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인도양 영일전쟁 (2) - 인도양 영일전쟁의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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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34회 작성일 16-02-07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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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중순양함 도셋셔와 콘월이 일본군에게 격침되는 장면


출격했던 함재기들을 모두 회수한 일본 기동부대는 남동쪽으로 이동하였다. 한편 몰디브 아두 아톨 정박지에 있던 영국 해군의 A 부대는 그 날(5일) 정오경 정박지를 떠나 급거 일본 함대를 향하여 급행하였다.

그들이 잡은 코스는 그대로 달리면 다음날 오전 일출 때 실론 섬에서 250마일 떨어진 지점에 도착하게 되는 것이었다.



영국 중순양함 침몰



서머빌 사령관은 콜롬보 항구에서 나와 대피 항해를 나갔던 두 척의 중순양함들에게 4월 5일 16:00까지 A 함대와 접촉하라고 명령하였다. 두 순양함들은 명령을 받고 침로를 변경하였다.

4월 5일 06:48 중순양함 도셋셔는 150마일 동쪽에 일본 함대가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두중순양함은 일 함대에서 이탈하기 위해서 27. 51노트의 전속력으로 달렸다.

그러나 불운은 그들을 찾아왔다. 해상의 시계는 아주 좋았다. 정오 조금 지나 두 함들은 일본 중순양함 도네(利根)에서 발진한 수상 정찰기에게 발견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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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영국 중순양함 콘월


88기의 일본 함재기들이 항모(항공모함)아카키(赤城)와 히류(飛龍), 그리고 소류(蒼龍)에서 출격하였다. 콜롬보를 공격하고 귀함하여 재무장한 항공대였다.

도셋셔는 13:38에 공격받기 시작했다. 여러 발의 폭탄과 어뢰를 맞고 13:48에 침몰하고 말았다. 14:00 중순양함 콘월도 다수의 치명타를 입고 역시 바다 속으로 사라졌다.

서머빌 제독은 두 순양함들이 공격을 받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자기 함대의 침로를 그들이 공격당하고 있는 남쪽으로 향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18:17 두 척이 침몰했다는 보고를 받자 이를 취소했다. 대신 코스를 바꾸어 일본 함대의 추격에 나섰다.

영함 인도미타블에서 발진한 수상 정착기가 해역을 다 뒤졌지만 일 함대는 발견되지 않았다.



일본 함대를 찾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영국 함대



서머빌 제독이 날이 밝으면 적 함대를 공격할 최단거리 해역까지 도착하고자 밤새 여러 번 출격시킨 수상 정찰기들은 아무런 결과도 가져오지 못했다.

(후에 전사가들은 만약 수상 함대인 서머빌 함대가 기대대로 일본 기동함대와 만났었다면 대패 했었을 것이라고 평하고 있다. 못 만난 것이 다행이라는 이야기다.)

다음 날 4월 6일 아침 구식 함대의 B 부대가 서머빌의 부대와 합류하였다. 두 척의 영국 순양함을 격침한 나구모 중장의 일본 기동부대는 4월 8일 아침 06:00까지 계속 남동쪽으로 항진했다. 8

일 아침 06:00 일본 기동부대는 갑자기 코스를 뒤집어 북서쪽으로 변침하고 실론 섬의 북쪽에 있는 트링코말리항의 서쪽 450마일 해역에 도착할 때까지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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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기동함대 기함 아카기. 1942년 3월 26일 콜롬보를 향해 출격 직후의 모습으로. 왼쪽에 휘하 기동함대의 모습이 보인다.


이 시점에 서머빌 제독은 또다시 나구모의 의도를 잘못 해석하였다. 일본 함대가 종적이 묘연해지자 그는 일본 함대가 몰디브 제도 끝 섬인 아두 아톨을 공격하기 위해서 기동한다고 잘못 판단하였다.

그는 나구모가 영국 함대가 그 곳으로 다시 돌아올 것으로 판단하고 이의 분쇄를 위해 기동중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서머빌 제독은 다음날 새벽에 일본 해군이 아두 아톨에 여명 공격을하리라고 믿고 함재기들을 모두 출격시킨 일본 함대를 급습하기로 작전을 세웠다.

당시 일본 해군은 몰디브 섬의 아두 아톨에 영국 해군기지가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으니 상당한 오판(誤判)이었다.

결과 서머빌 제독은 그의 함대를 일본 함대가 실제로 있는 곳에서1,000마일이나 떨어진 먼 바다에서 방황하게 만들었다.

이 실수로 인하여 서머빌 제독은 인도양을 내습한 일본군과 교전할 마지막 기회를 상실하고 말았다.

한편 런던의 해군본부는 4월 9일 서머빌 제독 휘하 구식 함들로 편성된 B 부대가 실제로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하고 걸리적거리는 존재로 판단하고 이 함대를 아프리카 케냐의 몸바사 항으로 보내도록 명령하였다.

서머빌은 명령한대로 B 부대를 몸바사 항으로 보냈다. 나구모 부대의 위치가 확인되지도 않았었고 인도의 동해안이 일본 함대에게 포격을 당하고 여러 척의 영국 화물선들이 벵골만에서 격침을 당하고 있음에도 역부족의 영국은 일찌감치 인도의 동해안을 일본에게 양보하는 행동을 취하기 시작한 것이다.

06:00 서머빌 제독은 함대에게 인도의 서해안에 있는 봄베이로 직행하라고 명령하였다. 일본 함대가 설치고 있는 인도 동해안 해역(인도 - 버마 사이)의 이탈 항해였다.



영국 항공모함 침몰



실론 북부 트링코말리 항에 있던 영국 함모 Hermes(그리스 신화의 신 '헤르메스'에서 나온 이름)는 밤 08:00에 호위함들과 함께 급히 항구를 떠나라는 지급 명령을 받았다.

있을 수 있는 일본 기동함대로부터 이탈하는 대피 명령이었다. 이항모 부대는 항모 험스와 구축함 뱀파이어와 급유선 브리티쉬 서젠트호와 콜베트 함 홀리호크였다.

여기에 보급함 아텔스테인 등은 4월 9일 모두 트링코말리 항을 떠났다. 다음날 10일 새벽 06:00 트링코말리 항 150마일 밖 해상에 도착해 있던일본 기동 함대는 85기의 함재기들을 출격시켰다.

공격 항공대는 07:25에 항구 상공에 도착해 해군 기지에 폭격을 했다. 주요 공격 목표는 해군 항만 시설과 수리 조선소, 그리고 비행장들이었다.

이번에도 영국 공군이 힘에 부치는 요격 출동을 했다. 트링코말리에 주둔했었던 공군 전투기들로서 17기의 허리케인과 6기의 풀머였다.

그러나 우수한 일본 함대 제로기와 상대가 되지 않아 8기의 허리케인기와 한 기의 풀머가 격추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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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로기 <출처 (cc) Kogo at Wikimedia. org>





영국 폭격기 블렌하임(Bristol Blenheim)




트링코말리에 있던 해군 사령관도 동뜰 무렵 일본 함대의 위치와 규모를 알고 9 기의 해군 브렌하임 쌍발 폭격기들을 출격시켰다.

폭격기들은 오전 10:25에 일본 함대를 발견했지만 함대 상공에서 초계하고 있던 일본 제로 전투기들에게 요격을 당했다.

폭격기들은 함대에 폭격을 했지만 명중탄은 한 발도내지 못했고 단지 3발의 근탄(近彈)만을 얻었을 뿐이었다. 9기중 5 기가 격추당했고 4기는 대파되어서 겨우 돌아왔다.

트링코말리항이 공격을 받고 있던 시각, 전날 밤 이 항구를 출항했었던 험스와 뱀파이어가 단지 65마일 남쪽에서 항해 중이었다. 험스는 그 함재기들을 육상에 대피시켜 놓았기 때문에 탑재기가 한 기도 없었다.

일본 항공대의 공격이 다 지나갔다고 생각했던 그들은 09:00에 180도로 변침하여 트링코말리 항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항을 떠나 대피했던 다른 해군 함정들도 항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항모 험스는 코스를 180 변침하기도 전에 일본 정찰기에 발견되고 말았다.

나구모는 09:00에 이 영국 항모 부대를 공격하도록 90기나 되는 함재기들을 발진시켜 이 영국 항모부대를 공격하였다.

10:35 나구모 부대의 급강하 폭격기 떼가 험스를 덮쳤다. 급강하 폭격기들은 십 분 간이나 험스를 파상 공격했다. 험스로서 버틸 능력이 없었다.

0:50 험스는 기능을 잃고 정지하여 표류하기 시작했다. 5분 후 험스는 옆으로 전복하여 침몰하기 시작했다.

다음은 구축함 뱀파이어(HMAS Vampire)의 차례였다. 격렬한 폭격을 받은 뱀파이어는 10분간 버티다가 함체가 두 동강이가 나며 역시 침몰했다. 브리티쉬 서젠트와 홀리호크, 아텔스태이등도 모두 같은 격침의 운명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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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침되는 영국 항모 험스




금의환향한 나구모 함대



작전에서 나구모가 잃은 손실은 얼마 안 되는 함재기와 조종사들 뿐이었고 함대의 어느 함정도 손실당한 것이 있지 않았다.

제로 전투기4기, 99식 급강하 폭격기10기, 97식 수평폭격기2기 합계 16기뿐이었다. 이 기동함대가 1941년 12월 8일 진주만을 공격할 때 입었던 항공기 피해가 29기였슴에 비하면 경미한 숫자였다.

영 함대를 격파한 나구모는 함대를 몰고 일본 본토로의 귀환 길에 올랐다. 그의 기동함대는 작년 11월 26일 이래 항구에 정박하지 않고 쉬지 않고 태평양과 인도양을 누비며 작전을 했었다.

그의 기동함대는 지난 4개월 가까이 진주만 기습의 성공, 라바울 공격, 호주 포트 다윈 공격, 그리고 콜롬보와 트링코말리의 공격 등, 각 작전에서 눈부신 전과를 올렸다.

각 함들도 정비가 필요했었고 승조원들은 휴식이 필요 하였다. 손실된 함재기와 조종사들도 보충하여야 했다.

그리고 일본군 대본영은 인도양 작전이 끝난 뒤에 당분간은 특별하게 나구모의 기동함대에게 부여할 임무도 없었다. 나구모 부대는 문자 그대로 금의환향(錦衣還鄕)하였다.



뒤처리를 담당한 오자와 함대



한편 나구모의 기동함대보다 조금 뒤 나구모의 실론 섬 공격과 때를 같이해서 출동한 오자와 지사부로(小澤 治三郎)중장의 제 1 남견함대(第一南遣艦隊, 별명은 말라야 함대)는 나구모 함대를 원거리 측면을 엄호하는 일차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다음 목표는 인도의 동해안을 포격하고 벵골만에서 운행하는 상선들을 격침하는 것이었다. 즉 통상선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주임무였다.

오자와의 부대는 4. 1일 버마령메르구이 항을 떠나 출동하였다. 이 함대는 4월 2일부터 4월 4일까지 안다만 제도와 니코바 중간 해역을 초계하며 나구모 기동부대가 영국 해군력의 등뼈를 부러뜨리는 작전이 종료하기까지 대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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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자와 제독. 일본 해군 3대 추남으로 놀림을 받았으나 역사가들은 그를 가장 능력있던 일본 해군 제독들중 한 명으로 평가한다.


그의 함대는 세 개의 함대로 편성되어 있었다. 중앙대(中央隊)는 한 척의 중순양함, 한 척의 경순양함, 한 척의 경항모(류조)의 구성이었다.

여기에 두 척의 구축함이 배속되어 있었다. 남방대(南方隊)는 두 척의 중순양함과 한 척의 구축함이 있었다.

북방대(北方隊)도 두 척의 중순양함과 한 척의 구축함이었다. 함대에 독립해서 운행되는 지원함대가 있었다. 두 척의 구축함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오자와의 주력함대와 달리 또 다른 보조 함대가 있었다. 탐색이 주요 기능이었다. 탐색 함대는 경순양함 카시이와 기뢰 부설함 하쓰타케와 아홉 척의 구축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함대는 전위로서 움직이며 안다만 제도 북쪽의 통행 선박들을 탐색하는 역할을 하고 나구모 부대가 철수를 할 때 후위를 담당했다.

나구모의 실론 작전이 끝나자 오자와 함대는 3개 함대로 분할되어 북서쪽으로 침로를 잡았다. 북방대는 북부 캘커타 남부 200마일의 해안을 오르내리며 사냥감을 찾았다.

일본 해군의 인도양 내습이 있자 영국은 인도 동쪽 벵골 만과 실론 섬 사이의 선단 운행을 정지했는데도 운 없게 오자와 함대에게 걸려 격침당한 선박들이 많았다.

중앙대는 인도 해안도시 비자가파탐 항의 북부를 항해하며 선박 사냥을 했다. 격침된 일부 선박 중에는 항모 류조에서 출격한 함재기들에게 당한 것들도 있었다.

남방대는 코가나다 근해에서 역시 수색과 공격을 해댔다. 류조의 함재기중의 일부는 인도 대륙을 폭격하여 주민들을 공포에 떨게 하였다.

오자와의 함대도 소기의 목표를 달성하자 4월 6일 작전을 종료하고 싱가포르로 철수했다.

일본 오자와 함대가 인도양에 들어와 작전한 기간인 4월 4일부터 9일까지 영국 측에 끼친 피해는 막심한 것이었다.

영국이 집계한 영국 측의 피해는 화물선 23척에 총톤수는 32,404톤이었다. 결과 여러 달 동안 영국은 호위함대가 없는 화물선 운항을 중단하여 전쟁물자 조달에 큰 어려움을 겪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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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해군 항모 류조. 오자와 함대 소속으로 선박 사냥에 나섰다.




인도양 작전의 성과와 비판



일본 해군의 인도양 작전은 후에 전사가나 해군 전문가들로부터 불필요한 작전이었다는 비판을 자주 받아왔다.

그 비난에 앞장섰던 사람은 진주만 공격과 실론 공격에서 총 항공대장을 했던 후치다 미쓰오(淵田 美津雄) 중좌도 있었고 해군의 격침 에이스로 유명한 하라 다메이치(原 爲一)중좌도 있었다.

그냥 놔두어도 별 볼일 없었을 허약한 영국 함대를 사냥하느라 쓸데없는 전력을 낭비했다는 것이었다.

이들의 주장은 인도양으로 가는 대신 진주만에서 일격을 받고 비실거리며 회복을 하고 있던 최대의 적 미국 함대를 조기에 찾아내어 격멸했어야 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보면 인도양 작전 기간도 짧았었고 일본 해군의 피해는 적은 반면 영국 해군의 피해는 컸기 때문에 위의 비판이 너무 과장된 것이라는 지적도 할 수가 있다.

미국 함대가 일본 마음대로 조기 결전에 응했을 것 같지도 않다. 그리고 일본의 인도양 출동에는 물리칠 수 없었던 독일의 요구도 있었다.

이 비판은 당시에 사기가 한껏 올라 미 해군 함대 조기 박멸에 목소리를 높이던 젊은 해군 장교들의 분위기를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일본 해군의 인도양 원정은 이런 점을 제외하면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잠재적인 위협이었던 영국의 동양 함대는 인도양에서 동 아프리카로 쫓아 냈으며 일본군이 침공했었던 버마, 안다만 제도, 수마트라 등을 영국 해군의 가능한 공격 위협에서 벗어나게 했다.

나구모와 오자와 함대의 인도양 원정 승리는 태평양 전쟁 후 일본군이 각지에서 거둔 거침없는 승리에 덧붙여 일본군은 물론 일반국민들까지 무적 황군의 환상에 들끓게 만들었다.

일본의 여론은 더 많은 영토를 점령하여 일본의 국력을 최대한 확대하라고 떠들어댔다. 그러나 이 인도양 원정 때가 일본 해군의 화려한 정점이었다. 이 때부터 내리막이 시작된다.




김창원 | 전사연구가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시라큐스 경영대학원에서 MBA를 취득했다. 장교로 군 복무, 기갑부대 전차 소대장을 지냈다. ‘울프 독’이라는 필명으로 전사와 역사를 다룬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 국방부 정책·정보 블로그(N.A.R.A.)에 기고하고 있으며, 저서로 [공격 마케팅]이 있다


자료제공

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



발행2013.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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