그리고 지방 영주들이 제국에 충성하도록 끊임없는 정복 사업을 통해 새 땅을 얻고, 그 땅을 영주들에게 새 봉토로 나누어 주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 황제는 수도에서 쉴 틈이 없이 동서남북을 돌아다니며 정복 전쟁을 벌이고 지방 세력을 감시해야 했는데, 샤를마뉴처럼 보기 드문 영걸(英傑)이 아닌 다음에는 좀처럼 따라할 수 없는 생활이었다. 게다가 9세기 들어 이슬람과 비잔티움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지면서 굳이 프랑크를 거치지 않더라도 무역이 가능해졌고, 그것은 제국의 앞날을 더욱 어둡게 했다. 그리고 이런 문제점을 가중시킨 것이 노르만, 이슬람 등의 침공, 그리고 무엇보다도 프랑크족 전통의 분할상속제도였다.

모든 왕조는 후계자 문제로 골치를 앓기 마련인데, 중국이나 조선을 비롯한 많은 나라가 채택했던 맏아들 우선 제도, 몽골족의 막내아들 우선 제도, 만주족이나 튀르크의 후계자 경쟁 제도 등이 각각의 장점과 단점을 가지고 운용되어 왔다. 그런데 프랑크족은 분할상속제도라 하여 아들들에게 재산을 갈라 나눠주는 전통이 있었고, 부족을 넘어 국가를 경영한 뒤에도 그 전통을 고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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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헨 성당에 있는 샤를마뉴의 옥좌. 이후 동프랑크, 그리고 독일 왕들도 이 옥좌에서 즉위식을 가졌다. <출처: (cc) Bojin at en.wikipedia.org>



이러면 상속에서 소외되는 왕자가 없으니 좋을 것도 같지만, 기껏 정복 전쟁을 벌여 나라를 크게 키워 놔봤자 다음 대에는 몇 개로 쪼개지기 마련이었다. 샤를마뉴의 카롤링거 왕조에 앞섰던 메로빙거 왕조도 그에 따라 분열과 통일을 반복했다. 다른 후계자들이 죽으며 남은 형제에게 영토를 상속해 줌으로써, 또는 형제끼리의 싸움으로 잠시 통일이 이루어졌다가 얼마 뒤 통일 군주가 죽으면 다시 분열이 찾아오는 식이었다. 또 자신에게 분할된 영토가 불만인 경우도 많았으므로, 갈등의 소지는 그치지 않았다.

갈리아와 게르만, 그리고 이탈리아 북부까지 통합하고 교황에게서 ‘서로마 황제’로 인정받은 샤를마뉴도 이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래서 일단 806년에 세 아들에게 영토를 분할해 주겠다고 언급했지만(그에 따르면 맏아들 샤를은 지금의 프랑스 북부와 독일 북부를, 둘째 피핀은 이탈리아와 독일 남부를, 막내 루이는 프랑스 남부와 스페인의 일부를 다스리게 되어 있었다), 황제의 지위를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피핀이 810년에, 샤를이 이듬해에 죽자 루이에게 황제의 지위와 제국 영토 대부분을 물려주기로 결심했다(다만 이탈리아는 피핀의 아들인 베르나르에게 주었다). 그래서 813년에 그를 공동황제로 옹립하고, 이듬해에 늑막염으로 세상을 떠난다.



끝없는 골육상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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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에게 무릎을 꿇고 참회하는 ‘경건왕’ 루이. 이 행동은 그의 두터운 신앙심을 확인시켜 주었지만, 정치적으로는 그의 권위에 악영향을 미쳤다.



카롤링거 프랑크 제국의 제2대 황제가 된 루이(루트비히 1세)는 왕자 시절에는 혼자 힘으로 바르셀로나를 공격해 점령할 만큼 강단이 있는 사람이었으나, 나이가 들수록 전쟁을 싫어하고 신앙에 의지하려는 성향이 되었다.그래서 부왕이 끊임없이 일으켰던 정복 전쟁을 일체 그만둬 버리자, 백성들로서는 한숨을 돌렸을지 몰라도 제국을 유지하던 영주와 기사들은 불만이 솟구쳤다.

루이의 그런 성향은 817년의 ‘제국 칙령’과 뒤이은 ‘베르나르 사태’ 이후 더 짙어졌다. 그는 우연한 사고로 목숨을 잃을 뻔하자 만약을 대비해야겠다는 생각에서 제국 칙령을 내려 후계자 구도를 수립했는데, 황제의 지위와 대부분의 영토는 장남 로타르에게 물려주고 차남인 피핀에게는 아키텐을, 삼남인 루이2세에게는 바이에른을 물려준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결정은 조카인 이탈리아의 베르나르에게 불편했으며(삼촌은 물론 조카까지 황제로 받들라는 소리였으니), 그는 루이 황제에게 대항하려는 뜻을 비쳤다. 그러자 루이는 곧바로 대군을 일으켜 이탈리아로 진군했는데, 겁에 질린 베르나르가 항복하자 그의 눈을 뽑으라는 명령을 내렸고, 베르나르는 그 후유증으로 죽고 말았다. 제국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어쩌면 불가피한 조치였지만, 루이 황제는 이후 죄책감에 끝없이 시달리게 되었다. 그래서 822년에는 로마 교황에게 찾아가 무릎을 꿇고 통렬한 참회를 했는데, 이는 황제의 위신을 스스로 포기한 것이라 하여 프랑크 귀족들에게 한층 실망을 주었다. 아무튼 이후 루이는 점점 정치에서 손을 떼고 신앙에만 몰두하여 ‘경건왕’이라는 별명까지 얻게 되지만, 제국은 걷잡을 수 없는 갈등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823년, 루이는 후비에게서 넷째 아들을 얻는다. 훗날 ‘대머리왕’ 샤를이라고 불리게 될 왕자였다. 뜻밖의 이복동생 출생에 로타르 등은 당황했다. 로타르는 잘못하면 제국 칙령에 따라 배분된 상속분이 바뀔지도 모른다고 염려했으며, 다른 왕자들도 그랬지만 그들은 은근히 로타르가 대부분을 차지해 버린 제국 칙령 자체에도 불만이 있었다. 루이가 늦둥이를 유독 귀여워하며 로타르의 영지를 일부 떼어주기로 함으로써 우려가 현실화되자, 결국 그들은 손을 잡고 830년에 반란을 일으켰다. 약 백 년 뒤인 935년에는 멀리 한반도의 후백제에서 부왕 견훤(甄萱, 867~936)이 늦둥이 이복동생 금강을 편애하는 것에 자극받은 신검, 양검, 용검 형제들이 반란을 일으키게 되는데, 그 비슷한 일이 서유럽에서도 벌어진 것이다. 이 ‘제1차 왕자의 난’은 루이 황제가 더 많은 땅을 미끼로 피핀과 루이2세(‘독일왕’ 루이)를 설득함으로써 1년 만에 진압되었으나, 이듬해에 다시 2차 반란이 터진다. 이번에는 루이 황제를 사로잡아 강제 퇴위시키고 감금하는 데 성공, 왕자들의 반역은 성공하는 듯했다. 그러나 다시 동생들이 배신, 루이 황제가 복위하고 로타르의 영지 대부분을 샤를에게 넘겨주는 것으로 반전된다.

그리고 다시 반전. 837년에 루이 황제가 상속분을 조정하면서 독일왕 루이의 영지를 일부 샤를에게 떼어 주고, 838년에 피핀이 죽으니 그의 영지 대부분도 샤를에게 넘긴다고 하자 피핀의 후계자인 피핀2세와 독일왕 루이가 ‘제3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그러자 이번에는 앞서의 난에서 주동자였던 로타르가 부왕과 합세했다. 그리하여 피핀2세와 독일왕 루이를 배제하고 제국을 동서로 갈라 동쪽은 로타르, 서쪽은 샤를이 갖는다는 조건으로 옛 전우인 동생과 조카를 격퇴했다. 세 번째의 난을 진압한 경건왕 루이는 급속히 건강이 나빠졌으며, 840년에 숨을 거뒀다. 그것은 또 다른 분쟁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마침내 베르됭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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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마뉴의 맏손자인 로타르 1세. 제국 전체에 군림하려던 그의 욕심이 결국 베르됭 조약을 낳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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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머리왕’ 샤를. 실제로 그는 대머리가 아니었으나, 루이 경건왕의 왕자로 태어났을 때 물려받을 영지가 하나도 없었으므로 ‘땅이 없는’ 샤를이라고 부르던 것이 와전되었다는 말이 있다.



로타르는 제3차 왕자의 난으로 정해진 판세에 만족하는 편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았으며, 아버지가 샤를마뉴에게 이어받은 황제의 위상, 곧 제국 전체에 군림하는 영광을 꿈꿨다. 그래서 817년의 제국 칙령을 다시 들먹이며 그 사이에 자신을 비롯한 왕자들의 반란과 부왕의 변덕으로 수도 없이 다시 만들어진 영토 분할안을 일체 무효로 하고, 자신이 3대 황제로서 제국에 군림하며 영토의 대부분을 차지하겠노라 선언한다.

당연히 대머리왕 샤를은 반발했으며, 로타르는 제3차 왕자의 난에서 패해 영지가 없는 처지이던 피핀2세에게 ‘제국 칙령에 따라 네 아버지에게 주어졌던 아키텐을 주겠다’고 유혹해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며 샤를을 압박했다. 그러자 샤를도 앞서의 적이었던 이복형 독일왕 루이와 손을 잡고 맞섰다. 이렇게 골육상쟁은 다시 한 번 판을 바꿔 짜서 재개되었으며, 841년 6월의 퐁트누아 전투에서 로타르는 분전했으나 동생들에게 참패해 달아났다. 그리고 승리한 루이와 샤를은 842년에 각자의 군대를 이끌고 스트라스부르에서 만나, ‘맹약’을 맺었던 것이다. 퐁트누아 전투 이후 기세가 꺾인 로타르는 협상을 요구했으며, 아마도 수십 년 동안 이 집안 사람들이 줄곧 그랬듯 두 동생 사이를 갈라놓고 판을 새로 짜려고 공작했겠지만, 그것에 대비해 ‘맹약’을 맺어둔 것인지라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결국 로타르가 동생들의 요구를 뭐든 받아들이겠다고 나옴으로써, 베르됭 조약이 이루어지게 된다. 843년 8월이었다.



• 로타르는 황제의 칭호를 유지하되, 자신의 영지 밖에서 주군으로 군림할 수 없다. 그의 영지는 프리시아, 알레마니아의 라인 강 서쪽 지역, 부르고뉴의 론 강 동쪽 지역, 프로방스, 이탈리아이다. 제국 수도인 아헨과 로마도 그의 영지에 속한다.


• 루이는 로타르의 영지 동쪽 지역을 다스린다. 작센, 아우스트라시아, 알레마니아의 라인 강 동쪽 지역, 바이에른이다.


• 샤를은 로타르의 영지 서쪽 지역을 다스린다. 네우스트리아, 아키텐, 가스코뉴, 셉티마니아, 부르고뉴의 론 강 서쪽 지역이다.


• 피핀2세는 아키텐을 다스리되, 샤를을 주군으로 섬긴다.



조약에 담긴 역사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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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됭 조약으로 삼분된 프랑크 제국. 붉은색이 샤를의 서프랑크, 녹색이 로타르의 로타링겐(로타르 왕국), 노란색이 루이의 동프랑크로, 오늘날의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의 틀이 이때 만들어졌다.



이렇게 해서 오늘날의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의 틀이 생겨났다고 한다. 하지만 거기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살펴보면 고개를 갸웃거릴지도 모른다. 그렇게까지 의미심장한 역사적 순간이었던 것 같지가 않기 때문이다. 분할상속제의 맹점에 따라 부자, 형제간에 끝없이 되풀이되어 온 땅따먹기 싸움, 그 한 결과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닌가? 가령 독일왕 루이는 스트라스부르 맹약에서 그토록 엄숙하게 하느님과 형제애를 들먹이며 샤를과 운명을 함께 하겠노라 했지만, 불과 3년 전에는 로타르와 손을 잡고 샤를과 죽도록 싸웠으며, 12년 전에는 샤를만 편애한다 하여 아버지에게까지 칼을 들이대지 않았던가?신의가 없기로는 샤를도 로타르도 다르지 않다. 그들이 철이 들고 말을 탈 줄 알기 시작한 이래, 서로 뻔질나게 편을 바꾸어 어제의 형제가 오늘은 원수가 되고, 내일은 다시 동지가 되는 장면을 연출한 것이 몇 번인가? 분명 베르됭 조약에 따른 영토 재분배는 샤를이 종전의 ‘제3차 왕자의 난’ 진압 후 확보한 서프랑크 영지를 다시 확보하고, 로타르의 영지 가운데 상당 부분을 루이가 얻어낸 것, 그 이상이 아닐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의미심장한 부분이 있다. 메로빙거 왕조 이래 모든 영토 싸움은 일방적인 선언과 전쟁으로만 결론이 났었다. 그러나 그런 일을 수없이 되풀이하다 보니 귀족도 평민도 지칠 대로 지쳤고, 지금은 결론이 났어도 언제 또 상황이 바뀔지 모르기에 불안이 그치지 않았다. 그래서 ‘맹약’, 그리고 ‘조약’이라는 형태로, 일단 이루어진 결론을 서로 확인하고, 신과 신하들과 만백성 앞에 공포함으로써 이를 안정시키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영토 분할이 그전처럼 “알레마니아는 누구에게, 부르고뉴는 누구에게” 식으로 지역 단위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알레마니아의 라인 강 동쪽은 누구에게, 서쪽은 누구에게” 식으로 지리적 경계로 이루어진 것도 특기할 만하다. 왜 그렇게 했을까? 스트라스부르 맹약에서 루이와 샤를은 똑같은 맹약문을 로망어와 게르만어로 되풀이해 읽었다. 루이가 데리고 온 병사들은 대부분 게르만어만 알아들었고, 샤를의 병사들도 로망어 말고는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메로빙거 이래 프랑크족은 수많은 부족과 종족을 무력으로 지배하고 있었지만, 전쟁을 거듭하다 보니 프랑크족만으로는 싸울 수 없고 지역의 피지배층을 동원하게 되었다. 게다가 프랑크족 자체도 각 지역민들에게 동화되어 갔다. 그래서 갈리아 지역에서는 로망어만 쓰이고, 게르만 지역에서는 게르만어밖에 모르는 상황이 되었던 것이다. 군대라는 조직이 서로 쓰는 말이 다르다면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없다. 따라서 대체로 큰 강이나 산맥으로 나뉘는 자연적인 언어와 문화의 경계에 따라 영토 분계선도 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직 프랑스나 독일의 민족의식 같은 것은 없었으나, 그 시초를 일굴 만한 테두리가 비로소 그어졌던 것이다.

그것은 북쪽의 프리시아(지금의 ‘저지대 국가들’, 즉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에서 서부 알레마니아(지금의 알자스-로렌. 로렌은 로트링겐, 즉 ‘로타르의 왕국’에서 나온 말이다), 동부 부르고뉴, 이탈리아로 이루어지는 매우 괴상하게 길다란 영토가 로타르의 몫이 된 까닭도 설명해 준다. 보통의 경우라면 이렇게 교통도 불편하고 방어하기도 힘든 국경을 설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루이와 샤를이 각각 게르만계와 로망계가 짙은 지역을 중심으로 영토를 나누다 보니 어중간한 지역이 그처럼 남겨졌다. 또한 로타르의 불만을 무마하고자 명목상의 황제 지위를 주면서 제국의 수도인 아헨과 로마가 모두 그의 손에 돌아가게끔 한다는 점도 고려되었다.



보통 사람들이 세운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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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뚱보왕’ 카를. 독일왕 루이의 아들로 동ㆍ서 프랑크를 한때 하나로 합쳤지만, 그것을 유지할 기량은 없었다.



베르됭 조약은 프랑크 왕조의 영토 변경사에 종지부를 찍지는 못했다. 855년에 로타르가 죽자, 그의 왕국은 그의 세 아들에 의해 삼분되었다. 프륌 조약으로, 루도비코는 황제위와 함께 이탈리아를, 로타르2세는 프리시아와 알레마니아를, 샤를(프로방스의 샤를)은 부르고뉴와 프로방스를 차지했다. 그리고 프로방스의 샤를이 863년, 로타르2세가 869년에 죽자, 로타르의 아들 가운데 홀로 남게 된 루도비코는 870년에 두 삼촌들(동프랑크의 루이와 서프랑크의 샤를)과 죽은 형제들의 영역을 나눠 갖는 메르센 조약을 맺음으로써 다시금 영역을 재분배했다(이것으로 거의 지금과 비슷한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의 경계선이 그려졌다. 알자스-로렌의 귀속권은 그 뒤 수백 년 동안 프랑스-독일의 분쟁거리가 되지만). 다시 880년에는 루도비코의 후계자인 카를로망의 죽음에 따른 리베몽 조약으로 영역이 또 조정되었다. 881년에는 독일왕 루이의 아들인 ‘뚱보왕’ 카를이 동ㆍ서 프랑크를 일시적으로 다시 합치기도 했으나, 분할상속제에 따른 군주 사후의 영토 분열은 거듭되었다. 이렇게 카롤링거 왕실의 핏줄도 차차 가물어졌다.

황제의 지위는 루도비코가 죽은 875년에 서프랑크의 샤를에게 넘어가 한동안 서프랑크에서 계승되다가, 899년에 동프랑크의 아르눌프가 마지막 카롤링거 황제로 숨을 거뒀다. 동프랑크 왕조에서 카롤링거의 직계는 911년에 아르눌프의 아들인 루드비히가 죽고 콘라트가 새 왕(‘최초의 독일 왕’)이 되면서 끝났다. 서프랑크에서는 987년에 카롤링거 왕실이 끝나고, 위그 카페가 ‘최초의 프랑스 왕’으로 즉위했다. 이후 프랑스와 독일은 모두 프랑크의 분할상속제를 버리고 장자상속제를 도입했는데, 다만 독일에서는 제후가 왕을 선거로 뽑는 원칙이 세습제와 병존했다. 근대적인 ‘국민국가’가 성립되려면 아직 멀었지만, 이제 프랑스와 독일, 그리고 이탈리아는 서로 다른 나라로 발전해 가게 되었다.

베르됭 조약이 체결될 때, 그 역사적 의미를 내다본 사람은 아마 한 명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후의 영토 조정이 프륌 조약, 메르센 조약 등으로 이어진 것에서 알 수 있듯, 국제정치란 힘으로 만드는 현실이지만 그것을 법적으로 공식화하고 안정화하는 것은 조약이라는 인식이 점차 자리 잡아 갔다. 또한 이전의 조약이 대체로 평화 조약이었던 반면 베르됭 조약을 기점으로 국경선 확정 조약이 일반적인 조약 유형에 추가되었다. 길고, 잦고, 잔혹하고, 야만적인 분쟁의 세월이 그런 변화에 눈을 띄운 것이다. 아직은 먼 미래, 민족과 국민의 시대가 찾아왔을 때도, 이 베르됭 조약을 자신들의 공동체가 탄생한 기원으로 돌아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어떤 신이나 영웅이 독단적으로 이룩한 신화나 정복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고 이뤄낸 ‘타협과 약속’이 역사를 열었음을 되새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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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규진 | 서울교육대학교 교수/역사저술가
글쓴이 함규진은 여러 방면의 지적 흐름에 관심이 많다. 정치학을 전공하여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주로 역사와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썼고, 인물이나 사상에 대한 번역서도 많이 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등 서로 대립되는 듯한 입장 사이에 길을 내고 함께 살아갈 집을 짓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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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도서
조약의 세계사 2014.12.22
고대부터 현대까지 64개의 조약으로 읽는 화해와 배신, 강압과 화합 그리고 진보의 역사.

‘지뢰는 과연 쓸모 있는 무기일까?’, ‘난징 조약은 불평등조약인가?’와 같은 흥미로운 물음을 던지며 세계사의 이면을 파고들어 역사와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을 넓힌다. 강화도 조약과 같이 우리 역사 속 조약부터 마스트리히트 조약처럼 생소한 조약, 고대의 히타이트-이집트 조약에서부터 현대에 체결된 리우환경협약까지 역사의 흐름을 바꾸고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계를 형성한 조약을 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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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2013.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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