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브레턴우즈 협정 - 전후 국제경제 질서를 설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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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56회 작성일 16-02-07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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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각국은 국제 금융거래의 문제에 대해 서로 조언을 구하고, 동의를 얻어야 한다. 세계의 번영에 해롭다고 의견이 일치된 행위는 불법화해야 한다. 그리고 단기 수지 불균형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이를 해결할 수 있게 서로가 서로를 도와야 한다.”
- 1944년 7월 21일, 브레턴우즈 협정 전문(前文) 중에서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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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제25대 대통령 윌리엄 매킨리의 대통령 선거 캠페인 포스터. 그는 금본위제와 보호무역을 바탕으로 산업자본에 유리한 정책을 전개하였다.



20세기로 접어들며 국제경제는 빠르게 성장했다. 아니, 거의 질주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까지의 50년 동안(1864~1914), 세계의 수출 규모는 5.5억 달러에서 198억 달러로 늘었다. 그것은 종전의 방식으로는 국제경제를 통제하기 힘들 정도의 급성장이었다. 그런 통제 불능성은 두 가지 얼굴을 가졌다. 하나는 개별 국가의 통제력을 넘어서는 국제적인 경제 흐름이며, 다른 하나는 그 와중에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려고 하는 개별 국가들의 정책 효과가 합쳐지면서 빚어지는 예상 밖의 파국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전까지 지배적인 경제 이론은 자유방임주의였으며, 금융 체제는 금본위제(金本位制)였다. 영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은 식민지에서 원료를 얻고, 제조한 상품을 주로 자기들끼리, 일부는 다시 식민지로 수출해서 부를 축적했다. 이때 무역의 기준은 금이었다. 각국의 화폐단위가 달랐으므로 보편적 기준이 없으면 누가 이익이고 손해인지 가늠할 수 없게 되는데, 그 기준 역할을 해준 것이 금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보다 옛날에는 그 금과 은을 전쟁, 약탈, 그리고 보호무역을 통해 최대한 자국에 많이 들여놓는 것이 국부를 늘리는 길이라 여겨지기도 했으나, 애덤 스미스(Adam Smith)와 데이비드 리카도(David Ricardo)가 ‘서로 다른 영역이 발달된 나라끼리 자유무역을 하는 편이 국부에 더 도움이 된다’는 자유무역 이론을 세우고, 데이비드 흄(David Hume)이 ‘무역 적자로 금이 유출되면 국내 금 유통량 감소에 비례해 물가가 떨어지게 되고, 따라서 수출이 유리해져서 국제수지가 회복된다’는 금본위제에 따른 자동수지균형론을 내세움으로써 정부는 경제의 흐름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입장이 대세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자유방임주의로는 해결이 되지 않을 만큼 그 규모가 커졌을 뿐 아니라 환투기, 노동운동, 사회복지에 따른 지출 등 종전에는 없었던 변수까지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국제경제는 점점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결정적으로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자유방임주의와 금본위제는 당분간 중지될 수밖에 없었다. 전쟁의 규모가 상상을 뛰어넘으면서 각국은 물자를 동원하고 생산을 계획하는 전시경제 체제로 들어갔으며, 전쟁 비용 부담이 눈덩이처럼 불어나자 더 이상 지불할 금 보유고가 없어 결국 금본위제를 중단하고 마구 화폐를 찍어내어 지불을 충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은 전쟁 종식과 함께 자연히 해소될 것이라 여겨졌고, 때문에 파리강화회의와 베르사유 조약에서 국제경제 문제에는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그 직후, 문제는 경제였음이 드러난다.

경제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보다 두 배의 부채를 진 채 인플레이션에 허덕이던 영국은 금본위제로 복귀하는 한편 물가 안정을 위해 파운드화의 가치를 높게 설정했다(1925년). 그러자 수출이 큰 타격을 입고 실업 사태가 일어났을 뿐 아니라, 예상 밖으로 물가도 떨어지지 않음으로써 심각한 스태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이렇게 되자 영국은 6년 만에 금본위제를 다시 포기했으며, 이는 연쇄반응을 일으켜 1930년대에는 거의 모든 주요 국가가 금본위제에 등을 돌렸다.

그리고 나서는 ‘너 죽고 나 살자’ 식의 각국의 경제정책이 전체 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저마다 자국 화폐를 미친 듯이 평가절하하고 자국 산업을 보호하는 무역 규제 조치에 혈안이 되다 보니, 생존에 필수적인 생필품마저 국경을 넘기 어렵게 됨으로써 결국 모든 국가의 경제와 민생이 곤란해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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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대공황기에 무료 급식을 받기 위해 줄을 서 있는 시카고의 실직자들.



‘너 죽고 나 살자’는 다른 식으로도 전개되었다. 패전국 독일에 강요된 배상금은 종전의 관례에 비해 가혹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그래서 주요 은행들을 중심으로 도스 안(1924년), 영 안(1929년) 등 독일의 부담을 줄여주는 수정안이 마련되기도 했으나, 유럽 각국은 전쟁 중에 미국에 진 막대한 부채를 갚을 길이 없다 보니 독일에 배상금 지불을 닦달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는 독일 경제의 재건을 더욱 어렵게 하고, 따라서 유럽 전체의 경기가 바닥을 기게 만들었다.

한편 미국은 1차 대전의 피해를 별로 보지 않은 데다 유럽에서 흘러드는 황금의 쓰나미(경쟁력 우위 덕분에 호황이던 수출 대금, 높은 이자율과 신용에 힘 입은 자본투자금, 부채 상환금)로 흥청망청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불러일으킨 과잉생산과 과잉 주식투자가 1929년 10월에 파탄을 일으켜 대공황을 초래함으로써, 국제경제는 엎친 데 덮친 꼴이 되어버렸다. 결국 그 극복 과정에서 히틀러가 집권하고, 또 한 차례의 세계대전까지 터지고 만다. 이제는 분명했다. 경제가 문제라는 것, 세계경제를 길들이기 위해 뭔가 국제적 협력 체제가 필요하다는 것.



브레턴우즈로 가는 길



그런 국제적 경제 협력 체제에 대한 구상은 이미 1920년부터 나타났다. 브뤼셀 경제회의에서 전후 원조용 국제은행 설립안이 처음 제기되고, 다시 1922년의 제노바 경제회의에서는 중앙은행 협력을 통한 국제금융 안정안이 제기되었다. 그리고 1930년의 제2차 헤이그 국제평화회의에서는 국제결제은행 창설이 논의되었다. 하지만 당시 국제경제의 대세였던 미국이 고립주의를 포기하지 않으며 유럽과의 공조를 외면하는 바람에, 결국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까지 그런 체제는 결실을 보지 못했다.

그리하여 1941년 8월 14일,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Franklin Delano Roosevelt)과 영국의 처칠 수상(Winston Leonard Spencer-Churchill)이 대서양 상의 영국 군함, 프린스오브웨일스 호에서 만나 전후 처리 방식을 놓고 회담을 가진 끝에 발표한 [대서양헌장]을 통해 전후에 자유무역주의를 되살리는 한편,국제경제 문제를 협력적으로 풀어나가자는 원칙이 처음으로 합의된다. 그 제4조에 “무역 장벽을 철폐한다”라고, 제5조에 “노동조건의 개선과 경제 발전, 사회보장을 확보하기 위하여 경제 분야에서 국제 협력을 도모한다”라고 명시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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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8월, 프린스오브웨일스 호 함상에서 회담 중인 루스벨트 대통령(왼쪽)과 처칠 수상(오른쪽).



이들은 곧바로 그 원칙을 실천에 옮길 구상을 마련하도록 자국 경제 관료들에게 지시했다. 미국에서는 통화 팀장 해리 덱스터 화이트(Harry Dexter White)가 재무장관 헨리 모겐소(Henry Morgenthau)의 지휘를 받으며, 영국에서는 당대 가장 유명한 경제학자였던 존 메이너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가 정부의 의뢰로 각각 계획안을 마련했다. 1943년 3월에는 케인스가 ‘국제청산동맹 설립에 관한 제안’을 발표했으며, 그 다음 달에는 화이트가 ‘연합국 국제안정기금안’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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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3월, IMF 이사회에서 만난 해리 덱스터 화이트(왼쪽)와 존 메이너드 케인스(오른쪽).



케인스의 안은 ‘국제청산동맹’이라는 일종의 세계은행을 창립하여 이 은행이 발행하는 ‘방코(bancor)’라는 국제 화폐로 유동성 부족을 겪고 있는 국가에 구제금융을 제공하자는 것이 골자였다. 이 은행은 영국이 49.8억, 미국이 40.4억 달러를 분담하는 것을 비롯하여 각국이 분담한 예치금을 기반으로 운영되는 것이었다. 또한 만약 어떤 나라가 심각한 적자에 직면에 경제 위기를 맞이하면 방코를 차입하는 한편 자국 화폐를 방코에 대해 절하하고 긴축정책을 펴며, 반대로 흑자국은 방코에 대해 절상하고 팽창정책을 펴도록 되어 있었다. 흑자국의 예치금이 일정 이상의 이자소득을 획득할 경우 몰수한다는 규정도 포함되었다. 그것은 국제 경제 위기 비용을 흑자국과 적자국이 고르게 분담하게끔 하려는 장치였으며, 한편으로는 지속적으로 예치금을 적립만 하고 사용은 하지 않을 것으로 보이는 미국이 국제경제를 좌지우지하지 않도록 노린 것이었다.

한편 화이트의 안은 ‘국제안정기금’이라는 금융 기구를 창립하여 ‘유니타스(unitas)’라는 국제 화폐를 발행하도록 한다는 점에서 케인스의 안과 비슷해 보였지만, 방코가 전혀 독자적인 화폐였던 데 비해 1 유니타스는 금 8.88671g, 달러로는 10달러에 해당된다고 설정되어 있었다. 말하자면 유니타스는 일정액의 달러나 일정량의 금 대신 통용되는 교환권과 같은 것이었다. 때문에 방코는 얼마를 찍어내느냐에 따라 독자적인 환율이 설정되고 그에 따라 국제금융을 조정할 능력이 있었지만, 유니타스는 그런 능력이 없었다. 또한 예치금 이자 몰수 제도 등이 없어서 지속적으로 흑자를 내는 국가들이 자본수출을 할 수가 있고, 국제 경제 위기의 대가는 구제금융을 받는 국가가 전적으로 부담하도록 되어 있었다. 화이트 안은 케인스 안에 비해 미국의 패권에 더 유리한 방안이었다.

두 가지 방안은 곧바로 상호 교환되어 절충에 들어갔다. 1943년 6월에 워싱턴에서 열린 19개국 경제회의에서는 프랑스와 캐나다가 독자 방안을 만들어 발표했으나, 왕년의 경제 패권국과 지금의 경제 패권국은 이를 무시하고 서로의 방안을 절충하는 데 힘을 쏟았다.

그리하여 9월 15일에서 10월 9일까지 영-미 대표가 9차례에 걸쳐 가진 워싱턴 회담에서 브레턴우즈 협정의 골자가 마련되는데, 결국 ‘떠오르는 태양’인 미국의 입장이 주로 관철되는 것으로 결판이 났다. 1944년 5월 25일(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이루어지기 11일 전이었다), 코델 헐 미국 국무장관은 44개 동맹국에 ‘연합국통화금융회의’에 참석해 달라는 초청장을 발송했다. 일자는 7월 1일, 장소는 미국 뉴햄프셔 주의 브레턴우즈.

그리고 회의 개최를 앞둔 6월, 애틀랜틱시티의 클라리지 호텔에서 ‘사전협의기초회의’가 열렸다. 미ㆍ영ㆍ중ㆍ소를 비롯 프랑스해방위원회ㆍ벨기에ㆍ인도ㆍ멕시코ㆍ브라질ㆍ필리핀 등 16개국이 참여한 이 회의에서는 새로 창립할 국제 금융 기구 기금의 분담액을 정하는 일이 중요했는데, 미국이 29억 달러를, 영국은 그 절반을 분담함으로써 총 100억 달러의 분담액에서 미국이 최고 비중을 차지하는 것으로 결론 났다. 분담액이 많을수록 해당 금융 기구에 대한 지배력이 커지기 때문에 영국 등은 자국의 비중을 늘리려 애썼지만, 미국의 정치ㆍ경제적 실력과 전후의 막대한 복구 자금 필요성 때문에 미국의 뜻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미소 속의 암투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6월 중순에 퀸메리 호를 타고 대서양을 건넜다. 영국 대표단의 좌장이던 그는 무려 13회나 선상 회의를 열어 브레턴우즈에 임하는 영국의 입장을 점검했으며, 브레턴우즈의 마운트워싱턴 호텔에 도착해서는 43개국에서 온 수백 명 대표단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조국인 영국뿐 아니라 미국이나 캐나다, 그밖의 여러 재무 관료들에게도 그는 영웅이었다. ‘보이는 손(공공권력)이 존재하는 자유경제’야말로 국내와 국제경제 모두를 재앙에서 구하는 해법이라는 그의 경제 이론에 두루 공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막상 회담이 시작되자, 화기애애한 분위기와 따스한 미소는 냉정한 눈빛과 날선 공방전에 자리를 내주었다. 회의는 3개의 위원회로 나뉘어 진행되었으며, 케인스는 그중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의 설립을 주 의제로 하는 제2위원회의 의장이 되었다. 한편 화이트는 국제통화기금(IMF)의 설립을 목적으로 하는 제1위원회를 주재했고, 기타 문제를 다루는 제3위원회는 멕시코의 수아레스가 주재했다. 저개발국에 발전 자금을 융자하는 것을 주 목적으로 하는 IBRD보다는 국제금융의 유동성을 조절하고 국제경제 문제를 해결하는 기능의 IMF가 더 중대한 기구였는데, 케인스가 제1위원회 주재 역을 맡지 못했다는 것은 바로 브레턴우즈가 미국 중심의 판임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실제로 화이트는 자신이 맡은 위원회뿐 아니라 회담 전체를 총괄했으며, 대표단의 투숙과 녹취록 배포 따위의 시시콜콜한 문제까지 일일이 결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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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브레턴우즈 협정 체결을 위한 회담의 개막 연설을 하고 있는 헨리 모겐소 미 재무장관.



하지만 어디까지나 국제회의를 거치는 협정이었던만치, 미국이 모든 일을 마음대로 할 수는 없었다. 의견 대립이 생길 때마다 미국은 주로 남미 국가들의 응원에 힘입었고, 영국은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등 영연방 국가들과 네덜란드, 그리스 등의 지지에 기댔다.

국제결제은행(BIS)의 청산 문제는 미국과 영국이 첨예하게 대립한 문제들 가운데 하나였다. 제1차 세계대전 후 독일의 배상금 지불을 처리하기 위해 만들어진 BIS는 나치가 선임한 이사 두 명을 이사진에 두고 있었으며, 2차대전 중에 나치가 점령한 국가에서 약탈한 ‘장물’을 빼돌리는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나치를 도왔다는 의혹을 받고 있었다. 이를 폐지하고 기금을 일체 처분해야 한다는 노르웨이의 제안을 미국이 적극 지지한 반면, BIS에 상당한 지분을 갖고 있던 영국은 한사코 반대하면서 논쟁이 그칠 줄을 몰랐다. 결국 영국의 동의 없이 미국이 독자적으로 청산을 결의해 버렸으나, 영국이 끝내 불복했기 때문에 실제 청산은 4년이 지난 1948년에야 겨우 이루어졌다.

반면 국제무역기구(ITO)의 창립은 미국의 난색에도 불구하고 최종 협정안에 포함되었으나, 미국 상원에서 부결되면서 결국 실현되지 못하다가 1995년의 우루과이라운드 협정에서 세계무역기구(WTO)로 되살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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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햄프셔 주 브레턴우즈의 마운트워싱턴 호텔. 브레턴우즈 협정이 맺어진 곳이다. <출처: (cc) rickpilot_2000 at en.wikipedia.org>



1944년 7월 1일에 시작된 협상은 7월 22일에 마무리되었고, 그날 체결이 이루어졌다. 방대한 협정 조항의 핵심은 다음과 같았다.



· 국제통화기금(IMF)과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을 창설한다.

· 금 1온스를 35달러로 고정시키고, 그 외 다른 나라의 통화는 달러에 고정한다.

· 고정환율제도를 실시하되 회원국은 상하 1%의 범위에서 환율을 바꿀 수 있으며, 국제수지의 근본적인 불균형이 있는 경우에 한해 예외적으로 IMF의 승인 하에 상하 10% 내외의 변동을 허용받을 수 있다.




모순 위에 세워진 번영



협정은 방코도 유니타스도 집어치우고, 금에 일정 환율로 고정된 달러를 기축통화로 삼는 ‘금환본위제(金換本位制)’를 수립했다. 이제 달러는 금과 마찬가지가 되었고, 그것은 원하는 대로 달러를 금과 교환해준다는 의미였다. 당시 미국이 세계 산업 생산량의 절반을 감당하고 세계 금 보유고의 삼분의 이를 확보할 만큼 실로 전무후무한 경제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체제였다.

미 재무장관 헨리 모겐소는 브레턴우즈 협정을 마무리 지으며 고별사에서 “IMF와 IBRD의 창설로 ‘일국경제주의(economic nationalism)’는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라고 언급했다. IMF는 가입국의 요청에 따라 기금에서 필요한 통화를 대출하여 유동성 부족 사태를 해소하며, 그 대출 한도는 1952년의 대기성차관협정에 따라 사전에 제한된 범위에 따랐다. 그러나 점점 국제경제 불균형이 잦아지자 1970년부터는 특별인출권(SDR)이 신설되었는데, 그것은 IMF에게서 ‘무담보 대출’을 얻을 수 있는 권한을 가입국에 부여했다. 그리고 1986년부터는 제3세계 국가들의 편의를 봐주는 특별 대출 제도가 생겼다. 그것은 본래 IBRD의 영역이었으며, 이후 설치된 국제개발협회(IDA), 국제금융공사(IFC), 다국간 투자보장기구(MIGA)와 합쳐 ‘세계은행(World Bank)’으로 불리게 되는 IBRD는 ‘은행’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예금은 취급하지 않으며, 회원국이 낸 기탁금과 투자 이득으로 저개발국을 원조하는 부흥 기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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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의 세계은행 본부. <출처: (cc) Shiny Things at en.wikipedia.org>



이처럼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직전에 체결된 브레턴우즈 협정에 따른 ‘브레턴우즈 체제’는 자유무역 원칙의 재확인, 미국의 경제 패권 확립, 국제경제에 집단적 조절 기능 추가라는 성격을 갖고 있었다. 그것이 완전한 자유방임주의가 아니라는 점에서 처음에는 공화당과 미국의 대형 은행들 중심으로 비준 반대론이 일기도 했다(그들은 그들의 멘토로 자유주의 경제학의 사도, 하이에크(Friedrich Hayek)를 내세우려 했으나, 하이에크가 “아쉬운 부분도 있지만 대체로 자유주의 원칙이 관철되었다”고 브레턴우즈 지지 입장을 밝히자 머쓱해졌다).

한편 그것이 실질적으로 미국의 패권을 수립한다는 점에서(달러의 기축통화 등극으로만이 아니라, IMF와 IBRD의 ‘대주주’로 미국이 자리잡음으로써도),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권 국가들은 비준을 거부했다(소련과 은밀히 내통하고 있던 화이트는 따라서 많이 당황했다). 브레턴우즈 체제는 1947년, 미국 등 23개국이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관세 및 무역에 대한 일반협정(GATT)을 맺고 자유주의 원칙을 더욱 강화함으로써 완성되었다.

그러나 그 체제의 성격이 오늘날까지도 국제경제의 기본 성격에 반영되고는 있지만, ‘순수한’ 브레턴우즈 체제는 20여 년 만에 붕괴해 버렸다. 그것은 그 체제가 처음부터 불안한 기초 위에 서 있었기 때문, 즉 미국의 막강한 경제력을 전제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브레턴우즈 협정에 따라 달러와 금이 똑같게 된 미국은 언뜻 보기에는 도깨비 방망이를 손에 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달러를 찍어내기만 하면 금을 얼마든지 확보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금의 가격은 1달러당 35온스로 고정되어 있었고, 따라서 달러를 마구 찍어냈다가는 금에 대한 달러의 실질 가치가 명목 가치보다 낮아져서 경제 위기가 초래될 수 있었다. 더구나 국제시장에서 금이 귀해져 금의 실질 가치가 올라간다면, 미국은 자국의 금을 방출하여 수지를 맞추어야 했다. 이는 미국이 막강한 자금력을 갖추고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1950년대까지는 미국의 산업 역량이 다른 나라들을 훨씬 초월했으므로 그럭저럭 가능했다. 하지만 그것 자체도 문제가 있었다. 미국이 계속 무역 흑자를 내면 해외에 달러가 부족해져 국제 유동성 위기가 초래된다. 그렇다고 계속 적자를 내면? 이번에는 해외 보유 달러 총액이 미국의 금 보유고를 초월해 버려서, ‘달러를 얼마든지 금으로 바꿔줄 수 있다’는 브레턴우즈 체제의 존립 근거가 무너진다. 이처럼 체제가 근본적으로 모순을 품고 있었을 뿐더러, 1960년대 이후 미국이 베트남전쟁과 복지사업 증대로 재정지출을 크게 늘린 데다 유럽과 일본 등의 경제가 살아나면서 더 이상 미국의 상품이 세계를 압도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리하여 갈수록 미국의 금 보유고가 위태로워지자, 주요국들은 되도록 금의 태환을 자제하고, 금풀(pool) 제도를 마련해 국제 금 가격이 오르면 미국뿐 아니라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네덜란드, 스위스, 벨기에까지 함께 자국의 금을 내다 팔아 가격 안정을 도왔다. 또 이중금시장제도를 도입, 민간 거래에서는 1달러당 35온스 이외의 가격으로도 금을 거래할 수 있도록 하는 등 갖은 방법을 다 써 봤지만 대세는 거스를 수 없었다. 결국 1971년 8월 15일,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달러와 금의 태환을 정지한다”고 선언했다. 브레턴우즈의 종말이었다.



미해결의 문제를 끌어안고



이후 한동안의 전환기를 거친 다음 국제시장의 고정환율제는 붕괴되어 변동환율제로 바뀌고, 금은 최종적으로 국제 화폐로서의 기능에서 해방되어 신용화폐만 남게 되었다. 그래도 달러는 그대로 기축통화였다. 브레턴우즈 이후 이십여 년 동안 달러가 쓰이면서 각국이 애써 관리해온 달러 보유고를 갑자기 외면하기도 그런데다, IMF 등의 국제금융기구를 미국이 장악하고 있고, 그래도 아직 최대 경제 대국인 미국이 자국 화폐를 조절하여 국제경제 변동에 대처하는 쪽이 보다 규모가 작은 경제 주체의 화폐 조절보다 믿을 만하기 때문이었다. IMF의 SDR을 기축통화로 삼자거나 유로화로 대신하자는 주장도 없지 않았으나, 아직까지 달러 체제를 유지하는 쪽이 더 편하다는 입장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덕분에 미국은 이제는 금 가치를 고민할 필요도 없이, 막대한 적자를 달러를 찍어내는 조치로 대처해 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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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국 화폐의 지불준비금(외환보유액) 규모. 달러가 전체의 약 60퍼센트 선을 넘나드는 가운데 유로화가 20퍼센트 남짓, 파운드화, 엔화, 기타가 나머지를 차지하고 있다. 독일의 마르크와 프랑스의 프랑은 1999년부터 유로화로 대체되었다.



한편 브레턴우즈 체제를 미국을 중심으로, 서유럽과 일본을 그에 종속된 부중심(副中心)으로 하는 세계경제 체제로 이해하는 시각도 있다. 미국은 계속 적자를 감수하며 달러 유동성을 공급하고, 덕분에 자체 외환 관리를 할 필요가 없는 서유럽과 일본은 달러를 지불준비금으로 흡수하여 미국의 적자를 완충해 줌으로써 3자가 상호 공생하는 방식으로 국제금융 질서를 유지했다는 것이다. 이런 체제는 2000년대 들어 미국과 유럽, 중국 사이에 재현되었다고도 한다. 이 ‘신(新) 브레턴우즈 체제’에서 미국은 전처럼 달러 유동성을 공급하고, 미국의 적자는 유럽의 자본 투자와 중국의 달러 매입으로 완충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축통화로서의 달러 전성시대도, 신 브레턴우즈도 전망이 밝지만은 않다는 게 중론이다. 아무튼 미국의 적자 규모가 끝이 보이지 않으며, 경제 규모상 미국을 넘볼 수준이 될 중국이나 유럽이 계속해서 달러에 목을 매지 않고 위안이나 유로를 대신 내세울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뚜렷한 대안 체제가 확실하지 않으며, 미국 경제나 달러의 지위가 급격히 하락할 경우 상상을 초월하는 경제난이 오리라는 견해 역시 중론을 이루고 있다.

20세기 초, 세계는 어찌어찌하다 보니, 미처 준비도 없는 상태에서 경제적으로 하나가 되었다. 그 가운데 누가 이익을 보고 누구에게 손해를 미룰 것인가? ‘보이는 손’의 구원을 바랄 것인가, ‘보이지 않는 손’의 영험함에 기댈 것인가? 이런 문제에 대한 견해 차이가 종종 경제난을 부르고, 전쟁과 혁명까지 일으켜왔다. 오늘날에도 근본적인 문제는 누구도 선뜻 손대지 못하는 가운데, 우리는 언제 또 치명적인 경제난이 올지 모르는 상태의 번영을 향수하며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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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규진 | 서울교육대학교 교수/역사저술가
글쓴이 함규진은 여러 방면의 지적 흐름에 관심이 많다. 정치학을 전공하여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주로 역사와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썼고, 인물이나 사상에 대한 번역서도 많이 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등 서로 대립되는 듯한 입장 사이에 길을 내고 함께 살아갈 집을 짓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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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도서
조약의 세계사 2014.12.22
고대부터 현대까지 64개의 조약으로 읽는 화해와 배신, 강압과 화합 그리고 진보의 역사.

‘지뢰는 과연 쓸모 있는 무기일까?’, ‘난징 조약은 불평등조약인가?’와 같은 흥미로운 물음을 던지며 세계사의 이면을 파고들어 역사와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을 넓힌다. 강화도 조약과 같이 우리 역사 속 조약부터 마스트리히트 조약처럼 생소한 조약, 고대의 히타이트-이집트 조약에서부터 현대에 체결된 리우환경협약까지 역사의 흐름을 바꾸고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계를 형성한 조약을 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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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2013.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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