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베스트팔렌 조약 - 주권국가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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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76회 작성일 16-02-07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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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사이의 관계에서 국가의 권리와 의무를 규정하는 국제법의 핵심 규칙들이 15세기와 16세기 내내 발전 되어왔다. 그런 국제법 규칙들의 완성은 1648년에 이루어졌다. 베스트팔렌 조약은 종교전쟁에 종지부를 찍고, 영토국가를 근대 국가체제의 초석으로 놓았다.”


-한스 모겐소, [국제관계론]




“1648년은 교회와 국가를 구분하는 확실한 지점은 아니지만 서유럽 역사에서 중요한 변동을 상징한다. (......) 미래는 국가에 속하게 되었다.”


-파리드 자카리아, [자유의 미래]



새로운 시대를 낳기 위한 진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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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6년, 가톨릭 교회를 습격해 ‘우상’을 파괴하는 네덜란드의 신교도들. 이는 네덜란드 독립전쟁의 신호탄이 되었으며, 30년 전쟁도 보헤미아 신교도들의 반란으로 시작되었다.



서구 역사상 가장 참혹했던 전쟁을 꼽는다면 아마 제1차 세계대전이나 제2차 세계대전일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3백여 년 전, 아직 화약 무기의 위력이 그다지 세지 않았던 때, 세계대전 못지 않게 유럽인들의 영혼을 공포와 환멸로 갈가리 찢어버린 참혹한 전쟁이 있었다. 30년 전쟁은 주로 독일 땅에서 이루어진 전쟁이었으나 참여한 나라는 유럽의 대부분이었고, 그 참상은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그토록 무시무시하고 지긋지긋한 전쟁을 겪은 나머지, 사람들은 스스로를 반성하고, 전통을 의심하며, 새로운 길을 찾고자 손을 잡게끔 된다.

30년 전쟁의 발단은 1618년, 신성로마 황제의 신교 탄압 정책에 불만을 품은 보헤미아의 신교도들이 라트신 궁전에서 가톨릭 참사위원들을 창밖으로 내던져 버린 사건이었다.하지만 정작 베스트팔렌(웨스트팔리아) 조약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실마리는 그보다 반세기도 더 전인 1566년, 네덜란드의 신교도들이 가톨릭교회들을 습격해 방화와 파괴를 자행한 사건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사건으로 ‘80년 전쟁’이라고도 불리는 네덜란드 독립전쟁이 촉발되었고, 베스트팔렌 조약은 30년 전쟁의 마무리뿐 아니라 독립전쟁을 하면서 30년 전쟁의 교전 당사자이기도 했던 네덜란드의 독립을 승인하는 조약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수십 년 동안 유럽 땅에 피의 비를 내리게 했던 갈등의 일차적 원인은 종교에 있었다. 16세기 초부터 불어닥친 종교개혁의 바람은 유럽인들이 서로를 악마의 종들로 여기고 거리낌 없이 살육을 저지르는 종교전쟁의 시대를 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순수한 뜻에서의 종교만이 이런 오랜 전쟁의 원인은 아니었다. 신성로마 황제는 ‘교회의 수호자’라는 중세 이래의 정치적 역할을 내세워, 신교를 믿는 지역과 지역 영주를 탄압하며 황제권을 강화하려고 했다. 황제의 간섭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지방 세력 입장에서도 종교전쟁은 좋은 빌미가 되었다.

더구나 16세기 초부터 신대륙에서 쏟아져 들어오던 귀금속이 줄어들기 시작한 데다 기후변화(소빙하기의 도래)마저 겹쳐, 유럽 전체가 불황과 빈곤의 늪에 빠짐에 따라 전쟁으로 남의 것을 빼앗아 내 배를 채우자는 식의 사고방식이 만연했다. 이런 아수라장 속에 보다 침착하게 대응했던 쪽은 잉글랜드와 프랑스였으니, 두 나라는 백년 전쟁의 후유증에서 벗어나 바야흐로 절대왕정 아래 근대적 중앙집권 국가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중세의 유산을 어떻게든 청산하고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려는 서구의 진통, 그것이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이어진 네덜란드 독립전쟁과 30년 전쟁의 역사적 의미였던 셈이다.



종교전쟁에서 영토전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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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쟁의 전투 중 하나인 로크로아 전투가 끝난 뒤의 모습. 전쟁은 유럽 전체로 확대되어 가면서 종교전쟁의 틀을 벗어나 영토전쟁으로 바뀌는 양상을 띄게 되었다.



보헤미아의 신교도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이를 보헤미아 출신의 신성로마 황제가 무력 진압하며 시작된 30년 전쟁은 같은 합스부르크 가문이라는 인연으로 스페인이 황제 편에 서고, 독립전쟁 중이던 네덜란드가 당연히 반(反)황제 전선에 서면서(다만 당시에는 스페인과 10년 이상 휴전 상태에 있었다. 보헤미아의 반란이 전쟁 재개의 신호탄이 된 셈이다), 신교 국가이자 독일의 팽창을 염려했던 덴마크와 스웨덴도 반황제 전선에 가담하고, 독일-스페인이 동서 국경에서 자국을 압박하는 것을 경계한 프랑스까지 그들을 도움으로써 유럽 전체의 전쟁으로 확대되어 갔다.

그런데 프랑스의 경우에는 인구수로 볼 때 가장 많은 가톨릭 신도를 거느린 유럽 제일의 가톨릭 국가였으며 일찍이 자국의 신교도(위그노)를 잔인하게 탄압했던 나라였다(1598년의 낭트칙령 이래 신교도에게 어느 정도의 관용이 주어졌으나, 그래도 가톨릭을 앞세우고 신교도를 백안시하는 태도는 여전했다). 그런데 신교도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는 가톨릭 수호의 명분을 내세운 신성로마 황제와 싸운다? 이것은 ‘종교적 명분’보다 ‘국익’이 앞선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일이었다. 그래도 워낙 모양이 안 좋았으므로 본격적인 참전은 1635년에야 개시했던 프랑스였지만, 그때는 이미 구교와 신교의 대결이라는 양상은 많이 퇴색되어 있었다. 1628년에 신성로마 황제 페르디난트 2세가 이탈리아의 영토 분쟁에 개입하면서 로마 교황과 적대관계로 바뀌고, 1629년에는 ‘토지반환령’을 선포하여 과거에 교회령이다가 지금은 영주 소유가 되어 있는 토지를 일체 교회에 반환하라고 지시하자 가톨릭 영주들까지도 반발하여 황제에게 맞섰기 때문이다. 이로써 전쟁은 종교전쟁의 틀을 벗어나 황제파와 반황제파의 영토전쟁으로 자리매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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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을 약탈하는 병사들의 모습. 30년 동안 계속되는 전쟁에 끌려나가고 학살당했으며, 약탈 및 강간에 시달린 것은 결국 독일의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결국 초반의 승세에 기고만장하여 자충수를 계속 두고 만 황제파는 1631~1632년에 스웨덴의 구스타프 아돌프가 황제파의 발렌슈타인을 격파하고, 1635년에 프랑스가 본격적으로 참전하면서 내내 밀리게 된다. 프랑스는 한동안 황제와 대결하며 동시에 반황제파의 일원인 네덜란드와 싸움을 벌였으나, 1637년에는 네덜란드와 동맹을 맺고 명실공히 반황제파의 중심 세력이 된다. 한편 1640년에는 포르투갈이 스페인에서 분리 독립하면서, 스페인은 네덜란드와의 전쟁에서조차 패색이 짙어져 황제를 도울 여지가 없게 되었다. 이쯤 되자 황제는 평화조약으로 전쟁을 마무리할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진작부터 황제가 그런 마음을 먹어주기를 두 손 모아 빌던 사람들은 독일의 평범한 서민들이었다. 30년 동안 계속되는 전쟁에 그들은 끌려나가고, 학살당하고, 약탈당하고, 강간당했다. 용병 위주였던 군인들은 적군이고 아군이고 차이가 없었다. 독일 인구의 삼분의 일이 사망했다고 하는(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이는 과장이고, 5퍼센트를 좀 넘었으리라고 한다. 그러나 그 정도로만 해도 20세기 이전까지는 가장 파괴적인 전쟁이 틀림없다) 이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보통 사람들이 밤낮으로 꿈꾸었던 것은 신의 영광도, 황제의 영광도 아닌 평화! 오직 평화였다.



두 개의 결정, 하나의 결과



하지만 전쟁은 그 뒤로도 몇 년을 더 끌었으며, 마침내 정식으로 평화조약 체결 교섭에 들어가고서도 조약이 성사되기까지 3년이나 걸렸다. 그만큼 사공이 많았기 때문이다. 프랑스, 네덜란드, 스웨덴, 스위스, 교황령, 스페인 등이 각자의 입장을 주장한 한편, 독일 측 참여자는 신성로마 황제 이외에도 66개의 공국들이었다.

또한 각국은 한편으로는 신성로마 황제의 힘을 축소시키려 하면서도, 동시에 신성로마가 완전히 붕괴하여 중부 유럽이 혼란 상태에 빠지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그것은 독일의 공국들도 마찬가지였다. 승리의 대가로 독일 영토를 원하면서도 동시에 독일의 일원이 되려는 경우도 있었는데, 스웨덴은 포메른 일부를 획득하면서 그것을 신성로마제국의 제후로서 보유하는 것으로 하여, 힘이 빠진 황제의 버팀목이 되어 주는 한편 장차 신성로마 황제위를 차지해 스웨덴과 독일을 합친다는 꿈을 꾸었다. 프랑스도 알자스-로렌을 차지하면서 스웨덴과 같은 조건을 검토했으나, 그것으로 ‘프랑크 제국’이 수백 년 만에 부활할 가능성을 독일도 주변 국가도 바라지 않았으므로 결국 영토만 얻는 것으로 낙착되었다. 네덜란드 7개 주는 독립의 조건을 놓고 서로 의견이 갈려, 2개 주는 끝내 조약 체결에 불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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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8년 5월 15일, 뮌스터 조약이 체결되었다. 프랑스, 네덜란드 등 개신교 국가들이 모여 체결한 이 조약은 무려 138개조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처럼 각국의 국익이 주요 관심사였지만 조약 자체는 애초에 종교전쟁으로 출발했음을 상기하려는 듯, 스웨덴 등은 가톨릭 도시인 오스나브뤼크에서, 프랑스, 네덜란드 등은 개신교 도시인 뮌스터에서 각각 황제와 조약을 맺었다(뮌스터 조약은 5월 15일, 오스나브뤼크 조약은 10월 24일). 하지만 두 조약이 상호보완적이었으며 두 도시 모두 독일의 베스트팔렌 지방에 있었으므로 이를 합쳐 ‘베스트팔렌 조약’이라고 부른다.

오스나브뤼크 조약은 17개조(단, 각 조마다 수십 개씩의 항이 달려 있었다)였고, 뮌스터 조약은 138개조나 되었는데, 이 중에서 영토 관련 주요 내용만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 네덜란드가 스페인에서 독립한다.


• 수십 년 동안 실질적인 독립국가였던 스위스가 신성로마제국에서 공식 독립한다.


• 프랑스는 스트라스부르를 제외한 알자스-로렌을 차지한다.


• 스웨덴은 서부 포메른과 비스마르, 브레멘 등 발트 해 연안의 독일 땅을 차지한다.


•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은 동부 포메른과 마크데부르크, 덴 등을 차지한다.


• 보헤미아의 신교 지역은 카를 루드비히 부왕(副王)이 다스리며, 구교 지역은 바이에른에 병합된다.


• 클레베 공이 다스리던 영지(그 귀속 문제는 30년 전쟁의 원인 중 하나를 제공했다) 중 클레베, 마르크, 라벤스베르크는 브란덴부르크에, 율리히, 베르크, 라벤슈타인은 노이부르크에 귀속된다.

아울러 독일의 분열을 격화시켰던 1629년의 토지반환령이 취소되어, 조약에서 명시되지 않은 옛 교회 영지는 현행 세속영주들의 영지로 인정되었다.



낡은 화면에 그린 새로운 세계의 청사진



베스트팔렌 조약은 영토 조정 말고도 중요한 내용을 여럿 담고 있었다. 그중 하나로, 신교도 중 루터파의 존재를 인정했던 1555년의 아우구스부르크 종교화의 결정을 재확인하고, 관용의 대상에 칼뱅파도 넣기로 함으로써 개신교가 비로소 유럽에서 인정받으며 종교전쟁의 불씨가 사라진 점이 중요했다. 아우구스부르크 종교화의에서는 ‘각 지역 주민의 신앙은 지역 통치자의 신앙에 따른다(cuius regio, eius religio)’는 원칙이 수립되었었고 이 역시 조약에서 재확인되었으나,



“1627년 이전에 다른 신앙을 갖기 시작한 사람은 설령 거주 지역의 통치자와 다른 신앙이더라도 자신의 신앙을 유지할 수 있으며, 그의 자녀에게 자신의 신앙을 가르칠 수 있다. 그의 신앙 활동은 집 안에서나 밖에서나 방해받지 않는다. 거주민으로서 공적 불이익을 당하지 않으며, 자신의 신앙에 따른 절차로 장례를 치를 수 있다. 또한 자신과 같은 신앙의 통치자가 다스리는 지역으로 이주하고 싶다면, 자유롭게 그리할 수 있다.”


- 오스나브뤼크 조약 제5조

이처럼 개인의 종교 자유가 어느 정도 보장되었다. 그토록 오랜 고통의 세월 끝에, 마침내 영혼의 구원을 빌미로 육체의 피를 흘려서는 안 된다는 합의가 유럽인들 사이에 조심스럽게나마 이루어졌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른바 ‘근대적 주권’이 그 내용에 비로소 명시되었다고도 한다.



“제국의 모든 공국들은(......) 법률을 만들고 해석할 권한, 전쟁을 선포할 권한, 세금을 매길 권한, 병사들을 징집할 권한, 영지 내에 새로운 요새를 건설하거나 강화할 권한이 있다.(......) 무엇보다도, 제국의 모든 공국들은 자체의 보전과 안전을 위해 외국과 자유롭게 동맹을 맺을 권한이 있다. 다만 그런 동맹이 황제, 제국, 제국의 평화, 그리고 이 조약 내용을 해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또한 각자 황제 및 제국과 맺은 맹세와 어긋나서도 안 된다.”


- 뮌스터 조약 제65조

이로써 프로이센이든 보헤미아든 바이에른이든 간에 각자 신성로마 황제의 종주권에서 벗어나서 자유롭게 나라를 다스리고 동맹을 체결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것은 곧 이들 공국이 ‘주권국가’로 거듭났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전통적인 해석이 오늘날에는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중세 시대부터 봉건 영주는 상위 영주에게 우선적으로 충성해야 했으나 그밖에는 영지를 자유롭게 다스렸으며, 상위 영주를 곤란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 이상 동맹도 마음대로 맺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조항은 그런 오래된 원칙을 다시 한 번 공식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중세의 ‘제한적 영주권’은 공국 단위의 위뿐 아니라 아래로도 마찬가지여서 작은 마을을 다스리는 영주도 공국의 영주에게 똑같은 자율권을 가질 수가 있었다. 그런데 이 조약에서는 공국만이 그런 권한의 소유자로 지목되었고, 따라서 그 지방 지도자들의 자율권은 무시된 셈이었다. 그리고 어차피 30년 전쟁의 결과 제국의 힘과 권위가 대부분 유명무실해진 마당에, 제국에 어긋나는 동맹은 불허한다는 조항은 곧 사문화될 수밖에 없었다. 이는 한창 진행되고 있던 절대왕정-중앙집권 경향에 발맞추어 근대적 주권국가의 형성에 도움을 주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베스트팔렌 조약은 그런 주권국가들끼리 평화를 유지하는 방식도 새롭게 도입했다.



“신교와 구교를 가리지 않고, 이 조약에 서명한 당사자들은 이 조약의 내용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 (......) 누군가 이 조약의 내용을 어기는 일이 있다면, 피해자는 가해자에게 직접 보복을 자제하고 우호적인 이웃들의 중재를 호소하거나, 재판의 절차를 밟아야 한다. (......) 3년의 조정 기간을 거쳐도 피해가 보상되지 않는다면, 이 조약에 서명한 당사자들은 모두 힘을 합쳐 피해자의 편에 서서, 가해자에게 보복해야 한다.”


- 뮌스터 조약 제123~124조

말하자면 ‘집단 안전보장에 의한 국제 평화 유지’라는 현대적인 국제정치 개념이 이때 이미 나타난 셈이다. 물론 이 내용이 그대로 지켜지지는 않았으며, 이후 유럽의 국제정치는 기본적으로 세력균형을 염두에 둔 힘의 정치가 이어졌다.하지만 ‘유럽의 모든 국가가 머리를 맞대고 평화를 유지할 방안을 강구하며, 서로가 신사적으로 침략을 자제하고 그럼에도 나타나는 침략자를 집단적으로 제재하기로 한다’는 개념은 이후에도 하나의 이상으로 살아남았다. 그래서 이 시기에 그로티우스가 내놓은 최초의 국제법 이론을 비롯하여, 칸트의 영구평화론, 나폴레옹 전쟁 이후 유럽 질서를 복원한 빈 체제, 19세기 말 제국주의 국가들끼리의 교통정리를 해낸 베를린 회의 등에서 이 이상은 계속 고려되고 응용되었으며, 마침내 세계대전 이후 국제연맹과 국제연합을 만드는 과정에서 본격적으로 현실화되는 것이다.



국가의 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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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의 파리강화회의. 주로 서구 열강의 수뇌들이 모여 제1차 세계대전의 뒤처리를 논의했다. 민족자결주의와 국제연맹 창설안이 여기서 나왔다.



베스트팔렌 조약이 유럽에 미친 직접적 영향은 독일(신성로마제국), 스페인의 몰락과 프랑스, 스웨덴의 융성이다. 신성로마제국은 사실상 오스트리아로 퇴화된 가운데 북부의 프로이센이 신흥 세력으로 발돋움하며 장차 독일의 패권을 놓고 오스트리아와 겨룰 실력을 쌓아가기 시작했다. 프랑스는 루이 14세 치하에서 비틀거리는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왕조를 끊고 자국과 같은 부르봉 왕조를 세우는 등 유럽 최고의 패권국가로서 영광을 구가했다. 스웨덴은 북유럽의 패자로 우뚝 서서 발트 해를 호수로 삼았으나, 곧 무리한 군국주의 발전의 한계에 부딪치고 러시아와의 경쟁에서 패배하면서 중위권 국가의 길을 가게 된다. 네덜란드는 염원하던 독립을 성취했으나, 조약의 결과로 이웃 프랑스와 스웨덴이 강력해지는 바람에 대륙 패권경쟁에는 엄두를 낼 수 없었으며, 이후 해양국가로서의 발전에 주력한다.

이후 중세적 질서가 빠르게 소멸되면서 유럽 각국은 절대왕정과 국가권력 강화, 과학기술과 자본주의 발전이라는 역사적 발전단계를 재빠르게 밟아나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주권국가끼리의 자유로운 교류와 연합’이라는 베스트팔렌의 틀을 되밟으며 주권 평등의 원칙, 주권 절대성의 원칙, 내정간섭 불가의 원칙 등 조약 당사자들은 아마도 예상하지 못했을 근대적 원칙들을 하나하나 정립해 나간다.

그러나 그런 원칙들은 ‘서구 기독교 국가’ 사이에서만 적용되는 것이었다. 지리상의 발견 이래 꾸준히 계속되어 온 비서구권 침략 과정에서, 비서구권 국가와 맺은 조약들에서는 상대 국가의 주권이 존중되지도, 내정 간섭이 자제되지도 않았다. ‘베스트팔렌 체제’가 비로소 지구 전체에 적용된 것은 20세기의 세계대전 이후다. 그리고 다시 30여 년이 흐르자, 베스트팔렌 체제 자체가 이미 낡았다는 지적이 거듭되기 시작한다. 안정을 빌미로 무력을 독점하고 타국의 간섭을 배제한 국가가 오히려 사상 최악의 전쟁과 인종청소를 자행했으며,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국가권력의 횡포에 신음하고 있다. 그리고 범세계적인 문제로 떠오른 인권 문제나 환경 문제, 빈곤 문제 등을 다루기 위해서는 국민국가라는 틀을 넘어서는 글로벌한 개입과 협력이 필요해졌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주권국가로는 한계가 있다’는 말이 ‘주권국가는 아무 쓸모가 없다’는 말이 되지는 않는다. 한국처럼 주권을 잃고 쓰라리고 기막힌 경험을 해본 나라에게 국가 무용론은 한결 낯설다. 개인과 사회, 국가와 민족, 그리고 세계. 이 모두가 조화를 이루며 각자의 입장을 가장 적절히 만족시킬 수 있는 틀을 찾으려면, 어쩌면 또 한 차례의 대전란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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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규진 | 서울교육대학교 교수/역사저술가
글쓴이 함규진은 여러 방면의 지적 흐름에 관심이 많다. 정치학을 전공하여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주로 역사와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썼고, 인물이나 사상에 대한 번역서도 많이 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등 서로 대립되는 듯한 입장 사이에 길을 내고 함께 살아갈 집을 짓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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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도서
조약의 세계사 2014.12.22
고대부터 현대까지 64개의 조약으로 읽는 화해와 배신, 강압과 화합 그리고 진보의 역사.

‘지뢰는 과연 쓸모 있는 무기일까?’, ‘난징 조약은 불평등조약인가?’와 같은 흥미로운 물음을 던지며 세계사의 이면을 파고들어 역사와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을 넓힌다. 강화도 조약과 같이 우리 역사 속 조약부터 마스트리히트 조약처럼 생소한 조약, 고대의 히타이트-이집트 조약에서부터 현대에 체결된 리우환경협약까지 역사의 흐름을 바꾸고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계를 형성한 조약을 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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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2013.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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