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골란고원 전차전 - 골란고원 전차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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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94회 작성일 16-02-07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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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목차
1. 골란고원 전차전2. 골란고원에서의 공방
3. 골란고원에서 패주한 시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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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군이 골란고원 전투에서 사용했던, 버려진 T-62 전차 〈출처 (cc) Pikiwikisrael at Wikimedia.org〉



1973년 10월 5일 이스라엘-시리아 접경의 골란고원 북부에 있는 헤르몬 산 관측소에서 근무하던 이스라엘 장병들은 골란고원의 입구 시리아 쪽에 배치되기 시작한 시리아 군의 전차들과 포들을 보고 긴장했다.

다음 날 10월 6일 아침 시리아 군 집결 병력의 크기가 더욱 커졌다. 오후 1시 45분, 집결한 시리아군의 포병들은 포에 씌운 위장망을 모두 걷어 냈다. 15분 뒤 14:00. 시리아 군의 모든 포가 불을 뿜었다.

이어서 전차들과 장갑차들이 이스라엘 방어선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피비린내 나는 골란고원의 전투가 발발한 것이다. 그 배경을 먼저 살펴보자.




한 쪽은 욤 키푸르, 다른 쪽은 라마단이라 부르는 전쟁




1948년 아랍 지역인 팔레스타인에 파고 들어와 독립을 선언한 이스라엘은 망국 후 천년 동안의 방황을 끝내는 감격스런 순간이었지만, 아랍 제국(諸國)에게는 두고 볼 수 없는 영토 침탈 세력의 등장이었다. 두 세력의 갈등이 전쟁으로 발전했던 것이 이스라엘 독립 후 여러 번 있었다.

1967년 6월 이집트 나세르(Gamal Abdel Nasser, 1918~1970) 대통령이 이스라엘 티란 해협을 봉쇄하고 이스라엘을 위협하다가 오히려 이스라엘에게 선제 공격을 당해 아랍국가들은 대패의 수모를 맛보았다. 이것이 유명한 1967년의 6일 전쟁이다. 이집트는 시나이 반도, 시리아는 골란고원, 요르단은 요르단 강 서안의 영토를 잃었다.

나세르가 죽고 권토중래(捲土重來)의 기회를 노리던 후임 안와르 사다트(Anwar Sadat 1918~1981) 대통령은 6월 전쟁의 치욕적인 패배를 당한 것은 아랍측이 '기습'을 당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사다트는 시리아 알아사드(Hafez al-Assad 1930-2000) 대통령과 협의하여 이스라엘을 '기습'해서 빼앗긴 영토들을 되찾고 중동의 주도권을 확보하기로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양국은 치밀하게 준비를 거듭하여 1973년 10월 6일 이스라엘의 남과 북에서 동시에 기습 협격(挾擊)하였다. 이스라엘은 아랍측이 선공(先攻)할지 모른다는 정보를 잇따라 입수했었으나 여러 가지 이유로 6일 전쟁같은 선제공격을 가하지 못하고 기습을 허용하였다.

1973년 발발했었던 이 전쟁은 이스라엘은 욤 키푸르 전쟁이라고 부르고 아랍측은 라마단 전쟁이라고 부른다.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제4차 중동전쟁이라고 부른다.

이 전쟁은 남쪽 시나이 반도와 북쪽 골란고원에서 각각 전투가 벌어지는데, 남쪽에서는 이집트가, 북쪽에서는 시리아가 이스라엘을 같은 날 기습했다. 이 글에서는 방어하던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골란고원의 전투를 소개하겠다.




6일 전쟁에서 잃은 골란고원을 찾으려는 시리아




골란고원은 이스라엘과 시리아 사이에 있는 화산암 고원 지대로서 원래는 시리아 영토였었다. 시리아 쪽으로는 완만한 경사지만 이스라엘 쪽은 해발 500미터의 급경사지다.

고원의 북쪽에는 해발 2,814 m의 헤르몬 산이 있어. 이스라엘 영토를 멀리까지 내려다 볼 수가 있다. 시리아는 1967년 6일 전쟁 이전부터 유리한 지형을 십분 활용하여 수시로 이스라엘 정착민촌과 군 시설에 포격을 했다.

이스라엘은 1967년 4개 여단을 동원해서 절벽 같은 급경사지를 올라가 고원을 공격 점령하고 1973년까지 내주지 않았었다. 시리아는 이를 되찾기에 절치부심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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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10월 6~10일의 골란고원 전투 상황도. 시리아가 골란고원으로 공격한 상황.



침공 시리아 군의 규모는 대단한 것이었다. 3 개 사단 28,000명의 병력과 600문의 포, 전차 800량이었다. 공격 이틀째에는 이 사단들에 더해서 2개의 기갑 사단들이 추가로 공격에 가담하였다.

불의의 기습을 당한 이스라엘이 당장 방어에 동원한 군사력은 1개 사단에 편성된 3개 여단 3,000명의 병력과 그리고 60문의 포, 180량의 전차가 전부였다.

이스라엘 군 사단은 라풀 에이탄 장군이 지휘하는 라풀 사단이었고 소속 된 주력 2개 여단은 7기갑 여단과 188 바라크 기갑 여단이었다. 이 외에 공수부대인 골라니 여단이 있었다1).

어느 모로 보나 이스라엘의 열세 전투력이 감당하기 힘든 거센 전투가 발발했다고 아니할 수가 없다. 골란고원의 북쪽 7기갑 여단의 지역은 바위가 많고 지면이 험한 지형이었고 남쪽 바라크 여단 지역은 그런대로 평탄한 지역이었다.

시리아군의 전면 공격은 100여기의 전폭기를 동원한 공습과 50분에 걸친 대규모 포격을 앞세우고 개시되었다.

공격군 1선 주력 3개 사단의 전위 3개 여단은, 1964년 이스라엘이 골란고원을 점령하고 시리아와 설정했던 휴전선을 돌파하자 UN군의 휴전 감시 초소를 우회해서 이스라엘 군의 방어 진지로 전진해왔다. 그 뒤를 시리아 주력 사단들이 뒤따랐다.

이스라엘 방어선을 뚫는 돌파구 형성의 중요한 목표를 부여받은 전위의 3개 사단은 막강하게 무장되어 있었다. 이 사단들에 이동식 대공 포대들, 이스라엘의 대전차호를 파괴하기 위한 불도저들과 장애물 통과 교량 전차들, 그리고 지뢰 제거 공병 차량들이 대거 뒤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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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차호 앞까지 전진한 시리아 전차대. 전차호에 빠진 전차도 보인다.



기갑 부대가 앞장 선 주력의 공격과 병행해서 골란고원의 북방 헤르몬 산에 시리아군의 공중 강습이 있었다. 헬리콥터에 탑승한 시리아 특공대들은 골란고원의 북쪽 헤르몬 산 정상 부근에 설치된 이스라엘군의 관측소를 공격해서 이스라엘 군을 제압하고 이를 점령했다.

이 관측소에는 각종 첨단 정보 장비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스라엘 골라니 여단은 바로 재탈환을 시도했으나 시리아군의 매복 공격에 걸려 호된 실패를 맛보아야 했다.




이스라엘의 방어 전략과 병력 집중




이스라엘 최고 사령부는 남쪽 시나이 반도를 공격해온 이집트 군과 북쪽 골란고원 전선을 공격해온 시리아 군 양쪽의 침공군 중에 북쪽 골란고원을 침공한 시리아군 격퇴에 우선 순위를 두었다.

시나이의 대 이집트 전선과 이스라엘 중심부 사이에 시나이 반도가 있어서 반격의 여유 공간이 있었다. 그러나 골란고원은 방어 종심(縱深)이 짧았다.

이스라엘 북부는 인구 밀집도가 높았고 만약 시리아군이 이곳을 점령한다면 이스라엘 북부에 위치한 티베리아스, 사패드, 하이파, 네타냐 등의 주요 도시들이 시리아 군 침공의 심각한 위협 아래 놓이게 된다.

예비군의 골란고원 증파는 초를 다투는 심각한 문제였다.




이스라엘 기갑의 시간 벌기 사투




이스라엘 군의 보병과 기갑은 예비군이 전선에 완전 전개할 때까지 시간을 벌기 위해서 전력을 집중하여 싸웠다. 이스라엘 군은 시리아군이 전선을 뚫으려고 할 때마다 있는 힘을 다하여 그 돌파구의 형성을 가로 막았다.

전선에 배치된 모든 이스라엘 전차들은 공격해오는 시리아 전차들을 향하여 불을 뿜었다. 이스라엘 전차병들은 골란고원 지형에서 연습했던 대로 아주 능숙한 전투 기술을 보였다. 시리아 군은 이스라엘의 정확한 전차포 사격에 연달아서 전차를 잃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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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이스라엘군의 주력이었던 센츄리온 전차



이스라엘 군의 주력 전차는 영국제 센츄리온 전차였었다. 시리아군은 소련제 T-62, T-54/55였다. 시리아 기갑의 선봉에 선 최신식 T-62의 115mm 포는 활강포(무강선포)라서 이스라엘 센츄리온의 105mm 강선포 보다 유효 사거리가 500m 정도가 짧았었다.

게다가 이스라엘 전차 포수들은 고도의 사격 훈련을 받아서 3,000m 거리에서 이동 전차를 명중시키는 세계 일류의 포 사격 솜씨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스라엘과 시리아의 전차포의 성능 차이와 포수들의 능력 차이는 골란고원 전투 초전의 원거리 사격전에서 이스라엘 군에게 주도권를 쥐게 하였다.

이스라엘 포수들은 시리아군의 불도저 전차와 교량 전차들, 즉 기갑 공병 차량을 최우선 목표로 노렸다. 시리아군 기갑 공병 차량들은 단시간 내에 대부분 파괴되었다.

대전차호(독일어로 Spitzgraben으로서 전차가 건널 수 없게 깊게 판 도랑)는 시리아군 기갑공병 차량들의 다수 파괴로 그 구축기능을 발휘하는 듯했다. 그러나 시리아의 보병들이 이스라엘의 집중적인 포화를 뚫고 접근해서 야전삽으로 대전차호에 전차 통과 통로를 개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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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병들이 개설한 통로로 통과하려다 멈춘 시리아 전차



전쟁 발발과 동시에 긴급 소집 된 이스라엘 예비군들은 집결지에 도착하는 대로 임시 조로 편성, 전차에 탑승하고 골란고원 전선으로 급파되었다.

미리 편성된 각 전차의 원래 조원들이 모두 도착하기를 기다려 투입할 여유조차도 없었다. 전차에 기관총을 설치하거나 또는 전차포의 영점 잡기 등의 시간 걸리는 작업마저 모두 생략하였다.

시리아 군은 이스라엘 예비군들이 전선에 전개하기에 소모되는 시간을 24시간 정도로 예상했었다. 하지만 이스라엘 예비군은 실제로 전 부대의 일선 전개를 단 15시간 내에 해치웠다.

예비군의 기갑 부대는 골란고원의 일선으로 질주하면서 시리아군이 빼앗은 헤르몬 산정의 관측소에서 유도하는 포병대의 정확한 사격에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또한 골란고원의 시리아 군들은 공격시 전차뿐만 아니라 소련제 대전차 유도탄과 RPG(대전차로켓포)를 대량 사용했었다.

그러나 골란고원은 지형이 평탄하지 않고 화산암 바위 등의 장애물들이 많아서 대전차 무기들의 성과는 시나이에서 이집트 군의 대전차 무기들이 거둔 것보다는 별로 크지가 않았다.




이스라엘 공군 출격




시리아군이 침공하자 이스라엘 공군 팬텀기 등의 전폭기들이 출격하였다. 그러나 공군기들이 골란고원 상공에 나타나자마자 시리아군 쪽에서 수십 발의 대공 미사일이 날아와서 이스라엘 공군기들을 명중시켰다.

자기들을 지원하고자 출격한 전투기들이 공중에서 폭발하고 격추되자 지상의 이스라엘 육군들은 크게 놀라 공중 지원의 중지를 요청하였다. 전투 발발 초기에 골란고원에 출격한 이스라엘 공군기들은 시리아의 대공 사격으로 무려 40기나 상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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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제 SA-6 미사일.



이스라엘 남쪽 수에즈 운하를 건너 시나이로 침공했던 이집트 군이 했듯이 골란고원의 시리아군들도 그들의 대공 미사일 포대 엄호 거리 밖으로는 나오려 하지 않았다.

시리아 군의 위협적인 대공망 배치를 분석한 이스라엘 공군은 다른 공격 전술을 사용하였다. 골란고원의 남쪽인 요르단 상공을 저공으로 횡단하여 골란고원의 측면 상공에서 급강하로 시리아군을 강타하고 빠져 나가는 것이었다.

시리아군의 대공 포대는 전선 정면에서 공격해오는 이스라엘 공군기를 염두에 두고 종대로 길게 배치한 것이었기 때문에 긴 종대의 옆을 찌르는 저공 측면 공격은 시리아군의 대공 포대들의 집중포화를 피할 수가 있었다.

이스라엘 공군기들은 주로 보통의 고폭탄이나 네이팜탄을 사용해서 시리아군의 기갑 차량을 공격해서 파괴하였다. 시리아 공군도 골란고원의 전투 중 단속적으로 이스라엘군을 공격해서 상당한 피해를 주었다.

전투 개시 이틀째. 이스라엘 공군은 주요 목표를 시리아군의 기갑 전투 차량에서 이동식 대공포들로 바꾸어 집중 공격했다.

이 공중 작전은 치른 대가는 컸고 얻은 소득은 너무 작았다. 시리아 대공 유도탄 포대는 단 한 곳이 파괴되었을 따름이고 이스라엘군은 전폭기 5기를 잃었다.




뚫리기 시작한 전선




그러나 시리아군은 막대한 손실에도 불구하고 중과부적의 악조건에서 선전하고 있는 이스라엘 군에게 지속적인 공격의 압력을 가했다.

전투 개시 여섯 시간 만에 이스라엘은 오로지 수적인 우세만으로 밀어붙이는 시리아군의 압력에 견디지 못하고 최일선 방어선이 붕괴되는 최초의 좌절을 맛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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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란고원 전투에서 버려져 남겨진 이스라엘 센츄리온 전차. 〈출처 : (cc) Shmuel Spiegelman〉



남쪽 바라크 여단 방어 지역내 라피드라는 이름의 방어 거점에 돌파구를 형성한 시리아 전차 여단은 북쪽으로 방향을 돌려 도로를 타고 진격해왔다.

그 도로는 골란고원을 대각선으로 비스듬히 가로 지르는 도로였다. 이 도로가 골란고원 전투의 운명을 가로지르는 한 분기점이 된다. 이 도로는 시리아군이 형성한 돌파구에서 나파라는 도시로 직통하는 도로였다.

나파는 골란고원의 모든 길이 집중하는 곳이기도 했지만 이스라엘군의 라풀 사단 사령부가 있던 군사 도시이기도 하였다.

목차


목차
1. 골란고원 전차전2. 골란고원에서의 공방
3. 골란고원에서 패주한 시리아
골란고원은 전쟁 발발 직전까지 188 바라크 기갑 여단만이 방어하고 있었지만 전쟁 직전 7기갑 여단이 긴급 증강되어 전선의 절반인 북부에 투입되었다. 7기갑 여단이 전방에 전개 완료 했을 때는 전투 발발 하루 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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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원 | 전사연구가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시라큐스 경영대학원에서 MBA를 취득했다. 장교로 군 복무, 기갑부대 전차 소대장을 지냈다. ‘울프 독’이라는 필명으로 전사와 역사를 다룬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 국방부 정책·정보 블로그(N.A.R.A.)에 기고하고 있으며, 저서로 [공격 마케팅]이 있다


발행2013.05.09.



주석


1
골란고원은 전쟁 발발 직전까지 188 바라크 기갑 여단만이 방어하고 있었지만 전쟁 직전 7기갑 여단이 긴급 증강되어 전선의 절반인 북부에 투입되었다. 7기갑 여단이 전방에 전개 완료 했을 때는 전투 발발 하루 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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