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서부에서의 연승과 남부의 징집령 - 사기 오른 북부와 총력전에 돌입한 남부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댓글 0건 조회 535회 작성일 16-02-07 08:45

본문















14548023284646.png



켄터키를 장악하라!



매클렐런은 매우 신중하고 치밀한 성격이었고 아울러 ‘완벽한’ 준비에 지나치게 집착하였다. 그는 많은 시간을 들여 군을 훈련시키고 조직하는 데는 뛰어났지만, 빠른 판단을 요하는 전투에는 적합치 않았다.

매클렐런의 지나친 신중함은 그를 영웅으로 만든 리치마운틴의 전투에서도 드러났다. 그의 부관이었던 로즈크랜스(William Rosecrans)는 매클렐런이 예비대를 투입하기를 주저하였고 이 때문에 전투를 쓸데없이 오래 끌었다고 불평하였다.

매클렐런의 지나친 신중함은 포토맥군의 훈련이 끝나고 모든 ‘준비’가 완료된 후에 드러났다. 처음에는 침체에 빠져있던 북군을 되살린 매클렐런을 ‘리틀 나폴레옹’이라 하며 칭송하던 여론은 그가 이런저런 이유로 출동하기를 거부하자 ‘Tardy George(느려터진 조지)’라고 비꼬기 시작하였다.

심지어 기다리다 못한 링컨 대통령이 1862년 1월 27일에 남부에 대한 행정부의 ‘강력한 행동’을 승인하는 법안에 서명함으로써 실질적으로 매클렐런에게 진격 명령을 내렸을 때도, 매클렐런은 이를 거부하였다.

결국 기다리다 못한 링컨 대통령은 3월 8일에 매클렐런을 미합중국군 총사령관직에서 해임하고 그에게 포토맥군 사령관직을 맡겼다. 이 일로 인하여 매클렐런은 링컨에게 앙심을 품게 되었지만 당장 최고 통수권자를 어찌할 수는 없었다.

매클렐런이 늑장을 부리고 포토맥군이 워싱턴 근교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는 동안, 애팔래치아 산맥 서쪽 켄터키-테네시 지역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켄터키는 비록 노예주였지만 남부의 분리 독립에는 반대했던 주로서 남부의 독립 이후에도 미 연방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켄터키 내에서는 친남부 세력도 만만치 않았고, 만약 남부가 켄터키를 장악하게 되면 오하이오-인디애나-일리노이 등 오대호 지역에 대한 공략의 발판이 될 수도 있었다.





이미지 목록


1
14548023293140


2
14548023301118


3
14548023310686


캔자스 지역을 관할하고 있던 데이비드 헌터 소장.





미주리 지역을 관할하고 있던 헨리 할렉 소장.





오하이오 군관구를 맡았던 돈 카를로스 뷰엘 준장.




이 지역은 산지와 숲이 많은 관계로 교통과 연락, 그리고 물자 수송 등에 있어 강을 통한 수운(水運)이 필수적이었다. 고로 이 지역을 차지하려면 테네시강과 컴벌랜드강을 무조건 장악해야 했다.

문제는 이 지역의 군 지휘권이 헌터(David Hunter) 소장의 캔자스 군관구(Department of Kansas), 할렉(Henry W. Halleck) 소장의 미주리 군관구(Department of Missouri), 그리고 뷰엘(Don Carlos Buell) 준장의 오하이오 군관구(Department of Ohio)로 분산되어 있어 통일된 움직임을 기대하기가 힘들었다는 것이다.

아울러 켄터키와 테네시의 친 남부파들을 몰아내고 이를 워싱턴 정부의 관할하에 두는 것도 급선무였다.


그랜트, 헨리 요새를 공격하다



다행히 켄터키 지역은 연방군이 빨리 장악할 수 있었지만, 테네시와 미주리 지역을 완전히 굳힐 필요가 있었다. 1862년 1월 10일과 19일에 연방군은 미들-크릭과 밀스프링스의 소규모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비록 전투는 소규모였지만 테네시를 거쳐 남부 깊숙이 진격할 수 있는 컴벌랜드 통로(Cumberland Gap)을 장악했다는 점에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승리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컴벌랜드 통로를 장악하였음에도 할렉이나 뷰엘은 교통상의 어려움을 들어 테네시 쪽으로 진격하기를 꺼리고 있었다.

이에 답답함을 느낀 그랜트(Ulysses S. Grant) 준장은 자신의 상관에게 적극적인 공격이 필요하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였고, 결국 2월 1일 할렉은 그랜트에게 일단의 병력을 맡겨 테네시강 유역에 대한 공격에 나서도록 하였다.

서부 지역의 남부 방어선은 극히 취약하였다. 현재 아칸소주 경계에서 컴벌랜드 통로까지 약 1000km의 전선을 지키는 남부 병력은 전부 존스턴(Albert Sidney Johnston) 대장의 통일된 지휘하에 있었지만 병력은 고작 2만에 불과하였다.

폴크(Leonidas Polk) 소장 휘하에 12,000명이 켄터키주의 컬럼버스에 주둔하며 방어선의 좌익을 담당하고 있었다.

또 다른 4,000명이 버크너(Simon Bolivar Buckner) 준장 휘하에 중앙에 해당하는 켄터키의 보울링-그린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틸먼(Lloyd Tilghman) 준장 휘하의 4,000병력이 테네시강 유역의 헨리 요새(Fort Henry)와 컴벌랜드강의 도넬슨 요새(Fort Donelson)를 지키며 남군의 우익을 맡고 있었다.



14548023321588



북군의 헨리 요새와 도넬슨 요새 공격도.


그랜트의 목표는 헨리 요새였다. 그의 상관인 할렉도 매클렐런처럼 몸을 사리는 경향이 있었지만 라이벌인 뷰엘을 능가하는 전공을 기대하면서 그랜트의 요청을 수락한 것이다.

그러나 마침 공격이 시작할 때 즈음 대홍수가 발생하였고, 이 때문에 원래는 강변에 있는 헨리 요새의 바로 아래 부분까지 물이 차오르면서 요새의 낮은 부분에 위치한 포들이 모두 잠겨버렸다.

그랜트에게는 좋은 소식이었으나 이때 마침 동부 전선에서 좌천된 보우레가드가 남부의 대규모 지원 병력을 이끌고 서부로 향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면서 그랜트는 예정보다 일찍 공격을 시작하기로 하였다.



14548023334652



1862년 2월 6일, 7척의 함선이 헨리 요새에 포격을 가하고 있는 모습. 포격이 시작된 지 75분만에 요새는 점령당하였다.


1862년 2월 1일 일리노이주의 카이로(Cairo, Illinois)를 떠난 북군은 2월 4일에 헨리 요새 인근에 도착하였고, 같이 출발한 푸트(Andrew Foote) 해군 준장의 강상(江上) 함대와 함께 2월 5일 합동 공격에 나섰다.

그랜트 휘하의 병력은 헨리 요새의 수비 병력들이 탈출할 수 있는 동북쪽 통로를 막았고 뒤이어 함대가 요새 근처에 도착하였다.

헨리 요새를 맡고 있던 틸먼은 대포의 반수가 작동 불능이 된 상태에서 요새가 수륙 합동 공격에 견디지 못할 것이라 여기고 수비 병력 4천 중 2,500을 지름길을 통하여 약 10km떨어진 도넬슨 요새로 보냈다.

다음날인 2월 6일에는 푸트 휘하 7개의 함선(4척은 철갑선)으로 구성된 선단이 헨리 요새에 포격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포병의 반격으로 그중 1척이 대파되기는 하였지만, 요새 병력은 7척의 함선들이 퍼붓는 집중 포격을 견딜 수 없었고, 포격이 시작된 지 불과 75분 만에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도넬슨 요새에서의 전투





14548023344732



컴벌랜드 강을 향해 있는 도넬슨 요새의 대포.


헨리 요새를 함락시킨 북군은 곧바로 도넬슨 요새의 공격에 나섰다. 도넬슨 요새는 정식 요새라기 보다는 병력과 물자를 쌓아놓은 곳에 담장을 둘러친 주둔지였다.

다만 강이 보이는 쪽으로 대포를 설치하여 요새로서의 구색은 갖추었다. 2월 12일에 요새 인근에 도착한 그랜트 휘하의 북군 병력은 총 25,000이었고 요새 내의 남군 병력은 몇칠 전 헨리 요새에서 도착한 병력을 합쳐 약 16,000 정도였다.

2월 12일과 13일에는 양군이 서로 탐색전을 펼치는 데 그쳤고, 비가 내리며 궂은 날씨가 13일 밤에 맹추위로 바뀌면서 양군 모두 추위에 떨었다.

남군 지휘부는 강과 육지 모두 장악당한 상태에서 요새를 지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여기고 탈출을 계획하였다.

그리고 남군은 도넬슨 요새를 둘러싼 북군 중 우익을 담당한 멕클레르넨드(John A. McClernand) 준장의 부대를 집중 공격하기로 하였다.

2월 14일에는 푸트의 함대가 도착하였고 그랜트는 요새에 포격을 가하여 무력화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요새의 수비력을 과소평가한 푸트가 함선들을 너무 가까이 모는 바람에 요새 포의 사정거리 안에 들어가면서 함선 모두가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포병들의 초전 승리에도 아랑곳없이 함대가 없었고, 육지에서의 증원이 불가능한 남군의 상황은 여전히 암울하였다.

결국 15일에 남군은 북군 우익에 대한 총공격을 감행하였고 일단 혈로(血路)를 뚫는 데는 성공하였지만, 공격을 지휘하던 필로우(Gideon Pillow) 준장이 공격 부대의 대열이 크게 흐트러지고 병사들이 지쳤음을 이유로 들어 탈출을 다음날로 미루기로 하였다.

남군의 일선에서 맹렬히 싸운 버크너 준장은 당장 탈출할 것을 주장하였지만 이는 묵살되었다. 잠시 일선에서 떠나 있던 그랜트는 다시 전장을 돌아보고 즉시 탈출구를 막으라고 주문하였고, 포위망의 다른 지역에서 병력을 불러와 탈출구는 결국 닫히게 되었다.



14548023360137



도넬슨 요새 전투. 육로 및 함대 지원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남부군의 선택은 탈출이었다.


탄약이 떨어져가는 상황에서 탈출구까지 막히자 남군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자 남군의 현장 총지휘관이었던 플로이드(John B. Floyd) 준장은 항장(降將)이라는 오명을 남기기는 싫다며 지휘권을 필로우에게 넘기고 일단의 병력과 함께 전장을 이탈한다.

지휘권을 넘겨받은 정치군인 필로우 준장 역시 포로가 되기는 싫다며 호위병 몇몇과 함께 나룻배를 타고 탈출하였다. 결국 열심히 싸운 버크너만 남아 그랜트에게 항복하는 불명예를 안아야 했다.

자신이 키운 기병대를 이끌고 북군 병력을 열심히 견제하던 포레스트(Nathan B. Forrest) 중령은 지휘관들을 겁쟁이라고 욕하면서 휘하의 기병 700여 명과 함께 필사의 탈출을 감행하였다.

포레스트는 전력을 보전하여 무사히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만약 남군이 그대로 탈출을 했더라면 북군의 승리는 반쪽짜리 승리로 끝났을 것이다.



14548023371427



사이먼 볼리바르 버크먼 준장. 한때 그랜트를 도왔던 그였지만, 그의 바람과 달리 그랜트는 ‘무조건적인 항복’을 고집함으로써 남군의 자존심을 뭉갰다.


버크너는 그랜트에게 항복 서신을 보내면서 그랜트가 명예로운 항복을 허락할 것이라 기대하고 있었다.

그랜트와 버크너는 1850년대에 캘리포니아에서 함께 근무한 적이 있었는데, 그랜트가 지나친 음주로 지위를 박탈당하고 캘리포니아를 떠나게 되었을 때 무일푼인 그에게 여비를 주면서 동부까지 갈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랜트는 버크너의 기대를 뭉개버리면서 무조건적인 항복 외에는 어떠한 조건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궁지에 몰린 버크너는 그랜트를 비신사적이라고 비꼬면서도 결국 자신의 휘하에 남은 병사들과 함께 북군에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서 그랜트는 ‘무조건 항복(Unconditional Surrender) 그랜트’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고, 남군은 13,000명이나 되는 병력이 북군의 포로가 되면서 큰 타격을 입었다.

남군은 전략적으로도 크나큰 타격을 입었다. 우선 컴벌랜드강과 테네시강이 뚫리면서 멀리 앨라배마와 미시시피 북부까지 북부의 수상 전력에 노출된 것이다.

실제로 헨리 요새 함락 이후 북군의 강상함대가 강을 따라 남군의 조선소를 부수고 배들을 불태우면서 앨라배마 북부의 플로렌스까지 시위를 하였다.

아울러 도넬슨 요새까지 함락되면서 북군의 대군단이 남군 주둔지인 켄터키주 컬럼버스와 남부에서 얼마 안되는 공업 도시인 내슈빌(Nashville) 사이의 공간을 장악하게 되었다.

여기에다 아직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뷰엘의 군대가 내슈빌을 위협하는 위치에 있었다. 이에 따라 남군은 내슈빌에서 철수함은 물론, 컬럼버스에서도 철수해야 했다.

이로써 북부와 남부의 중간 지대인 테네시와 켄터키가 북군의 수중으로 들어갔고, 이후 북군에 의한 남부 초토화의 시발점이 된다.


위기의 남부, 징집령을 내리다



서부에서의 승리로 북부의 사기는 크게 올랐고 북부 곳곳에서는 축포와 함께 승리의 종소리가 울렸다. 반면 불-런에서의 승리로 빠른 승전의 환상에 빠져 있던 남부의 여론은 이 전쟁이 힘든 전쟁이 될 것임을 인정하기 시작하였다.

남부의 신문들은 ‘어려운 시간’이 도래하였다며 총력전에 돌입할 것을 주문하였다. 그러나 남부가 총력전을 펼치기에는 장애 요소가 너무 많았다. 그중 가장 큰 것은 징집에 대한 반대였다.

남부 사회는 ‘민병(Militia)’의 전통이 강했으며 민병이 아니더라도 군은 스스로 자원해서 가는 곳이었지, 억지로 끌려가는 곳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남부가 전쟁을 수행하는 데 있어 가장 큰 명분은 워싱턴 정부의 독선과 독재를 벗어나 남부의 ‘자유’를 지킨다는 것이었다. 당시 싸우고 있던 지원병들도 1년 복무를 조건으로 군에 자원한 것이었다.

결국 총력전에 필요한 병력이 부족함을 느낀 남부 정부는 1년 병사들이 만약 복무를 연장하면 60일 휴가와 50달러의 급료를 주는 것과 동시에 새로운 부대를 선택할 수 있게 하고, 부대장을 직접 선출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러자 병사들이 기병이나 포병 등 상대적으로 죽을 위험이 적은 부대를 택하고, 엄격하고 유능한 지휘관보다는 친한 사람을 선출하는 부작용이 생겼다.

결국 3월 28일에 대통령 데이비스는 남부 의회에 징집령이 포함된 법안을 상정하였는데, 대다수의 의원들은 이 법안이 주(州)들의 ‘자유’를 침해한다며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다. 이러한 소란을 잠재운 것은 텍사스 출신의 위그폴(Louis Wigfall) 상원의원이었다.


“제발 이런 유치한 말다툼은 그만둡시다……우리의 적은 우리 연합(남부)의 주(州) 모두에 거점을 가지고 있습니다……버지니아는 그들에 의하여 에워싸여 있소……우리는 지금 큰 군대가 필요하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 병력을 어디에서 구하란 말입니까?……그 어느 누구도 국가의 안위에 반하는 권리를 가질 수 없습니다.”


(Let us cease this child's play… The enemy are in some portions of almost every State in the Confederacy. . . . Virginia is enveloped by them. We need a large army. How are you going to get it? . . . No man has any individual rights, which come into conflict with the welfare of the country)

1862년 4월 16일, 징집법안이 남부 의회를 통과하였다. 이 징집령으로 1861년에 325,000명이었던 남부의 총 병력은 45만으로 늘어났다.

물론 대리인을 세울 수도 있고, 일부 직업인들은 징집에서 제외시키는 예외 사항을 두는 바람에 돈 많은 부자들이 징집을 피하고 특정 직업인을 양성하기 위한 ‘학원’이 생기는 등 부작용이 있었지만, 이 징집령은 남부의 절박한 상황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일부 논자들은 남북 전쟁이 초기에는 남부가 유리하였다가 북부가 전세를 뒤집었다고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1861년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1865년 전쟁이 끝날 때까지 남부가 확실한 우위를 보였던 때는 없었으며, 남부는 시종일관 북부의 물량 공세에 시달려야 했다.


매클렐런, 진군을 시작하다



남부의 징집령의 뒷배경에는 남부의 수도 리치먼드를 향한 북부 포토맥군의 대공세가 있었다.

1862년 초 여전히 북군 총사령관이었던 매클렐런은 버지니아주 센터빌에 주둔하고 있던 존스턴의 남군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하는 바람에 피해를 두려워하여 움직이지 않았다.

아울러 남부 공략에 대한 작전을 놓고 링컨 대통령과 말다툼을 하면서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매클렐런은 북군의 압도적인 해상력을 이용하여 버지니아 반도 남단까지 병력을 옮긴 다음, 남쪽에서 리치먼드를 공략함과 동시에 워싱턴 근교에 주둔한 다른 병력이 남진하여 리치먼드를 남북에서 조이는 작전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링컨은 이에 반대하면서 센터빌에 주둔한 남군을 몰아낸 다음 병력의 우위를 이용하여 리치먼드를 육지에서 직공(直攻)할 것을 주문하였다.

혹시라도 워싱턴의 수비가 허술해져 남군이 공격해올 것을 걱정한 것이다. 매클렐런은 이미 워싱턴은 자신이 구축한 튼튼한 수비망의 보호하에 있다며 주장을 꺾지 않았다.

이에 링컨은 그래도 직업군인인 매클렐런이 자신보다는 작전에 대하여 잘 알 것이라 생각하며 3월초 매클렐런의 작전을 승인하였다.

그러나 매클렐런이 본격적으로 작전을 시작하기도 전에, 존스턴군은 이미 매클렐런이 상륙작전을 시도할 것을 눈치채고 3월 9일에 센터빌에서 남쪽 컬페퍼(Culpeper) 지역으로 병력을 옮겼다.

매클렐런이 그의 작전을 개시하기 전 존스턴군에 대한 견제 차원에서 센터빌 인근으로 진격하였을 때, 존스턴군은 이미 온데간데 없었으며 통나무를 검게 칠하여 대포로 위장하는 등 위장 진지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을 뿐이었다.

별로 강하지도 않은 적이었는데 미적거리느라 적군이 탈출할 수 있었다며 이 사건으로 인하여 매클렐런에 대한 비난 여론은 더욱 높아졌다.



14548023382759



존스턴의 남군이 센터빌에서 철수하면서 남긴 가짜 포대. 남군에게 속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매클렐런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기본적으로 여론에 민감한 매클렐런은 비난 여론을 의식한 듯 공격을 서둘렀다. 마침내 3월 17일, 12만 1500의 병력, 대포 44문, 수레 1150대, 그리고 말 1만 5천마리를 실은 대함대가 버지니아주 알렉산드리아를 출발한다.

그리고 같은 날에 버지니아 반도 남단의 먼로 요새(Fort Monroe)에 상륙하면서 이른바 버지니아 반도 캠페인(The Peninsular Campaign)이 시작된다.

설상가상으로 남부의 잭슨(Stonewall Jackson) 소장이 버지니아 서부 셰넌도어 지역에서 매우 효과적인 기동전을 펼치면서 매클렐런이 구상한 작전은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병력은 불과 17,000에 불과하였지만 잭슨은 탁월한 지휘력을 발휘하면서 셰넌도어 인근의 북군 병력에 수시로 기습을 가하였다. 비록 뱅크스(Nathaniel Banks) 소장이 이끄는 북군의 움직임을 잘못 판단하여 3월 23일에 컨스타운(Kernstown)에서 패하기는 하지만 링컨 대통령과 워싱턴 정부는 혹시라도 잭슨의 병력이 워싱턴을 공격할 우려가 있다고 생각하여 뱅크스의 2만 병력을 셰넌도어에 그대로 두는 것은 물론, 버지니아주 프레데릭스버그(Fredericksburg)에 있던 맥도웰(Irvin McDowell) 소장의 3만 병력까지 움직이지 말고 잭슨의 움직임에 대비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로서 매클렐런의 공격에 보조를 맞추기로 하였던 5만의 병력이 리치먼드 공략을 포기하고, 잭슨의 병력을 쫓게 된 것이다.

매클렐런은 작전이 무산될 수도 있다며 링컨의 조치에 크게 반발하였지만, 그래도 전력의 우위를 믿고 반도 남쪽에서 그대로 밀고 올라가기로 하였다.


‘전쟁의 안개’는 언제나 예측 불가능한 결과를 만든다



사전 준비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매클렐런은 모든 것이 계획된 대로만 된다면 자신이 이기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전쟁론]의 저자인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Carl von Clausewitz, 1780~1831)는 전쟁 중에는 지휘관들의 계획을 방해하는 ‘전쟁의 안개’가 생겨나게 마련이며, 이 때문에 계획이 원래대로 진행되지 않는 ‘마찰력’이란 것이 생긴다고 역설하였다.

즉 시시각각 상황이 바뀌는 전쟁터에서 모든 것이 원래 계획대로 진행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자신의 대군과 엄청난 물자를 바닷길로 옮기면서 매클렐런은 우세한 해상 전력으로 보급을 유지할 수 있다고 보았지만, 당장 해군은 난색을 표하였다.

남부 해군의 신무기인 철갑선 버지니아(CSN Virginia) 호와 남군 해군이 인근 해상에 있어 보급선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14548023396138



햄프턴로즈 전투에서 격돌하고 있는 남군 철갑선 버지니아 호(왼쪽)와 북군 철갑선 모니터 호(오른쪽).


버지니아 호는 원래 북군 해군의 메리맥(USS Merrimac) 호였는데, 남부가 분리 독립을 선언하던 1861년 4월에 지금의 노포크(Norfolk) 조선소를 맡고 있던 북군이 철수하면서 불태운 선박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메리맥 호는 완전히 불타지 않고 엔진은 온전한 채로 홀수선까지만 가라앉았다. 이를 남군이 건져올려 철갑선인 버지니아 호로 개조한 것이었다.

버지니아 호는 3월 8일에 제임스강(James River) 어귀에 있는 햄프턴로즈(Hampton Roads) 수로에서 북군 목제함선 2척을 격침시킨다.

이에 북군도 스웨덴 출신의 발명가인 에릭손(John Ericsson)이 만든 철갑선 모니터(USS Monitor) 호를 출동시켰고, 다음 날에는 세계 최초로 철갑 동력선 간의 함포전이 벌어졌다.

이 함포전은 무승부로 끝났다. 그러나 이 두 철갑선은 그해를 넘기지 못하고 버지니아 호는 강바닥에 좌초된 후 자폭(自爆), 모니터 호는 풍랑에 휩쓸리면서 운명을 다한다.

매클렐런은 보급선을 유지하는 것과 동시에 북군의 해상력으로 버지니아 반도에서 가장 큰 도시인 요크타운을 수륙 양면에서 공격하고자 하였으나, 해군의 비협조로 이를 포기해야만 하였다.

매클렐런은 1862년 4월 4일, 전군에 버지니아 반도를 거슬러 올라가라는 명령을 내린다.

참고문헌〈단행본〉


  • Iver Bernstein, [The New York City Draft Riots: Their Significance for American Society and Politics in the Age of the Civil War]
  • Benjamin Franklin Cooling, [Counterthrust: From the Peninsula to the Antietam]
  • John William Draper, [History of the American Civil War]
  • Joseph E. Johnston, [Narrative of Military Operations during the Civil War]
  • James M. MacPherson, [Battle Cry of Freedom: The Civil War Era]
  • Louis P. Masur, [The Civil War: A Concise History]
  • William T. Sherman, [Memoirs of General William T. Sherman]

 


 




참고문헌〈인터넷〉





김성남 | 안보·전쟁사 전문가
글쓴이 김성남은 전쟁이 인간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가지고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미국 UC 버클리 동양학과를 졸업한 후 연세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국제학 석사를 받고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에 진학하여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 [전쟁으로 보는 삼국지], [전쟁 세계사] 등이 있으며 공저로 [4세대 전쟁]이, 역서로 [원시전쟁: 평화로움으로 조작된 인간의 원초적인 역사]가 있다.


발행2013.10.15.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