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북군의 리치먼드 공략과 남부의 위기 - 뉴올리언스를 되찾은 북군, 리치먼드를 향하여 북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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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92회 작성일 16-02-07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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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되는 남군의 패배



1862년 4월 4일, 버지니아 반도 남부에서 북쪽으로 진격을 시작한 매클렐런은 남군이 요크타운에 그대로 있을 것이고, 이를 포위하여 함락시키면 반도에서 남군의 기세를 크게 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1862년 전반부만 놓고 보자면 남부에게 상황이 좋지 않았다. 약간 과장해서 말하자면 남부는 상당한 궁지에 몰려 있었다.

일단 수도 리치먼드 뒤쪽으로는 적의 12만 대군이 상륙하여 진격해오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리치먼드 앞쪽에는 추가로 5만의 적병이 수도를 노리고 있었다.

아울러 헨리 요새와 도넬슨 요새에서의 패배로 켄터키와 테네시가 북부에 넘어갔다.

경계주인 미주리에서는 프라이스(Sterling Price)가 이끄는 친(親) 남부 주방위군이 북군을 몰아내는 듯 하였으나, 1861년 10월 프레드릭타운(Fredericktown) 전투를 고비로 전세가 뒤집혀 남군은 미주리주에서도 밀려나기에 이르렀다.

남군의 밴도른(Earl Van Dorn) 소장이 16,000의 병력을 동원하여 미주리를 재차 점령하고자 하였으나, 1862년 3월 6일에서 8일까지 벌어진 피리지(Pea Ridge) 전투에서 북군 커티스(Samuel Curtis) 준장의 1만 병력에 대패하면서 결국 미주리를 북군에게 온전히 내주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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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리지의 전투(Battle of Pea Ridge). 이 전투의 결과 미주리(Missouri) 주가 온전히 북부의 영토가 되었다.


미주리 이후에도 남군의 패배는 계속되었다. 텍사스의 엘파소에서 출발하여 뉴멕시코와 콜로라도까지 점령하려고 했던 일단의 남군은 3월 26일에서 28일에 현재 산타페 인근의 글로리에타 고개(Glorieta Pass)에서 북군 기습대에 보급 부대가 당하는 바람에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고 물러나와야 했다.

이후 북부 편에 있었던 캘리포니아에서 증원 병력이 도착하면서 남군은 애리조나와 뉴멕시코에서 물러나고 텍사스를 지키기에도 급급한 상황이 되었다.

전황은 남부에게 계속 좋지 않은 쪽으로 흘러갔고, 1862년 4월에는 남군에게 더욱 더 큰 패배가 기다리고 있었다.


남군, 방심한 북군을 공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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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일로 전투에서 북군을 지휘한 율리시스 그랜트. 서부에서의 북군의 승리를 주도하였고 이후 북군 총사령관직에 오른다. 남북전쟁에서 수많은 공적을 세우고 결국 북부에게 승리를 안긴 그는 후에 18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헨리 요새와 도넬슨 요새를 빼앗기고 켄터키와 테네시에서 밀려난 남군으로서는 서부에서의 전세를 만회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헨리와 도넬슨 요새를 함락시켜 테네시강 유역을 완전히 장악한 그랜트의 군대는 테네시와 미시시피주의 경계 지역인 피츠버그 랜딩(Pittsburg Landing)까지 밀고 들어온 상태였다.

여세를 몰아 미합중국 국방부는 그랜트의 상관인 할렉이 맡고 있던 미주리 군관구를 확장하여 미시시피 군관구(Department of Mississippi)를 새로 만들고, 이곳의 사령관이 된 할렉 소장은 테네시주 내쉬빌에 주둔하고 있던 뷰엘 소장의 오하이오 군(Army of Ohio)에게 피츠버그 랜딩으로 이동하여 그랜트와 합세할 것을 명령하였다.

그랜트의 테네시 군(Army of Tennessee)과 뷰엘의 오하이오 군이 합칠 경우 북군은 7만 5천의 병력으로 남부에 대한 본격적인 진공을 시작할 수 있었다.

따라서 남군의 목표는 테네시 군과 오하이오 군이 합쳐지는 것을 막고, 더 나아가 이들을 각개격파한 다음 테네시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남군 사령관인 존스턴(Albert Sydney Johnston) 대장과 불-런 전투 이후 좌천되어 서부로 파견된 보우레가드 소장은 4월 4일과 5일 이틀에 걸쳐 피츠버그 랜딩의 북군 주둔지 인근까지 남군 병력 4만 5천명을 이동시켰다.

테네시를 잃어버린 후로 남부 언론의 혹독한 비판에 시달리고 있었던 존스턴 대장으로서는 승리가 절실하였다.

그러나 피츠버그 랜딩에 동원된 남군 병력은 전투를 겪어보지 않은 신병들이 대부분이었고, 일선 장교들 역시 미숙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울러 이동하는 동안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데다 산과 계곡, 그리고 강이 뒤엉킨 복잡한 지형은 이동을 더욱 어렵게 하였다.

부대들은 길을 잃고 헤매기 일쑤였고 이 때문에 원래 4월 4일에 예정된 공격을 뒤로 미루어야 했다.

일부 병사들은 혹시라도 화약이 비에 젖어 총이 발사되지 않을 것을 우려하여 이동 중에 시험 사격을 하곤 하였는데, 보우레가드는 남군의 이동을 그랜트 군이 알게 되면 기습의 효과를 망칠 수 있다며 펄펄 뛰었다.

그러나 북군 병사들 역시 주둔지에서 시험 사격을 하고 있었던 데다, 비까지 쏟아지고 있었기 때문에 총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 보우레가드의 우려는 기우에 그쳤다.

마침내 남군은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피츠버그 랜딩의 북군 주둔지에서 불과 3마일(5km)밖에 안 되는 지점까지 들키지 않고 이동하였다.

남군의 공격이 임박하였지만, 북군 지휘관들은 헨리 요새와 도넬슨 요새에서의 승전 이후 승리의 분위기에 취해 남군이 공격해올 리 없다며 정찰을 게을리하였다.

5명의 북군 사단장 중 한 명이었던 셔먼도 4월 5일에 부하 장교가 인근 숲 속에서 적병들이 이동하고 있다고 보고하자 이를 무시하면서 “그따위 헛소리를 지껄이려거든 오하이오로 돌아가게”라고 야단칠 정도였다.

아울러 북군은 주둔지를 만들면서 흙을 쌓아 올린다던가 하는 기본적인 방어 시설도 구축하지 않았기 때문에, 4월 6일 오전 6시에서 7시 사이에 남군이 공격을 시작하였을 때 몹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북군 프렌티스(Benjamin Prentiss) 준장의 정찰대가 공격 직전에 남군을 발견하고 총격을 가하는 바람에 그나마 북군 병사들이 총을 들고 대비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었을 뿐이다.

마지막 순간에 적군을 발견하기는 하였지만, 북군은 워낙 방심하고 있었던 탓에 남군의 공격을 견디지 못했다. 남군의 맹공 앞에 북군의 진지는 하나둘씩 무너졌다.

다행인 것은 전투 시작 전에는 안일하게 대응했던 셔먼이 온 전선을 뛰어다니면서 사단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며 북군 진지들이 모두 무너지는 것만은 막았다는 사실이다.

다른 북군 사단장들인 맥클레르넨드(McClernand), 프렌티스, 월리스(W.H.L Wallace)도 비록 남군의 거센 공격에 물러나기는 하였지만 대오를 유지하면서 후퇴하였다.

이 와중에 북군 주둔 지역의 중간에 ‘벌집(Hornet’s Nest)’이라고 부르는 움푹 패인 지형이 있었는데, 후퇴하던 프렌티스의 병력 일부가 오전 9시경쯤 이곳에 모여들어 수비 진지를 구축하였다. 이 때문에 남군의 전선 한가운데에 돌출부가 생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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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군의 사령관 앨버트 시드니 존스턴. 샤일로 전투에서 다리에 총상을 입고 과다 출혈로 사망했다.


사실 돌출부가 생기게 되면 심각한 위협이 되지 않은 한 일단의 부대를 포위 부대로 남겨두고 적의 주력을 공격하는 것이 상식이지만, 존스턴과 보우레가드는 ‘벌집’ 공격에 18,000의 주력부대를 투입하였다.

남군은 벌집을 향하여 열 차례나 돌격을 하였지만 4,500명에 불과한 북군 병력에 여지없이 격퇴되었다.

할 수 없이 남군은 보병 돌격을 그치고 60여문의 야포를 동원하여 집중사격을 한 후에야 벌집의 북군 병력을 굴복시킬 수 있었다.

벌집 공격으로 인하여 남군의 병력이 소모되었음은 물론이고, 남군의 진격이 지연되면서 후퇴하던 북군 주력들이 대오를 재정비하고 병력을 추스를 수 있 시간을 허용하였다.

설상가상으로 남군은 벌집 공격 와중에 사령관인 존스턴 대장이 다리에 총상을 입는 횡액을 겪었다.

존스턴은 이를 경미한 부상으로 여기고 치료를 거부하였지만, 사실은 총탄이 다리의 동맥을 끊어놓은 상태였다.

이 총상으로 인하여 존스턴은 약 한 시간 후 과다 출혈로 사망하였고 보우레가드가 사령관 역할을 대행하게 되었다.

북군의 피해 또한 무척 심각하였고 그들이 설치한 진지를 모두 빼앗기면서 엄청난 양의 보급 물자도 남군에 넘어갔다.

그러나 의외로 그랜트는 당황하지 않았다. 남군의 공격은 병력을 집중하여 전선을 돌파하는 것이 아니라 긴 전선을 유지하면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북군은 무질서하게 후퇴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뒤로 물러나온 것이었다.

비록 남군에게 몰리기는 하였지만 후퇴하는 북군은 험준한 계곡을 앞에 두고 방어선을 재구축할 수 있었고, 아직까지 야포 전력에서 남군에 비해 우세를 점하고 있었다.

아울러 북군의 뒤 테네시강에서는 북군의 함선 2척이 대기하고 있었고, 지원사격을 해줄 수도 있었다.

이때가 오후 6시, 하루 종일 전투를 하느라 병력이 지친 데다 계곡을 가로질러 공격하다가 북군의 포사격에 막대한 피해를 입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 보우레가드는 공격 중지 명령을 내린다.

후일 남군 지휘관 가운데 몇몇은 보우레가드가 이때 큰 전술적 실수를 저질렀다고 비난하였지만, 병사들이 지쳤고 야간전투가 어려웠던 당시의 상황을 고려할 때 보우레가드의 결정은 적절한 조치였다.


샤일로에서 승리한 북군, 뉴올리언스도 점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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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일로 전투에서 남군의 공격 (4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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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일로 전투에서 북군의 반격 (4월 7일).



다음 날(4월 7일)은 남군에게 재앙이었다. 이번에는 남군 사령관인 보우레가드가 방심하고 있었다.

그는 빼앗은 북군 진지에 있던 셔먼의 침대에서 편히 잠들었다. 북군의 피해가 심각하여 다음 날 오전에 북군 패잔병들을 소탕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랜트가 어디 있는지 찾지 못하여 인근을 헤매던 월리스(Lew Wallace, 소설 [벤허]의 저자이기도 하다) 소장의 사단이 늦은 밤에 도착하였고, 사바나에서 급하게 달려온 뷰엘의 오하이오군 또한 그랜트 군에 합류하였다.

날이 밝자마자 북군은 전면적인 반격에 나섰다.

남군이 전날의 전투로 지쳐 있었고 전사자와 부상자를 제외하고는 제대로 싸울 수 있는 병력이 25,000으로 줄어 있었던데 비하여 북군은 지쳤지만 멀쩡한 15,000의 병력에 새로이 도착한 25,000의 병력을 합쳐 4만의 병력으로 맹렬한 반격을 펼쳤다.

엉성한 포위망을 형성한 남군은 강력한 포 지원과 함께 조직적으로 이루어지는 북군의 반격에 힘없이 밀려났다.

정오쯤에 남군은 전날의 공격 시작 지점까지 밀려났고 남아 있던 예비대까지 모두 전투에 투입되었으나, 체력이 충만한 2만 5천의 병력이 보충된 4만의 북군에게 계속해서 밀려났고 일부 사단은 붕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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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일로 전투. 사상자의 수는 북군이 더 많았지만 남군이 전면적으로 후퇴함에 따라 전투는 북군의 승리로 기록되었다.


결국 오후 2시 반에 보우레가드의 참모가 병력을 모두 잃기 보다는 일부라도 보전하여 후퇴하자고 조언하였고 보우레가드는 이를 받아들였다.

남군은 전면적인 후퇴를 시작하였고 지친 북군은 이를 추격할 수 없었다. 비록 사상자의 수는 북군이 더 많았지만, 남군이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후퇴하였기에 샤일로 전투는 북군의 승리로 기록되었다.

남부의 관점에서는 많은 병력과 지휘관을 투입한 전투가 실패로 돌아간 것이었고, 이로써 테네시와 켄터키는 북부의 영역으로 굳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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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올리언스 공격을 지휘한 패러거트 제독. 세인트 필립 요새와 잭슨 요새를 포격하여 남부 최대의 관문이자 미시시피강의 관문인 뉴올리언스를 북부를 되찾았다.


그러나 샤일로가 패전의 끝이 아니었다. 4월이 지나기도 전에 남부에게 있어 전세는 더욱 암울해졌다. 인구와 물자가 더 많은 북군은 여러 지역을 동시에 공격할 수 있었다.

사실 테네시 전역에 동원된 남군 병력과 함선 중 상당수는 루이지애나에서 차출된 것이었다.

이 때문에 4월 18일에 패러거트(David G. Farragut) 대령이 이끄는 함대가 뉴올리언스로 들어가는 관문이라 할 수 있는 세인트 필립(St. Phillip)에 나타났을 때, 뉴올리언스 인근에는 3천의 민병과 강상 함선 몇 척밖에 없었다.

패러거트는 4월 18일에서 23일까지 박격포를 실은 함선들을 동원하여 세인트 필립 요새와 인근의 중요 군사기지인 잭슨 요새(Fort Jackson)를 포격하였다.

다행히 화약고 등의 군사시설은 다치지 않았지만, 병영 건물이 모두 부서지는 바람에 잭슨 요새의 병사들은 식사가 부실해지고 휴식을 제대로 취할 수도 없었다.

패러거트의 함대는 강 어귀를 막고 있던 장애물들을 제거하고 4월 24일에 뉴올리언스 방향으로 향하였다.

뉴올리언스 인근의 남군 해상력은 몇 척의 강상함대와 아직 도장 공사도 마치지 못한 함선들밖에 없었고 이들은 북군 함대의 상대가 되지 못하였다.

남군은 뉴올리언스로 향하는 패러거트의 함대를 막으려고 하였지만, 북군 함선들은 우세한 화력을 앞세워 남군 함선들을 두들겼다.

북군은 단지 1척이 침몰한 반면 남군은 12척의 배를 잃었고 뉴올리언스는 사실상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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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러거트의 북군 함대가 잭슨 요새와 세인트 필립 요새를 포격하고 있다.


4월 25일, 14척으로 이루어진 북군 함대가 뉴올리언스에 나타났고 항복하지 않을 경우 무자비한 포격이 이어질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뉴올리언스의 시민들은 공황 상태에 빠졌고 이들이 폭동을 일으키면서 시내는 무정부 상태가 되었다.

한편 뉴올리언스의 수비를 책임지고 있던 러벨(Mansfield Lovell) 소장과 시장ㆍ시의회는 누가 항복을 할 것인가를 두고 옥신각신하였지만 결국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했다.

기다리다 못한 패러거트는 두 명의 장교와 함께 해병들을 보내어 시내에 있는 관세청 건물로 가서 남부 깃발을 끌어내리고 미합중국기를 게양하게 하였다.

남부 최대의 항구이자 미시시피강의 관문인 뉴올리언스가 다시 미합중국의 손에 들어온 것이었다.

한편 패러거트는 뉴올리언스로 떠나면서 함대를 나누어 박격포함들을 포터(David Porter) 대령에게 맡겼다.

박격포함들을 지휘하게 된 포터는 버틀러(Benjamin Butler) 소장의 육전대와 함께 요새를 향한 공격을 계속하였다.

계속되는 공격에 요새 안 병사들의 불편과 피로도는 극에 달하였다. 포터는 잭슨 요새의 지휘관인 던컨(Johnson K. Duncan) 준장에게 항복을 종용하였지만 던컨은 이를 거부하였고 포격은 계속되었다.

계속되는 포격을 견디다 못한 잭슨 요새의 병사들은 마침내 4월 29일 반란을 일으켰고 요새는 북군에게 함락되었다.

잭슨 요새가 함락되면서 고립된 세인트-필립 역시 같은 날 북군에게 항복하고 만다.


북군, 여세를 몰아 리치먼드 공략을 위해 진격하다



남부는 샤일로에서 패하여 켄터키와 테네시를 상실하고 패러거트와 버틀러에게 뉴올리언스를 잃었지만, 이 와중에도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남군으로서는 다른 곳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매클렐런의 12만 대군이 버지니아 반도의 먼로 요새에 상륙한 후 수도 리치먼드를 향하여 북상중이었기 때문이다.

4월 5일, 매클렐런 휘하 키즈(Erasmus Keyes) 준장의 4군단이 남군 매그루더(John B. Magruder)의 병력과 마주치자 매클렐런은 매우 놀랐다.

자신의 생각으로는 남군이 버지니아 반도에서 가장 큰 도시인 요크타운에 병력을 집중할 것이기 때문에, 요크타운에 이를 때까지 남군이 없을 것이라 예상했던 것이다.

그러나 매그루더는 자신의 병력이 매클렐런의 대군을 막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증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지연작전을 쓰기로 하였다.

자신의 병력 중 한 대대를 동원하여 주둔지인 워릭강(Warwick River)에서 떠나고 돌아오기를 반복하게 한 것이다.

아울러 야포를 최대한 느슨히 배치하여 최대한 넓은 지역에서 북군에 간헐적으로 포격을 가하였다.

이에 속은 매클렐런은 야포를 총동원하여 남군을 두들기려고 하였고, 이를 위해 후방에 있던 야포들을 전진 배치하였다.

매그루더의 지연작전은 성공하여 매클렐런이 포격 준비를 하는 동안 총사령관 존스턴이 보낸 증원 병력이 실제로 도착하였다.

매클렐런은 4월 16일에 남군의 수비를 알아보기 위하여 탐색공격을 시도해 보았지만, 오히려 손해만 입고 물러났다.

매클렐런은 이미 출발 이전부터 남군의 군세를 너무 높게 보고 있었는데, 매그루더의 속임수에 속아 자신이 싸워야 할 남군 병력이 무려 10만이나 된다고 믿고 있었다(실제로 이 시점에서 매그루더가 거느린 병력은 3만 5천에 불과했다).

설상가상으로 잭슨(Stonewall Jackson)이 셰넌도어 방면에서 북군을 공격하자, 놀란 링컨은 워싱턴 수비를 대비하여 맥도웰(Irvin McDowell)의 1군단을 버지니아주 북쪽의 프레데릭스버그 인근에 두겠다는 통보를 해왔다.

이 때문에 매클렐런이 구상한 리치먼드에 대한 양면 공격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해군의 비협조 때문에 남군의 전선을 우회할 수 없었던 매클렐런은 기본적으로 앞의 남군 전력을 두들기는 데만 몰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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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3월 17일부터 5월 31일까지 버지니아 반도 작전의 상황도. <출처: (cc) Hlj at en.wikipedia.org>


증원군을 받은 남군 병력은 5만 7천까지 늘어난다. 그러나 병력이 증원되기는 하였지만 매클렐런이 준비한 야포 전력이 워낙 막강하였기 때문에 존스턴은 이미 워릭강 전선을 지킬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존스턴은 5월 3일에 워릭강의 군을 물려 리치먼드 방면으로 철수시켰다.

5월 5일에 남군 전선에 대한 전면 공격을 하려고 했던 매클렐런은 그 전날인 5월 4일, 열기구로 남군 진지를 정찰한 결과 진지가 비었음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남군이 자신을 속이고 일제히 철수해버린 것이었다. 매클렐런은 스톤맨(George Stoneman) 준장의 기병대로 남군을 추격하는 한편, 프랭클린(William Franklin) 준장의 부대를 함선에 태워 남군 후방에 대한 상륙작전으로 남군의 퇴로를 막으려 하였다.

북군의 추격이 의외로 빠르게 이루어지자 존스턴은 윌리엄스버그 인근의 매그루더 요새(Fort Magruder)에서 지연전을 펼치기로 하였다.

북군 약 4만 대 남군 3만 2천이 격돌한 윌리엄스버그의 전투에서 남군은 일부 지휘관의 실수로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일단 북군의 진격 속도를 늦추려는 목적은 달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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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그루더 요새에서 펼쳐진 윌리엄스버그 전투. 많은 피해에도 불구하고 남군은 북군의 진격 속도를 늦추는 데에 성공하였다.


한편 배를 타고 남군의 퇴로를 막으려 하였던 프랭클린의 부대는 5월 7일에 엘트험즈랜딩(Eltham’s Landing)에 상륙하여 임시 부두까지 짓고 병력과 야포를 하선시켰다.

이들은 남군 본대를 가로막고자 하였으나 휘팅(W.H.C Whitting)과 후드(John Bell Hood)의 남군 돌격대에 가로막혀 상륙 지역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상륙부대는 남군이 철수한 뒤에 그들을 쫓아 도로에 진입하였으나 이미 남군 본대는 지나간 다음이었다.

링컨 또한 직접 전장(먼로 요새)에 나와 전장을 시찰하였다. 배를 수배하여 친히 주변을 정찰한 링컨은 남군 본대와 멀리 떨어져 있는 노포크를 점령할 수 있다고 여겨 통수권자로서 직접 해군 함선들을 동원하여 노포크에 포격을 가하였다.

구원을 기대할 수 없음을 안 노포크의 남군들은 즉시 항구를 비웠고, 이로써 5월 8일에 북군 육전대가 노포크를 장악하였다.

매클렐런은 여전히 조심스럽게 리치먼드를 향하여 진격하였고, 남군의 북부 버지니아 군(Army of Northern Virginia)을 맡고 있던 존스턴 역시 조심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그가 버지니아 반도에서 군을 물린 이유는 야전으로 병력을 소모하기보다는 리치먼드 수비에 병력을 집중시키기 위함이었다.

이때 북군은 북대서양 봉쇄 함대의 일부를 차출하여 리치먼드에 대한 과감한 공략을 시도해보았다.

장갑함 모니터와 함께 제임스강을 거슬러 올라가 리치먼드를 공격하고자 하였으나, 리치먼드 남쪽 약 10km 드루리즈 블러프(Drewry’s Bluff)에 위치한 남군 요새와 남군 강상함대의 악착같은 수비로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다.

다만 함대를 지휘했던 로저스 (John Rodgers) 해군준장은 돌아오는 길에 리치먼드에서 남쪽으로 약 15km 정도 떨어진 곳에 상륙이 가능한 지점이 있음을 매클렐런에게 통보하였다.

그러나 매클렐런은 어떤 이유에선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결국 리치먼드를 정면공격하기로 하였다.


위기의 남부엔 로버트 리가 있었다



리치먼드 인근으로 진격한 북군은 포위전에 돌입하면서 리치먼드에서 동쪽으로 약 10km 지점, 칙카호미니강(Chickahominy River)에 포진하고 공격을 준비하였다.

북군이 막강한 포병 전력을 배치 완료하면 리치먼드가 함락될 수도 있다는 위기감에 존스턴은 북군이 공격 준비를 완료하기 전에 공격하기로 결정한다.

남군 사령관 존스턴은 포토맥군이 강에 의하여 양분되어 있다는 점을 이용하여 남쪽에 있던 북군의 3군단과 4군단을 공격하기로 한다.

마침 며칠간 계속된 비로 강물이 불어나 있었고, 남군이 칙카호미니강의 다리를 다수 파괴하였기 때문에 공격이 이루어지더라도 원군이 오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다.

존스턴은 5월 31일에 22개 연대 약 5만의 병력을 동원하여 강 남쪽에 있는 북군 3만 3천을 들이쳤다.

원래는 한꺼번에 공격해서 단숨에 공파해야 했으나 비로 인하여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았던 탓에 남군은 결과적으로 축차공격(逐次攻擊, 가용 가능한 부대를 순차적으로 투입하여 공격함)을 할 수밖에 없었다.

북군 대형의 끝에 위치한 케이시(Silas Casey) 준장의 6천 병력은 남군의 맹렬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완강히 버텼다.

그러나 중과부적으로 밀린 케이시의 병력은 제1방어선을 내어주고 2선으로 후퇴한다.

이때 강 북쪽에 주둔하고 있던 제2군단장 섬너(Edwin Sumner) 준장은 총성과 포성을 듣고 전투가 벌어진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매클렐런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세지윅(John Sedgwick) 준장의 사단에 진격 명령을 내렸고, 세지윅의 사단은 강물에 휩쓸리지 않고 남아 있는 유일한 다리를 이용하여 남쪽으로 진격하였다.

아슬아슬하게 서 있던 낡은 다리는 북군 병력이 건너는 동안에는 간신히 버텨주었지만, 병력이 모두 도강한 후 몇 분도 지나지 않아 붕괴되었다.

세지윅이 거느린 사단의 증원으로 남군의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매클렐런은 이 공격에 놀란 나머지 병력을 모두 남쪽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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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연합 대통령 데이비스의 군사고문이자 북부 버지니아군의 총사령관직을 맡은 로버트 리 장군.


한편, 공격 와중에 남군의 총사령관인 존스턴이 중상을 입고 지휘불능이 되었다.

남부 대통령 데이비스는 공석이 된 북부 버지니아군의 사령관에 대통령의 군사고문직을 맡고 있던 로버트 리(Robert Edward Lee, 1807~
1870) 대장을 임명하였다.

리는 버지니아에 대장원을 가진 농장주였으며 기사도와 예법을 중요시하는 전형적인 귀족 군인(aristocratic officer)이었다.

그는 웨스트포인트 시절부터 수재로 이름이 높았고 뛰어난 전술적 감각의 보유자였는데, 이 때문에 한때 선배인 윈필드 스콧으로부터 북군 사령관직을 제의 받은 바 있지만 그의 근신 요청을 스콧이 받아들이지 않아 할 수 없이 남군에서 군직을 맡게 되었다.

리는 호시탐탐 남부의 해안을 노리는 북군 해군으로부터 남부 해안을 보호하기 위하여 전쟁 초기에는 노스캐롤라이나와 사우스캐롤라이나 등지의 해안 수비를 총괄하다가 1862년 초기에 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스의 군사고문이 되었다.

매클렐런의 공경이 시작되기 전, 잭슨을 셰넌도어로 진격시켜 북군의 눈을 돌리게 한 작전은 다름아닌 리의 아이디어였다.

그는 수도 리치먼드에 대한 북군의 공격이 임박하자 리치먼드를 공격하는 북군 전력을 분산시켜야 한다는 작전을 세웠고, 이것이 보기 좋게 성공한 것이었다.

잭슨은 5월 27일까지 셰넌도어에서 북군을 실컷 농락한 뒤 버지니아 반도 방면으로 복귀하였다.

다만 2개월에 걸쳐 500km를 넘게 행군한 잭슨의 병력은 결국 피로 때문에 버지니아 반도에서는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하였다.

리는 북군 사령관 매클렐런이 존스턴의 공격으로 극도로 몸을 사리는 것을 보고 공격적인 전략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린다.

남군이 맹렬한 기세로 공격을 가하면 실패를 무엇보다도 두려워하는 매클렐런이 물러날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실제로 매클렐런은 존스턴의 공격으로 인하여 병력을 재배치한 다음 약 한 달간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새로이 사령관이 된 리는 병력을 집중시킨 다음 6월 25일에 매클렐런의 북군에 대한 맹공을 시작하였다. 이른바 ‘7일 전투’의 시작이었다.

7월 1일까지 끊이지 않고 여덟 번의 전투가 벌어졌는데, 사실 6월 27일 게인즈-밀(Gaines’s Mill)에서의 승리를 제외하고 남군이 속시원히 승리한 전투는 없었다.

대부분이 막대한 사상자를 낸 무승부로 끝났고, 7월 1일의 멜번-힐(Malvern Hill)의 전투에서는 오히려 북군의 집중 포격에 남군이 5300명의 사상자를 내면서 대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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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7월 1일, ‘7일 전투’ 종료 시의 상황도.


그러나 어찌되었건 남군의 맹공에 시달리는 매클렐런은 계속해서 병력을 리치먼드와 점점 멀어진 위치에 재배치하였고, 6월 24일 남부 수도인 리치먼드를 불과 10km 남겨두고 있던 북군은 7월 1일에 이르러서는 25km이상 떨어진 곳으로 물러나 있었다.

비록 많은 사상자를 내기는 했지만 리는 북군을 리치먼드에서 멀어지게 한다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북군의 사기는 다시 급락하였고 남부의 사기는 치솟았다. 결국 매클렐런과 포토맥군은 8월초에 버지니아 반도에서 철수하였다.

수많은 인원과 물자를 동원하여 한 번의 공격으로 전쟁을 끝내고자 했던 버지니아 반도 원정이 실패로 돌아간 것이다. 이제는 남군이 공격에 나설 차례였다.

참고문헌〈단행본〉


  • Iver Bernstein, [The New York City Draft Riots: Their Significance for American Society and Politics in the Age of the Civil War]
  • Benjamin Franklin Cooling, [Counterthrust: From the Peninsula to the Antietam]
  • John William Draper, [History of the American Civil War]
  • Joseph E. Johnston, [Narrative of Military Operations during the Civil War]
  • James M. MacPherson, [Battle Cry of Freedom: The Civil War Era]
  • Louis P. Masur, [The Civil War: A Concise History]
  • William T. Sherman, [Memoirs of General William T. Sherman]

 


 




참고문헌〈인터넷〉





김성남 | 안보·전쟁사 전문가
글쓴이 김성남은 전쟁이 인간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가지고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미국 UC 버클리 동양학과를 졸업한 후 연세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국제학 석사를 받고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에 진학하여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 [전쟁으로 보는 삼국지], [전쟁 세계사] 등이 있으며 공저로 [4세대 전쟁]이, 역서로 [원시전쟁: 평화로움으로 조작된 인간의 원초적인 역사]가 있다.


발행2013.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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