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우금치 전투 (3) - 기개로만은 꺽을 수 없었던 전력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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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537회 작성일 16-02-07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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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금치의 동학혁명 위령비


우금치 전투에서 동학군은 왜 그렇게 많은 전사자가 발생했던 대패를 당했을까? 아주 간단하게 말하면 화력이 병력을 압도해버린 것이라고 말 할 수가 있다. 먼저 전투의 양상을 살펴보자.



관군의 자동 화기




우금치 고개에서 동학군이 떼죽음을 당했는데, 관군이나 일본군이 장비했었던 단발 소총의 개인화기만으로는 절대 우금치 전투에서와 같은 대량 살상자를 발생시킬 수가 없다. 막대한 동학군의 피해의 원인을 풀어보기 위해서 관군의 개틀링 기관총에 주목해야 한다.

동학군 주력과 싸웠던 이규태는 동학군 격멸의 중심이 ‘포’였음을 말하고 있다.

“…한꺼번에 밀려 올라가다가 대포를 쏘면 물러나고 잠시 대포를 멈추면 밀려왔다. 제 1대가 무너지면 제 2 대 제 3대가 대신하였다…

이날 오후까지 전진과 후퇴를 수십차례 반복하면서 농민군 시체가 언덕과 고개 언저리에 쌓여갔다.

시체에서 흘러나온 피는 눈을 흥건하게 적시다가 얼어붙었다…“

당시에 개틀링 기관총이 회전포 또는 회선포라는 이름으로서 포(砲)로 분류했었다. 위에서 말하는 대포는 개틀링 포가 틀림없다. 이규태의 글은 포가 쉬지 않고 불을 토했음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학군의 진퇴를 개틀링 기관포 사격이 좌우하고 있슴도 알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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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틀링 기관총. 우금치 전투 당시에는 회전포 포로 분류했다.


관군의 크룹 포는 숫자도 몇 문 되지 않았었고 유연화약을 사용하는 제약으로 발사 속도가 1분에 한 발 발사하는 속도로서 밀집대형의 동학군에게 개틀링기관총만큼 위력을 발휘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개틀링 기관총은 여섯 개의 총신 다발이 축을 따라 회전하면서 총탄을 연발로 발사하는 기관총인데 요즈음의 기관총같이 방아쇠만 당기면 총탄이 자동으로 발사되는 것이 아니라 총신 후방의 핸들을 돌려야 하는 수동 기관총이다. 발사 속도는 현대 기관총의 삼분의 일인 200발이다. 유연화약으로 발사되었으나 탄속만 느릴 뿐 살상력이나 사거리는 현대의 기관총과 큰 차이가 없다.



동학군 작전의 실수




첫째, 실패한 공격 방식은 되풀이 하지 않는 것이 전술의 원칙이다. 동학군은 실패한 밀집대형의 정면 공격을 무리하게 되풀이 했다. 관군 측의 기록은 동학군이 4-50차례의 돌격을 해왔다고 한다. 부대가 넓은 횡대로 산개해서 공격하는 현대전에서 반나절 동안 4~50차례의 공격이란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즉, 당시 장방형 밀집대형의 여러 개가 연달아서 돌격해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대 군사용어로 인간 파도 같은 공격을 뜻하는 제파공격(悌波攻擊)이라고 하겠다. 적의 화력 앞에 기세가 꺾인 정면 공격의 반복이 작전의 최대 실수다.

둘째, 현대 보병 전술에서 자동화기를 가진 적군과 붙었을 때의 공격 형태는 산개해서 실시하는 약진과 포복이다. 엎드려야 살 수가 있다. 그러나, 동학군의 주력 무기인 화승총은 전장총(前裝銃)으로 총구에 화약과 총알을 장전해야 했기 때문에 서서 전투를 해야 했다. 포복 전투는 엎드려서 장전할 수 있는 후장총(後裝銃)이 출현한 후에야 등장했었다. 게다가 일단 밀집 대형의 행렬을 지어 앞으로 밀고 나가면 뒤에서 연속으로 이동하는 사람들 때문에 몸을 빼내거나 총탄을 피하는 등의 개인 행동이 어렵다. 자동화기를 상대로 뻣뻣하게 서서 전진하는 밀집된 부대가 어떻게 될지는 너무나도 뻔한 일이다.

셋째, 동학군의 미신도 한 몫 했다. 전투에 나서는 동학군마다 등에 노랑색 바탕에 궁을(弓乙)이라는 붉은 글씨를 쓴 부적을 붙이고 돌격과 동시에 “시천주 조화정(侍天主造化定)”이라는 주문을 큰 소리로 합창했다 한다. 전봉준은 이를 절대불사(不死)의 부적과 주문이라 믿도록 했다. 그리하여 동학군들은 사정없이 날아오는 실탄 앞에는 다 부질없는 짓이었지만 그 영험을 믿어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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옴두르만 전투를 그린 그림. 우금치 전투 4년 후인 1898년에 벌어졌다. 5만 2천명의 수단군이 돌격했으나 영국군 기관총의 위력에 순식간에 1만명 이상이 전사, 1만 3천명이 부상당하고 괴멸 당한 전투이다. 영국군 전사자는 47명에 불과했다.




작전 실패의 배경들




그러나, 전봉준이 잘못 판단하게 된, 그래서 결과적으로 참패하게 된 배경이 있었다. 이를 소개해보는 것도 우금치 전투의 연구와 분석에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그 하나다. 전봉준은 왜 이렇게 현대의 상식 밖의 대병력을 좁은 우금치 골짜기에 집중했을까? 그가 가진 전투력의 핵심은 관군보다 압도적으로 우세한 병력이었다. 전봉준은 이 병력을 사용해서 우금치 방어선을 뚫어보겠다는 결심하게 된 것은 그가 관군과 정면 대결로 승리한 장성 황룡강변 월평 전투 경험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월평 전투에서 동학군을 엉성하게 기습한 관군은 약 700명(실제 병력은 300명 수준이고 400병은 노무자 수준의 지방민 지원부대)이었지만 동학군은 4,000명이 넘었었다. 관군의 공격은 너무 빨랐고 서툴렀다. 동학군은 재빨리 반격의 태세를 갖추었다. 관군은 크룹포와 개틀링 기관총까지 보유했었으나 열 배가 넘는 압도적인 병력으로 반격한 동학군은 절대 우위에 있던 병력으로 관군을 격퇴하고 크룹포와 개틀링 기관총도 노획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지휘관은 성공한 전술은 자기화(自己化)해서 상용하는 경향이 있다. 전봉준이 여기에서 얻었던 승리의 경험을 통해,'대군으로 공격하면 우수한 장비의 적도 이길 수가 있다.'라는 전술 교리를 얻었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황룡강 월평의 승리는 우금치 전투의 어두운 미래를 예고하고 있었다.

그 둘이다. 급조 된 동학군의 지휘통솔의 문제가 그를 실패로 밀어 넣었다. 삼례에서 급조한 동학군 부대가 12월 초의 추운 날씨와 공주 주변 전투에서의 패전의 충격으로 도망병이 늘어나고 있는 내부 사정이 그에게 속전속결을 강요했었기 때문이었다.

그 셋이다. 우금치의 교묘한 지형이 동학군 작전의 실패로 몰아넣었다. 우금치만 넘으면 공주가 바로 아래에 있다. 동학군은 공주 문턱까지 갔던 것이다. 조금만 무리하면 공주에 발을 들여 놓을 수가 있다는 아주 감질나는 상황이었다.

전봉준이 실패한 정면 공격을 되풀이 하도록 유혹한 우금치의 지형적 요소가 또 있었다. 주력이 공격한 우금치 고개 아래 공격 개시선에서 고개 정상까지 1km가 넘는데, 이 정도 긴 거리에 부대를 장시간 기관총 사격에 노출시키고 공격한다면 부대의 공격 유지가 불가능하다. 그러나 우금치 계곡을 감싸고 있는 동쪽 능선에서 계곡을 향하여 수직으로 짧은 가지형 능선들이 두어 개 나와 있어 그 짧은 계곡 사면으로 부대를 대피시키면 화력으로부터 엄폐가 가능하다. 고개에서 불과 300m거리에도 그런 언덕이 있다. 불과 300m 거리니 이곳에 대피하고 있다가 밀집대형을 연속으로 내보내 기세를 올리며 전속력으로 달리면 우금치 고개의 방어선을 단숨에 돌파할 수 있다는 전형적인 단병접전식 욕심을 부릴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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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우금치 골짜기. 1894년 초겨울 시산혈해가 되었던 들판이다.




기개로만은 꺾을 수 없었던 전력차




가렴주구에 시달리던 민초들을 대표해서 민중 봉기를 유도한 전봉준은 그의 혁명적 기개와 저항 정신은 크게 평가된다. 그러나 너무 근대 전술을 몰랐었고 피아 전력(戰力)의 격차를 몰랐으며 신형 무기의 준비가 안 되었으며 그의 동학군 부대는 훈련이 안 된 오합지졸의 집단이었다. 그럼에도 여러 이유로 어쩔 수없이 결전으로 돌입했지만 우금치의 관군-일본군 혼성군은 화승총과 죽창으로 무장한 부대가 몰려들어 두들겨 봐도 분쇄될 상대가 아니었다는 것이 비극이었다.

전적지 기념물라고는 위령탑 밖에 없는 우금치 전투장을 찾아 갈 때마다 항상 가슴이 뭉클해지는 느낌을 누를 수가 없었다. 전봉준과 수많은 희생자들의 불쌍한 유혼이 언저리에 맴돌고 있기 때문이다. 동학농민혁명의 발생의 직접적인 원인 제공자인 조병갑은 일단 섬으로 유배형에 처해졌었으나 불과 1년만에 복권, 고등재판관으로 승진했고 그의 후손들도 잘 살고 있다. 반면, 전봉준의 집안은 그야말로 풍비박산 났다.

현재는 몇 개의 동학 유적지와 오로지 애절한 가락의 파랑새 민요만이 전봉준의 자취를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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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금치 전투 주요 사건 관련 일자







김창원 | 전사연구가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시라큐스 경영대학원에서 MBA를 취득했다. 장교로 군 복무, 기갑부대 전차 소대장을 지냈다. ‘울프 독’이라는 필명으로 전사와 역사를 다룬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 국방부 정책·정보 블로그(N.A.R.A.)에 기고하고 있으며, 저서로 [공격 마케팅]이 있다


자료제공

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



발행2013.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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