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난징 조약의 체결 - 배려 속에 숨은 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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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507회 작성일 16-02-07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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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편 전쟁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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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표
전쟁 주체 청 vs 영국
(2차는 청 vs 영국, 프랑스, 미국, 러시아)
전쟁 시기 1839~1842(1차), 1856~1860(2차)
전쟁터 중국
주요 전투 천비 해전, 광동 전투, 태고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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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조약인가 기미정책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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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징 조약의 체결 장면.



청왕조는 기영(畿英)을 흠차대신에 임명하고 사포도통(都統) 이리포(伊里布)를 부사로 하여 영국과 교섭하게 했다. 이들은 8월 말에 영국 측 대표인 포틴저가 탑승한 콘월리스 호에 올라 협상에 들어갔다.

임칙서와 달리, 기영과 이리포는 국제법에 무지했다. 그리고 그들은 이 협상이 전통적인 “기미(覊縻)” 정책의 일환이라는 도광제의 지령을 받고 있었다.

한나라나 당나라가 강력한 이민족과 정면 대결하지 않고 정략결혼이나 무역 허용 등으로 달랬듯, 청나라도 서양 오랑캐들을 어르고 달래서 침략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회담장으로 향하는 그들의 낯빛은 어두웠다. 지금 청나라의 상황은 한이나 당보다는 북방민족에 크게 시달리던 송나라와 비슷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거란이나 여진은 중국의 땅을 요구했다. 저들도 대규모의 땅을 내놓으라고 요구하지 않을까?

그러나 곧 그런 우려는 사라졌다. 포틴저는 가장 중요한 요구 사항으로 (1) 배상금 지불 (2) 홍콩 할양 및 5개 항 개항 (3) 동등 외교를 내밀었으며 이는 반드시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밝혔다.

그 정도라면 앞서의 천비 가조약과 큰 차이도 없으며, 주산 열도를 비롯한 양쯔강 일대의 점령지를 선선히 포기하겠다는 이야기 아닌가?

기영과 이리포는 들뜬 기분을 감추며 배상금 액수를 두고 주로 밀고 당기기를 했다. 그리고 영국이 거론한 항구 중 복주만은 곤란하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하지만 결국 대체로 영국의 뜻이 관철되었고, 8월 29일에 다음과 같은 서문(그 내용은 도광제에게 올린 중국어본에서는 삭제되었다)과,



“대영제국 여왕폐하와 중국 황제폐하께서는 두 나라 사이에 빚어진 오해와 그에 따른 적대행위에 종지부를 찍고자, 조약을 맺기로 합의하셨다. (......) 이들 전권대사들은, 서로 완전한 권한에 입각한 의사소통을 하고, 적절하고 절차에 맞는 형태로, 다음과 같은 조항에 합의했다.”

이하 13개조를 갖춘 조약이 조인되었다(이하 내용은 요약된 것임).



제1조. 영국과 청은 앞으로 영구히 평화와 우정을 누린다.

제2조. 청은 광동 외에 하문, 복주, 영파, 상해를 개항한다.

제3조. 청은 영국의 편의를 위해 홍콩을 제공하고, 홍콩은 영국의 법률에 따라 통치된다.

제4조. 청은 1839년에 몰수했던 아편의 대금과 이후 영국인들에게 가한 위협의 위자료로 6백만 달러를 배상한다.

제5조. 청은 공행을 폐지하고, 공행의 채무금 3백만 달러를 지불한다.

제6조. 청은 전쟁 배상금으로 1200만 달러를 지불한다.

제7조. 청은 이상의 총 2100만 달러 중 6백만 달러는 즉시, 6백만 달러는 1843년까지, 5백만 달러는 1844년까지, 4백만 달러는 1845년까지 지불한다.

제8조. 청은 현재 중국 전역에 감금 중인 모든 영국인을 무조건 석방한다.

제9조. 청은 영국에 협조한 모든 중국인들을 일체 처벌하지 않는다.

제10조. 청은 개항한 5개 항에서 영국인들이 자유롭고 안전하게 생활하도록 보장하며, 공정하고 적절한 관세를 설정한다.

제11조. 영국과 청의 고위관료들은 해당되는 직급에 맞게 대등하게 교류한다.

제12조. 이 조약 내용을 청국 황제가 승인하고, 최초의 배상금이 지불되는 즉시, 영국군은 남경과 대운하 지역에서 철수한다. 단 주산 열도의 주둔군은 조약 내용이 모두 이행될 때까지 주둔한다.

제13조. 이 조약문의 원본을 각자의 수도로 가져가 비준하고 교환하며, 그 사이에 그 복사본은 원본과 같은 효과를 갖는다.




행운 속에 숨은 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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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역사박물관에 소장된 난징 조약문 복사본. 〈출처: (cc) Rachel at zh.wikipedia.org〉



이어서, 1843년에 난징 조약의 내용을 보완, 구체화하는 호문채 조약이 체결되었다. 그 주요 내용은 중국의 수입관세를 물품별로 4~13%, 평균 5%로 매기며 수출관세는 1.5%~10.75%로 고정하는 것, 개항지마다 영사(領事)를 주재시키고 독자적 재판권을 부여하는 것, 영국에 최혜국 대우를 보장하는 것 등이었다.

관세를 마음대로 정할 수 없고, 외국인 영사에게 치외법권을 허용하며, 외교적 입장에 상관없이 특정 국가에게 최혜국 대우를 하는 것은 명백한 주권 침해였다.

그러나 도광제 이하 중국 고위층(주권의 개념을 몰랐던)은 그렇게 여기지 않았으며, ‘멍청한 오랑캐들에게 최소한의 양보만 하고 오히려 이익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변방의 보잘것없는 적은 땅인 홍콩을 제외한 영토 상실이 없었고, 무역에서는 도리어 전보다 나아졌기 때문이다.

종전의 중국 관세는 3%도 되지 않았는데 이제는 평균 5%가 되었으니 오히려 중국 조정의 수입이 늘게 된 셈이며, 수입관세보다 수출관세가 낮게 책정되었으니 중국 상품이 영국에서 더 잘 팔릴 수 있게 된 셈 아닌가?

그러나 그것은 영국이 어리석어서도, 선량해서도 아니었고, 치밀한 계산 끝에 나온 내용이었다. 중국의 원래 관세가 낮기는 했지만 공행의 횡포와 관리들의 부패로 영국 상인들이 실제 치러야 하는 비용은 훨씬 높았다.

그것을 평균 5%로 고정한다면 남는 장사였고, 무엇보다 때에 따라 관세가 들쑥날쑥함에 따라 예산을 세울 수가 없던 상황이 말끔히 정리된 것이다.

또한 수출관세를 더 낮춰 줌으로써 중국 상품의 경쟁력을 높여 준 것은 이보다 더 중국의 은 보유량이 격감한다면 중국 경제가 붕괴될 것이며, 그렇다면 황금알을 낳는 닭의 배를 가르는 격이 될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앞서 중국 원정군이 런던에서 채비를 할 때, 영국 무역상들이 ‘지나치게 중국을 압박하여 파멸시키지 말라’는 시위를 벌인 적이 있었다.

영국은 무한한 잠재력을 지닌 중국 시장을 선점하고 최혜국 대우를 보장받는 것으로써 최선의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또 하나의 기묘한 점은 모든 문제의 발단이 된 아편 무역 이야기가 난징 조약문에도 호문채 조약문에도 일체 보이지 않는 사실이다.

그것은 아편을 직접 거론하기가 꺼림칙했던 영국의 입장과, 아편 무역 합법화를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던 중국의 입장이 반영된 것이었다.

난징 조약 협상장에서 포틴저는 “아편 밀매를 완전히 막을 수 없는 이상, 합법화하여 세금 수입이나 거두라”고 예전의 이금론자와 같은 조언을 했으나 기영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래서 1차 전쟁이 끝난 뒤에도 아편은 중국에서 계속 불법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공식적인 것이며, 전쟁 이후 조정은 아편 단속의 힘도 의지도 잃어버림으로써 아편 수입이 다시 폭증하게 된다. 호문채 조약에서 영사재판권이 설정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아편이 지나치게 성행할 경우 중국 경제를 무너뜨리고 영국의 합법적인 무역에도 지장을 주기 때문에, 청국 관리들이 손을 놓은 아편 단속을 영국 영사들의 손으로 하려고 했던 것이다.

결국 난징 조약은 그 당시 중국에서는 큰 문제로 여겨지지 않았으며 어쨌든 영국이 중국을 배려한 부분도 있었으나, 그 독소 조항들은 이후 서구 열강과의 조약들에서 반복되고 활용되면서 중국을 차차 반식민지의 늪으로 끌고 들어간다.

청은 1843년 7월에 미국과 왕샤 조약을, 1844년에 프랑스와 황푸 조약을 맺으며 난징 조약에 준하는 보장을 해주었으며, 특히 황푸 조약에서는 기독교 포교권이 처음으로 공식 인정되었다.

참고문헌


  • John Oughterlony, [THE CHINESE WAR], London, Sounders and Otley, 1844.
  • J. R. Fairbank, [CHINESE DIPLOMACY AND 'l'HE TREATY OF NANKING 1842], The Journal of Modern History, Vol. XII No.1, 1940.
  • 이에인 딕키 외, [해전의 모든 것](휴먼앤북스, 2010).
  • 김용구, [세계외교사](서울대학교출판부, 2006).
  • 임계순, [중국의 여의주 홍콩](한국경제신문사, 1997).
  • 이영옥, “아편전쟁 시기 도광제의 아편정책” [동양사학연구] 69집. 2000.
  • 이학노, “아편전쟁시기(1839~1842) 중국의 아편문제” [대구사학] 60집. 2000.
  • 방용필, “아편전쟁이후의 청영관계, 1842-51: 통상과 관세문제를 중심으로” [한양대학교 인문논총] 제16집. 1988.
  • 정성일, “아편전쟁전 도광제의 대영인식과 정책” [경북사학] 제19집. 1996.
  • 하정식, “아편전쟁과 조선·일본” [근대중국연구] 제2집, 2001.
  • 박지동, “영·미·일의 아시아 침탈과 민중 학살사 재고찰” [광주대학교 사회과학연구] 제9집. 1999.
  • 전형권, “임칙서의 정치관에 대한 소고” [창원대학교 논문집] 12권 1호.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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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규진 | 서울교육대학교 교수/역사저술가
글쓴이 함규진은 여러 방면의 지적 흐름에 관심이 많다. 정치학을 전공하여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주로 역사와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썼고, 인물이나 사상에 대한 번역서도 많이 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등 서로 대립되는 듯한 입장 사이에 길을 내고 함께 살아갈 집을 짓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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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도서
조약의 세계사 2014.12.22
고대부터 현대까지 64개의 조약으로 읽는 화해와 배신, 강압과 화합 그리고 진보의 역사.

‘지뢰는 과연 쓸모 있는 무기일까?’, ‘난징 조약은 불평등조약인가?’와 같은 흥미로운 물음을 던지며 세계사의 이면을 파고들어 역사와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을 넓힌다. 강화도 조약과 같이 우리 역사 속 조약부터 마스트리히트 조약처럼 생소한 조약, 고대의 히타이트-이집트 조약에서부터 현대에 체결된 리우환경협약까지 역사의 흐름을 바꾸고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계를 형성한 조약을 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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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2013.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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