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우금치 전투 (2) - 우금치 계곡의 혈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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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80회 작성일 16-02-07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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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12월 5일 전투가 시작되었다. 동학군은 해가 뜬 이른 아침부터 우금치 관군측에 탐색 공격과 교란 공격이 배합된 치고 빠지는, 말하자면 ‘히트 앤드 런’의 공격을 되풀이 했다.



우금치 전투 시작




공격은 먼저 우금치 고개를 감싸고 있는 좌우 양쪽 능선에 가해졌었다. 좌우 능선을 확보한 뒤 계곡으로 밀려들어가 우금치를 공격할 주력의 양측면 공격 위험성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관군들은 계곡을 감싸고 있는 양쪽 능선에 병력을 배치하지 않았었기 때문에 동학군들은 쉽게 이 능선들을 점령하고 우금치 관군 방어선에 교란 공격을 가했다. 그들은 수시로 돌파 할 듯 위장 공격을 하고 함성을 질러대고 깃발을 흔들었으며 사격을 가했다.

관군들이나 일본군은 최대한 사격을 자제하고 사격 군기를 엄수했다. 양 능선을 확보한 동학군은 계곡 속으로 여러 번에 걸쳐 주병력을 투입했다. 우금치 계곡 안의 동학군이 점점 증강하여 정오쯤에는 동학군 주력이 대부분 다 투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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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금치 전투 상황도




동학군의 공격 대형




동학군이 이날 사용한 전법은 19세기 중반까지 사용되던 밀집대형에 의한 집중 돌격이었다. 즉 열(列)과 오(伍)를 늘어선 집단이 지휘자의 질타 속에 적진에 쇄도하는 전투 방식으로 나폴레옹 시대에 절정에 달했었다. 멀리서 보면 병사들의 대형들이 장방형의 카드 같은 것을 옆으로 늘어놓은 모습처럼 보인다. 이런 대형에서 지휘관은 후방에서 전장을 한 눈에 보면서 지휘하는 경우가 보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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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쟁 당시의 바이센베르크 전투도. 밀집대형을 잘 보여준다.


기록에 따르면 전봉준은 붉은 덮개를 씌운 사인교(四人轎, 네 사람이 드는 가마)를 타고 우금치 계곡으로 들어 와 공격을 지휘했다고 한다. 이는 동학군 주력이 모두 계곡으로 투입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거병 이래 말을 타고 지휘했는데 이 날은 산의 경사가 급해서였었거나, 여유 혹은 자신감을 보이기 위한 연출의 목적이 있어서 그랬는지는 알기 어렵지만, 원거리에서 적에게 확연히 관측이 되는 붉은 가마를 사용하였다. 현대의 전장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지휘관의 이동 수단이라 할 수 있겠다.



동학군의 무장




전봉준의 1차 봉기 때 싸운 전투들에서는 동학군들은 선두 열들은 화승총을 들고 후방 열들은 창을 들었다고 되어 있다. 화승총으로 제압하고 창부대가 근접전투로 적을 섬멸하는 전투 방식이다. 황룡강 월평 전투 때 4,000 동학 병력중에 절반인 2,000명만 화승총을 가졌다고 한다. 관군이 대패한 이 전투에서 동학군이 노획한 신식총(영국제 스나이더 소총)은 겨우 30정에 지나지 않았다.

우금치 공격 병력의 무장 정도도 이보다 결코 낫다고 볼 수가 없다. 넉넉하게 보아도 공격 병력 만 명의 절반 정도만 유효 사거리 100미터의 화승총으로 무장하고 있다고 추정된다. 큰 싸움인 월평 전투에서 노획한 신식총의 노획량 수준으로 보아 장거리 사격이 가능한 신식총은 몇 백 정이 넘지 않을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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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나이더 소총 <출처 (cc) Antique Military Rifles>




관군-일본군의 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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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 전쟁(1904-1905) 무렵의 일본군 복장. 우금치 전투 당시의 일본군 복장도 이와 유사했다.


관군에게는 동학군이 갖지 못한 양식(洋式)총과 독일제 크룹 포(砲)와 개틀링 기관총이 있었다. 관군은 영국제 스나이더 단발 소총을 주력으로 쓰고 있었으며 중앙 병력 일부는 더 신식인 모젤 총으로도 장비했었다. 일본군도 투입된 것이 후비보병이라 역시 스나이더 소총을 사용하였다.

우금치 전투에서 개틀링 기관총이 몇 정이 동원되었는지는 아쉽게도 기록이 없다. 그러나 그 지난 7월 23일 일본군의 궁중 침궐후 강제로 빼앗았던 서울 경군의 무기가 소총 2,000정에 개틀링 기관총이 8문이었으니, 그 중 몇 정이 동원되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우금치 골짜기에 동학군 병력이 최대로 몰려들어 공격을 시작할 즈음 드디어 작전 지휘권을 쥔 일본군이 바라던 호기(好氣)가 도래했다. 정오 무렵이었다, 관군과 일본군의 보유 화력을 일시에 집중하는 사격 명령이 내려졌다. 일제사격의 신호는 일본군의 진지가 있던 견준봉에서 발신되었다.

동학쪽에서 전투에 참가했었던 한 사람은 이렇게 증언한다.

“갑자기 일본군이 포진한 산(견준봉)의 정상에서 포성 한 발이 터졌다.

이 포성이 일제 사격의 명령 신호였다. 이어서 관군 측의 각종 포와 총이 포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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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틀링 기관총. 오늘날 벌칸포의 원조가 된 기관총이다. <출처 (cc) Matthew Trump>


좁은 우금치 고개 능선 일대는 포성과 총성 그리고 비명과 함성의 소리가 뒤덮었고 관군과 동학 농민군이 발사한 소총과 기관총들이 뱉은 유연화약의 자욱한 하얀 연기가 능선을 흘러 퍼졌다. 관군들은 연속으로 능선에 나타나서 총을 발사하고 사라졌다.

관군들은 2열 횡대로 서서 전열이 능선 앞에 나서서 상체를 드러내고 사격을 가하는 동안 후열은 뒤로 물러나 장전하고 전열과 사격 교대를 했다. 집중 사격의 불벼락을 받은 동학 농민군은 무수히 쓰러졌다. 동학군은 저돌적으로 돌격했다가 수많은 시체를 남기고 패퇴하기를 되풀이 하였다. 관군 측 기록은 동학군이 4-50차례의 돌격을 해왔다고 한다.

결국 전봉준이 그처럼 바라던 우금치 돌파는 공세 종말점(攻勢終末點)에 오고 말았다. 더 독전해서 몰아 부칠 수가 없는 상황이 오고 말았던 것이다. 수많은 동학군 시체들이 우금치 정상 부근과 아래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즐비하게 쌓이고 피가 내를 이루어 흘러내렸다.

관군의 부대를 지휘했던 이규태는 전투 후 우금치 고개와 골짜기를 시산혈해(屍山血海)’라고 표현했다. 시체가 산처럼 쌓였고 피가 바다처럼 흘렀다는 비참한 장면의 묘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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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룹포(Krupp gun). 독일제로 19세기에 여러 나라에서 쓰인 포이다. 사진은 75mm 구경.




마지막 측면 공격과 송장매미




이제 동학군과 국가의 운명은 결론에 이르고 있었다. 전봉준은 서쪽으로 지는 해가 우금치의 동학군 시체 더미에 긴 그림자를 던질 무렵 마지막 공주 점령의 시도를 하게 된다.

실패를 거듭한 정면 공격의 무모함을 자각하고 우금치 계곡을 크게 우회하여 우금치 측후방 시재 쪽으로 침투하는 측면 공격을 개시했다(이 측면 공격은 우금치 전투 개시와 함께 시도되었다고 주장하는 기록들이 있다. 혹은 공격은 일찍 시작했지만 병력을 더 증파했다는 설도 있다). 우금치 고개를 멀리 우회하여 시재를 넘어 측면 공격을 한 동학군은 관군이 지키는 두리봉에 붙어 여러 번의 격투 끝에 두리봉을 점령했다.

그러나 여기까지였다. 동학군은 이 두리봉을 점령한 뒤에 일부 주력이 계속 전진해서 공주로 나갔지만 매복한 관군에게 저지당하고 후퇴했다. 후퇴한 이들은 전봉준 본대와의 합류가 불가능했다. 우금치 배치 관군들이 전투 승리 후 퇴로를 차단했기 때문이다. 두리봉으로 몰린 측면 공격 동학군은 며칠간 공격을 받아 내다가 쓰러지고, 흩어지고 말았다.

공주에는 동학군과 관련된 유적지로 송장배미가 있다. 동학군의 시체를 유기한 논이라는 말이다. 18구의 전사체가 유기 되었다. 두리봉에서 빤히 보이는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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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송장매미. 동학군 18명의 전사체가 유기되었던 곳이다.




전봉준의 패주와 처형




전봉준이 핏빛과 땅거미가 뒤섞인 우금치 계곡 밖에서 남은 인원을 점점한 바 1만명의 초기 인원 중 생존자는 단 3,000명이었다. 수많은 부하의 주검을 목격한 전봉준은 퇴각 할 수밖에 없었다. 모리오 대위는 50명의 관군 특공대를 지휘하여 그 뒤를 10여리(약 4km)나 뒤쫓아 오며 총격을 가했다. 적의 재공격 시도를 좌절시키기 위한 패주 부대 추격은 근대 보병전술의 한 부분인데, 전투 마무리 단계에서까지 일본군이 동학군 소멸에 십분 활용한 (당시로서는) 첨단 전투 기술의 한 단면이 보인다.

전봉준은 얼마 남지 않은 병력을 지휘해서 논산으로 후퇴했다. 밤사이에 다수의 낙오 및 이탈이 발생했다. 전봉준은 논산에 집결했으나 참담한 형편이었다. 동학군은 불과 500명 밖에 남지 않았다. 이틀 뒤에는 우금치 옆 능치를 방어하던 동학군이 동학군으로 변장한 관군에게 패주했다. 공주 지역 동학군의 완전 제거를 달성한 관군과 일본군은 장거리 추격 작전을 시작했다. 전봉준은 병력을 재편성해서 논산 주변에서 방어를 시도했지만 역시 무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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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2월 말 일본영사관에서 조선 법무아문으로 이송되는 전봉준.


그는 쫓기며 계속해서 남하했다. 그는 추격하는 일본군과 관군과 김제 원평과 태인에서 마지막 저항을 시도했지만 했지만 여기서도 크게 패했었고 그의 부대는 와해되었다. 심복 세 명을 데리고 피신하던 전봉준은 12월 28일, 순창 피노리 주막에서 그 곳 주민이며 옛 부하였던 김경천의 배신으로 동네 사람들에게 무참하게 구타당하고 잡혀 일본군에게 인계되었다. 서울로 압송된 전봉준은 1895년 4월 23일 교수형을 선고 받고, 얼마후 동지들인 손화중, 최경선 등과 같이 집단 교수형에 처해졌다.




김창원 | 전사연구가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시라큐스 경영대학원에서 MBA를 취득했다. 장교로 군 복무, 기갑부대 전차 소대장을 지냈다. ‘울프 독’이라는 필명으로 전사와 역사를 다룬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 국방부 정책·정보 블로그(N.A.R.A.)에 기고하고 있으며, 저서로 [공격 마케팅]이 있다


자료제공

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



발행2013.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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