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네르친스크 조약 - 중국 최초의 근대적 국제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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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74회 작성일 16-02-07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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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두림바이 구룬) 황제의 성지를 받들어 경계를 확정하려 파견된 대신들인 내대신 소에투 (......)등과, 러시아국(오로스 구룬) 천가한(天可汗)의 칙명으로 경계를 확정하려 파견된 사신들인 (......)골로빈 등은, 강희(康熙) 28년 7월 20일에, 니포초(尼布楚)에서 만났다. (......) 이제부터 화평을 맺어 영원한 평화 속에서 살아가고자, 다음과 같이 합의하여 결정하였다......”
네르친스크 조약 전문(前文): 만주어판

1689년 8월 12일, 북경에서 약 1500킬로미터, 모스크바에서는 약 800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작은 요새 도시, 네르친스크에 청나라와 러시아의 대표들이 마주 앉았다. 그리고 보름만인 8월 27일, 위와 같은 전문으로 시작되는 역사적인 조약을 맺었다.



진격의 러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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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를 정복해 들어가는 러시아.



러시아는 세계 최대의 영토를 자랑하는 거대 국가다. 그러나 그 큰 부분은 시베리아라고 통칭되는 우랄 산맥 동쪽의 아시아 지역, 눈과 초원, 침엽수림과 빙하로 덮인 광활한 땅이며, 러시아가 처음부터 그 땅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서유럽 국가들의 해상제국 건설에 비길 만한 러시아의 육상제국 건설 과정은 16세기 말부터 시작되었다. 시베리아를 다스리는 칸의 백성들을 주로 코사크 병사들이 습격하여 정복하고, 요새 도시를 세우고, 그러기를 반복하며 계속 동쪽으로, 동쪽으로 나아가는 과정. 그 과정은 17세기에도 계속되어 1605년에 시베리아 중부에 톰스크가 건설되었고, 1606년에는 몽골에서 북극해로 흐르는 예니세이 강을 발견했다. 그리고 다시 20여 년, 시베리아 정복이 시작된 뒤로 약 반세기만에, 러시아인들은 고구려와 발해가 지배했던 땅의 어귀까지 다다랐다.

1632년에 동시베리아의 레나 강변에 야쿠츠크를 건설한 러시아인들은 이를 아시아 동북부 공략의 총사령부로 삼고, 보다 따뜻하고 사람이 많이 사는 남쪽으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1639년, 그들은 그 과정에서 처음으로 태평양에 도달했으며, 동시에 여느 때처럼 그곳 원주민들을 습격하고 정복하려 했다. 그러나 이제까지 그들의 전진을 가로막는 세력이라고는 무기도 전투경험도 부족하고 수적으로도 변변치 않은 유목 부족들 뿐이었으나, 이번에는 사정이 달랐다. 그곳에는 강력한 만주족이 있었으며, 청나라를 세운 그들의 국세는 한창 욱일승천하고 있었던 것이다. 원주민들의 구원 요청에 응한 만주족 병력과 러시아 병력이 최초로 교전을 벌였고, 러시아군은 패퇴했다.

그러나 청나라가 ‘진격의 러시아’를 저지하는 데 크게 힘을 쏟을 처지는 아니었다. 보다 남쪽에서 또 다른 거인, 명나라를 죽이는 데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르하치가 1616년에 건국한 후금은 1618년부터 명나라와 전쟁에 들어갔으며, 1636년에는 제2대 홍타이지(청태종)가 청으로 국호를 바꾸고 황제를 선언한 상황이었다. 그해에 병자호란을 일으켜 조선에게 뒤통수를 맞을 위험을 제거한 청태종은 다시 명나라와의 싸움에 앞장섰다. 이런 마당에 퍼런 눈의 오랑캐들이 북방에서 장난질을 친다고 일일이 상대할 여유는 없었다.



용과 곰의 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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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페이 하바로프의 동상. 그의 이름을 딴 도시인 하바로프스크에 세워져 있다.



하지만 러시아도 본국으로부터 워낙 멀리 떨어진 곳에서 만만찮은 강적을 만난 셈이라, 신중하게 움직였다. 1643년, 모스크비친이 이끄는 ‘탐험대’가 오호츠크 해를 탐사했으며, 다시 남쪽으로 방향을 돌려 아무르강(흑룡강) 유역과 사할린 섬을 조사했다. 1년 뒤 이자성에 의해 무너진 북경을 청나라가 차지하여 제3대 순치제가 중국 황제로 등극하는 가운데 러시아에서는 또 다른 탐험대를 파견했다. 파견된 포야르코프 탐험대는 흑룡강이 오호츠크 해로 흘러들어가는 하구 일대를 답사한 다음, 그곳 부족들의 동향에 대해 모스크바에 보고했다. “이곳 부족들은 청나라에 조공을 바치고 있지 않습니다. 이들을 잘 공략하면 러시아 편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이듬해 파견된 하바로프 탐험대는 포야르코프의 보고를 재확인했고, “이곳 땅은 비옥하여 농산물 소출이 좋습니다. 이곳을 손에 넣으면 군량을 확보할 수 있게 됩니다”라는 보고도 덧붙였다.

마침내 1651년, 하바로프는 본국에서 증원된 병력을 이끌고 흑룡강 유역의 다우르족을 공격했다. 소수의 청나라 군사가 지원했으나 다우르족은 패배했고, 하바로프는 한동안 러시아군의 제1전진기지가 될 알바진 요새를 세웠다. 이듬해에는 네르친스크가 세워졌으며, 시베리아 중부에서 새 땅을 개척하기 위한 정착민들이 속속 도착했다.

이쯤 되자 청나라도 긴장했다. 그리하여 2천의 병력으로 알바진을 공략하게 했는데, 이에 맞선 러시아군은 2백에 불과했으나 우수한 무기 등에 힘입어 잘 싸웠다. 이 전투는 서로 자신들이 승리했다고 주장했으나 결국 러시아인들을 쫓아내지 못한 청나라의 패배에 가까웠다. 이대로는 안되겠다고 여긴 청나라는 무기의 불리함을 극복하고자 조선에 조총수들을 파병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리하여 1654년에 조선군 156명과 청군 3천여 명이 송화강 중류인 혼동강에서 러시아군과 충돌했으며, 일주일만에 러시아군을 패퇴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것이 제1차 나선정벌이다.

이어서 1655년의 코마르 공방전, 1657년의 사르호디 전투, 1658년의 제2차 나선정벌 등에서 양측은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였으나 1660년 이후로는 청나라 쪽이 우세를 잡았다. 네르친스크 이남의 러시아인들을 일소해버린 청나라는 여세를 몰아 흑룡강 일대에서 러시아인을 말살하려고 했으나, 국내 정세의 변동이 발목을 잡았다. 순치제가 죽고 여덟 살인 애신각라현엽, 즉 강희제(康熙帝,1654~1722)가 제위를 계승한 것이다. 장차 희대의 명군으로 추앙받을 그였으나 아직은 어린아이였으므로 그의 섭정을 맡은 대신들은 잠시 숨을 고르며 내실을 다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또한 1669년에 강희제가 친정을 시작하자마자 오삼계, 상가희, 경계무 등 명청 전쟁에 공을 세워 왕으로 봉해져 있던 옛 명나라 장수들의 권력을 축소시키는 삭번(削藩)을 시도하고, 이에 반발한 오삼계 등이 ‘삼번의 난’을 일으키면서 청나라는 다시 북쪽을 살필 여유가 없게 된다. 그래서 이때 이미 외교적으로 문제를 매듭지으려는 노력이 양국간에 이루어졌지만, 네르친스크 지역의 부족장이던 간티무르를 송환하라는 청의 요구를 러시아가 한사코 거부하면서 협상은 끝내 결렬을 거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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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제(왼쪽)와 표트르 1세(오른쪽). 두 사람은 공통점이 많다. 둘 다 자기 왕조의 제4대 황제였으며,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가 장성하자 섭정을 팽하고 전권을 쥐었다. 그리고 불세출의 명군으로 국가를 반석 위에 올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네르친스크 조약은 표트르라기보다는 섭정이던 소피아 공주와 강희제 사이에서 실질적으로 맺어졌다.



마침내 1681년에 삼번의 난이 끝나자, 이제 28세가 된 강희제는 곧바로 흑룡강 일대 러시아인들을 공략할 준비에 착수했다. 한편 이해에 모스크바에서는 표도르 3세가 죽고 표트르 1세(Pyotr I, 1672~1725)가 즉위했으나, 역시 11세에 불과하여 그의 이복누이 소피아가 섭정이 되어 러시아를 다스리게 된다. 그리고 1685년, 만반의 준비를 갖춘 청나라의 공략군은 알바진 요새를 함락시켰다. 강희제는 항복한 러시아인들이 네르친스크로 돌아가는 것을 허용했으나, 그들은 얼마 후 지원군과 함께 돌아와 알바진을 탈환했다. 재개된 전투는 10개월을 끌었는데, 요새의 러시아군은 8백 명이 70명이 될 때까지 악착같이 버텼다.

강희제는 일단 군대를 물려 재정비한 다음 다시 알바진을 공격하려 했으나, 1688년에 뜻밖의 사태가 벌어졌다. 당시 몽골은 동부의 할하 부(部)와 서부의 오이라트(중가르) 부(部)로 나뉘어져 있었으며 할하 부는 청나라에 복속해 있었다. 그런데 오이라트의 갈단이 할하를 공격, 할하의 족장들이 청나라로 피신해왔던 것이다. 러시아인이 비록 소수이지만 만만찮은 적수임이 확인된 가운데 그들과 오이라트가 힘을 합친다면 골치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전쟁보다는 외교를 통해 그것을 막는 게 먼저라는 생각이 강희제를 사로잡았다.

그는 미처 몰랐지만, 사정은 러시아도 비슷했다. 1686년부터 폴란드, 베네치아,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고 오스만튀르크와 전쟁을 시작했던 것이다. 그 첫걸음으로 크림 칸국을 병합하려 했으나, 생각대로 전황이 풀리지 않아 당황하던 때였다. 싸워보니 청나라가 만만치 않은 강국인데다, 너무 먼 극동까지 병력을 공급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러시아도 타협을 적극적으로 검토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렇게 양쪽의 속셈이 일치함으로써 네르친스크 조약의 문이 열렸다.



포위 속에서의 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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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6년에 청나라군이 러시아의 알바진 요새를 공격하는 모습



러시아는 표도르 골로빈을 대표로 하는 천여 명의 대표단을 파견했고, 청나라는 소에투를 필두로 하는 고위관료들과 통역을 맡을 예수회 신부들인 제르비용, 페레이라, 그리고 76척의 군함, 5천 마리의 군마 및 낙타, 1만 5천의 병력을 파견했다. 전쟁 때보다도 많은 병력을 교섭회담장에 딸려 보낸 것은 러시아인들을 위압하기 위해서였다. 양측은 회담 장소를 정하는 문제에서부터 서로 부딪쳤는데, 청나라는 “오랑캐의 사절들이 천자에게 항복하던 예를 따라” 북경에서 회담을 갖자고 했다. 그러나 러시아 쪽은 이를 완강히 거부하며, “접경 지대에서 갖되, 구체적인 장소는 마음대로”라고 통보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셀렌기스크로 회담 장소가 정해졌으나, 그곳은 갈단의 공격을 받을 위험이 있다 하여 네르친스크로 바뀌었다.

문제의 핵심인 경계선을 두고도 처음에는 합의가 힘들어 보였다. 청나라 대표들은 모든 땅이 중국 황제의 땅이라는 화이관에 따른 주장을 내놓지는 않았으나, “우리는 칭기즈칸의 정당한 후계자이며, 따라서 우랄 산맥 동쪽의 시베리아는 모두 우리 땅”이라고 강변했기 때문이다. 이대로는 얘기가 안 된다며 러시아 대표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 하자 겨우 현실적인 교섭이 시작되었으나, 흑룡강 유역에 ‘개척’해놓은 땅을 양보하지 않으려는 러시아 측과 그렇다면 회담을 할 까닭이 없다는 청나라 측의 의견이 계속해서 평행선을 달렸다. 하지만 결국 회담장 주변을 겹겹이 에워싸고 있던 청나라 군대의 무력시위가 먹혔던지, 러시아 측이 한 걸음 물러서는 식으로 정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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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르친스크 조약으로 정해진 경계.




• 고르비차강의 발원지에서 대흥안령(스타노보이 산맥)이 바다에 이르는 선을 경계로 남쪽은 중국이, 북쪽은 러시아가 차지한다.


• 우디 강의 남쪽과 대흥안령의 북쪽 사이에 있는 땅은 중립지대로 삼으며, 나중에 다시 협의하여 조정하기로 한다.


• 흑룡강에 접한 아르군 강의 북쪽 연안은 러시아가, 남쪽 연안은 중국이 차지한다.


• 메이렐케 강 하구, 약사의 땅에 있는 러시아인은 모두 퇴거하며, 그 가옥 등은 철거한다.


• 정해진 경계를 사사로이 넘는 자가 있다면 즉시 해당국의 법에 따라 처벌한다.


• 앞으로 경계를 넘는 사람은 통행허가증을 소지해야 한다. 허가증을 가지고 정당한 활동을 하는 외국인은 추방당하지 않는다.


• 과거의 갈등을 모두 잊고, 앞으로 영구히 화평하도록 한다.


• 이 내용을 중국어, 라틴어, 러시아어로 비문에 새겨 경계지에 세운다.



한계와 미흡함, 그러나 새로움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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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0년, 러시아 궁정에서 강희제에게 보낸 편지.



네르친스크 조약문은 요약하면 이 8개조로 이루어져 있었고, 양측은 그 내용의 2개국어본(청나라는 중국어, 즉 만주어본과 라틴어본, 러시아는 러시아어본과 라틴어본)에 각각 서명하였다. 그리고 경계비에는 위 3개 국어 외에 한문과 몽골어로도 조약문 내용을 새겼다고 하는데, 오늘날 그 경계비는 남아 있지 않다(끝내 세우지 않았다고 보기도 한다).

이 조약을 흔히 “중국 최초의 국제조약”이라 한다. 중국의 천하사상에 따르면 천하의 모든 땅은 중국 황제의 소유이고 모든 사람은 중국 황제의 신하로, 다만 먼 변방의 오랑캐는 교화가 미치기 어려우므로 조공을 받으며 예의를 가르치는 것이므로, 대등한 주권국가끼리 맺는 약속인 국제조약은 어불성설이었다. 송이 요와 맺은 전연의 맹약만 해도, 실질적으로는 국제조약이었으나 송나라 쪽 표현으로는 “대국인 송이 요를 불쌍히 여겨 베풀어주는 내용”으로 호도되어 있었다.

하지만 사실 그런 아전인수식 호도는 네르친스크 조약도 예외가 아니었다. [강희실록] 등에 남아 있는 조약의 한문 내용을 보면 만주본이나 라틴어본에서 상대국을 대등한 주권국가로 인정하고 대우하는 표현이 빠지거나 윤색되어 있는 것이다. 가령 “주웨 구룬 (두 나라)”이라고 청과 러시아를 대등하게 표현한 부분이 삭제되고, “오로스 구룬(러시아국)”을 “아라사”라고만 표시해 국가가 아닌 부족인 것처럼 보이게 했으며, “과거의 갈등을 모두 잊고, 앞으로 영구히 화평하도록 한다”는 “아라사는 앞으로 중국을 배반하지 않으며, 영구히 화평하도록 한다”로 바뀌어 있다.

그 내용이 다분히 모호하며, 핵심 내용에 대한 해석조차 아전인수이기도 했다. 가령 청나라는 조약 체결 과정에서 그 난리를 쳐 놓고도 십여 년 뒤 러시아 사절에게 “시베리아는 전부 우리 땅이다. 지난번 조약은 단지 임시 경계일 따름이다”며 천연스레 황당한 주장을 하기도 했다. 러시아는 러시아대로, 아르군 강이나 대흥안령 등의 지명이 완전히 통일되어 있지 않고 지역과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는 점을 이용해서, 19세기에 “네르친스크 조약에 따르면 흑룡강 북쪽은 러시아 땅이다”라고 우기는 모습이었다.

그래도 이 조약은 중국사에서, 또 동서양 교섭의 역사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먼저 청나라는 교섭대표단을 전원 만주족으로만 구성하고 한족 관료를 배제했으며, 교섭문도 원본은 만주어로만 작성했다. 그것은 중요한 외교 문제를 한족에게 맡길 수 없다는 경계심도 작용한 결과였겠지만, 한족과 한문이 개입할 때 전형적인 화이관과 천하사상이 문제를 일으킬 수밖에 없으리라는 점을 염두에 둔 조치이기도 했다. 강희제는 러시아를 진심으로 대등하게 대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것은 얼마 전부터 그에게 서양 학문을 가르쳐주고 있던 예수회 신부들(조약 과정에서 통역을 맡기도 했던)이 당시 유럽에서 수립된 국제법 질서와 원리에 대해서 알려주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약 40년 전에 주권국가 이념의 태동을 알렸던 베스트팔렌 조약의 영향이 이곳 극동에도 어느새 미쳐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 조약문에는 그때까지 통상적으로 들어가 있던 한 가지가 빠져 있었다. 바로 “신”에 대한 언급이었다. 베스트팔렌 조약에서도 조약이 영구히 지켜질 수 있도록 신의 가호가 언급되었고, 전연의 맹약에서도 이를 어기는 쪽은 천지신명의 벌을 받으리라고 명시되어 있었다. 이처럼 그때까지는 사람이 세운 질서인 조약의 이행 보장 근거를 신에게서 찾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네르친스크에서는 그리 하려 해도 그럴 수가 없었다. 러시아인과 중국인의 종교가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쁜 의미로는 상황이 바뀌면 양쪽 모두 조약을 깨버리는 데 부담이 더 적어지게 되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좋은 쪽으로는, 이제야말로 서로 다른 종교와 문화를 가진 세력이 만났을 때, 서로의 다름을 관용하면서 보편적인 이성과 상식에 따라 합의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동양과 서양의 만남이 이후로도 계속 그런 식이었다면, 중국이나 조선을 짓밟는 일이 ‘야만인들을 참된 길로 인도하라는 신의 뜻’이라고 변명하는 일이 자제되었더라면, 근대사는 좀 더 훌륭해지지 않았을까?



피와 눈물을 아끼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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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강의 ‘중국 나눠먹기’. 왼쪽부터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일본이 중국을 두고 경쟁하고 있다. 러시아는 흰 모자를 쓰고 수염을 기른 니콜라이 2세로 표현되었다.



네르친스크 조약으로 합의된 양국의 경계는 1727년의 캬흐타 조약으로 보완되었으며, 그 질서는 19세기 후반이 되기까지 변동이 없었다. 그 사이에, 중국과 러시아 모두 18세기를 영광스러운 발전의 시대로 향유했다. 청나라는 1697년에 오이라트를 무찌르고 갈단을 제거했으며, 계속해서 1759년에는 오이라트(중가르)를 완전히 패망시켜 몽골 전역을 손에 넣고 중앙아시아까지 영토를 넓혔다. 또한 1720년에 티베트를 속국으로 삼고, 1790년에는 티베트를 괴롭히는 구르카족을 정벌하고자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네팔을 공격하여 무릎꿇리기도 했다. 실로 몽골제국 이래 동아시아가 이처럼 세계에 힘을 떨친 때는 없었다.

한편 러시아도 1698년에 표트르 1세가 친정체제를 구축하고는 대담한 서구화 개혁을 통해 국력을 키웠고, 1700년에서 1721년까지의 북방전쟁으로 스웨덴 제국을 격파하고 동유럽과 발트 해의 패자로 우뚝 섰다. 러시아의 위세는 19세기 초 나폴레옹 전쟁에서 나폴레옹 프랑스를 몰락시키는 선봉장이 되면서 절정에 달했다.

그러나 19세기는 청나라의 운이 다하는 때였다. 내부 모순에다 서양 열강의 눈부신 성장이 겹치면서 중화의 자존심은 계속해서 짓밟혀갔고, 19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네르친스크 체제를 이어받으며 침략을 자제했던 러시아도 결국 ‘중국 나눠먹기’에 뛰어든다.

그리하여 1857년에 일방적으로 아무르주와 연해주를 설치하고, 1858년의 아이훈 조약에서는 강압적으로 아무르주(흑룡강 이북)를 빼앗고 연해주(우수리강 이동)는 공동통치지로 만들었다가, 1860년의 베이징 조약에서는 그나마 빼앗아 버렸다. 그래서 오늘날과 비슷한 중-러 국경선이 만들어진 것이다.

청나라 멸망과 반식민지화, 중일전쟁의 질곡을 거쳐 공산 중국의 힘이 어느 정도 커지자, 중국은 네르친스크 조약을 내세우며 소련에게 아무르주와 연해주를 반환하라고 주장했다. 그 주장은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소련 말기에 고르바초프는 국경 지대 약간의 땅을 반환할 뜻을 전했다. 그래서 시작된 영토협정은 1990년대 내내, 소련이 러시아 공화국으로 바뀐 뒤에도 이어지다가 2005년, 러시아가 전바오도 등 몇몇 섬을 중국에게 넘기는 것으로 최종 합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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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러 국경분쟁은 2005년에 완전 종결되었다. 2008년에 중국을 방문한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오른쪽)과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왼쪽). <출처: (cc) Presidential Press and Information Office at en.wikipedia.org>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다.” [성서]의 말이다. 그 영원한 땅을 국가라는 명목으로나마 영원히 차지하기 위해 벌이는 싸움은 [성서]가 쓰이기 전부터 시작되었고, 오늘날에도 멈추지 않고 있다. 그러나 다만 싸움으로만 문제를 해결할 것이 아니라 냉정하고 합리적인 토론과 협상으로 해결한다면, 그리고 그때 서로의 입장과 신념을 존중하고, 서로 다른 부분을 상대를 공격해도 좋을 빌미로 여기지 않을 수 있다면, 그 땅 위에 피와 눈물은 조금이라도 덜 떨어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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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규진 | 서울교육대학교 교수/역사저술가
글쓴이 함규진은 여러 방면의 지적 흐름에 관심이 많다. 정치학을 전공하여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주로 역사와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썼고, 인물이나 사상에 대한 번역서도 많이 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등 서로 대립되는 듯한 입장 사이에 길을 내고 함께 살아갈 집을 짓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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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도서
조약의 세계사 2014.12.22
고대부터 현대까지 64개의 조약으로 읽는 화해와 배신, 강압과 화합 그리고 진보의 역사.

‘지뢰는 과연 쓸모 있는 무기일까?’, ‘난징 조약은 불평등조약인가?’와 같은 흥미로운 물음을 던지며 세계사의 이면을 파고들어 역사와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을 넓힌다. 강화도 조약과 같이 우리 역사 속 조약부터 마스트리히트 조약처럼 생소한 조약, 고대의 히타이트-이집트 조약에서부터 현대에 체결된 리우환경협약까지 역사의 흐름을 바꾸고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계를 형성한 조약을 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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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2013.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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