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웨이크섬 전투(2) - 일본이 점령한 웨이크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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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522회 작성일 16-02-07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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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웨이크섬 전투2. 웨이크섬 전투의 결과

일본 함대가 퇴각하고 커닝햄과 데버루는 하와이 섬에 증원군을 긴급 요청하고 그 도착을 긴장 속에 기다렸다.

마샬 군도에서 날아오는 일본 쌍발 폭격기 1식 육상 공격기의 웨이크섬 공습은 매일이다시피 이어졌다. 웨이크섬의 방어 시설물과 전투 장비들이 서서히 파괴되어 갔다.



2차 상륙작전의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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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오카 사다미치(梶岡 定道 1891-1944)소장. 1944년 12월 전투 중 전사했음.



한편 첫 공격에서 볼품없는 패배를 당하고 철수한 가지오카 소장은 마셜 군도의 콰자레인 섬에 머물며 2차 공격을 준비하였다.

그를 포함한 일본 해군 지휘부의 간부들은 웨이크섬의 방어력을 과소평가했다는 사실을 자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가지오카 제독이 망신감에 얼굴을 들 수없는 이유가 있었다, 개전 전에 일본이 웨이크섬보다도 더 중시하던 목표가 있었다. 당시 일본 영토였던 사이판 섬과 인접해있던 괌 섬이었다.

괌 섬은 크고 인구도 많았다. 섬이 요새화되었다고 판단했었던 일본은 네 척의 중순양함을 주축으로 하는 강력한 침공 함대와 5,000명의 병력을 파견했다.

그러나 큰 섬인 괌 섬은 별다르게 방어되지 않았다. 일본 해군은 이틀간 포격과 폭격을 가하고 12월 10일 아침 6시 25분에 상륙했는데 수비하던 미군은 20분 만에 항복을 해버렸다.

(미군 수비 병력 500명중 현지 차모로 족(族) 출신이 과반을 넘었었다. 이들은 열심히 싸울 의지나 실력이 없었다.)

괌 섬보다 훨씬 작은 섬인 웨이크섬 점령에 실패한 가지오카는 수치심을 누르고 함대 증강과 병력 증원을 요청했다.

웨이크섬이 만만치 않게 방어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대본영의 해군은 하와이 기습을 완수하고 귀환 중이던 나구모(南雲) 기동 부대에서 히류(飛龍)와 소류(蒼龍), 두 척의 항공모함과 중순양함들을 빼내 웨이크섬으로 급파했다.

가지오카의 침공 함대에도 두 척의 구축함을 포함한 6척의 함선을 증강하고 괌 섬 점령을 완료한 육전대 병력을 이동시켜 웨이크섬 침공 병력에 증원하였다. 웨이크섬 공략 육전대 병력은 무려 2,000명의 대병력이 되었다.

1941년 12월 21일 05:45, 가지오카가 지휘하는 웨이크섬 2차 침공 함대는 마셜 군도 콰자레인 섬의 루오타 기지를 출발하였다.

한편 첫 침공후 웨이크섬의 긴급 구원을 받은 미 태평양 함대 사령관 대행 윌리암 파이 중장은 구원 부대를 구성해서 프랭크 후레처 제독 지휘하에 웨이크섬으로 달려가도록 명령하였다.

항모 사라토가를 중심으로 함대를 편성한 구원 부대는 1개 대대의 지원 병력과 항공기, 포탄, 무기들을 싣고 웨이크섬으로 향하였다.



일본의 2차 상륙작전




구원 함대가 느린 속도로 웨이크섬으로 항해하고 있던 12월 22일, 파이 중장은 두 척의 일본 항모들과 전함으로 의심되는 두 척의 적함(실제로는 중순양함)들이 이 해역에서 작전 중이라는 사실을 알고 웨이크섬 구원을 포기하고 함대를 회항(回航)시켰다.

12월 22일, 새벽 웨이크섬 북방 200해리 해역까지 접근한 두 척의 일본 항모에서 발진한 함재기들이 웨이크섬을 공습했다.

다음 날에도 함재기들의 공격이 되풀이 되었는데 두 번째 공습에서 일본 항공대는 고공에 잠복해있던 두 기의 와일드캣 기들이 가한 급강하 기습을 받고 두 기의 97식 함상 공격기를 잃었다.

그 중 한 기의 조종사는 수평 폭격의 명수였고 진주만 기습 항공대의 향도기로서 유도 임무를 해낸 명조종사 가나이 노보루(金井 昇) 일등 비행 병조였다. (가나이 병조는 해군에서 잘 알려져 있었고 일본 언론에도 보도 된 전쟁 영웅이었다.)

기습 임무에는 성공했지만 공격 성공 직후 두 대의 와일드캣 기는 엄습하는 제로 전투기들에게 격추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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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97식 함상 공격기



12월 23일 자정이 지날 무렵 일본 함대 사령관 가지오카는 다시 섬에 접근해왔다. 1차 공격에서 크게 실패하고 마셜 군도로 쫓겨났던 침공 함대는 2차 공격에서는 다른 상륙 전술을 사용하였다.

사전 함포 사격도 없이 어둠을 타고 2마일까지 가까이 다가간 함대는 아직 심야인 23일 02:20 해안 2개처에 발동정(發動艇)에 승선한 선발 육전대를 기습 상륙시켰다.

제 32호 초계정과 제 33호 초계정이 추가 병력을 싣고 섬의 해변으로 직행 돌격을 가하고 좌초했다. 좌초한 초계정에서 병력들이 쏟아져 내려와 공격부대에 가세했다.

기습을 당해 상륙을 허락했으나 해병대는 이번에도 분전(奮戰)하였다. 해안에 좌초한 초계정들은 포격으로 불타고,염상(炎上)시키고일본군 33명이 전사했다.

일본군은 막심한 피해를 입었지만 계속 상륙해서 비행장으로 진격해갔다. 해병의 용맹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약 1,000명의 일본 육전대가 상륙에 성공하였다.

공격하는 일본군과 미군의 병력 차이가 2대 1이었으나 미 해병대의 저항은 맹렬하였다. 윌크스 섬의 포대를 공격했던 마이즈루(舞鶴)특별 육전대는 중대장이 전사하고 일개 소대가 전멸하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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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에 격파되어 좌초 된 일본 해군 32호 초계정





웨이크섬의 함락




선전(善戰)하던 미 해병대에게 비운(悲運)이 닥쳤다. 일본군은 비행장 근처에서 데버루 소령을 포로로 잡고 조금의 시간이 흐른 뒤 지프(Jeep)차를 타고 지휘를 하던 커닝햄 중령도 포로로 잡았다.

일본군은 커닝햄 중령의 지프차에 백기를 걸고 해병 포대와 방어부대들을 방문하여 항복을 권하게 하였다. 해병들은 웨이크섬 지휘관들이 정식으로 항복한 것으로 오판하고 모두 항복하였다.

10월 23일 10시 45분. 전투는 상황이 종료되고 웨이크섬은 일본군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15일간의 전투에서 웨이크섬의 수비군들은 4척의 일본 전투함들을 격침하고 여러 척을 대파했다.

더해서 21기의 일본 항공기들을 격추하고 일본군 820명을 사살하고 300명을 부상시켰다. 미군의 손실은 12대의 항공기가 파괴되었고 119명이 전사하였고 50명이 부상하였다.

항복하여 포로가 된 미군들의 구성은 368명의 해병, 60명의 해군, 5 명의 육군, 그리고 토건회사 모리슨-누드센 사 직원 1,104명이었다.



미군 항복 후 웨이크섬




일본군은 웨이크섬 공사장에서 처음으로 불도저를 보았다. 불도저는 비행장 건설용으로 미 토건회사가 반입했던 것이었다.

일본군은 불도저의 성능에 반해 센진리키(千人力)이라 명명하고 즉각 활용했었다. 일본은 포로의 대부분을 중국 점령지 등의 포로수용소로 이동시켰지만1) 98명의 민간 기술자들은 섬에 억류하고 요새화 공사를 계속하도록하였다.

일본군은자기들에게큰피해를준미군들을그냥두지않았다. 일천 이백 여명의 포로들을 닛다마루(新田丸)에 승선시켜 후송 중에 포로들의 폭동 기미가 있다는 혐의를 뒤집어씌워 5명을 참수하고 수장(水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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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점령하에 웨이크섬 계속 요새화 되었다. 태평양 전쟁 기간 미군은 웨이크섬을 탈환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었다.

웨이크섬은 미군의 개구리 뜀뛰기(Leap frog) 반격 작전에서 주공 방향에 있지 않아서였다. (이 작전은 웨이크섬이나 라바울 같이 요새화된 섬들은 그냥 지나치기도 했었다.)

미군은 웨이크섬 대신 그 남쪽 마셜 군도 콰자레인 섬의 전략적 가치를 더 중시했었다. 1944년 1월 31일 미군은 육군 7 보병 사단을 동원해서 이를 상륙 점령해버렸다.



웨이크섬의 봉쇄




상륙 공격하는 대신 미군은 잠수함으로 웨이크섬을 봉쇄하고 보급을 끊어 일본군을 굶게 만들었다. 간간히 일본 잠수함이 찾아와서 긴급 물품을 전달했지만 턱없이 부족하였다.

일본군과 포로들은 굶주렸다. 풀을 뜯어먹고 해안선의 어패류를 핥듯 잡아먹고 천연 기념물인 웨이크섬 뜸부기를 멸종시킬 정도로 굶주림에 시달렸다.

가끔 수비대가 보유한 선박을 바다에 내보내 고기도 잡았지만 이 정도로는 어림도 없었다.

굶주릴 대로 굶주린 일본군은 평균 체중이 41kg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기력이 쇠약해져 힘든 노동을 할 수가 없었다.

웨이크섬을 점령하고 있는 동안 일본군 중에 병사하거나 아사한 자들이 무려 1,040명이나 발생했었다. 전후 철수 인원이 4,000명 정도였으니 그 피해에 짐작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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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격기 조종사 시절의 조지 부시(George H. W. Bush)





미 해군 함재기의 공격을 받고 있는 웨이크섬




정기적으로 미 항모 부대가 찾아와서 공격을 가하고 사라질 따름이었다. 여러 번에 걸친 항모들의 웨이크 공습 작전 중에 조지 H.W 부시(미국 41대 대통령)가 해군 조종사로 참여했었다.

1943년 10월 5일 미 항모 요크타운은 웨이크섬에 대규모 공중 공격을 가했다. 이 대규모 항모 기습으로 웨이크섬의 시설 90%가 파괴되어 버렸다.

10월 7일 수비군 사령관 해군 소장 사카이바라(酒井原 繁松)는 미군의 상륙 작전이 임박했다고 잘못 판단하고 억류하고 있던 98명의 기술자 포로들을 북쪽 해변에 몰아놓고 기관총 사격으로 모두 학살했다.

그러나 한 미국인이 살아남아 해변 집단 무덤의 바위에 아래 그림과 같이 표식을 했는데 이 바위는 지금도 남아있다.

하지만 섬의 이곳 저곳을 숨어 도망 다니던 이 포로는 체포되어서 사카이바라가 직접 칼로 목을 베어 죽였다. 그 사람의 신원은 지금까지도 알려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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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하게 잠시 생존했었던 민간인 포로가 바위에 남긴 표시





일본의 항복과 웨이크섬




종전이 된 후 1945년 9월 4일 상륙한 미군은 사카이바라로부터 항복을 접수 받고 섬을 재탈환하였다.

아이러니컬하지만 항복한 후에야 일본군들은 미군이 긴급 지원한 식량으로 마음껏 배를 불리고 기력을 찾을 수가 있었다. 사카이바라는 포로 학살 혐의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고 1947년 6월 18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웨이크섬을 다시 접수한 미군은 냉전 시대 이 섬의 시설을 확장하여 군사 기지로 사용했었다.

1950년대 초기 태평양을 오가는 민항기들이 이 섬에 들러 재급유를 받고 다음 급유지인 미드웨이나 하와이로 향했었다.

당시의 프로펠러 기들은 항속거리가 짧아서 한 번에 태평양을 건너지 못하고 중간 급유를 받아야 했다.

당시 웨이크섬에 기착하던 민항기들 중에 일본항공(JAL)기들도 있었다. 지금은 200여명의 미국 측 인원만이 거주하며 유사시를 위한 비행장의 보수 유지를 담당하고 있다.

목차


목차
1. 웨이크섬 전투2. 웨이크섬 전투의 결과



김창원 | 전사연구가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시라큐스 경영대학원에서 MBA를 취득했다. 장교로 군 복무, 기갑부대 전차 소대장을 지냈다. ‘울프 독’이라는 필명으로 전사와 역사를 다룬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 국방부 정책·정보 블로그(N.A.R.A.)에 기고하고 있으며, 저서로 [공격 마케팅]이 있다


제공

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



발행2013.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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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은자기들에게큰피해를준미군들을그냥두지않았다. 일천 이백 여명의 포로들을 닛다마루(新田丸)에 승선시켜 후송 중에 포로들의 폭동 기미가 있다는 혐의를 뒤집어씌워 5명을 참수하고 수장(水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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