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루이지애나 매입 협정 - 미국, 종이 한 장으로 강국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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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98회 작성일 16-02-07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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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3년의 여름, 토머스 제퍼슨은 펜을 한 번 휘리릭 놀려서 미국 영토를 두 배로 늘려버렸다. 루이지애나 전체를 프랑스에게서 매입한다는, 기대도 하지 않았던 일은 축제 분위기를 가져왔으며, 미국 여론과 언론은 한 목소리로 칭송을 했다. 이로써 제퍼슨은 멕시코만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미시시피 강 루트를 보호할 뿐 아니라, 영토범위를 북미 대륙을 가로질러 태평양까지 뻗는다는 “명백한 운명”을 실현하는 데 한 걸음 다가섰다. 그리고 프랑스, 영국, 스페인이 아메리카에 손을 뻗치려는 팽창욕을 크게 억제할 수 있었다.”
-닉 래곤, [대통령의 결단]


프랑스의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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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지애나 매입 협정서.



“나폴레옹은 결코 미국의 친구가 아니었다. 그러나 프랑스 앙시앵 레짐(ancien régime)이 미국 독립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면서 시작된 ‘프랑스의 은혜’는 이 제1통령의 손으로 마무리되었다.” 세기말의 미국 역사학자 윌리엄 슬론은 루이지애나 매입 협정을 두고 이렇게 썼다. 그의 말대로 18세기에서 19세기 초까지 프랑스는 줄곧 미국에 도움을 주어왔다. 프랑스는 프렌치 인디언 전쟁(1754~1763. 7년 전쟁의 일환으로는 1756~1763)으로 북아메리카의 광활한 식민지를 잃었는데, 이때 캐나다는 영국에게, 루이지애나와 쿠바는 스페인에게 돌아갔다. 이후 영국을 원수처럼 여기게 된 프랑스는 어떻게든 영국 제국의 힘을 약화시키고자, 아메리카 식민지의 봉기가 일어났을 때(1775) 적극적으로 후원에 나섰다. 스스로의 재정난에도 불구하고 거액의 자금을 원조했을 뿐 아니라, 1778년부터는 라파예트 등이 이끄는 수천 명의 원정군이 아메리카로 건너가 독립군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웠다. 1778년 9월의 체사피크 만 해전과 10월의 요크타운 전투에서 영국군에게 치명타를 안김으로써 미국 독립전쟁의 승리를 가져온 주역도 프랑스군이었다.

이로써 7년 전쟁의 설욕을 한 셈인 프랑스였지만, 그 덕분에 가중된 재정난은 혁명과 구체제 몰락의 한 원인이 된다. 공화국 프랑스도 미국과 사이가 좋았는데, 양국의 지도자들이 비슷한 이념과 개인적 친분을 나누었을 뿐 아니라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영국을 견제한다는 목표를 여전히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혁명의 아들이자 반역자인 나폴레옹(Napoléon I, 1769~1821)이 1799년에 권력을 장악하게 되자, 미국은 미국을 증오하지는 않으나 혐오하면서 아메리카에서 광대한 영토를 되찾기 위해 견제해야 할 상대로 여기는 야심만만한 프랑스 정권을 상대하게 된다.



나폴레옹 vs 제퍼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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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왼쪽)과 제퍼슨(오른쪽). 두 사람 모두 어느 정도 이상주의적인 지도자였으나, 이상을 추구하는 방식은 달랐다.



아메리카에서 나폴레옹의 야심의 첫걸음은 1800년, 스페인과 비밀리에 맺은(그러나 곧 공공연한 비밀이 되었다) 산일데폰소 조약을 통해 루이지애나를 되찾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그것은 앞서 1795년에 미국이 스페인과 맺은 핀크니 조약의 내용을 위협할 수 있었다. 당시의 관건은 루이지애나 남쪽의 뉴올리언스였는데, 미시시피 강 어귀에 있는 이 도시가 적대 세력에게 들어간다면 미국 내부 물류의 대동맥이라 할 수 있는 미시시피 수로가 차단될 위험이 있었다. 그래서 미국은 뉴올리언스를 손에 넣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미국 선박의 자유 출입권을 보장받는 일에 사활을 걸었으며, 핀크니 조약에서 ‘뉴올리언스를 계속 스페인의 영토로 두되, 미국인의 미시시피 강 자유 항행권과, 뉴올리언스 무관세 선적권을 보장한다’는 타협을 이끌어냈던 것이다. 그런데 나폴레옹 프랑스가 그 도시의 새 주인이 된다면 앞날이 어떻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나폴레옹은 뉴올리언스에서 미국 배들의 무관세 선적권을 제한하는 법령을 선포하고(아직은 명목상 지배자였던 스페인의 감독관을 통해) 플로리다의 일부 거점, 그리고 생도맹그(아이티) 등에 병력을 파견하면서 미국을 봉쇄하는 구도를 만들어 가기 시작했다. 노심초사하던 미국의 제퍼슨(Thomas Jefferson, 1743~1826) 행정부는 ‘뉴올리언스를 건드리지 마라’는 메시지를 계속해서 파리로 보내는 한편, 나폴레옹이 정 거칠게 나올 경우 할 수 없이 이제까지의 외교 노선을 포기하고 영국과 동맹을 맺을 수밖에 없다는 판단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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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 르클레르(Charles Leclerc). 나폴레옹의 야망의 선봉이 되어 생도맹그로 향했으나 황열병에 쓰러지고 만다.



그러나 ‘프렌치 아메리카’ 제국을 건설하려던 나폴레옹의 꿈은 1802년에 된서리를 맞았다. 처남인 샤를 르클레르에게 2만 5천의 병력을 주어 생도맹그로 보냈으나 참담한 실패로 끝났기 때문이었다. 르클레르의 군대는 일단 투생 루베르튀르(Toussaint L'ouverture, 1743~1803)가 이끄는 생도맹그 독립운동을 진압하여 생도맹그를 확실한 프랑스 식민지로 만든 다음, 여세를 몰아 뉴올리언스에 상륙, 그 도시를 접수할 임무를 띠고 있었다. 르클레르는 투생을 붙잡아 프랑스로 보내는 데는 성공했으나, 생도맹그 원주민들은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더욱이 황열병이 유행하면서 프랑스 병사들이 끝없이 쓰러져 가고, 급기야 르클레르 본인마저 희생되자 나폴레옹은 삼분의 일로 줄어든 병력의 철수를 지시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제퍼슨은 한숨을 돌릴 수 있었지만, 뉴올리언스에 대한 나폴레옹의 압박은 멈추지 않았다. 그때 그는 묘안을 떠올리고, 그 내용을 자신의 오랜 친구이자 프랑스의 거물 정치인이던 뒤퐁 드느무르를 통해 나폴레옹에게 전했다. “미합중국은 적절한 가격에 뉴올리언스를 매입할 뜻이 있습니다.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부득이 영국과 동맹을 맺고 프랑스와 전쟁을 벌일 것입니다.” 제퍼슨의 제안을 들은 나폴레옹은 심사숙고했다. 그리고 새로운 제안을 파리 주재 미국 대사인 로버트 리빙스턴에게 전했다. “본인은 뉴올리언스는 물론이고, 루이지애나 전체를 매각할 뜻이 있소.”



나폴레옹의 생각, 자신의 신념에 충실하라!



이런 나폴레옹의 결정은 오늘날의 시각에서는 어이없어 보인다. 그토록 야심차게 구상했던 제국의 기반을 그 라이벌에게 넘겨줄 뿐 아니라, 그 땅의 면적이 무려 214만 평방킬로미터로 한반도의 열 배에 조금 못 미치며 당시 프랑스 영토의 세 배가 훨씬 넘는 대규모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나름대로 냉정한 분석을 통해 그런 결정을 내렸다.

첫째, 그는 돈이 말 그대로 많이, 그리고 급히 필요했다. 영국과의 결전은 당장 1년 뒤로 다가와 있었는데, 전쟁 준비 자금은 턱없이 부족했다. 나폴레옹은 평생 영국과의 대결을 최대의 과제로 삼았던 만큼, 영국과 싸워 이길 수 있다면 다른 것은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따라서 만약 그때까지 캐나다를 가지고 있었다면 캐나다까지 팔아버렸을 정도로 당장 쓸 돈이 급했던 것이 나폴레옹의 현실이었다.

둘째, 그는 당장 미국에게서 뉴올리언스를 힘으로 지키기 어렵고, 뉴올리언스에 목을 매고 있는 미국이 자칫하면 영국과 동맹을 맺을 가능성이 충분함을 통찰하고 있었다. 그럴 바에야 돈이라도 챙기면서 넘겨주자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미국은 영국과의 동맹을 접을뿐더러, 자신들의 국고를 거덜낸 참이니 전쟁에 뛰어들래야 뛰어들 수 없을 것 아닌가?

셋째, 당시 나폴레옹이나 그 누구나 루이지애나의 참된 가치를 몰랐다. 아니, 그 땅의 대략적인 크기만 알 뿐, 그 땅에 뭐가 있는지조차 잘 모르고 있었다. 사하라 사막처럼 쓸모없는 땅이라는 소문이 무성했으니, 루이지애나를 사들인다고 하자 미국 의회에서조차 “뉴올리언스는 절실히 필요하다. 그런데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황무지에 왜 세금을 낭비하느냐”하는 반대의 목소리가 한때 난무하기도 했다. 리빙스턴 대사처럼 “이로써 우리 미국도 일류 국가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던 사람도 있었으나, 나폴레옹은 이렇게 코웃음을 쳤다. “그래. 이것으로 미국이 강대국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 불모지를 열심히 개간해서)한 삼백 년 정도 지나면 말이야. ......하지만 그 나라의 정치체제가 과연 삼백 년을 버텨낼 수 있을까?”

그래도 나폴레옹과 의견이 다른 프랑스인도 많았다. 이 일의 주무 부처였던 외무장관 탈레랑, 나폴레옹의 형제이며 스페인에 압력을 넣어 루이지애나를 되찾는 데 앞장서기도 했던 조제프와 루시앵 보나파르트도 그런 사람이었으며, 그들은 튀를리궁으로 나폴레옹을 찾아가 거세게 항의했다. 그러나 그는 근본적으로 독재자였으며, 매각 결정은 결국 그의 뜻대로 관철되었다.



제퍼슨의 생각, 때로는 자신의 신념을 배반하라!



하지만 미국에서는 사정이 좀 달랐다. 제퍼슨은 야당의 반대를 무마해야 했고, 그에 앞서 다름 아닌 스스로에게서 찬성을 얻어야 했다. 미국은 대통령과 연방정부의 결정권을 엄격히 제한하는 나라였으며, ‘새로운 영토를 획득할 권한’은 헌법에 눈 씻고 봐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 헌법의 기초자 중 하나였으며, 연방정부의 권한 강화를 그 누구보다도 소리 높여 반대해 온 장본인인 제퍼슨은 딜레마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뉴올리언스 매입으로 9백만 달러를 생각했지만 그것도 과연 확보할 수 있을까 염려했거늘, 나폴레옹이 루이지애나까지 ‘끼워서’ 내놓은 가격은 무려 1500만 달러였다. 그 가운데 375만 달러는 프랑스의 부채를 일부 승계하는 형식으로 넘어갈 수 있었지만, 그래도 1200만에 가까운 막대한 자금을 마련하려면 정부의 긴요한 예산을 대폭 깎고도 모자라서 거액의 국채를 짊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제퍼슨은 이제껏 국채를 줄이는 일을 주된 정책과제로 추진해 오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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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올리언스에서 프랑스의 삼색기가 내려가고 미국의 성조기가 게양되고 있다.



나폴레옹이 변심할까 두려워 협정 자체는 1803년 5월 1일에 서둘러 타결되었으나, 의회 비준과 대금 지불 과정은 제퍼슨 스스로의 고민까지 겹쳐 험난했다. 제퍼슨은 아무리 봐도 연방정부는 현행 헌법 체제에서 이런 결정을 내릴 권한이 없다며 비준에 앞서 헌법 개정부터 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그것은 시간적으로 어려울 뿐 아니라 앞서의 협정이 위헌적 행위로 당연 무효라고 스스로 선언하는 셈인지라 정부 각료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그렇게 여름이 지나자 애초에 ‘비준과 대금 지불까지 6개월의 시한을 주겠다’고 했던 나폴레옹이 볼멘소리를 하기 시작했고, 그가 결정을 번복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는 첩보가 파리에서 연일 날아들었다.

결국 제퍼슨은 마음을 굳게 먹고, 비준을 추진한다. “미국 대통령은 외국과 조약을 체결할 권한이 있다. 루이지애나 매입 협정도 엄연한 조약이다.” 대통령과 연방정부에 영토 획득 권한이 없다는 야당의 비판에 그는 이런 논리로 대응했다. 그리고 나중에 이 일을 회고하며 이렇게 썼다. “법조문을 엄격히 준수하는 일은 선량한 시민의 중대한 의무 중 하나다. 하지만 가장 중대한 의무는 아니다. ......법률 문구에 집착하느라 조국의 파멸을 불러온다면, 그것은 법 자체를 파멸시키는 일이다. ......즉, 수단 때문에 목적을 희생해 버리는 일이다.” 1803년 말, 협정은 하원에서 90 대 25, 상원에서 26대 5로 비준되었다. 이로써 제임스 윌킨슨 대령이 미국 정부를 대표하여 뉴올리언스로 가서 프랑스 대표에게서 루이지애나를 공식 인계받았다.



협상장에서 밟아간 대국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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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지애나 매입과 이후 미국의 영토 확장.



이렇게 미국의 일부가 된 루이지애나는 지금의 15개 주에 걸쳐 있다. 미주리, 아칸소, 아이오와, 네브래스카, 오클라호마, 사우스다코타의 전체와 몬태나, 캔자스, 와이오밍의 대부분, 루이지애나(지금의 루이지애나 주는 미시시피 강과 뉴올리언스를 중심으로 하는, 원 루이지애나의 남단이다), 미네소타, 콜로라도, 노스다코타의 약 절반, 뉴멕시코, 텍사스의 일부에 해당하며, 1803년 당시에는 미국 영토의 약 50퍼센트, 지금은 23퍼센트에 해당된다.

루이지애나 매입은 단지 미국의 덩치를 키웠을 뿐 아니라, 미국이 서쪽으로 쭉쭉 뻗어나가 태평양에 이르고, 북아메리카의 중심 세력이 되는 기틀을 마련했다. 루이지애나 매입이 없었다면 미국이 아메리카의 유일 강대국이 되지 못했을 것이고, 아메리카는 아프리카와 마찬가지로 유럽 열강의 싸움터가 되었을 것이다. 미국이 유럽 국가끼리의 제국주의 경쟁에서 한 발 물러서서 국력을 키워나갈 여유가 없었다면, 20세기 들어 초강대국으로 떠오를 기회 또한 얻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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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언과 만난 루이스-클라크 탐험대. 제퍼슨은 매입한 루이지애나의 사정을 알기 위해 루이스(Meriwether Lewis)와 클라크(William Clark)에게 탐험대를 맡겼다. 이들은 48명의 탐험대를 이끌고 1804년에서 1806년까지 미국 서부를 두루 탐험했다.



그리고 루이지애나 매입은 이 나라가 발전하는 독특한 패턴을 마련했다. 이후 미국의 팽창이 전쟁보다는 주로 매입이나 협상에 따른 양보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1818년에 영국과의 협정으로 캐나다와의 국경지대를 서로 교환하고, 1819년에 루이지애나 서부와 플로리다를 스페인에게서 양도받았으며, 1845년에는 텍사스를 병합, 1846년에는 오리건을 영국에게서 얻고, 1848년과 1854년에 캘리포니아와 네바다, 유타, 애리조나 등을 멕시코에게서 양보받거나 매입했다.그리고 1867년 알래스카를 러시아에게서 매입했으며, 1898년에 하와이를 병합했다. 역사상 말 위에서 천하를 얻은 국가는 많았으나, 이처럼 협상장에서 대국이 된 나라는 달리 찾을 수가 없다.

그것은 전술의 천재였던 나폴레옹이 장기적 관점에서는 얼마나 시야가 좁았던가를 일깨우는 사실이기도 하다. 그는 분명 그 시점에서는 가장 현실적인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그가 삼백 년을 넘길 리가 없다고 비웃었던 체제는(하긴 엄격히 말하면 아직은 더 두고 봐야 할지 모르지만), 빠른 결단과 필요한 물자의 빠른 동원이 장기인 독재체제에 비해 전쟁과 정복에는 서투를지 몰라도, 협상과 조약을 통하여 더 내실 있고 장기적인 발전을 이룩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물론 깨어 있으며 자유롭게 생각하고 말할 수 있는 국민과, 그런 국민을 두려워하고 섬기는 지도자가 있을 때에만 해당될지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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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규진 | 서울교육대학교 교수/역사저술가
글쓴이 함규진은 여러 방면의 지적 흐름에 관심이 많다. 정치학을 전공하여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주로 역사와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썼고, 인물이나 사상에 대한 번역서도 많이 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등 서로 대립되는 듯한 입장 사이에 길을 내고 함께 살아갈 집을 짓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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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도서
조약의 세계사 2014.12.22
고대부터 현대까지 64개의 조약으로 읽는 화해와 배신, 강압과 화합 그리고 진보의 역사.

‘지뢰는 과연 쓸모 있는 무기일까?’, ‘난징 조약은 불평등조약인가?’와 같은 흥미로운 물음을 던지며 세계사의 이면을 파고들어 역사와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을 넓힌다. 강화도 조약과 같이 우리 역사 속 조약부터 마스트리히트 조약처럼 생소한 조약, 고대의 히타이트-이집트 조약에서부터 현대에 체결된 리우환경협약까지 역사의 흐름을 바꾸고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계를 형성한 조약을 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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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2013.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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