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북군의 재정비와 봉쇄 작전 - 북부, 반격에 나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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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527회 작성일 16-02-07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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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클렐런, 북군을 살리다




불 런에서의 참패는 북군의 사기를 땅에 떨어뜨렸지만 이는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했다. 처음에 ‘반란군’ 따위에게 패했다는 소식에 망연자실했던 미국(북부) 국민들은 이내 평정을 되찾고 제대로 싸워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링컨 대통령은 불 런에서의 패배 하루 뒤(7월 22일)에 곧장 3년 복무 기한의 병사 50만 명을 모집하는 법안에 서명하고 사흘 뒤에는 추가로 50만을 모집하는 법안에 재차 서명하였다.

젊은이들은 적극적으로 군문(軍門)에 몰려들었고 각 도시의 모병 사무소는 군에 입대하려는 청년들로 가득했다.

아울러 북부의 주지사들은 앞다투어 각 주의 의용병(volunteers)으로 구성된 부대를 보내겠다는 제안을 하였다. 머지않아 워싱턴 근교에 마련된 여러 훈련장에는 훈련병들이 넘쳐났다.

이렇게 청년들이 넘쳐나게 된 이면에는 당시 미국의 이민을 둘러싼 현실이 있다. 1840년대까지 60만 명에 불과하던 ‘이민자’의 수는 1850년에 이르러 180만으로 급증한다.

특히 아일랜드의 감자 흉작으로 인한 대기근, 그리고 1848년 유럽 각국에서의 시민혁명 실패는 많은 유럽인들을 미국으로 내몰았다.

1860년에 이르러서는 이민자 수가 더욱 늘어났고, 미국의 노동시장은 새로운 인력을 흡수할 수 없어 많은 청년들이 거리를 배회하고 있었다.

이들은 하루하루를 무의미하게 보내기보다는 군대에 들어가 공짜 밥을 얻어먹고 전쟁에 나가 싸우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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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3년 5월 챈슬러스빌(Chancellorsville) 전투에 참여한 병사들. 젊은이들이 적극적으로 의용병이 되었던 이면에는 미국의 이민을 둘러싼 현실이 있었다. 넘쳐나는 이민자로 인해 노동시장이 포화되자 청년들은 전쟁터로 내몰리게 된 것이다.


어찌되었건 누군가는 불 런의 패배에 대한 책임을 져야 했고 결국 동북버지니아군 사령관 맥도웰은 해임되었다.

동북버지니아군을 대체하기 위하여 새로이 창설된 포토맥군(Army of the Potomac)의 사령관에는 군문으로 복귀한 전직 철도 회사 사장 조지 매클렐런(George B. McClellan, 1826~1885)이 임명되었다.

그는 많은 사가(史家)들에 의해 초기 북군 패배의 원흉으로 지적되고 있지만, 이는 어찌 보면 누명이다. 매클렐런은 커다란 집단을 조직하고 운영하는 데 뛰어난 인물이었다.

당시 채 2만도 되지 않던 미합중국 육군을 수십만의 정예 조직으로 거듭나게 한 데는 누구보다도 매클렐런의 공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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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매클렐런(George B. McClellan) 소장. 조직 운영과 행정 능력이 탁월하였던 그는 불 런에서의 참패 이후 북군을 재정비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일단 그는 부임하자마자 헌병을 동원하여 워싱턴 곳곳의 술집과 가정집에 숨어 있던 전직 장교들과 도망병들을 찾아내어 다시 병영으로 데리고 왔다.

그리고 새로이 모인 수십 만의 신병들을 훈련시킬 교과과정을 짜고 신병들의 훈련을 적극적으로 감독하였다. 아울러 군이 필요한 물자를 확보하는 데 주력하여 이에 대한 생산을 주문하고 막대한 양의 군량과 탄약을 비축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는 하루 18시간을 일하면서도 지치지 않고 부하들을 마구 몰아붙였다.

매클렐런은 부임한 후 불과 두 달만에 땅바닥까지 떨어졌던 북군의 사기를 진작시켰고 엉망이었던 군 기강을 바로잡았다.

오합지졸이었던 수십만의 신병들은 훈련을 거쳐 당장이라도 싸울 수 있는 강한 군인들로 거듭났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매클렐런은 장교와 사병을 막론하고 군 전체의 신망을 얻었고 포토맥군을 잘 조직된 전투 집단으로 변화시켰다.

매클렐런의 부지런함 덕분에 주에서 보내는 의용병과 단기 사병에 의존하던 북군이 전문화된 직업적 정규군으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현대로 따지자면 매클렐런은 탁월한 병참감(兵站監, Quartermaster General)이자 공병감(工兵監, Chief of Engineers)이라 할 수 있다.

2만도 안 되는 군을 수십만의 강군으로 만들고, 이들이 필요로 하는 물자를 확보하였으며, 덤으로 워싱턴 주변에 12개의 포대 진지를 만들고 이를 기반으로 수도 방어 네트워크를 완성하였다.

매클렐런은 사실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한 후 군 생활 내내 공병 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인물이었다. 그는 멕시코-미국 전쟁 당시 공병단에 재직하면서 수많은 전투에서 효과적인 작전으로 대위까지 진급하였다.

전쟁 후 웨스트포인트로 돌아와 진지 구축과 공병 훈련을 담당하였고, 아울러 외국에서 총검술과 기병전 서적을 들여와 이를 토대로 훈련 교본을 제작하기도 하였다.

뽐내기를 좋아하는 만큼 부지런하고 열심히 일하는 일 중독자였던 매클렐런은 군내에서 소위 ‘군사과학’의 대가로서 그 명성이 높아졌다.


포토맥군 사령관 매클렐런의 문제점




매클렐런은 1857년에 군직을 내려놓고 공병으로서의 경력을 이용하여 철도 회사의 사장이 되었다. 그러나 남북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1861년 4월에 오하이오주 의용군의 사령관으로 군문에 복귀하였다.

그의 유명세는 연방정부에서도 마찬가지였고, 그의 공병/병참경력을 높이 산 연방정부에 의하여 5월 3일에 오하이오강 이북의 지역을 총괄하는 오하이오 군관구(軍管區, Department of Ohio)의 수장이 됨과 동시에 미합중국 정규 육군의 소장(少將)으로 임명되었다.

그의 나이 불과 34세에 총사령관인 스콧에 이어 미국 육군에서 두 번째로 높은 계급을 받은 것이다.

이와 더불어 그는 연방에 남아 있기를 원하는 서부 버지니아 지역에서의 작전을 맡았고, 6월과 7월에 비록 소규모이기는 하지만 필리파이(Philippi)와 리치마운틴(Rich Mountain) 등의 전투에서 남군을 격파하였다.

특히 리치마운틴에서의 전투는 그를 일약 영웅으로 만들었고, 이 때문에 유명세를 타고 신설 포토맥군의 사령관에 임명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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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티텀 전투 이후 막사 안에 마주 앉은 링컨과 매클렐런. 매클렐런은 한때 ‘젊은 나폴레옹’이라 불릴 정도로 지지를 받았으나, 지나치게 신중한 성격 탓에 전투의 순간 승리를 거머쥐지 못했다.


그러나 병참과 조직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며 군대를 재빨리 장악한 매클렐런이었지만 그에게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매클렐런의 문제는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는, 그의 성장 과정이 너무 순탄했다는 것이다. 필라델피아의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고 아버지의 영향력으로 16세에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에 입학하여 20세에 59명 중 2등의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멕시코-미국 전쟁에서의 공훈으로 대위까지 승진하였고 여러 차례의 유럽 유학을 거치면서 군내 공병 전문가가 되었다.

그리고 군직을 내려놓은 후에는 철도 회사 사장이 되었다가 군문에 복귀하여 소장 계급을 달게 되었다. 한 마디로 그는 실패를 겪어본 적이 없었던 사람이었다.

두 번째, 그는 야심이 큰 정치군인이었다. 야전에서의 지휘보다는 정부 내 인사들과 교분을 다지는 데 주력하였고, 포토맥군을 훈련시키는 과정에서 군의 대선배이자 상관인 스콧 중장을 제치고 모든 보고를 대통령에게 직접 하였다.

상관으로서 무시당하는 것을 두고 스콧이 불편한 심기를 내비치자 멕클레렌은 이를 대통령과 함께 여당인 공화당 고위 인사들에게 일러바쳤다.

이에 매클렐런이 승리를 가져다 주기를 기대하였던 공화당 의원들은 스콧을 성토하였고 링컨에게 스콧을 몰아내라고 종용하였다. 결국 스콧은 ‘건강상의 이유’로 사령관직에서 사임하였다.

세 번째, 매클렐런은 모든 일에 지나친 완벽주의를 추구하였고 아울러 지나치게 신중하였다. 군을 움직이는 데 있어 모든 게 확실하지 않으면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단점들로 인하여, 매클렐런은 정작 전투의 순간이 닥쳤을 때 승리를 거머쥘 수가 없었다.


내륙수로와 바다를 봉쇄하라




포토맥군의 재정비가 이루어지는 동안 미합중국의 해군 역시 증강되고 있었다. 이미 링컨은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남부 해안에 대한 봉쇄를 명령한 상태였다.

문제는 이러한 봉쇄 작전을 수행하기 위한 함선이 태부족이었다는 것이다. 당시 미합중국 해군에는 42척의 주력함선이 있었는데, 상당수가 탐험을 위한 원양항해 중이어서 즉시 투입될 수가 없었다.

그나마 대다수는 범선이었고 기동력이 좋은 증기선은 3척밖에 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워싱턴 정부에 의한 봉쇄령이 선포되자 다른 나라, 특히 유럽 국가들은 미 해군이 허풍을 떤다며 공공연히 비웃기까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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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해군 증강 사업의 일환으로 1862년 진수된 기범선(機帆船) 뉴 아이언사이드(New Ironsides)호.


그러나 워싱턴 정부에게 더 심각한 문제는 바로 내륙수로, 즉 강을 장악하는 문제였다.

특히 내륙에서 병력을 움직이는 데 있어 오하이오강이나 미시시피강 같은 큰 강은 중요한 수송로였고, 수심이 얕은 내륙수로에서 원활히 기동할 수 있는 강상(江上) 함선의 보급도 시급하였다.

이에 워싱턴 정부는 원양항해를 하고 있던 함선들을 전부 불러들이고 새로운 함선들을 건조함은 물론 민간의 무역선과 여객선들을 대량 구입하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1861년 말에 이르러 미합중국 해군에 80척의 증기선과 60척의 범선이 증강되었고, 봉쇄에 투입된 함선의 수가 160척에 달했다.

1862년에는 더욱 빠른 증강이 이루어져 미 해군은 282척의 증기함선과 102척의 범선을 보유하게 되었다.

해군 병력도 빠른 수로 증강되어 전쟁 전 9,000명에 불과했던 미합중국 해군은 1861년 말 24,000명으로 늘어났고, 이후 곧 5만 명을 넘었다.

이에 비하여 남부에는 함선 건조를 위한 조선소도 얼마 되지 않았고(전국에 걸쳐 7개소), 숙련된 선공(船工)들과 수병의 수에서도 북부 해군의 물량을 당해낼 수 없었다.

이 때문에 남부에서는 함상전력으로 북부 해군과 정면대결하기보다는 기동력으로 북부의 함선들을 따돌리기 위한 쾌속선들을 주로 띄웠는데, 이들을 통칭하여 봉쇄돌파선(Blockade Runners)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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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의 봉쇄돌파선. 북부의 함선을 따돌리기 위해 남부가 선택한 것은 기동력 있는 쾌속선이었다.


북부의 봉쇄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점은, 의외로 봉쇄 작전에 지원하는 청년들이 많아 인원 부족을 걱정할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뱃일과 함상 생활이 결코 쉬울 리는 없었지만 일단 먹는 것, 입는 것, 그리고 심지어 술 마시는 것(?)까지 복무 환경이 전반적으로 육군보다 나았다. 결정적인 것은 배에 타게 되면 총포탄에 맞아 죽거나 다칠 확률이 현격히 낮아진다는 것이었다.

혹시라도 남부의 무역선이라던가 봉쇄돌파선을 나포할 경우 짭짤한 금전적 이익도 얻을 수 있었다. 남부의 함선을 나포하였을 시 배와 함께 화물은 경매에 부쳐졌고, 그에 따른 수익은 그 배를 나포한 함선의 승무원들이 나누어 가지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한 예를 들자면 1864년말경 미합중국 해군의 아이올로스(Aeolus) 호(號)가 남부의 돌파선인 호프(Hope) 호(號)를 나포하자 규정대로 경매 후 수익이 분배되었는데, 아이올로스 호의 함장은 13,000달러, 현재 가치로 약 20만달러에 해당하는 돈을 받았다.

그리고 수병 1명당 1천달러, 현재의 가치로 약 15,000달러가 주어졌다. 참고로 이 당시 북부 육군 병사의 월 수당이 13달러, 현재의 가치로 약 200달러 정도였던 것을 감안하면 해군에 들어가 봉쇄 작전에 종사하는 것이 훨씬 나았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북군의 봉쇄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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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년 8월 29일에 노스캐롤라이나 해터러스에 상륙하고 있는 북군 육전단. 해터러스 요새는 이후 북군의 봉쇄 작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북부 육군이 불 런에서의 참패 이후 재정비하는 동안 해군은 링컨 대통령의 봉쇄령에 보조를 맞추어 남부 해안에 대한 공략에 나섰다.

일단 중남부 해안에서 돌파선들이 출항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봉쇄돌파선들의 ‘소굴’이 된 노스캐롤라이나의 해터러스 해협(Hatteras Inlet)을 공략하였다.

이 지역은 긴 섬들이 해안을 방파제처럼 막고 있었고, 남부의 함선들은 이 섬들을 이용하여 북부 봉쇄함들과 숨바꼭질을 하였다.

남부에서는 이 지역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부랴부랴 수비를 보강하였고 아울러 등대라던가 부표등 항해에 필요한 시설물을 모두 철거하였다.

그렇지만 보강이 끝나기 전 1861년 8월 28일, 상륙 병력을 실은 북부 해군의 전함 7척이 하테라스 앞바다에 나타났다.

이 지역을 지키고 있던 남군의 해터러스 요새(Fort Hatteras)와 클라크 요새(Fort Clark)에는 총 19문의 구식 활강포가 설치되어 있었다. 총 141문의 신식 강선포를 싣고 있었던 북군 함대는 이를 이용하여 강선포의 최대사거리에서 두 요새를 포격하였다.

요새의 활강포로는 북군 함대를 타격할 수 없었다. 이어진 포격전에서 비록 두 요새의 병력 900명 중 사상자는 25명에 불과하였지만, 두 요새 모두 주요 시설이 부서졌다.

이에 북군의 버틀러(Benjamin Butler)가 이끄는 육전대가 상륙하자 두 요새를 지키던 남군은 항복할 수밖에 없었고, 해터러스는 이후 북군의 봉쇄 작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 승리가 북부에 전해지면서 불 런 참패의 쓰라림이 어느 정도 진정되었다. 북부 해군의 남부 해안에 대한 작전은 계속되어 1861년 11월 7일에 사우스캐롤라이나 해안의 남부 요새인 포트 로얄을 점령하였다.

아울러 북군은 이를 기지로 삼아 남부의 중요 항구인 찰스턴과 사바나 간 철로를 끊으려 하였으나 이 지역을 맡고 있던 리(Robert E. Lee)가 철로의 수비를 강화시키면서 작전을 보류할 수밖에 없었다.

남북 양측 모두 아직 얼마나 큰 전쟁을 치러야 하는지, 이 전쟁이 얼마나 오래갈 지 모른 채 1861년 말은 비교적 조용히 지나갔다.

참고문헌〈단행본〉


  • Iver Bernstein, [The New York City Draft Riots: Their Significance for American Society and Politics in the Age of the Civil War]
  • Benjamin Franklin Cooling, [Counterthrust: From the Peninsula to the Antietam]
  • John William Draper, [History of the American Civil War]
  • Joseph E. Johnston, [Narrative of Military Operations during the Civil War]
  • James M. MacPherson, [Battle Cry of Freedom: The Civil War Era]
  • Louis P. Masur, [The Civil War: A Concise History]
  • William T. Sherman, [Memoirs of General William T. Sherman]

 


 




참고문헌〈인터넷〉





김성남 | 안보·전쟁사 전문가
글쓴이 김성남은 전쟁이 인간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가지고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미국 UC 버클리 동양학과를 졸업한 후 연세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국제학 석사를 받고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에 진학하여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 [전쟁으로 보는 삼국지], [전쟁 세계사] 등이 있으며 공저로 [4세대 전쟁]이, 역서로 [원시전쟁: 평화로움으로 조작된 인간의 원초적인 역사]가 있다.


발행2013.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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