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베르사유 조약 - 이상과 현실의 불안한 합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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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528회 작성일 16-02-07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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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조약은 확실히 공개적이었다. 여러 서명국에서 비준 논의에 들어가기 전에 조약 내용을 일반에 낱낱이 공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조약 내용 자체는 결코 ‘공개적으로’ 수립되지 않았다. 역사상 그 어떤 협상도 그처럼 철저한 비밀에 싸인 신비의 과정이 아니었다. (......) 윌슨, 로이드 조지, 클레망소가 밀실에서 마주앉아 있는 동안 완전무장한 미군은 각국의 전문가, 외교관, 심지어 대통령 외의 미국 대표단까지도 그 자리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철통 같은 경계를 펼치고 있었다.”


영국 대표단의 일원으로 베르사유 조약 협상 과정에 참여했었고, 이후 현대 외교 이론의 고전이 된 [외교론]을 저술한 해럴드 니컬슨이 남긴 회상이다. 확실히 제1차 세계대전을 마무리 짓기 위한 파리강화회의와 그 가장 큰 결과물인 베르사유 조약은 그동안 국익의 미명하에 수많은 국민의 목숨이 스러졌던 일을 반성하며, 민주적이고 이상적인 새로운 국제정치의 틀을 만들려는 희망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그 희망은 도처에서 낡고 차가운 현실주의에 묶여 있었다.



평화를 지키는 방법



18세기 말의 프랑스 대혁명과 그것을 정리하는 셈이었던 19세기 초의 나폴레옹 전쟁은 유럽이 새로운 근대적 질서를 필요로 함을 보여주었다. 그 질서는 신성불가침의 주권을 가진 국민국가들이 헌법에 보장된 권력으로 국민을 동원하고, 눈부시게 발전한 과학기술력에 경제력까지 휘두르면서 자국의 이익을 자유롭게 극대화하되, 동시에 적어도 유럽 국가들끼리는 파멸적인 전쟁을 자제해야 한다는 목표를 추구했다.

어떻게 각국의 국익을 추구하는 자유를 보장하면서 동시에 평화를 유지할 것인가? 1815년의 빈 회의에서 1848년의 2월 혁명 시기까지는 대체로 ‘신성동맹’이나 ‘5국동맹’ 같은 주요 강대국들의 협의체가 우월한 힘으로 현상을 유지하는 방식이 주류였다. 이 시기에는 비유럽 제국인 튀르크와 중국이 공략당하고, 벨기에가 네덜란드에서 독립하는 정도 말고는 큰 분쟁이나 판도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의 먼로주의로 신대륙에서 유럽 제국의 영향력이 차단되었으며, 빈 체제의 보수성에 맞서는 지식인과 대중의 저항이 유럽 각국에서 끊이지 않았다. 19세기 중반을 넘으면서는 야심적인 나폴레옹 3세가 프랑스를 제2제정으로 탈바꿈시키고, 이탈리아와 독일에서는 통일 전쟁이 일어나 빈 체제 식의 질서가 붕괴하게 된다. 그리고 1870년의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1911년까지는 신흥강대국 독일의 수상, 비스마르크의 기획에 따른 ‘세력균형체제’가 유럽의 평화를 담당했다. 열강들 사이의 거미줄처럼 복잡한 동맹과 적대 관계로 어느 한쪽이 섣불리 상대를 공격할 수 없는 상태가 됨으로써 분쟁이 자제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시기에 유럽 밖에서는 식민지 쟁탈전이 치열했으나 그것이 유럽 국가들 사이의 전면전으로 치닫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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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년, 베르사유 궁전의 ‘거울의 방’에서 프랑스에 승리한 프로이센의 빌헬름 1세가 ‘독일 황제’에 즉위하고, ‘독일제국 수립’을 선언하고 있다. 단하의 흰 군복 차림의 사람이 신흥강대국 독일 제국의 수상 비스마르크다.



그런데 강대국중심체제나 세력균형체제가 적나라한 힘의 과시와 공포의 조성에 힘입은 냉혹한 현실정치적 접근이었던 반면, 인도주의와 평화주의의 이상에 따라 모든 국가가 전쟁을 자제하고 국익 추구도 분별 있게 하자는 접근도 있었다. 앙리 뒤낭의 정신에 따라 전시에 부상병을 인도적으로 대우하기로 합의한 제네바 협약(1864년)은 그런 접근이 현실화된 일례였으나 전쟁 자체를 방지하는 체제는 아니었고, 헤이그 국제평화회의(1899년)는 국제분쟁의 평화적 처리와 전후 배상 문제에 기준을 수립했으나 그 “국제분쟁을 전쟁이 아닌 재판으로 해결한다”는 원칙은 각국에 의무가 아닌 선택권으로 부여됨으로써 전쟁 가능성을 결정적으로 줄이지는 못했다.

한편 민간의 여러 평화론 중에서 임마누엘 칸트의 [영구평화론](1795)은 각국이 주권의 일부를 유보하여 국제평화기구를 세우고, 비밀외교를 없애고 국제 관계를 일반 대중에게 투명하게 드러냄으로써 소수의 정치인들이 국가와 국민의 운명을 걸고 도박을 벌일 기회를 없애자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는 19세기 내내 주목받고 공감도 받았으되 당시의 현실 정치에 반영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런 이상이 현실의 문을 두드리게 될 날이 차츰차츰 다가오고 있었다.



사상 최악의 전쟁, 그리고 반성의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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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격렬했던 전투 가운데 하나였던 베르됭 전투에서 숨진 프랑스 병사들을 안장한 두오몽 묘지. 17만 명 이상이 묻혀 있다. <출처: (cc) Jean-Pol GRANDMONT at commons.wikimedia.org>



제1차 세계대전은 비스마르크 퇴진 후 흐트러진 동맹체제망에 계속 고조되던 민족주의가 뒤얽히면서 벌어졌다.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의 작은 분쟁으로 끝날 수 있었을 사태가 범슬라브주의에 따른 러시아의 개입, 삼국동맹에 따른 독일의 개입, 삼국협상에 따른 프랑스, 영국의 개입 등으로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며 세계 주요 열강이 빠짐없이 참전하는 도가니가 되어버린 것이다. 독일이나 오스트리아는 처음 이 전쟁이 몇 주면 끝나리라 보았으나, 결국 4년이나 끌었다. 그냥 끈 정도가 아니라, 제1차 마른 전투 한 번에 러일전쟁(세계대전 직전의 가장 큰 전쟁이었던) 전 기간에 사용한 것에 맞먹는 포탄을 퍼부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물량전이자 살육전이 밤낮으로 이어졌다.

전쟁 발발 직후 대부분의 유럽 시민들이 맹목적 애국주의에 취해 전쟁을 부르짖고 있는 동안 일부 사회주의자들만이 “어떤 미친 인간이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부의 피를 흐르게 했다는 이유로, 이제 수천 명 민중의 피가 흐르려 한다!”며 전쟁에 반대했으나, 그들은 “수천 만 명의 피가 흐르려 한다”라고 말했어야 했다. 러시아 사상자 665만, 독일 사상자 599만, 프랑스 사상자 563만……. 총 사상자 3252만 4566. 그것이야말로 산업혁명과 자본주의 발전이 낳은 전대미문의 파괴력이, 헌법적 권한에 따라 국민국가가 전장으로 내몬 선량한 보통 사람들에게 사정없이 내리쳐진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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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중 독가스를 마신 어느 캐나다 병사.



현대문명이 아무리 비위가 좋아도 그런 참상에는 구역질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에 대한 혐오와 평화의 갈구가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가운데, 국제정치적으로도 러시아가 혁명으로 공산화되고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전선에서 이탈하는 한편 미국이 오랜 고립의 전통을 깨고 연합국 편으로 참전, 독일과 그 동맹국들의 패배에 결정적 역할을 함으로써 ‘새로운 이상적 질서’에 대한 희망이 커졌다. 19세기 말 이미 제1 경제강국의 지위를 차지했던 미국은 유럽의 자멸과도 같던 이 전쟁의 결과 정치ㆍ 군사적으로도 최고의 지위를 자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수반인 우드로 윌슨(Thomas Woodrow Wilson, 1856~1924)은 ‘미국적 방식’인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협상 중심주의를 국제 질서의 기본 원칙으로 삼음으로써 영구 평화를 이룩할 수 있다는 이상에 불타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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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28번째 대통령 우드로 윌슨. “승리 없는 평화”를 통해 “세력공동체”를 구축하자고 한 그는 “평화원칙 14개조”를 발표하는 등 이상주의적 행보를 보였다.



그는 1917년 1월의 의회 연설에서 이 전쟁은 새로운 세력균형 체제를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참된 평화를 이룩하는 전쟁이 되어야 한다고 하며 “세력균형이 아니라 세력공동체(community of power)를 이루어야 한다. 서로 편을 먹고 맞설 것이 아니라, 모두 하나의 편이 되어 공동의 평화를 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 전쟁은 “승리 없는 평화”로 귀결되어야 한다고 했다. 승리란 다른 누군가의 패배를 의미하며, 유리한 자와 불리한 자로, 이익을 본 자와 손해를 본 자로 편이 나뉜다면 결코 평화의 공동체를 이룰 수 없기 때문에!

이런 그의 입장은 1918년 1월의 유명한 “평화원칙 14개조”에서 더 구체화되었다. 그 제1조에서는 모든 비밀 외교를 금지했으며, 제5조는 주권 평등과 민족 자결주의를 규정하고, 그 구체적 실천 과제를 6조에서 13조까지 제시했다. 그리고 제14조에서는 국제연맹의 창설을 제창했다. 말미에서 윌슨은 이렇게 말했다. “세력이 강하든 약하든 관계없이 모든 민족과 국가에 정의가 실현되어야 한다. 그들 모두가 자유와 안전을 동등하게 보장받으며, 더불어 살아갈 권리를 갖고 있다.” 그에 대한 비판(가령 비서구 민족에 대한 배려 부족, 소련에 대한 양보, 미국의 국익과 미국 자본의 이익을 은근히 반영하는 게 아니냐는 의심 등)에도 불구하고, 당시 세계 여론은 14개조를 신시대의 복음으로 여기며 열광하였다. 1918년 11월, 독일이 항복했으며 유럽 국가들은 윌슨의 14개조를 기조로 삼는 평화협정을 추진할 것에 합의했다. 칸트가 주장했던 영구평화론이 백여 년을 지난 시점에서, 최악의 전쟁의 결과로 실현되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현실과의 야합, 비극이 잉태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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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런던에 도착한 윌슨.



파리에서 열리는 강화회의에 참석차, 윌슨은 1918년 12월에 유럽으로 갔으며 가는 곳마다 ‘구세주’로 큰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정작 회담장에 들어선 그는 냉랭하고 긴장된 분위기를 느끼고 멈칫해야 했다. 유럽의 승전국 대표들은 윌슨의 “승리 없는 평화”도 바라지 않았고, “세력공동체”를 이룰 생각도 없었던 것이다.

본래 골수 사회주의자, 진보정치인이었으나 전시에 수상이 된 뒤로는 “나의 국내 정책은 전쟁 수행이다. 나의 대외 정책도 전쟁 수행이다. 나의 경제 정책도 전쟁 수행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전력을 다해 프랑스를 지켜냈던 조르주 클레망소(George Clemenceau, 1841~1929)는 다시 독일에 위협당하는 일이 없도록 못박기 위해, 전쟁으로 황폐해진 국토와 거덜난 산업시설의 복구에 조금이라도 보탤 자원을 얻기 위해, 약 반세기 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겪은 치욕을 되갚기 위해, 독일이 잔혹한 대가를 치르도록 해야 한다고 벼르고 있었다. 인권 변호사 출신의 영국 수상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David Lloyd George, 1863~1945)도 자유주의 정치인으로서 윌슨의 사상에 다분히 공명했지만, 실추된 영국의 국위를 높이고 유럽에서의 안전을 보장받는 것이 자신의 첫째 가는 사명이라고 여겼다.

한편 이탈리아는 본래 3국 동맹으로 독일, 오스트리아와 함께 했다가 빠진 다음에 통일 과정에서의 ‘미수복 영토’를 되찾게 해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연합군에 참여했었으므로 평화회의에서 그 영토를, 그리고 다른 오스트리아 땅을 덤으로 받기를 바랐다. 또 일본은 중국과 태평양의 독일 식민지를 요구했다. 이밖에 헝가리 영토 내의 루마니아인 다수 거주지를 병합하려는 루마니아와 팔레스타인 땅을 얻으려는 시온주의 유대인들, 독립을 염원하는 한국, 인도, 아르메니아 등의 대표들이 “민족자결주의”에 희망을 걸고 회의장 앞을 떠나지 않았던 한편 그리스, 헤자즈(아랍) 등은 반대로 여러 민족을 망라하는 제국을 건설하고 싶어했다. 심지어 옛날에 빼앗긴 예술품을 돌려달라는 청원이나 경제 원조를 해달라는 요구도 끝이 없었다. 윌슨과 그의 14개조에 지나친 기대를 건 때문도 있었고, 전쟁을 치르는 도중 그때그때의 필요에 따라 맺어진 각종 조약과 밀약 따위를 총결산할 자리가 이 회의밖에 없었던 이유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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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사유 궁전의 ‘거울의 방’에서 체결된 베르사유 조약. 가운데 서류를 들고 있는 사람이 윌슨이며 그가 앉은 왼쪽으로 클레망소와 로이드 조지가 앉아 있다.



이는 도무지 윌슨의 “승리 없는 평화”나 “민족자결주의”와 부합되지 않았고, 그는 설득을 거듭했으나 미국의 위력과 윌슨의 인기에도 불구하고 저마다의 자국 이익 우선주의를 제압할 수는 없었다. “모든 국가가 자유와 안전을 동등하게 보장받아야”라는 원칙도, “비밀외교는 없어야 한다”는 원칙도 지킬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수많은 나라와 민족의 대표들이 각자의 요구를 내밀며 소란을 피우는 상황을 타개하고자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5개국의 수석 및 차석 대표들만 ‘10인 이사회’를 구성해 배타적으로 일을 논의하기 시작했고, 며칠 뒤에는 다시 일본도 따돌리고 윌슨, 클레망소, 로이드 조지와 이탈리아의 오를란도 수상 네 명만 회의를 열었으며, 다시 얼마 뒤에는 오를란도마저 퇴장하고 세 사람만이 니컬슨의 묘사대로 ‘철통 같은 경계’ 속에서 비밀 회담을 진행하게 되었다.

미국이 최대의 국력을 가지고 있지만 윌슨이 곧 미국은 아니라는 점도 문제였다. 대학 총장 출신의 그는 명석한 정치인이었으나 노회한 협상가는 아니었으며, 건강이 몹시 나빠져 있던 탓에 클레망소나 로이드 조지의 옹고집에 배짱 좋게 맞설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에게는 공화당이 장악하고 있던 상원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아킬레스건마저 있었다. 그는 유럽 수뇌들이 국제연맹 창설에 열의가 없음을 알고, 평화조약 내용에 국제연맹 창설안이 결부되도록 하여 연맹 창설이 무산되는 일을 막았다. 그러나 본국 상원이 보내온 청원서에는 “먼로 독트린이 무시되고, 미국 국내 문제에 국제연맹이 간섭할 소지가 있으며, 연맹에서 탈퇴할 자유가 없다”는 문제점을 지적하며 국제연맹 가입을 거부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윌슨은 고심 끝에 그런 문제점을 제거하도록 연맹안을 수정하고 싶다고 유럽 수뇌들에게 밝혔는데, 클레망소와 로이드 조지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자신들이 고집해온 자국 이익 보장책을 대가로 요구했다. 결국 윌슨은 스스로의 원칙을 깨트리며 그들에게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이탈리아에 대해서는 민족자결주의와 비밀외교 금지 원칙을 들어(참전하면 영토를 준다는 협약은 비밀로 체결되었었고, 이른바 미수복 영토와 오스트리아 영토에는 이탈리아계가 아닌 주민이 많았으므로) 양보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했는데, 이 명백한 차별 대우에 격분한 오를란도는 회담장에서 물러나 버렸다. 이는 훗날 이탈리아에 파시스트 정권이 들어서고,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는 불씨가 된다. 일본도 자국의 요구가 거절되자 회담을 거부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윌슨이 마지못해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자, 이번에는 중국이 반발하여 회담장을 떠났다.



베르사유 조약의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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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판 베르사유 조약문.



파리강화회의의 결과 체결된 조약은 연합국-독일 사이의 베르사유 조약(1919년 6월 28일), 연합국-오스트리아 사이의 생제르맹 조약(9월 10일), 불가리아와의 뇌이 조약(11월 27일), 헝가리와의 트리아농 조약(1920년 6월 4일), 튀르크와의 세브르 조약(8월 11일)으로 모두 다섯 개이나, 베르사유 조약이 그중 가장 앞섰고 또한 중요성이 높았으므로 사실상 제1차 세계대전은 베르사유 조약으로 마무리되었다고 본다.

그 전문에 명시된 조약 주체에는 독일에 대한 연합국 구성원들로 벨기에, 그리스, 포르투갈,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루마니아, 폴란드, 볼리비아, 브라질, 쿠바, 에콰도르, 과테말라, 온두라스, 아이티, 니카라과, 우루과이, 파나마, 페루, 헤자즈, 라이베리아, 중국, 태국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앞서 말한 대로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과 이탈리아가 ‘연합국 이사국’으로 협상 과정을 도맡았으며 중국은(그리고 결국 미국도) 이 조약을 비준하지 않았다. 총 15개 장, 440개 조로 이루어진 이 조약의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제1장, 국제연맹 규약]은 조약 제1조부터 26조를 구성하며, 자체 전문에서 “국제 협력 증진과 국제평화 및 안보를 달성하고자, 전쟁에 의존하지 않을 책임을 받아들임으로써, 개방되고 정의롭고 명예로운 국제 관계를 규정함으로써, 국제법을 국제 관계의 실행 규칙으로 확고히 이해함으로써, 상대국 국민들과의 교류에서 정의를 유지하고 모든 조약상의 의무를 견실히 준수함으로써” 국제연맹 규약에 동의한다고 표시하고 있다. 제4조는 파리강화회의의 연합국 이사국들이 상임이사회를 구성한다고 규정했으나, 제5조에서 “모든 회의의 의결은 참석자들의 만장일치로 이루어진다”고 규정했기 때문에 국제연합의 안전보장이사회 같은 권력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는 만장일치의 비현실성과 더불어 국제연맹의 운신의 폭을 좁혔으며, 협상 과정에서 미국 상원을 달래려 원안에 있던 연맹의 국내 문제 개입권과 가입국의 탈퇴 금지 의무를 삭제함으로써 이후 일본, 이탈리아가 침략 전쟁을 자행하던 끝에 연맹을 탈퇴하며 독일과 함께 제2차 세계대전의 주역이 될 수 있게 된다. 또 제8조에 규정된 “회원국의 군비축소 의무” 때문에 1922년에 워싱턴 군축조약이 체결되지만, 여기서 불공평한 결과가 강요되었다고 여긴 일본의 불만이 역시 전쟁의 불씨를 더한다.

[제2장, 독일의 영토]와 [제3장, 유럽 영토의 재편]은 조약 제7조부터 제117조까지에 달하는데, 이로써 독일은 알자스-로렌, 단치히 회랑지대와 슐레스비히 북부, 슐레지엔 상부, 포즈나니를 잃었으며 라인 강 유역과 자르 지역을 국제연맹이 관할하는 비무장지대로 내놓았다. 프랑스는 오랜 영토 분쟁지인 알자스-로렌을 얻고 비무장지대 설정으로 안보 위협을 줄였다. 덴마크와 벨기에도 독일의 일부 영토를 얻었으며, 신생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도 자기 몫을 챙겼다. 이로써 다수의 독일계 주민이 졸지에 외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는데, 현실주의가 민족자결주의에 거둔 이 승리의 후유증으로 독일의 나치스 집권이 가능해진다.

[제4장, 독일의 해외 영토]는 조약 제118조에서 제158조의 내용으로, 제119조는 “독일은 모든 해외 영토 및 이권을 연합국 이사국들에게 양도한다”고 규정함으로써 독일제국을 해체함과 함께 본래의 민족자결주의와 승리 없는 평화 원칙이 실종된 ‘강대국 사이의 땅따먹기’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일본은 소원대로 중국의 산둥 반도를 얻고, 태평양의 저먼 군도는 영국과 반씩 나눠가졌다. 영국은 또한 독일령 동아프리카의 전부를 갖고 카메룬, 토고는 프랑스와 나눠가졌으며, 벨기에는 루안다-우룬디를 차지했다. 또한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남아프리카도 영연방의 일원으로서 각각 뉴기니, 사모아, 독일령 서남아프리카를 병합했다. 이밖에 독일은 튀르크, 모로코, 이집트, 라이베리아 등에서 획득했던 이권을 모두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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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베를린 거리에서 구걸로 연명하는 독일군 상이용사. 연합국의 전쟁 비용뿐 아니라 연합국 군인과 민간인의 피해 모두를 배상하게 된 독일의 경제력과 국방력은 허약해질 대로 허약해졌다. <출처: (cc) German Federal Archive at en.wikipedia.org>



[제5장, 독일의 군사력]에 따라 독일은 병력 징집권을 잃고 중포와 탱크, 거함을 보유할 수 없게 되었으며, 해공군 없이 10만의 직업군인만을 가진 왜소한 군사력의 국가로 전락했다. 또 [제6장, 전쟁포로와 전사자]를 넘어, [제7장, 전쟁책임], [제8장, 전쟁배상], [제9장, 재정조치]에 따라 독일은 연합국의 전쟁 비용을 배상할 뿐 아니라 연합국 군인과 민간인이 입은 모든 피해를 배상하도록 되었는데, 이는 그때까지 전쟁 비용을 배상할 따름이던 관행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이로써 전쟁 책임이 강화되어 전쟁 억제에 도움이 되리라며 ‘이상적’이라 여겨지기도 했으나, ‘현실적’으로는 승자가 패자에게 과도한 배상금을 울궈낸 셈이었다.

[제10장, 경제조치]와 [제11장, 항공로], [제12장, 수로 및 철로]의 내용은 독일이 연합국 이사국들에게 최혜국 대우를 할 것, 연합국 상품에 불리한 ‘불공정 규제’를 철폐할 것, 원칙적으로 모든 국내 교통로를 개방할 것, 일부 주요 산업시설과 탄광 등을 양도할 것 등을 규정했다. 이처럼 가혹하고 치사할 정도의 조치는 일부 윌슨의 이상(자유무역 진흥)을 반영하기는 했으되, 결과적으로 신생 바이마르 공화국이 허약해진 국방력과 경제력 때문에 국가의 기틀을 잡지 못한 채 휘청거리다 좌초하도록 몰아감으로써, 독일의 ‘민주주의 정착’을 결정적으로 저해하고 만다.



학습하는 인류?



윌슨은 어떻게든 자신의 이상을 매개로 새로운 국제정치 질서를 짜려고 애썼으나, 그의 이상이 아직 세계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 그가 ‘더 큰 이상 실현을 위해’라는 명목으로 허용한 여러 현실적 양보 때문에, 그 노력은 크게 빛을 잃었다. 결정적으로 미국 상원은 끝내 국제연맹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으며, 국제연맹 규약이 베르사유 조약과 통합되어 있었기 때문에 1920년 3월에 조약 비준 자체가 부결되었다(미국은 이후 별도 조약안을 마련, 1921년에 독일과 단독으로 평화조약을 맺는다). 절망한 윌슨은 쇠약한 몸을 이끌고 전국 유세를 다니며 조약 비준을 호소했으나 헛수고였고, 1921년에 하야하고 실의에 빠져 살다가 1924년에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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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에 침략한 이탈리아군을 피해 망명하는 에티오피아의 셀라시에 황제. 국제연맹은 이 침략을 막는 데 무력했다.



미국을 비롯한 여러 주요 국가가 빠진 국제연맹은 현실적으로 세계 정치를 포괄할 힘이 부족했다(소련은 1934년에 가입하지만 1939년에 핀란드 침략으로 제명된다. 독일은 1926년에 가입했다가 나치 집권 후 탈퇴한다). 그리고 설령 모든 나라가 자리를 함께했다 해도, 윌슨이 생각한 “세력공동체”를 이루기란 무리였을 것이다. 민족자결주의와 국권평등주의는 패전국들에 대한 처우에서 손상되었을 뿐 아니라, 이후 약소국들과 피압박 민족의 염원이 여지없이 묵살됨으로써 ‘빛 좋은 개살구’ 꼴이 되었다.

그리고 독일의 입장에서 이상과 현실이 뒤섞인 베르사유 조약의 내용은 지나쳐도 너무 지나친 것이었다. 이제껏 수없이 치러진 전쟁에서 패자는 승자에게 톡톡히 대가를 치러왔지만, 이렇게 국토의 14퍼센트, 인구의 10퍼센트, 식민지의 전체를 빼앗길 뿐더러 자위 능력도 경제 능력도 없는 약소국으로의 전락을 강요당한 일은 듣도 보도 못하지 않았는가? 연합국 국민이 죽은 만큼 우리 국민도 죽었다. 비인도적인 만행(가령 독가스나 집단 학살)도 양쪽이 모두 저질렀다. 왜 모든 전쟁의 책임을 우리가 뒤집어써야 하는가? 그것도 차라리 말이나 말지, ‘민주주의’니 ‘민족자결주의’니 ‘승리 없는 평화’니 따위를 떠들어대는 가운데? 이런 의문은 꼭 극우파가 아니더라도 대부분 독일인들의 뇌리에 사무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하여 인류는 또 한 번의 비극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튼 자유와 민주의 이상을 실현하고, 모든 나라가 하나의 가족처럼 더불어 살아가자는 생각을 제시한 점은 귀하다 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인류는 이후 교훈을 학습했고, 국제정치의 관행도 조금씩 개선되었다. 다만 그런 학습과 개선의 속도가 너무 느리다는 지적은 오늘날에도 피하기 어렵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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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규진 | 서울교육대학교 교수/역사저술가
글쓴이 함규진은 여러 방면의 지적 흐름에 관심이 많다. 정치학을 전공하여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주로 역사와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썼고, 인물이나 사상에 대한 번역서도 많이 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등 서로 대립되는 듯한 입장 사이에 길을 내고 함께 살아갈 집을 짓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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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도서
조약의 세계사 2014.12.22
고대부터 현대까지 64개의 조약으로 읽는 화해와 배신, 강압과 화합 그리고 진보의 역사.

‘지뢰는 과연 쓸모 있는 무기일까?’, ‘난징 조약은 불평등조약인가?’와 같은 흥미로운 물음을 던지며 세계사의 이면을 파고들어 역사와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을 넓힌다. 강화도 조약과 같이 우리 역사 속 조약부터 마스트리히트 조약처럼 생소한 조약, 고대의 히타이트-이집트 조약에서부터 현대에 체결된 리우환경협약까지 역사의 흐름을 바꾸고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계를 형성한 조약을 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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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2013.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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