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우금치 전투 - 동학 농민혁명의 운명을 가른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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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95회 작성일 16-02-07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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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의 운명을 가른 전투는 우금치 전투이다. <출처 국립현대미술관, 그림 박생광 [전봉준] 1985>


우금치 전투에서 싸운 공격군의 정확한 통칭은 동학 농민군이다. 비록 봉기는 동학(東學)을 믿는 간부들이 지도했지만 주체는 학정에 시달리다 못해 일어난 농민들이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약칭하여 동학군으로 부르겠다. 또한 우금치는 현지에서는 우금티로 부르나, 역시 관행대로 우금치로 호칭한다. 전투에 관한 날짜는 모두 양력으로 바꾸어 기술하기로 한다. 예를 들어 우금치 전투의 정확한 날짜는 양력으로 1894년 12월 5일(음력 11월 9일)이다.


전투의 배경




동학 혁명은 전라도 고부 군수 조병갑의 수탈에 시달리던 농민들이 1894년 4월 25일 고창군의 무장에서 동학 접주(接主) 전봉준의 주도하에 봉기한 역사적 사건이다. 동학군은 5월 11일의 황토현 싸움과 5월 27일의 장성 월평 싸움에서 승리하고 며칠 뒤 전주성을 접수했으나 전주성 싸움 후인 6월 10일 경, 관군 홍계훈과 화의를 맺고 해산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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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1854~1895)의 영정


그러나 청군이 동학군의 토벌 명분으로 조선 출병을 강행하고 일본이 이를 트집 삼아 대규모로 내침했다. 일본군은 7월 23일, 조선 궁궐을 침탈하여 실질적인 조선 통치권을 장악했다. 일본군은 고종을 협박하여 조선군의 무기들을 모두 회수하고 조선군을 무력화시켰다. 이 궁궐 침탈 만행에서 죽은 조선군만 50여 명이 넘는다. 고종은 연금 상태에 놓인다. 이후 일본군은 9월 청 육군을 평양(9월 15~17일)에서, 청의 해군을 황해 해전(9월17일)에서 격파하고 청군을 만주로 몰아낸다.

전봉준은 청일전쟁이 한창인 10월 삼례에서 2차 거병을 하였다. 2차 거병에는 동학의 호남세력인 남접 세력에, 교주 최시형의 명령으로 충청, 강원, 황해의 북접(北接) 세력이 가세하여 동학 병력은 4만이 되었다. 1894년 11월 9일 전봉준은 직계 일만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삼례를 출발하여 북상했다. 그는 강경과 논산을 들르며 군수품을 확보하고 모병을 하여 군세를 늘렸다. 북상 기동의 최종 목표는 한양이었다.

북상 길에 공주가 있었다. 11월 20일부터 공주 주변에서 관군과 동학군들의 격돌이 여러 차례 있었다.


우금치 공격 전야




공주 주변의 전투 후 재정비를 끝낸 동학군은 12월 2일~3일 다시 재진격을 해서 공주 남방을 3면에서 에워싸는 형태로 전개했다. 12월 3일 동학군은 공주 동남방 효포와 능치에서 맹렬한 공격을 해왔다.

관군은 그 기세에 놀라 다소 후퇴했는데 동학군은 오후에 갑자기 공격 방향을 왼쪽으로 틀어 이인을 기습 점령해버렸다. 이곳은 성하영의 경리청 부대[한양 북한산 주둔 부대]가 방어선을 치던 곳이었다. 이로서 동학군은 우금치 공격을 향한 교두보를 확보했다.

공주 감영과 우금치에 대한 병력 배치와 경계는 더욱 강화되었다. 이 관군에 모리오 마사이치 대위가 지휘하는 200여명의 일본군 중대 병력이 증원 배치되었다.


일본군의 전투 개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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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치 고이쓰케(伊集知 幸介, 1854~1917)


일본군의 동학군을 대하는 태도는 아주 신중하면서도 교묘했다. 일본은 먼저 부산에 이지치 고이쓰케(伊集知幸介)소좌를 보내 여기서 동학군 지역으로 스파이들을 침투시켜 치밀한 정보를 수집했다. 충분한 정보를 입수한 일본은 1차로 미나미 고시로(南 小四郞)소좌를 지휘관으로 한 후비보병1) 19대대를 동학군 토벌에 동원했는데 대대는 3개 중대로 분할되어 3개 루트로 한반도 남부를 종주 파견했다.

후비보병은 예비역으로 편성 된 부대를 말한다. 병력의 나이도 많고, 무기도 신식 무라다 22년식 5 연발총이 아닌 구식 스나이더 단발총을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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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의 정면에 나타난 부대는 일본군의 모리오 대위가 지휘하는 서로(西路) 파견 2중대였었고 대대장 미나미 소좌가 이 방면으로 같이 동행해서 관군을 포함한 방어군의 전투를 지휘했다. 이들이 공주에 도착한 것은 우금치의 대접전이 있기 12일 전이었다.


관군의 편성




당시 한양에는 조선군의 근위대 성격 부대가 3개 대대가 있었고 지방에 주요 요지에 한 개 대대씩 있었다. 서울 군은 경군(京軍)이라 불렸고 지방군은 영군 (營軍)이라 불렀다. 공주 방면에 투입한 동학군 토벌 관군은 신정희가 지휘하는 순무영과 경리청등의 병력 3,500명이었다.이 병력들은 공주 여러 방어 전선에 분산 배치되었고 우금치 방면 투입 병력은 우선봉장 이두황(李斗璜, 1858 ~ 1916), 좌선봉장 이규태(李圭泰)가 지휘하는 두 개 대대의 병력 1,500 명이었다.

관군은 이두황 부대와 이규태 부대만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일본군이 훈련시킨 이진호2) (李軫鎬, 1867~1943)의 최정예 교도중대(敎導中隊) 350명도 우금치에 증강 투입 되었다. 이 부대는 일본군의 직접 지휘를 받았다.

이범호로 표기한 문헌도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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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군란전의 별기군 - 일본 장교 호리모토의 훈련를 받았다.
우금치 전투 때 관군들의 복장과 유사하다.


우금치 전투가 동학군과 일본군의 전투로 착각하는 일부 의견도 있고 반대로 일본군이 관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일본 극우파 학자들의 억지도 있는데, 정리하자면 전투 주력은 관군이었으며, 일본군이 지휘권을 행사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참고로 우금치에서 활약한 관군 지휘관 중 이규태는 이후 항일 의병장이 되나, 이두황과 이범호는 대표적인 반민족적인 친일파 인사로 전락한다.


우금치의 지형




우금치 계곡은 좌우에 두 팔을 내밀어 안은 것 같은 양 능선이 감싸고 있고 밑은 다른 능선이 막고 있는 사방이 막힌 계곡이다. 동서로 달리는 능선이 상하에 있고 남북으로 달리는 능선이 좌우에 있어 중간에 형성 된 비스듬한 사각형 모양이 우금치 계곡이라 생각하면 된다.

사각형의 동쪽의 남북 수직 능선은 도로와 같이 병행하다가 우금치에서 만난다. 서쪽 남북 수직 능선은 지세가 더 험해서 높고 낮게 구비치며 올라 가다가 북쪽 동서 능선의 최고봉 견준봉(犬蹲과 만난다. 당시의 도로는 지금과 달리 매우 좁았다.

보병 지휘관들이 우금치 현지에 가본다면 누구나 꼭 같이 판단하겠지만 우금치에서 중요한 전술적 요지(要地)는 네 곳이다. 이곳에서 제일 중요한 곳은 우금치 고개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일대를 다 조망할 수있는 최고 높이의 견준봉이다. 그리고 계곡을 감싸고 있는 좌우 남북 능선 두 개가 또 다른 요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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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금치 주변의 지형. 능선의 줄기를 단순화하여 그린 모습이다. 붉은 색으로 표시한 곳이 전투지역으로, 크기는 가로 800미터 세로 1200미터 정도이다.



우금치의 방어전투 배치




이두황은 우금치의 서쪽(우측)에, 그리고 이규태의 부대가 우금치 동쪽(좌측)에 배치되었고 일본군 200명이 우측의 이두황 부대를 지나 최우측에 서있는 최고봉 견준봉에 배치되었다. 일본군은 나중에 이 견준봉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전날 이인 전투에서 패주한 성하영의 경리청 군사를 이두황의 부대와 견준봉의 일본군 사이에 끼어 배치하였다.

이규태의 부대가 우금치 고갯길과 그 계곡을 감싸는 왼팔 격의 능선을 방어하는 부대인데 이 중요한 곳에 소수의 부대만 배치할 리가 없었다. 이범호가 지휘하는 정예 교도 중대 병력 350명이 이규태 부대 쪽에 증강 배치되었다.

방어선의 최우측(서쪽)인 견준봉에서 우금치 좌측(동쪽)까지 방어선의 폭은 약 800m 정도였다. 6.25 전쟁에서 중대장과 대대장으로서 수많은 전투를 경험한 이대용 장군의 견해에 따르면, 우금치 관군이나 일본군의 무기가 비록 구식 단발총 수준이지만 우금치 능선 1 km 정면에 2개 대대가 넘는 부대를 배치했다면 대단한 집중 방어라고 할 수 있다고 한다. 25,000분의 1 지도에서도 지형을 파악하기가 힘든 폭 800미터 길이 1,200 미터의 좁은 계곡이 일만 동학군의 참혹한 운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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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우금치 고개. 도로는 확장되고, 고개는 터널이 되어 옛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방어군의 지휘권은 19후비 보병대대장 미나미 고지로 소좌가 행사했다. 12월 5일 있었던 우금치 전투에서 관군은 봄에 황토현이나 월평의 대패와는 아주 다른 강한 전투력을 발휘했는데 이는 현대적인 전술을 터득한 일본군이 전투를 주도했던 것도 이유가 된 것이라고 본다.





김창원 | 전사연구가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시라큐스 경영대학원에서 MBA를 취득했다. 장교로 군 복무, 기갑부대 전차 소대장을 지냈다. ‘울프 독’이라는 필명으로 전사와 역사를 다룬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 국방부 정책·정보 블로그(N.A.R.A.)에 기고하고 있으며, 저서로 [공격 마케팅]이 있다


자료제공

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



발행2013.04.12.



주석


1
후비보병은 예비역으로 편성 된 부대를 말한다. 병력의 나이도 많고, 무기도 신식 무라다 22년식 5 연발총이 아닌 구식 스나이더 단발총을 사용했다.
2
이범호로 표기한 문헌도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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