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뮌헨 협정 - 11개월 동안의 평화, 그리고 또 다른 세계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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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78회 작성일 16-02-07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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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이 도전해 온다면 반드시 맞받아쳐야 한다는 사람들이 언제나 옳지는 않다. 겸허한 자세로 인내와 성실함으로 평화적 타협을 추진하는 사람들이 언제나 틀리지도 않는다. 아니, 대개의 경우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도덕적으로나, 현실적으로 더 나은 선택을 했다고 할 것이다. 인내와 꾸준한 선량함 덕분에 이제껏 피할 수 있었던 전쟁이 몇 번일까! 종교와 도덕은 개인끼리만이 아니라 국가와 국가 사이에서도 온화함과 겸허함을 종용하고 있다. (......) 그러나 국가의 안전, 동포의 생명과 자유가 걸린 문제에서, 최후의 수단을 쓰지 않으면 안 될 때가 오면, 그런 확신이 있을 때는, 무력을 사용하는 일을 피하면 안 된다. 그것은 정당하고 절실한 문제다. 싸우지 않을 수 없을 때는, 싸워야 한다.”


윈스턴 처칠은 그의 [제2차 세계대전 회고록]에서, 전쟁의 전주곡이 된 1938년의 체코슬로바키아 위기가 뮌헨 협정으로 일단락되는 내용을 쓰면서 이렇게 쓰디쓴 어조로 마감하고 있다. 당시 전 해군상이면서 야당 지도자였던 처칠은 뮌헨 협정 타결 소식에 “우리는 완전하고 절대적으로 패배했다.”고 부르짖었으나 그의 연설은 항의하는 청중의 야유에 묻혀버렸다. “이것은 끝이 아니다. 시작일 뿐이다!”는 그의 말에는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두 번째의 세계대전이 터진 다음, 처칠의 관점은 뮌헨 협정을 바라보는 정통의 관점이 된다. 대체 왜 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마음만 먹으면 나치 독일을 압도할 수 있는 입장에서도, 그처럼 “완전하고 절대적인 패배”를 자초했을까?



잘못 끼워진 베르사유의 단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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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5월, 베르사유 조약에 반대하며 의회 앞에서 벌어진 독일 군중의 시위. 베르사유 조약으로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고 국토의 일부와 해외 식민지를 빼앗겼으며 엄청난 병력 축소로 약소국으로 전락하게 된 독일 국민들은 분노와 배신감에 휩싸였다.



메테르니히의 빈 체제나 비스마르크의 베를린 체제가 불완전하나마 수십 년 이상 유럽에 평화를 유지했던 반면, 제1차 세계대전을 마무리하며 수립된 베르사유 체제는 불과 몇 년 만에 잘못 채워진 단추들이 말썽을 부렸다. 조금만 힘을 주면 그 단추들은 투두둑 뜯겨나가게 되어 있었다.

사상 최악의 인명과 재산 피해를 빚은 제1차 세계대전은 해결 과정에서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이 필요하다는 의식을 불러왔으며, 이에 주목받은 것이 우드로 윌슨(Thomas Woodrow Wilson, 1856~1924)의 ‘민족자결주의’와 ‘승리 없는 평화’ 개념이었다. 각 민족은 강제된 지배를 받을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국가를 선택해야 분쟁의 소지가 없어지며, 승리란 어느 한쪽의 패배를 의미하여 원한과 복수를 가져오기 때문에 모두가 대등한 입장에서 평화를 이루고 그 평화를 지키기 위해 협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많은 세계인들에게 새 시대의 복음처럼 들렸고, 사실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이에 수긍하여 항복을 결정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파리 강화회의의 막이 오르자 온통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국가들의 아귀다툼만 벌어졌다. 결국 오스트리아는 대부분의 국토를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유고슬라비아 등의 신생국에게 넘기고 왜소한 국가로 전락했으며, 독일도 국토의 14퍼센트를 잃고 해외 식민지를 몰수당할 뿐 아니라 막대한 배상금을 떠안고, 국가 방위도 어려울 만큼의 병력만을 간신히 보유할 수 있게 되었다.

패전국 국민들은 당연히 분노에 복받쳤다. ‘승리 없는 평화’라고? 그러면 어째서 근대 전쟁사를 통틀어 가장 가혹한 대가를 우리에게 강요한단 말인가? ‘민족자결주의’라고? 그러면 왜 어제까지만 해도 이웃해 살던 독일인들이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게 되었는가? 위임통치라는 이름으로 패전국의 식민지를 승전국들이 골고루 나눠 가졌는데, 그게 어디가 민족자결이고 승리 없는 평화란 말인가?

개인이라 해도 자신이 범한 잘못보다 훨씬 무거운 처벌을 받으면 죄책감보다 분노와 억울함에 사로잡히기 마련인데, 국가적 차원에서 이해할 수 없는 처분을 당한 패전국 국민은 전후 질서에서 조금의 정당성도 찾을 수가 없었다. 대공황이 초래한 최악의 경제난까지 겹쳐 독일과 오스트리아 국민의 마음을 흉흉하게 만드는 가운데, “복수를 해야 한다”, “베르사유 체제를 뒤엎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정치를 뒤흔들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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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11월, 히틀러가 베르사유 체제에 대한 불만을 이용하려 뮌헨에서 터뜨린 “맥주홀 소반란(Beer Hall Putsch)” 당시의 모습. 이때 그는 보기 좋게 실패하여 투옥되었으나, 15년 뒤에는 바로 이 뮌헨에서 화려한 성공을 거두게 된다. <출처: (cc) Das Bundesarchiv at en.wikipedia.org>



그런 ‘국민적 염원’을 풀어줄 정치 세력으로는 먼저 공산당이 꼽혔다. 사실 파리 강화회의가 시작되던 1919년 1월에 스파르타쿠스단이 베를린에서 무장투쟁에 나설 때만 해도, 프로이센 황실이 무너진 독일의 새로운 주인은 이 나라 출신인 카를 마르크스의 추종자들이 되지 않겠느냐는 시각이 상당했다. 하지만 독일이 당한 처분에만 반대한다기보다 제국주의와 자본주의 자체를 반대하며, 사회를 근본적으로 뒤엎으려 하는 공산당에게 일반인들은 섣불리 전폭적 지지를 보낼 수 없었다. 게다가 ‘독일 혁명이 실질적으로 독일을 소련의 위성국으로 만드는 결과가 된다면?’ 여기에 사색이 되어 독일의 공산화 가능성을 없애려 했던 국내외의 자본가와 영국, 프랑스, 미국 등 자본주의 국가들의 공작까지 작용하여, 독일인들의 한풀이를 책임질 권한은 모든 잘못을 공산당과 유대인에게 돌린 오스트리아 출신의 신출내기 정치인,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히틀러가 집권하자마자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에 나치당이 출범하고, “게르만 민족의 통일”을 외치는 소리가 베를린과 빈, 그리고 독일계가 주를 이루는 체코의 주데텐 지방에서 살기등등하게 울려 퍼지게 된 상황을 런던이나 파리에서는 ‘이해’했으며, 다분히 ‘다행’으로 여겼다. 베르사유에서 자신들이 벌인 일이 사실 심하긴 했으며, ‘게르만 통일’이 ‘프롤레타리아 단결’보다야 백배 나은 주장이었으니까.



히틀러의 ‘승산 없는 모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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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1월, 수상에 취임하여 관저에서 환호하는 군중에게 답례하고 있는 히틀러. 체코슬로바키아 위기는 사실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출처: (cc) Das Bundesarchiv at en.wikipedia.org>



그러므로 뮌헨 협정으로 일단 종료된 1938년의 ‘체코슬로바키아 위기’는 사실 1933년에 히틀러가 집권했을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아니, 어쩌면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일부를 떼내어 체코슬로바키아라는 나라를 만들었던 1918년부터일까? 지역적으로는 보헤미아, 모라비아, 루테니아와 슬로바키아를 하나로 묶고, 민족적으로는 체크인(Czech) 50퍼센트에 독일인 23퍼센트, 슬로바키아인 15퍼센트, 헝가리인 5퍼센트, 우크라이나인 5퍼센트, 폴란드인 1퍼센트로 이루어져 있던 이 나라는 ‘민족자결주의’가 무색한 구성물로, 독일의 중앙부를 칼처럼 겨눈 지리적 모양새에서 보듯 프랑스가 독일을 동쪽에서 압박하려는 의도에 따라 신생독립시킨 국가였다. 그리고 내내 프랑스와의 동맹에 근거해 존립해왔는데, 나중에는 이웃한 소련에도 우호적인 자세를 나타냈다.

체코의 독일계 주민은 나라 전체에 흩어져 살았으나 특히 독일과 접경한 주데텐 지방에 많았는데, 그곳 주민들은 따로 주민 투표를 시행하여 오스트리아에 편입되기로 결의했으나 프라하 정부에 의해 묵살될 만큼 처음부터 체코에 대한 귀속감이 적었다. 그러다가 히틀러가 집권하자 곧바로 콘라트 헨라인(Konrad Henlein)이라는 교사가 ‘주데텐 독일당’이라는 나치당을 결성한다. 히틀러는 1938년 2월에 “천만 이상의 게르만인이 우리와 국경을 접한 두 나라에 살고 있다 (......) 이들 동포를 보호하고 그들의 개인적ㆍ정치적ㆍ사상적인 기본적 자유를 확보해주는 것은 독일의 의무다” 라고 선언하기까지 대외 팽창 정책을 드러내지 않았으나, 이면에서는 1935년부터 헨라인에게 자금을 지원하고 비밀 지령을 내렸으며, 1937년에는 ‘녹색 작전’이라는 이름의 주데텐 점령 계획을 기안하도록 하며 착착 준비를 진행하고 있었다.

1938년 3월 12일에는 강압과 모략으로 오스트리아를 합병했으며, 이때 불안해하는 베를린 주재 체코 공사에게 “당신네 나라를 침공할 생각은 전혀 없다”고 안심시켰다. 프랑스 대통령도 체코 대사에게 안전보장을 약속했는데, 이는 불과 몇 달 만에 공염불이 될 예정이었다. 3월 말, 히틀러는 헨라인에게 “체코 정부가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할 조건을 요구하라”고 지시했다. 주데텐에서 갈등을 일으켜서, 그것을 빌미로 병력을 동원할 속셈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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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지령을 받고 반란을 일으킨 주데텐의 ‘주데텐 게르만 해방군. <출처: (cc) Das Bundesarchiv at en.wikipedia.org>



다음 달, 헨라인은 자치권을 달라고 요구함으로써 총통의 지시를 따랐는데, 의외로 독일 내부에서 문제가 생겼다. ‘녹색 작전’을 면밀히 검토한 군부가 “우리 전력으로는 체코를 침공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체코는 40개 사단의 병력을 갖고 있었고, 무장 수준도 유럽 최고였다. 그에 비해 독일은 최근 오스트리아를 합병하여 12개 사단을 추가했음에도 총 48개 사단으로, 결코 압도적인 우세라고 볼 수 없었다. 히틀러는 마지못해 ‘병력의 대부분(35개 사단)을 체코에 투입하고, 서부 국경은 13개 사단으로 막는다’와 ‘군사행동에 돌입하기 전에 외교전과 경제전(경제봉쇄 등)을 전개하여 최대한 유리한 상황을 조성한다’는 방침대로 ‘녹색 작전’을 다시 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부의 우려는 가시지 않았다. 13개 사단이랬자 그 중 8개 사단은 예비군이며, 동맹에 따라 프랑스가 병력을 동원한다면 단시간 내에 65개 사단이 독일 서부로 쇄도할 것이다. 게다가 영국이, 나아가 소련까지 참전한다면? 너무나 무모해 보이는 이 모험을 포기하도록 히틀러를 설득할 자신이 없었던 일부 군부 인사들(베크, 할더, 비츨레벤, 폰 클라이스트 등)은 대신 아예 히틀러를 제거해 버리자고 뜻을 모았으며, 영국과 은밀히 연락을 취하기 시작했다.



영국과 프랑스, 약자에게 굽실대다



그러나 영국, 그리고 프랑스의 반응은 독일의 음모자들의 기대에 한참 어긋났다. 그들은 “독일이 체코를 침공할 경우, 영국과 프랑스는 군사개입을 할 것이다”라는 언질을 받고 싶었으나, 겨우 야당 인사 처칠의 약속만 받아낼 수 있었다. 오히려, 두 나라는 은밀히 “주데텐 할양을 고려하라”고 체코 정부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물밑에서 이런 움직임이 벌어지고 있던 것을 알았는지 몰랐는지, 히틀러는 1938년 5월에 12개 사단을 체코 국경에 전진 배치시킴으로써 전 세계에 사태의 현실성을 주지시켰다. 동맹과 여러 차례 이루어진 공약에 따라, 히틀러가 체코를 침공하면 당연히 영국과 프랑스가 개입하리라고 각국의 일반인들은 믿었다. 그러면 소련도 참전하지 않을까? 어쩌면 폴란드와 헝가리도, 아니, 이탈리아까지? 그렇다면 이것은 세계대전이 다시 벌어진다는 말이 아닌가? 제1차 세계대전의 악몽이 아직도 눈앞에 선했던 유럽인들은 치를 떨었다. 주데텐이라는, 그때까지 거의 있는지도 몰랐던 지역이 삽시간에 전 세계에 암운을 드리우고 있었다.

이에 히틀러는 “주데텐을 침공할 의사가 없다”고 선언했으나, 뒤를 돌아서서는 군 참모부에게 “10월 1일까지 주데텐 점령을 완료하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춰라”고 지시했다. 긴장이 날로 고조되는 가운데, 8월에는 독일의 음모자들이 애가 닳아서 런던과 파리의 지원을 요청하고, 영국에서도 처칠 등 소수의 강경론자들이 영-프-소 동맹과 미국의 참여를 이뤄내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등 히틀러의 야욕을 분쇄하려는 노력이 한창 벌어지고 있었다.

상황이 일변한 것은 9월 초였다. 7일자 <런던타임스>에 “파멸적인 전쟁을 치르느니, 주데텐을 양보하는 일을 체코 정부는 고려해야 한다”는 사설이 실렸고, 체코의 베네시 대통령도 헨라인과 만나 주데텐의 자치권 부여와 주민 투표를 통한 귀속 결정 허용 등, 주데텐 독일당의 요구를 거의 모두 수용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그러나 히틀러는 이를 기뻐하기보다 불편해했다. 뼛속까지 이미지 정치인이었던 그는 원만한 타협으로 목표를 달성하기보다는 ‘완강한 적들의 기를 꺾고, 정복한 도시에 위풍당당하게 입성하는’ 모습을 연출하기를 갈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헨라인에게 뭐든 핑계를 대고 회담을 결렬시키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영국이 직접 손을 내밀어왔다. 체임벌린(Neville Arthur Chamberlain, 1869~1940) 수상이 주데텐 문제를 대화로 풀자며 히틀러와의 회담을 제의해온 것이다. 이는 히틀러 제거 계획을 거의 실행하기 직전이던 음모자들을 망연자실하게 만들었다. 그들에게는 ‘히틀러가 독일 국민을 자멸적 전쟁으로 몰고 있다’는 명분이 간절히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부탁에 그토록 묵묵부답이던 영국 수상이 히틀러를 만나러 불원천리하고 달려온다니? 그리하여 음모의 결행이 무기한 연기된 가운데, 9월 15일부터 9월 23일까지 체임벌린은 영불해협을 바쁘게 오가며 베르흐테스가르텐, 고데스베르크, 드레센에서 히틀러와 마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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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돌프 히틀러. 그에게 주데텐의 획득은 “시작의 끝”처럼 여겨졌지만, 사실은 “끝의 시작”과 같았다. <출처: (cc) Das Bundesarchiv at en.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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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9월 29일, 뮌헨에 도착한 영국 수상 체임벌린. <출처: (cc) Das Bundesarchiv at en.wikipedia.org>



히틀러는 자신이 침략자가 아니라 “민족자결주의에 따라 독일과 통일하고 싶어하는 동포들의 뜻을 따를 뿐”이라며 “한 사람의 체크인도 필요 없다”고 단언했다. 체임벌린이 정 그렇다면 주데텐을 양보하도록 체코 정부를 설득하겠다고 하고, 정말로 프랑스의 달라디에 수상과 함께 베네시를 반 설득 반 위협하여 주데텐 할양을 따내자(“그것은 곧 체코슬로바키아 전체의 소멸로 이어질 것이다”며 반대하던 베네시는 결국 뜻을 굽히고 사임했다), 히틀러는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그 사이에 체코가 동원령을 내리고, 히틀러의 사주에 따라 반란을 일으킨 헨라인 일당을 진압하고 헨라인을 독일로 쫓아버린 일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체코가 언제 뒤통수를 칠지 모르니 평화적인 할양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이런 적반하장식 주장에 체임벌린이 “그러면 기어코 전쟁을 하겠다는 것이냐”고 묻자, 히틀러는 “10월 1일까지 주데텐 거주 체크인을 전원 철수시킨다면 생각해보겠다”고 대답했다.

체임벌린이 히틀러의 요구안을 들고 런던에 돌아가자, 이번만은 영국 의회가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프랑스가 육군을 부분 동원, 영국이 해군을 동원하는 가운데 소련도 개입 의사를 천명했고, 유고슬라비아와 루마니아까지 나섰다. 히틀러는 외교전의 일환으로 헝가리와 폴란드에게 각각 자국계 주민이 많은 체코 영토를 요구하라고 부추겼었는데, 만일 그에 따라 헝가리가 체코를 침공한다면 이들 두 나라가 개입하겠다는 것이었다. 친독일적인 스웨덴도 히틀러에게 양보를 권고했고, 미국은 관계당사국 모두가 원탁회의를 열어 문제를 해결하자면서 사태의 원인은 히틀러에게 있다고 했다. 유럽 전체가 전운에 휩싸인 가운데, 베를린의 음모자들은 쿠데타의 세부 계획까지 마련해놓고 초읽기에 들어갔다. 바야흐로 히틀러 집권 이래 최대의 위기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먼저 고개를 숙인 쪽은 히틀러가 아닌 반대편이었다. 프랑스가 “문제가 되는 지역보다 더 넓은 지역을 할양하도록 하겠다”고 제안하고, 영국은 이탈리아의 무솔리니에게 거중조정(居中調停, 국제기구나 국가 또는 개인 등 제3자의 권고로 국제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일)을 부탁했던 것이다. 히틀러는 화답했다. “9월 29일, 뮌헨에서 만나 사태를 해결합시다.”



버림받은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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뮌헨 협정 후 체코슬로바키아의 분할-소멸. 1은 뮌헨 협정에 따라 독일에 할양(1938.9)된 지역이고, 2는 폴란드의 요구로 할양(1938.10)된 티셴 지구. 3은 헝가리의 요구로 할양(1938.11)된 지구이며 헝가리는 다시 루테니아 지구(4)를 병합했다(1939.3). 그리고 독일은 체코의 잔여 영토를 점령하여 보헤미아와 모라비아(5)는 자국 영토로 삼고 슬로바키아(6)는 위성국으로 삼았다(1939.3).



뮌헨 회담은 무솔리니가 들고 온 ‘중재안’(사실은 히틀러가 불러준 내용을 받아쓰기한 것이었다)을 한 두 가지 세부 사항만 빼고 수용하는 자리였다. 이상하게도 협정 직전까지 열세에 몰려 있던 쪽은 분명 히틀러였는데, 협정안은 히틀러에게 더 유리한 내용이었다.



· 체코는 본래 문제가 된 주데텐만이 아니라 그 땅을 포함한 북동부 일대의 땅에 대한 주권을 포기한다.


· 독일은 10월 1일에 주데텐으로 병력을 들여보내 10일에 점령을 완료한다(어차피 전쟁 없이 넘기는 것을, ‘정복’의 모양새를 기필코 연출하려던 히틀러의 고집 때문에 이 조항이 포함되었다).


· 주데텐 이외의 비(非) 독일계가 많은 땅의 최종 귀속은 주민 투표에 따른다(이는 끝내 지켜지지 않았다).


· 체코의 남은 영토에 대해서는 협정국들이 안전을 보장한다(이 역시 공염불이었다).


협정 과정에서 히틀러가 영국과 프랑스의 지도자들에게 양보한 유일한 사안은 “회담장에 체코 대표도 참석해야 하지 않느냐”는 주장을 반승낙한 것이었는데, 그나마 오후부터, 그것도 회담장이 아니라 그 옆방에서 기다리게 한다는 것이었다. 말 그대로 “기다리게”만! 베를린 주재 체코 공사인 보이텍과 프라하 외무부의 마사리크는 자기 나라의 운명을 결정하는 장소 옆에서 멍하니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눈이 빠지게 지켜보던 회담장 문은 다섯 시간이 지나서야 열렸다. 그렇지만 체코인들을 쳐다도 보지 않고 지나가는 히틀러와 무솔리니 뒤로 걸어 나오던 체임벌린은 어떻게 됐느냐는 다급한 질문에 하품을 하며 무반응이었고, 뒤따르던 달라디에는 퉁명스럽게 “바쁘니까 나중에 얘기하자”고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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뮌헨 협정 당시의 기념 사진. 왼쪽부터 영국 수상 체임벌린, 프랑스 수상 달라디에, 히틀러, 무솔리니, 이탈리아 외상 치아노. <출처: (cc) Das Bundesarchiv at en.wikipedia.org>



다음 날, 체코슬로바키아 수상이면서 임시 대통령을 맡고 있던 실로비는 대국민 연설에서 이렇게 외쳤다. “세계가 우리를 버렸습니다! 우리는 외톨이입니다.” 이것으로 체코는 280만 독일계 주데텐인과 80만의 체코인이 거주하는 국토의 육분의 일과 석탄 생산의 66퍼센트, 시멘트의 80퍼센트, 제철의 70퍼센트, 전력의 70퍼센트, 각종 산업 시설의 40퍼센트를 총 한 방 쏴보지 못하고 상실했다. 그리고 베네시의 예언대로, 그 뒤 반년도 지나지 않아 나라 전체가 히틀러의 손아귀로 들어가 버렸다(1939년 3월, 히틀러는 모라비아와 보헤미아를 병합하고, 슬로바키아는 위성국가로 만들었다). 체임벌린은 뮌헨에서 개선장군처럼 런던으로 돌아왔다. 환호하는 군중에게 그는 협정문을 흔들어 보이며, 이것이 “우리 시대의 평화”의 약속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 평화는 고작 11개월짜리였다.



누가 어리석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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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데텐 병합 뒤 망명 또는 추방의 길에 오른 체크 주민들. 그들은 집도 자동차도 남겨둔 채 ‘몸만 빠져나가야’ 했다.



대체 왜 영국과 프랑스는 마음만 먹으면 히틀러를 쓸어버릴 수 있는 상황에서 자존심을 깎고 신의를 어겨가며 뮌헨에서 “항복”했던 것일까. 모든 자료를 종합해 볼 때 당시 독일은 영, 프는커녕 체코조차 싸워 이길 능력이 없었다. 그 사실을 뻔히 알고 있던 독일 육군참모총장, 수도경비사령관, 수도경찰국장 등은 휘하의 병력을 언제라도 동원할 태세를 갖춰 놓고 영국과 프랑스의 언질 하나만 기다리고 있었다. 히틀러에 대한 압박을 조금만 강화했던들 히틀러는 실각하거나, 야욕을 포기했으리라.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도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으리라. 어째서 체임벌린과 달라디에는 그토록 멍청한 실수를 저지른 것일까?

그것이 실수가 아니라 신중한 계산의 결과였다는 주장은 먼저 당시 영국과 프랑스의 국민들이 극심한 전쟁 기피 성향을 갖고 있었다는 점을 든다. <런던타임스>에 주데텐을 할양하라고 체코를 윽박지르는 사설이 당당히 실리고, 뮌헨 협정의 결과가 당장에는 전폭적인 지지와 환영을 받았던 사실이 그 증거라는 것이다. 확실히 할 수만 있으면 전쟁을 피하자는 여론이 당시에 지배적이었던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독일도 마찬가지였다. 베르사유 체제에 대한 불만이야 가득하지만, 그렇다고 전쟁으로 그것을 무너뜨리자는 생각을 하기에는 1차대전의 상처가 너무도 쓰라렸던 것이다. 실제로, 뮌헨의 승리에 도취된 히틀러가 주데텐으로 병력을 진군시키며 일부러 베를린 시내를 통과하도록 했는데, 이것을 본 시민들은 환호는커녕 굳은 얼굴로 바라보거나 그 자리를 피하는 모습이어서 히틀러를 크게 실망시키기도 했다. 그런 전쟁 기피 심리에 기대 음모자들도 쿠데타를 모의했던 것이다.

다른 근거는 이 11개월의 평화 동안 영국과 프랑스가 전력을 재정비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사실 위기의 발발 직전인 1938년 3월에 영국 참모부가 내각에 제출한 보고서에 따르면, 영국은 독일과 전쟁을 벌이기에 충분한 전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전쟁이 발발하기까지 전력 증강에 진력한 결과 독일의 메서슈미트 기를 압도하는 스핏파이어 공군기가 배치되는 등 중대한 군사 혁신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 기간 동안 독일의 군비 증강은 영, 프의 증강 수준을 뛰어넘었다. 무엇보다 체코의 병합으로 40개 사단의 병력이 독일군에 추가되었을 뿐 아니라, 영국의 군수산업 시설과 맞먹는 생산량의 군수 시설이 히틀러에게 들어갔다. 그리고 원래 베르사유 조약의 제한 때문에 1938년 당시에도 영, 프에 훨씬 못 미치던 독일의 전력이었으나, 독일은 프랑스의 두 배가 넘는 인구에 전시체제에 따른 살인적인 공장 가동으로 11개월이면 그 격차를 충분히 따라잡고 남을 잠재력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전략적으로도 뮌헨 협정은 동유럽 국가들이 더 이상 영, 프의 눈치를 보지 않고 히틀러에게 추종하는 형세를 초래하여, 전처럼 독일을 양쪽에서 견제하는 일이 불가능하게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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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10월, 주데텐란트에 입성하는 히틀러. 이때까지만 해도 승승장구하던 그였지만, 뮌헨에서의 승리는 종말의 시작이기도 했다. <출처: (cc) Das Bundesarchiv at en.wikipedia.org>



그러면 결국 체임벌린과 달라디에는 ‘겁쟁이’에 ‘바보’일 뿐이었을까? 그렇지만은 않다. 처칠이 언급하지 않은 한 가지 요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공산주의의 위협’이라는 요소였다. 영국과 프랑스가 마음만 먹으면 히틀러를 저지할 뿐 아니라 독일을 점령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다음은? 히틀러와의 회담에 나서기 직전, 체임벌린은 독일과 싸워 이기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러면 독일이 공산화될 가능성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았나?” 히틀러는 윽박지른다고 꼬리를 말 인물은 아니었으며, 체코를 지키려면 불가불 독일군을 분쇄하고 베를린을 점령해야 했다. 그러면 무정부 상태가 된 독일의 질서는 누가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독일 내부의 음모를 후원하여 히틀러를 제거할까? 그러나 히틀러가 사라진 독일을 누가 이끌 것인가? 저 소심하고 근시안적인 음모꾼 나부랭이들이?

방법은 2차 대전 후처럼 독일을 분할하여 군정을 실시하는 것이었는데, 그때와는 달리 미국이 아직 고립주의를 고수하는 마당에 영국과 프랑스만으로 독일을 점령 통치하기란 힘에 겨운 일이었다. 그리고 분명히 소련이 끼어들 텐데, 그러면 독일의 상당 부분은 소련의 영향 아래 공산화되지 않겠는가? 2차 대전 후 실제로 그랬듯 말이다. 그러지 않더라도 혼란에 빠진 틈을 타 혁명이 벌어져 공산주의 독일이 출현할지도 모른다. 그것만은 영, 프의 수뇌들과 자본가들이 어떻게든 피하고 싶은 악몽이었다. 체코를 액막이용 제물로 던져줄망정! 결국 공산주의와 소련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히틀러의 정권 장악이 묵인되었으며, 그가 아직은 국제질서 유지에 필요하다는 판단이 뮌헨에서의 저자세를 가져왔다. 그리고 히틀러는 그런 속사정을 최대한 활용해 누워서 떡을 먹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히틀러의 종말의 시작이기도 했다. 뮌헨의 승리를 겉모양으로만 판단했던 그는 “우리 적들은 알고 보니 구더기 같은 것들이었어. 나는 뮌헨에서 그 사실을 알았지”라며 거들먹거리게 되었다. 그리고 체코의 나머지를, 다시 폴란드를 똑같은 공갈협박과 우격다짐으로 손에 넣으려고 했다. 하지만 1939년에는 영국과 프랑스의 분위기도 달라져 있었다. 그동안 전력도 증강했고, 히틀러에 대한 경계심도 키운 두 나라의 지도자들은 필요하면 소련과 임시로 손을 잡더라도 히틀러를 없애야겠다고 마음을 고쳐먹게 되었다. 그리하여 전쟁은 불가피해졌으며, 제3제국의 패망과 독일의 분단도 피치 못할 운명이 되고 말았다.

오늘날 뮌헨 협정은 ‘한치 앞도 못 내다본 유화정책의 비극’으로 곧잘 거론된다. 그리고 ‘불량국가와 타협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의 근거로 내세워진다. 하지만 히틀러가 뮌헨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등 뒤에 있던 소련의 그림자 때문이었다. 약간 다른 맥락이지만, 등 뒤를 받쳐 주던 소련이 사라진 다음 이라크가 어떻게 되었는지, 만약 지금 중국이 없다면 북한이 어떻게 되었을지를 생각하면 그때나 지금이나 국제정치의 셈법은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외교적 결정에 오판은 있을지 몰라도, 어리석음은 없다고 보아야 한다. 상황의 진실과 상대의 진의를 섣불리 판단하고 상대는 어리석을 따름이라고 보는 정책 결정자가 있다면, 곧 자신이야말로 어리석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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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규진 | 서울교육대학교 교수/역사저술가
글쓴이 함규진은 여러 방면의 지적 흐름에 관심이 많다. 정치학을 전공하여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주로 역사와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썼고, 인물이나 사상에 대한 번역서도 많이 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등 서로 대립되는 듯한 입장 사이에 길을 내고 함께 살아갈 집을 짓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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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도서
조약의 세계사 2014.12.22
고대부터 현대까지 64개의 조약으로 읽는 화해와 배신, 강압과 화합 그리고 진보의 역사.

‘지뢰는 과연 쓸모 있는 무기일까?’, ‘난징 조약은 불평등조약인가?’와 같은 흥미로운 물음을 던지며 세계사의 이면을 파고들어 역사와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을 넓힌다. 강화도 조약과 같이 우리 역사 속 조약부터 마스트리히트 조약처럼 생소한 조약, 고대의 히타이트-이집트 조약에서부터 현대에 체결된 리우환경협약까지 역사의 흐름을 바꾸고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계를 형성한 조약을 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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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2013.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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