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토르데시야스 조약 - 스페인과 포르투갈, 지구를 둘로 나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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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504회 작성일 16-02-07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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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서양이라고 불리는 바다. 그 수평선은 끝없이 펼쳐진다. 어디를 둘러봐도 물, 물, 물. 파도만이 희고 검은 빛으로 출렁이며, 짙푸른 평원에 움직임을 보태고 있을 따름이다. 그런데 1494년 6월 7일, 이 광대한 푸른 평원에 한 줄기 경계선이 그어졌다. 그 선은 북극에서부터 죽 내리그어져 대서양을 둘로 가르고, 남아메리카의 동단부에 상륙하여 약 3천 킬로미터 정도 아마존의 열대우림을 치달리고는, 다시 대서양으로 나와 남극에 꽂혔다. 물론 바다 위에 눈에 보이는 선은 없었다. 몇 명의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고는 펼쳐 놓은 지도(아직은 꽤나 부정확하고, ‘테라 인코그니타’ 즉, 미지의 세상이라고 적힌 공백을 많이 포함하고 있던) 위에 내리그은 선이었을 뿐이니까. 그러나 그 보이지 않는 선을 경계로, 이후 인류는 지구의 운명을 바꿔 나가는 담대한 모험을 펼치게 된다.



수평선을 넘으며 벌인 경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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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대륙에 상륙한 콜럼버스. 콜럼버스의 서인도 제도 발견은 포르투갈과 스페인 사이의 신대륙 영토 분쟁을 야기하는 사건이었다.



15세기의 유럽은 대체로 세 개의 지역에서 불꽃 튀는 경쟁을 벌이는 양상이었다. 동유럽에서는 튀르크의 공세로 동로마제국이 멸망하고(1453), 계속되는 유럽 정복을 막기 위해 헝가리, 오스트리아와 교황령, 베네치아 등이 힘을 합치고 있었다. 서유럽에서는 영국과 프랑스가 백년 전쟁(1337~1453)의 수라장 속에서 치열하게 부딪히는 한편, 각각 중앙집권적 국가의 틀을 잡아가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보다도 서쪽, 이베리아 반도에서도 두 나라의 경쟁이 열띠게 펼쳐졌다. 그러나 그 경쟁은 성격이 좀 달랐다. 다른 유럽 국가들이 유럽 안에서의 패권과 이익을 위해 다투고 있었다면,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먼 바다 건너, 아직 지도에도 표시되지 않은 광활한 신세계를 두고 경쟁하기 시작했다.

이 경쟁에서 먼저 앞섰던 쪽은 포르투갈이었다. 스페인은 1492년 그라나다를 함락시킬 때까지 이슬람을 상대로 “국토 회복 운동(레콩키스타)”을 벌이고, 또한 카스티야와 아라곤을 통일시켜 스페인 왕국의 모습을 갖추느라 15세기 내내 바빴다. 그에 비해 포르투갈은 이미 1249년에 오늘날의 국토를 갖추고 14세기에는 내실을 기하며 절대왕권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15세기가 되자, 주앙 1세의 아들인 엔히크(엔리케) 왕자는 ‘대서양에 면해 있는 포르투갈의 미래는 해외에 있다’는 신념 아래 1415년에 북아프리카의 세우타를 점령하고, 대서양의 카나리아, 아조레스, 마데이라 제도에까지 손을 뻗쳤다. 그리고 1422년부터는 아프리카 탐험대를 출범시켜 서아프리카 항로를 개척하고, 1434년부터는 아프리카에서 ‘사냥’한 노예를 리스본에 풀어놓기 시작했다. 이런 그를 훗날 사람들은 ‘항해왕’이라고 부르며 지리상의 발견 시대를 연 선구자라고 기리게 된다.

포르투갈은 이런 노력을 공인받기 바랐고, 당시 유럽에서 초국가적인 권위를 갖고 있던 교황에게 부탁했다. 결국 1456년, 포르투갈은 교황 칙서에 따라 “기니와 카보보자도르(당시 유럽에 알려져 있던 가장 먼 땅이었다) 남쪽에서 앞으로 발견되는 모든 땅”에 대한 권리를 얻었다. 스페인은 당연히 그 내용에 불만을 가졌으나, 1479년에 포르투갈-카스티야 계승 전쟁을 마무리하며 포르투갈이 카스티야의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는 대신 스페인은 1456년의 칙서를 인정하는 것으로 대략 합의되었다.

그러나 1493년 3월, 포르투갈의 주앙 2세가 놀라 자빠질 일이 벌어졌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서인도’를 탐험하고 돌아온 것이다. 당시 콜럼버스는 나쁜 날씨 때문에 부득이 포르투갈의 항구에 기착했으므로, 주앙 2세는 스페인의 이사벨 1세보다 더 빨리 그의 성공 소식을 알 수 있었다. 이탈리아 출신인 콜럼버스는 서쪽으로 항해하여 인도에 도달한다는 기획안을 먼저 포르투갈에 가져갔었지만, 아프리카 항로에 골몰하고 있던 주앙 2세에게 외면받자 스페인 궁정의 문을 두드렸던 것이었다. 그가 발견한 바하마 제도, 쿠바, 히스파니올라(아이티) 등은 위도상 포르투갈이 이미 확보한 카보보자도르의 선보다 아래에 있었다. 따라서 원칙대로라면 그곳들도 포르투갈 땅이 되어야 할 터였으나, 스페인이 그것을 받아들일 턱이 없었다. 결국 주앙 2세는 다시 한 번 교황의 중재로 분쟁을 결판내려 했다.



뒤통수를 맞은 포르투갈, 반전을 노리다



그러나 바로 작년인 1492년에 새로 교황이 된 알렉산데르 6세는 스페인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그 자신이 스페인 출신인 데다가, 교황이 되기 위해 뿌린 막대한 돈의 상당액을 스페인 왕실에서 빌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1493년 5월 3일에 그가 내놓은 칙서에는 “카보베르데 제도 서쪽으로 100레구아(약 480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을 분기점으로, 서쪽은 스페인이 관리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기왕의 “카보보자도르 남쪽”은 카보베르데를 기준으로 하는 대서양의 반쪽에만 해당되는 셈으로 하고, 콜럼버스가 발견한 땅은 스페인령임을 인정해 준 것이었다. 포르투갈은 칙령의 문구에 언급도 되지 않았다. 더구나 나중에 추가로 내놓은 칙령에서는 ‘인도’ 전역을 스페인에게 준다는 뜻으로 해석될 만한 문구가 있었다.

주앙 2세는 이 결과에 당연히 불만이었고, 한때 전쟁을 벌일 각오까지 다졌다. 그러나 포르투갈이 먼저 영토 획득의 명분으로 교황의 승인을 내세웠는데, 이제 와서 스스로 그 정당성을 부정한다는 것은 안 될 말이었다. 그렇다고 친스페인 교황의 손에 계속해서 해외 영토 경쟁의 중재역을 맡겨 둔다? 그것도 안 될 말이었다. 결국 그는 새로운 해결책을 마련했다. 교황을 제쳐 놓고, 스페인과 단독으로 영토 분계선을 협상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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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의 주앙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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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을 공동 통치하던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와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



‘자기네가 주장하던 대로 교황의 중재를 받았는데, 또 협상을 하자고?’ 스페인의 이사벨라와 페르난도는 콧방귀를 뀌려고 했다. 그러나 협상이 결렬되면 전쟁뿐이라는 포르투갈의 서슬에 결국 입장을 바꿨다. 포르투갈 및 이슬람 세력과의 오랜 전쟁이 겨우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또 전쟁을 치를 처지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두 나라의 대표들은 스페인의 토르데시야스에서 만나 협상을 시작했다. 포르투갈은 이번만은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히지 않도록 만반의 준비를 했다. 그래서 스페인 대표단은 정치인뿐이었으나, 포르투갈 대표단에는 당대 최고의 측량사와 지리 전문가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 카보베르데에서 서쪽으로 370레구아 떨어진 지점에서 남북으로 선을 긋고, 그 선의 서쪽에 속한 모든 땅, 대륙과 섬을 망라한 모든 땅은, 이미 발견되고 정복된 땅과 앞으로 발견되고 정복될 땅을 망라한 모든 땅은, 스페인에게 속한다. 한편 그 선의 동쪽에 속한 (......) 모든 땅은 포르투갈에 속한다.


• 위의 내용은 이 조약이 체결된 시점에 기독교를 믿는 주민의 땅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 포르투갈이 위의 선을 넘어 서쪽으로 항해한다면, 그 목적이 포르투갈에 속한 땅에 도달하기 위한 경우가 아니라면 허용되지 않는다. 그런 목적의 항해라면 안전이 보장된다. 스페인이 위의 선을 넘어 동쪽으로 항해한다면, (......) 그런 목적의 항해라면 안전이 보장된다.

1494년 6월 7일에 조인된 토르데시야스 조약은 위의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핵심은 분계선을 270레구아 정도 서쪽으로 당기는 것이었다. 자신의 권위가 무시당했다고 여긴 교황은 불만을 표시했으나, 알렉산데르 6세가 죽고 다음 교황이 된 율리우스 2세는 결국 1506년에 이 조약을 승인했다.



누가 더 이익을 보았는가



조약을 마치고 포르투갈의 주앙 2세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을지 모른다. 단지 분계선을 얼마간 서쪽으로 당기는 것만으로는 당장 스페인 쪽에 손해날 일이 없어 보였다. 분쟁의 원인이 된 콜럼버스의 발견지도 고스란히 스페인의 손에 남았다. 스페인 입장에서는 새로 포르투갈 영역에 들어간 지역에 미지의 땅이 얼마나 있을지도 모르는 마당에, 그들이 발견한 새 영토에 대해 포르투갈의 보장을 받았다고 나름 만족했을 것이다. 그러나 포르투갈은 ‘미지의 땅이 얼마나 있을지도 모르는’게 아니었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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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르데시야스 조약문. 포르투갈 소장본이다. 이 조약의 체결로 오늘날 남아메리카의 절반을 차지하는 브라질은 포르투갈의 식민지가 되었고, 두 나라는 세계를 둘로 나누었다.



조약 체결 시점에서는 아무도 모르는 것으로 되어 있던 남아메리카의 동단부는 본래 교황의 칙서로는 스페인의 땅이 되지만, 토르데시야스 조약으로 포르투갈에게 돌아가게 된다. 포르투갈은 스페인보다 해양 탐사의 경험이 훨씬 앞서 있었고, 비밀리에 남쪽 땅의 존재를 알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래서 1500년에 ‘아프리카 탐사를 위해 나섰던 포르투갈의 페드루 알바레스 카브랄’ 선장이 ‘전혀 우연히’ 남아메리카 동단부를 발견함으로써 그 땅의 존재를 ‘처음’ 알았다는 것은 속임수였을 지도 모른다. 오늘날 남아메리카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는 브라질이 포르투갈 식민지로 출발할 수 있었던 것은 토르데시야스 조약의 직접적 결과였다. 아무튼 이로써 두 나라는 ‘세계를 둘로 나누었다.’ 또한 교황 칙서에는 언급되지 않았던, 각자의 수역에서의 항행권이 비로소 명기된 점도 각자의 영역에 대한 배타적 지배권을 강조한 셈이었다(애초에 교황의 칙서에는 해당 지역에서 기독교를 포교할 권한만 나와 있으며, 실질적인 영토권이 나와 있지는 않았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전후의 상황을 봐서 역시 그 의미는 영토 경계 규정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조약으로 포르투갈이 스페인을 보기 좋게 속여넘기고 많은 실익을 챙긴 것이 당시의 진실이었더라도, 장기적으로는 오히려 포르투갈이 손해를 본 셈이 된다. 문제는 ‘테라 인코그니타’의 전체 규모를 포르투갈조차 몰랐다는 데 있었다. 그들이 남아메리카 동단부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해도, 그것이 그냥 큼직한 섬 정도가 아니라 유럽 전체보다 큰 대륙의 일부였음을 알았겠는가? 조약 이후 스페인은 분계선 서쪽에서, 포르투갈은 동쪽에서 영토 확장을 추구해 나갔는데 포르투갈이 공략했던 세계에는 강력한 국가들이 많아서 넓은 영토를 차지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스페인은 브라질을 제외한 아메리카 전체를 파죽지세로 정복할 수 있었다. 주앙 2세가 만약 오늘날의 세계 지도를 가지고 있었다면, ‘영역을 동서가 아니라 남북으로 나누어야 한다’고 주장했을 것이고, 그러면 아메리카의 북쪽은 스페인, 남쪽은 포르투갈이라는 식으로 경계가 정해졌으리라.



세계를 갈라먹다



또한 조약 당시의 사람들은 콜럼버스의 발견에도 불구하고 ‘지구는 둥글다’는 사실을 확실히 받아들이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대서양을 양분하는 하나의 선만 긋고 말지 않았을 테니까! 두 나라가 동, 서로 계속 정복을 해나가다 보면 어딘가에서 마주치게 될 텐데, 그쪽은 누구의 영역이라 할 것인가? 가령 한반도는 토르데시야스 경계선에서 동쪽에 있는가, 서쪽에 있는가? 이 문제는 1522년에 마젤란 일행이 최초의 세계 일주 항해를 마치고 돌아와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입증하고, 7년 뒤인 1529년의 사라고사 조약에서 태평양에 또 하나의 경계선이 그어짐으로써 해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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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르데시야스 조약을 계기로 양분된 지구. 보라색 점선이 1493년의 교황 칙서에 따른 경계선이고 보라색 선이 토르데시야스 조약(1494)에 따른 선이다(기점의 해석에 따라 이보다 좀 더 오른쪽으로 잡을 수도 있다). 녹색 선은 1529년의 사라고사 조약으로 추가된 경계선이다. <출처: (cc) Lencer at en.wikipedia.org>



토르데시야스 조약문에는 모호한 구석도 있었다. “카보베르데에서 서쪽으로 370레구아 떨어진 지점”이라고 했는데, 정확한 기준점이 카보베르데 제도의 중앙부인지, 서쪽 끝부분인지, 동쪽 끝부분인지가 불분명했던 것이다. 카보베르데는 너비 약 250킬로미터 정도의 해역에 점점이 흩어진 섬들이므로,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상당히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었다. 그래서 나중에도 이 점을 두고 종종 갈등이 빚어지게 된다.

아무튼 토르데시야스 경계선은 한참 동안 지리상의 발견 내지 침략의 기준선이 되었다. 포르투갈은 1497년에 바스코 다 가마가 아프리카 최남단의 희망봉(1488년에 바르톨로메우 디아스가 처음으로 통과했다)을 돌아 인도에 이르러 2년 만에 귀환함으로써 인도 경략의 길을 열었고, 1505년에는 프란시스코 알메이다가 초대 인도 부왕(副王)으로 부임했다. 1507년에는 동아프리카의 모잠비크를 점령하고, 1511년에는 아폰수 드 알부케르크가 말라카를 차지했으며, 1518년에는 실론(스리랑카)에 콜롬보를 건설, 1543년에는 일본에 도착, 1557년에는 중국 남부에 마카오를 건설했다.

한편 스페인은 1510년에 바스코 발보아가 파나마에 정착촌을 세우고 남태평양을 발견했으며, 1521년에 코르테스가 아즈텍을, 1532년에 피사로가 잉카를 멸망시키면서 중남미를 차례차례 손에 넣어갔다. 이후 파나마를 경계로 하는 중앙아메리카는 ‘누에바 에스파냐’로, 남아메리카의 콜롬비아와 베네수엘라 일대는 ‘누에바 그라나다’로, 잉카의 옛 땅은 ‘페루’로, 지금의 아르헨티나 일대는 ‘라플라타’로 구획되어 각각의 부왕들이 다스리는 식민지가 된다. 필리핀도 1521년에 마젤란이 상륙한 이래 스페인 식민지로 되었다(사라고사 조약의 기준선으로는 포르투갈의 영역에 속했음에도). 1580년에는 토르데시야스 경계선이 순식간에 무의미해져 버리는 일이 발생했다. 스페인의 펠리페 2세가 포르투갈의 왕위를 계승함으로써 두 나라를 통일해 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17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스페인은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구가하게 되지만, 확고한 자치권과 고유 제도의 철저한 보존을 조건으로 통합에 동의했던 포르투갈은 이 기간 중에도 개척했던 식민지를 별도로 관리했으며, 1668년에 다시 독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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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말의 두 제국. 푸른색이 포르투갈, 붉은색이 스페인령이다.



토르데시야스 경계선이 진정으로 무의미해진 때는 17세기 초, 영국, 프랑스, 그리고 스페인에서 독립한 네덜란드 등이 해외 식민지 개척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들 국가는 처음부터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인정하기 싫어했다.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는 “이 세계를 두 나라에게 나눠주다니, 아담의 유언장에 그런 조항이 있었던가?”라고 빈정댔으며,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는 “바다는 만인의 것이다. 누가 바다를 독점하려 한단 말인가?”라며 분개했다. 이때를 전후해 여러 유럽 열강이 종교개혁으로 개신교화되면서, 기본적으로 교황의 권위에 기대고 있던 토르데시야스 조약의 권위는 더욱 무시되었다. 그러나 의외로 현대에 와서도 이 조약이 국경분쟁에 거론되는 일이 없지 않다. 가령 1940년대에는 칠레가 이 조약을 근거로 남극 영유권을 주장했으며, 1982년에는 아르헨티나가 포클랜드 제도에 대한 영유권 주장의 근거로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내세웠다.



역사 위에 그은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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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초, 브라질의 흑인 노예를 매질하는 장면. 브라질은 1822년에 독립했으나 노예제도는 1888년, 서구 문화권에서는 마지막으로 폐지되었다.



토르데시야스 조약이 역사에 남긴 영향은 무엇일까. 우선 브라질이라는 나라가 이 결과로 탄생했다. 다른 남미 국가에 비해 브라질에 유독 물라토(mulato: 흑백혼혈인)가 많은 까닭도 그 때문이다. 식민지 건설 과정에서 포르투갈이 자신들이 지배하는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무수히 실어와 노예로 부렸던 것이다. 이후 브라질은 1808년에 나폴레옹을 피해 포르투갈 왕실이 피난할 정도로 포르투갈의 충실한 식민지로 남았다가, 1822년에 포르투갈 왕실의 일원인 페드루 1세가 브라질 제국을 선언하고 독립한 뒤로 차차 유럽과의 끈이 끊어져갔다.

또한 이 조약은 유럽이 바닷길을 이용해 비유럽 세계로 진출하는 ‘서세동점’의 본격화를 가져왔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세계제국을 건설했을 뿐 아니라, 그에 자극받은 다른 유럽 국가들도 유럽에서의 다툼에서 벗어나 훨씬 넓은 세계로 눈길을 돌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토르데시야스 경계선은 인간이 지도 위에 멋대로 자를 대고 선을 그음으로써 자연적인, 또 오래 이어져온 문화적인 경계를 무시하고 강자의 이익에 따라서 세계를 재단하고, 찢고, 소유하고, 착취하는 근대문명의 출발선이 되기도 했다. 지도 위에 임의로 선을 그어 경계를 짓는 방식이 그때가 처음은 아니었으나 지구적인 규모로 이루어진 적은 없었기에, 오늘날에도 아프리카나 아메리카 지도에 남아 있는 반듯반듯한 인위적 직선들이 이 이후로 널리 유행하게 된 것이다.

어떤 ‘선’도 개의치 않고 자유로이 넘나드는 물고기와 바닷새는, 바람과 햇빛은, 바다 위에 보이지 않는 선이 있었다는 것을, 아니 지금도 여기저기 있다는 것을 모른다. 그들은 교황의 칙령도 정복자의 야심도 모른다. 아득히 먼 옛날, 인간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부터 지금껏 늘 똑같이, 무심히 날고, 헤엄치고, 불고, 빛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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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규진 | 서울교육대학교 교수/역사저술가
글쓴이 함규진은 여러 방면의 지적 흐름에 관심이 많다. 정치학을 전공하여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주로 역사와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썼고, 인물이나 사상에 대한 번역서도 많이 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등 서로 대립되는 듯한 입장 사이에 길을 내고 함께 살아갈 집을 짓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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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도서
조약의 세계사 2014.12.22
고대부터 현대까지 64개의 조약으로 읽는 화해와 배신, 강압과 화합 그리고 진보의 역사.

‘지뢰는 과연 쓸모 있는 무기일까?’, ‘난징 조약은 불평등조약인가?’와 같은 흥미로운 물음을 던지며 세계사의 이면을 파고들어 역사와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을 넓힌다. 강화도 조약과 같이 우리 역사 속 조약부터 마스트리히트 조약처럼 생소한 조약, 고대의 히타이트-이집트 조약에서부터 현대에 체결된 리우환경협약까지 역사의 흐름을 바꾸고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계를 형성한 조약을 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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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2013.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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