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남군의 반격과 링컨의 노예해방선언 - 남부, 반격을 시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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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515회 작성일 16-02-07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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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국가들을 자극하라, 남부의 외교와 트렌트 호 사건



남북 전쟁 당시 미합중국은 남부뿐만이 아니라 혹시라도 남부에 있을 외교적 지원을 차단하기 위하여 다른 국가의 움직임에도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실제로 영국과 프랑스는 여러 차례 남부를 지지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이 당시 유럽은 산업혁명의 와중에 있었고, 앞서 언급하였듯이 유럽의 산업혁명을 이끄는 것은 바로 섬유산업이었다.

남부는 유럽 섬유산업의 필수 물품인 면화(綿花)를 무기로 삼아 유럽 국가들의 전쟁 개입, 또는 최소한 남부에 대한 우호적 여론을 이끌어내려 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전쟁 초기인 1861년 11월 8일, 남부 정부는 메이슨(James Mason)과 슬라이델(John Slidell)을 영국에 파견하여 남부연합에 대한 외교적 인정을 받아내고자 하였다.

이들은 영국 국적의 우편선인 트렌트(Trent) 호(號)를 타고 동맹을 제의하러 가던 중, 지금의 바하마 근처 해역에서 북부의 군함인 샌 재신토(San Jacinto) 호에 발견되어 강제로 정선(停船)당한 뒤 체포되었다.

트렌트 호의 나포와 남부 외교관들의 체포는 그 당시 북부가 남부에 대하여 실시하고 있던 해상봉쇄 작전인 아나콘다 작전(The Anaconda Plan)의 일환이었다(그러나 함장인 윌크스(Wilkes)는 트렌트 호를 나포하라는 구체적인 명령을 받은 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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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는 외교전의 일환으로 1861년에 메이슨(James Mason, 왼쪽)과 슬라이델(John Slidell, 오른쪽)을 영국에 보냈다. 영국 국적의 우편선을 타고 가던 두 사람이 북군에 체포되면서 ‘트렌트 호 사건’이 일어났다.


남북 전쟁이 발발하였을 때, 영국의 보수적인 정권은 미국의 ‘극단적인 민주주의’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미국의 민주주의가 실패하기를 은연중 바라고 있었다.

아울러 미국이 가진 잠재적인 국력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당시 미국 주재 러시아 대사에 의하면 만약 미국이 양분(兩分)된다면 가장 이득을 볼 나라는 영국이며 따라서 영국은 남북 전쟁의 결과를 마음 졸이면서 기다리고 있다고 할 정도였다.

프랑스는 당시 멕시코에 친불(親佛) 허수아비 정권을 세운 상황이었으며, 프랑스에 우호적인 남부 정권과 국경을 맞대는 것이 보다 유리할 것이라 판단하고 전쟁 초기에 남부를 승인하려 하였다.

만약 영국이 남부의 독립을 승인한다면 프랑스 역시 이를 따를 것임을 분명히 하여 미합중국 정부를 긴장시켰다.

미국의 분열을 바라는 서유럽과는 달리, 러시아는 오히려 북부가 승리하여 통일된 미합중국이 영국을 견제하여 주기를 바라며 북부를 지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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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렌트 호를 나포하여 영국과 미합중국 간의 외교 갈등을 촉발시킨 윌크스(Charles Wilkes) 함장.


이런 상황에서 샌 재신토 호의 함장인 찰스 윌크스가 취한 행동은 북부의 대전략의 차원에서는 충분히 수긍이 가는 일이었지만, 사태는 북부가 가장 두려워하면서도 남부에는 매우 유리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사실 유럽 국가들이 남부의 외교적 노력에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던 상황이어서 슬라이델은 북군 수병들에게 체포되어 가면서 오히려 쾌재를 불렀다.

이 일로 인하여 미합중국과 영국의 사이가 나빠지고 남부의 외교적 목적이 보다 빨리 달성되리라 본 것이다.

슬라이델이 생각한 대로 영국의 국기를 달고 항해하던 배가 외국 군함에게 정지당하고, 게다가 외국의 군인들이 강제 승선하여 승객 일부를 데려갔다는 소식이 영국에 알려지자 영국의 조야(朝野, 정부와 민간 모두)는 전쟁 여론으로 들끓었다.

사건이 발생하기 전, 미합중국의 국무장관 시워드(William Henry Seward)는 유럽에 상당히 강경한 외교적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미합중국은 남부의 ‘국가’와 전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반란’을 진압하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남부를 승인하는 어떠한 행위도 미합중국에 대한 적대 행위로 간주할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그러나 윌크스 함장이 트렌트 호를 나포하고 남부 외교관들을 체포하자 미합중국은 국제적으로, 그리고 법적으로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만약 윌크스 함장의 행위가 ‘합법’이 되려면 미합중국의 함선이 ‘적국’을 돕는 제3국의 함선을 나포했다는 것을 증명해야 했다.

이렇게 되면 남부를 ‘적국’으로 인정하여야 하는 상황이 되기 때문에 이는 시워드와 링컨의 정책에 역행하는 것이었다.

링컨은 외교적 형세가 매우 불리하게 된 것을 인정해야만 하였다. 이후 영국 정부는 미합중국 정부에 공식적인 사과를 요구하였고, 체포된 남부 외교관들을 석방할 것을 요구하였다.

설상가상으로 영국은 자국의 식민지인 캐나다와 서부 대서양에서 군사력을 증강하기 시작하였다.

영국과 전쟁을 할 여력이 없었던 미국 정부는 결국 메이슨과 슬라이델을 석방하였으며, 윌크스 함장이 정부의 공식 승인 없이 독단적으로 행동하였다고 인정함으로써 사태는 일단락되었다.


남군, 동부 전선에서 반격을 시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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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7월에 남군 사령관이 된 로버트 리(Robert E. Lee). 북부의 공세를 막기만 할 것이 아니라 실제로 북부를 침공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과감한 작전으로 남군을 여러 차례 승리로 이끌었다.


1862년 5월에 이르러 북부의 해상봉쇄는 영국과 프랑스의 경제에 실제로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였다.

남부의 면화 수출이 전쟁 이전과 비교하여 3분의 1로 줄어들자 영국과 프랑스의 섬유산업이 타격을 받았던 것이다.

특히 섬유 공장들이 집중되어 있던 영국의 랭캐셔(Lancashire)에서는 대규모 정리해고로 쫓겨난 노동자들의 불만이 폭발 직전에 이르렀다.

마찬가지로 공장에서 쫓겨난 프랑스 노동자들의 불만도 점증하고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은연중에 북부의 패배를 바라고는 있었지만, 동시에 남부에 대한 승인에 대해서는 매우 신중하였다. 남부의 승리가 확실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7일 전투’를 통하여 매클렐런의 포토맥군을 멀리 물리친 후 남부 주력군인 북부 버지니아군의 수장이 된 리는 북부의 공세를 막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북부를 침공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이때까지 전투는 주로 남부 영토인 버지니아에서 벌어졌기 때문에, 전투로 인한 피해는 모두 남부가 입고 있는 상황이었다.

일단 리의 논리는 북부 수도 워싱턴의 생명선인 볼티모어-오하이오(Baltimore-Ohio) 철도를 끊고, 펜실베이니아의 농업지대를 공략하여 북부에도 경제적인 타격을 입히는 동시에, 친남부주의자들이 많은 메릴랜드를 침공하여 메릴랜드의 분리를 유도하고 북부 영토를 직접 공격함으로써 북부주민들의 사기를 떨어뜨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울러 남부가 북부를 공략하여 대승을 거두면 유보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는 유럽 국가들, 특히 영국과 프랑스의 승인을 얻어낼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서부에서도 연패하고 리치먼드가 직접적인 위협을 받는 상황에서 남부는 전황을 반전시킬 수 있는 승리가 절실하였다.

한편 신중하다 못해 소극적인 매클렐런을 대체할 만한 인물을 찾던 링컨은 포프(John Pope) 소장을 새로이 편성된 미연방 버지니아군(Union Army of Virginia)의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서부 전선에서 몇 차례 성공을 거두어 새로이 사령관으로 임명된 포프는 부임하자 마자 “영광은 오직 진격에 있고, 후퇴에는 오직 수치만이 있을 뿐이다”라며 허세를 잔뜩 부렸다.

그에 대한 군 내부의 평판은 좋지 않았고, 포토맥군의 매클렐런과 그 휘하 장교들 또한 포프에 대한 경멸감을 공공연히 내비쳤다.

그러나 링컨은 어찌되었건 매클렐런에게 포프의 작전을 보조하라고 명령하였고, 이 때문에 포토맥군은 워싱턴 남쪽 알렉산드리아까지 배를 타고 장시간 항해해야만 했다.

할렉은 핏츠포터(John FitzPorter)의 군단을 포토맥군에서 차출하여 포프의 버지니아군에 합류하게 하였다.

이 때문에 메클렐런의 포프에 대한 경멸감은 극에 달하였는데, 매클렐런은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런 형편없는 인간은 어떤 일을 맡기만 하면 모조리 망쳐놓고 만다”라고 극언을 할 정도였다.

이 때문에 할렉이 다시 추가로 포토맥군에서 병력을 차출하려 하였을 때 매클렐런은 사실상 할렉의 명령을 거부하였다.

그러나 매클렐런을 비호하고 있는 정치 세력이 워낙 두터워 할렉은 메클렐런의 항명(抗命) 행위에 대한 어떠한 조치도 취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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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8월 남군의 북부 버지니아 작전도. 남군이 대승을 거두었고, 북부는 수도 워싱턴 DC가 위험에 처하는 상황이 되었다. <출처: (cc) Hal Jespersen at en.wikipedia.org>


한편 북군에 맞서 메릴랜드를 향하여 북진하던 남군의 북부 버지니아군(Army of Northern Virginia) 중 잭슨의 군단이 8월 9일 컬페퍼(Culpeper) 인근의 시더 마운틴(Cedar Mountain)에서 연방 버지니아군의 일부와 충돌하였다.

이 전투에서 버지니아군 제 2군단을 맡고 있던 북군의 뱅크스 소장은 1862년 봄 셰넌도어 밸리(Shenandoah Valley)에서 잭슨에게 망신당한 것을 복수할 생각에 성급한 공격을 하였다.

북군이 의외로 빠르게 공격을 해오자 남군 쪽 잭슨 사단의 일선 부대를 맡고 있던 윈더(Charles Winder) 준장이 전사하는 등 초반의 상황은 북군에 유리하였다.

그러나 잭슨의 직속부대인 스톤월 여단(Stonewall Brigade), 힐 (A.P. Hill), 브랜치(Lawrence Branch)와 트림블(Isaac Trimble)에 의한 반격이 시작되자 북군이 패퇴하였다.

뱅크스는 병력의 30%를 잃고 정신없이 후퇴하다가 뒤늦게 도착한 증원군 덕에 간신히 남군의 진격을 막을 수 있었다.

이후 남군의 진격이 계속되면서 포프는 허풍만 드셀 뿐 리와 잭슨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북군은 이후 머내서스 스테이션(Manassas station, 8월 27일), 더로우페어 갭(Thoroughfare Gap, 8월 28일) 등에서 연패하고, 포프와 리가 거의 정면으로 부딪힌 8월 28일부터 8월 30일까지의 제 2차 불 런 전투(Second Battle of Bull Run)에서는 북군이 사상자 1만 명을 내면서 대패하고 말았다.

포프의 버지니아군이 리에게 철저히 두들겨 맞으면서 이번에는 북부의 수도인 워싱턴이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서부에서의 남군의 반격과 수세에 몰린 북군



이때 서부에서도 남군의 반격이 이루어지면서 북군은 수세에 몰리게 된다. 1862년 5월 말, 북군이 미시시피주의 북쪽 끝인 코린트(Corinth)를 점령한 후 그랜트는 당장 미시시피강의 빅스버그(Vicksburg)를 공격할 것을 주장하였다.

뉴올리언스를 점령한 패러거트의 함대가 내친김에 빅스버그 공격을 시도해보았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요새의 위치가 높아 함포로는 공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강과 육지에서 동시에 공격해야 그나마 성공의 가능성을 높일 수 있었다.

빅스버그는 미시시피강에 위치한 남군 최대의 요새여서 미주리주와 뉴올리언스를 장악한 북군이 이를 점령하는 것은 ‘아나콘다 작전’의 요지에 부합되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서부전선을 맡은 북군의 사령관 할렉(Henry Halleck)은 빅스버그를 공격하려면 새로이 철도가 필요한데, 가뭄과 탈수로 인해 쓰러지는 병사들이 많은 상황에서 도보로 육상 공격을 감행하면 낙오병들이 많아질 것을 우려하였다.

따라서 그는 서부에 포진한 북군 병력 총 11만의 군세(軍勢)를 셋으로 나누어 4만은 아칸소 방면으로 향하게 하고, 4만은 뷰엘의 지휘하에 테네시 동부의 채터누가(Chattanooga) 방면으로 진격시켰다. 그리고 나머지 3만은 보급을 위한 철도를 깔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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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불 런 전투 당시 철로를 개설 중인 북군. 북군의 철로 개설은 궤간을 통일하는 등 미합중국 군사철도청(USMRR)에서 관리ㆍ담당하였다. 철로 보급을 통한 물자 수송의 원활함은 결국 북부의 승리를 이끄는 주요한 요소가 된다.


새로이 개설된 철도에 대한 관리는 1862년 2월 창설된 미합중국 군사철도청(US Military Railroads, USMRR)이 일괄적으로 담당하였다.

USMRR은 철도를 개설할 때 무조건 게이지(Gauge, 궤간)를 통일시켜 각 지역간의 보급이 원활히 이루어지도록 만들었다.

이에 비하여 남부는 북부의 USMMR같이 철도를 총괄하는 기관도 없었거니와 지역간 게이지가 달라 병력과 물자 수송에 애로가 자주 발생하였다.

철도 보급을 통한 원활한 물자 수송은 장기적인 차원에서 북부 승리의 견인차로 작용하였다.

북군 기술자들은 철로를 건설하는 데 매우 효율적이었지만, USMRR은 그 창설 초기에 서부전선에서 그다지 큰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남군의 포레스트(Nathan Forrest) 대령과 모건(John Hunt Morgan) 대령의 기마대가 진격하는 북군의 후방에 출몰하여 보급대를 습격하고 철도를 뜯어내는 등 게릴라 전술로 뷰엘의 군을 괴롭혔기 때문이다.

특히 모건은 테네시와 켄터키에서 철저히 현지 보급에만 의존하여 싸웠다.

이러한 모건의 활약상에 힘입은 남부에서는 미합중국에 잔류하기로 결정한 켄터키에 아직 친남부 세력이 상당할 것이라 생각하고, 브래그(Braxton Bragg) 대장을 테네시군(Army of Tennessee)의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1862년 7월에 북진을 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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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레스트(Nathan B. Forrest, 왼쪽)와 모건(John Hunt Morgan, 오른쪽). 신출귀몰하는 기병 전술로 보급대를 습격하고 철도를 파괴하는 등 테네시와 켄터키 일대의 북군을 괴롭혔다.


뷰엘은 일단 프라이스(Sterling Price)와 밴 도른(Earl van Dorn)의 휘하에 32,000명을 코린트에 남겨두어 그랜트와 로즈크랜즈의 군을 견제하게 한 다음, 35,000의 병력을 철로를 이용해 애틀랜타로 돌린 후 채터누가로 옮기는 우회 작전을 실시하였다.

이에 남군의 브래그는 녹스빌(Knoxville)에 주둔하고 있던 스미스(Kirby Smith) 소장의 동부 테네시군(Army of East Tennessee) 18,000명과 공동작전을 구상하였다.

그의 작전은 5만이 넘는 병력으로 켄터키를 공략하고, 멀리 앨라배마 북부에까지 진출한 뷰엘의 보급로를 끊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를 막기 위하여 뷰엘이 북상하면 뷰엘의 군을 격파하고 켄터키를 영구 점령한 다음, 오하이오주까지 치는 것이었다.

일단 같이 행동하기로 한 스미스의 움직임은 신속하였다. 8월 14일에 브래그로부터 1개 사단을 지원받은 스미스의 군은 21,000명으로 늘어났고, 녹스빌에서 진격을 시작한 스미스의 부대는 북군에 점령당한 중요 요충지인 컴벌랜드 갭(Cumberland Gap)을 우회하여 켄터키 중심부로 그대로 진격하였다.

그리고 1개 사단으로 컴벌랜드 갭의 북군을 견제하게 하고는 2주 만인 8월 29일에 켄터키의 중부 도시인 리치먼드(Richmond, Kentucky)에 도착한다.

리치먼드는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켄터키주의 주요 도시인 루이빌과 녹스빌, 그리고 주도(主都)인 프랭크포트(Frankfort)를 잇는 교통의 요지였으며 오하이오주의 신시내티로부터 불과 75마일(120km) 떨어져 있었다.

멀리 떨어져 있을 줄 알았던 남군의 공격에 리치먼드의 주민들은 당황하였고 일부는 황급히 피난을 떠났다.

근처에 주둔하고 있던 북군 넬슨(Edmund Nelson)의 신병 6,500명이 스미스의 병력과 충돌하였으나 다음 날(8월 30일)에 스미스의 군에 패하고 황망히 물러난다.

스미스는 헤스(Henry Heth)에게 8천의 병력을 주어 신시내티 근방으로 가서 정찰할 것을 명하였다.

렉싱턴에서 출발한 헤스는 약 2주간 혹시라도 신시내티를 공략할 만한 약점이 있는가를 살펴보았지만, 시장인 해치(George Hatch)와 월리스(Lew Wallace) 소장이 정규군 2만과 민병 6만을 동원하여 철통같이 지키고 있음을 파악하고는 공격을 포기하고 렉싱턴으로 복귀하였다.


북군, 전세 전환의 실마리를 잡다



한편 렉싱턴을 점령한 브래그는 주민들에게 ‘남부의 정의로운 전쟁’에 동참할 것을 종용하였지만, 켄터키의 친남부 주민들은 남부로 떠나거나 이미 종군하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새로이 남군에 입대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북군의 야전군이 아직도 건재한 상황에서 브래그의 병력을 가지고 켄터키를 장악하고 지켜낼 수 있을 지가 의문이었고, 아울러 브래그의 편을 들었다가 혹시라도 북군이 다시 점령할 경우 보복을 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남군을 돕는 데 매우 소극적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말로는 ‘남군 만세’를 외치면서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않고 눈치만 보았다.

남군은 9월 17일에 먼포드빌(Munfordville)을 공격하여 북군 4000명을 격파하고 이를 점령하였으나 이러한 승리도 켄터키 주민들을 안심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브래그는 코린트에 남겨둔 프라이스와 밴 도른의 군이 북상하여 도와주기를 기대하였으나 프라이스와 밴 도른의 군은 10월 4일 2차 코린트전투(Second Battle of Corinth)에서 그랜트와 로즈크랜스(William Rosecrans)가 이끄는 북군에 크게 패하고 말았다.

다만 그랜트는 이 전투에서 양면으로 부대를 나누어 밴 도른의 퇴로를 막아 남군을 전멸시키려 하였는데, 남군의 공격을 격퇴한 로즈크랜스가 어떤 이유에선지 후퇴하는 남군을 가로막지 않아 패한 남군은 무사히 후퇴할 수 있었고, 이 일로 그랜트와 로즈크랜스는 원수가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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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10월 4일 벌어진 2차 코린트 전투. 프라이스와 밴 도른이 이끄는 남군은 그랜트와 로즈크랜스의 북군에 밀려 대패하였고, 이로써 켄터키의 남군은 지원병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한편 남쪽에 있던 뷰엘은 여전히 보급의 어려움을 들어 여러 차례 움직이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서부의 사령관이었다가 북군 총사령관으로 영전한 할렉은 여러 차례 뷰엘에게 전보를 쳐서 다시 북상할 것을 종용하였으나 뷰엘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고 계속해서 변명으로 일관하였다.

결국 참다 못한 할렉은 비록 수사적인 표현이기는 하지만 뷰엘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보낸다.

“지금 정부에서는 잘 싸우지 못하는 장군들 때문에 단두대를 세우고 있다네……. 아무래도 프랑스혁명에서 본 것과 같은 가혹한 조치가 필요할 것 같네만…….”

사실상의 최후통첩을 받은 뷰엘은 마침내 군을 움직여 브래그와 싸우러 나선다. 북상하는 뷰엘은 일단 한 개 사단은 주도 프랭크포트 쪽으로 움직여 양동작전을 펼쳤다.

이때 프랭크포트에서는 남군의 비호하에 켄터키 ‘주지사’의 취임식이 거행되고 있었는데, 뷰엘이 보낸 양동부대의 공격으로 인하여 취소되었다.

이때 뷰엘의 병력은 6만, 브래그와 스미스의 군은 약 4만 정도였다. 그러나 남군은 약 100km에 걸쳐 분산되어 있었고, 아울러 스미스는 명목상 브래그의 밑에 있었지만 사실상 독립적으로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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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5월부터 10월까지 이루어진 남군의 켄터키 공략과 페리빌 전투. 남군의 공격은 실패로 끝나고 이후 남군은 서부에서 전세를 회복하지 못한다. <출처: (cc) Hal Jespersen at en.wikipedia.org>


브래그의 병력은 나뉘어져 있었고 뷰엘 역시 여러 방면으로 군을 보냈기 때문에 10월 8일에 뷰엘의 북군과 브래그의 남군이 페리빌(Perryville)에서 충돌하였을 때의 병력은 북군이 약 23,000, 그리고 남군이 약 17,000 정도였다.

이 전투에서 북군의 사상자는 4,200명, 남군은 약 3,400명으로 피해는 북군이 더 많았지만, 결국 북군의 전략적인 승리로 귀결되었다.

브래그의 군은 장거리 보급 능력이 없는데다 코린트 방면에서 북상하기로 했던 프라이스와 밴 도른의 군이 패하면서 더 이상 추가 병력지원을 기대할 수 없었다.

브래그는 원정이 실패하였음을 인정하고 남쪽으로 긴 후퇴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남군은 다시는 켄터키에 발을 들이지 못하였고, 서부에서 다시 주도권을 잡으려 했던 남군의 시도는 완전히 좌절되었다.


고개 드는 북부의 반전론과 노예해방 문제



2차 불 런 전투 이후 워싱턴 방면으로 후퇴하던 포프의 버지니아군은 리와 잭슨이 계속하여 진격해오고 사령관 할렉이 반격을 명하면서 9월 1일 현재 버지니아주 패어팩스(Fairfax, Virginia) 인근의 찬틸리 장원(Chantilly Plantation)에서 남군과 전투를 벌였다.

전투는 무승부로 끝났지만 심각한 피해를 입은 포프의 군은 워싱턴 방면으로 완전히 퇴각한다. 이후 버지니아군은 해체되고 포프 역시 해임되었다.

남은 병력은 매클렐런의 포토맥군과 합쳐졌다. 남군의 공격이 북부의 버지니아군(Army of Virginia)을 사실상 와해시킨 것이다.

남군 역시 계속되는 전투로 지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유럽에서의 외교적인 승인을 얻기 위하여 계속 승리해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었다.

리는 마음 편히 군을 쉬게 할 여유가 없었고 더 큰 승리를 위하여 메릴랜드주로 진격을 명령하기에 이른다.

뒤바뀐 전황에 실망한 사람들은 일단 노예제를 유지하면서 미 연방에 남았던 켄터키나 미주리 등의 유권자들이었다.

이들은 매클렐런이 리치먼드를 함락시키면 노예제에 대한 폐지 논의 없이 전쟁이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할 것이 거의 확실시되면서 노예제도 폐지론자들의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하였다. 노예제도가 ‘반란’을 일으키고 있는 남부의 물적ㆍ제도적 토대라는 논리가 힘을 얻었던 것이다.

불과 1년 전인 1861년만 해도 노예제 폐지론자들은 남부의 여론을 악화시켜 전쟁을 일으킨 원흉으로 지탄받았으나, 1862년에는 전쟁을 주도하고 있던 공화당의 정치적 지지를 얻으면서 북부 각지에서 강연회를 열고 국회에서도 연설하는 등 크게 세력을 넓혔다.

이에 힘입어 1862년 3월 13일에는 전투 중 북군 진영으로 넘어온 흑인 노예들을 돌려주는 것을 금지하는 법안이 하원에서 통과되었다.

이 이전에도 대다수의 북군 지휘관들은 전투 중에 노예들이 북군 진영으로 넘어오면 일단 병영에서 허드렛일을 담당케 하고 주인들에게 돌려보내지 않는 것이 관행이었다.

1861년 4월, 버지니아 반도 원정 중 두 명의 노예가 북군 버틀러(Benjamin Butler) 소장의 진영으로 넘어오자 그 주인인 남군 장교가 백기를 들고 북군 진영으로 찾아와 반환을 요구하였던 적이 있었다.

이때 버틀러 소장은 노예들을 ‘노획품(Contraband)’이라고 하며 내놓기를 거부하였고, 결국 이것이 하나의 관행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일부 지휘관들이 실제로 노예들을 내놓는 경우도 있어, 폐지론자들은 이를 확실히 금지하는 법안을 요구하여 통과시킨 것이다.

이미 주(州) 이외의 속지(Territory)들과 수도인 워싱턴 DC에서 노예금지법안이 통과되었고 영국과 노예 거래 중지를 위한 조약을 체결한 상태에서 노예반환금지법안까지 통과되자 북부 노예주(Slave state) 출신 의원들과 유력 인사들은 크게 당황하였다. 이들은 목청을 높여 공화당을 성토하기 시작하였다.

전쟁 이전과 같이 노예제는 다시 한 번 첨예한 정치적 이슈로 떠올랐고, 링컨은 이러한 갈등을 정치적 타협을 통해 해결하려 하였다.

그가 내놓은 타협안은 북부의 노예를 모두 자유인으로 풀어주는 대신 노예주들에게 재정적인 보상을 해주는 것이었다.

링컨은 3개월분의 전쟁 예산이면 북부 내의 모든 노예들의 유상(有償) 해방이 가능하다고 하였으나 노예주들은 이 제안을 거절하였다.

사실 유상 해방에 필요한 재정은 북부의 다른 주들에서 세금을 걷어 충당할 계획이어서 노예주들이 금전적으로 손해 볼 일은 없었기 때문에 노예주들의 거부는 좀 아이러니한 감이 없지 않았다.

그리고 링컨은 노예주들이 타협안을 거절하자 실망을 감추지 못했으며 직설적으로 노예주들을 꾸짖었다.


“만약 경계주(Border States)들이 노예들의 점진적 해방에 대한 결정을 바로 내릴 수 없다면… 노예제도는 결국 갈등과 충돌, 즉 전쟁의 여파에 의하여 사라지게 될 것이요… 결국 당신들에게는 남는 것이 아무 것도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노예들의 해방에 반대하는 것은 노예주들뿐만이 아니었다.

당시 야당인 민주당은 원칙적인 차원에서 노예해방에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노예들을 해방시키면 수백만의 흑인 자유민들이 남부에서 북부로 이주하여 백인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빼앗고, 갑작스런 흑인들의 유입으로 인종 갈등과 사회적 혼란이 벌어질 수 있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시간이 흐르면서 야당인 민주당은 전쟁을 지지하는 파와 반대하는 파로 나뉘게 되는데, 반전론자들은 전쟁보다는 협상으로 연방을 통합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하였다.

급진적인 노예폐지론이 없어지면 남부가 협상에 응할 것이라는 것이 이들의 논리였다.

하지만 남부 인사들은 남부의 최종적인 목적이 ‘독립’이었음을 분명히 하고 있었기 때문에, 민주당 반전론자들의 협상론이 실현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링컨은 노예해방에 적극적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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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반전론자들인 ‘카퍼헤드(Copperheads)파’가 1864년에 제작한 반(反) 링컨 팸플릿.


1862년 후반 전황이 북부에 불리해지자, 전쟁이 장기화할 것을 두려워한 인사들을 중심으로 반전론과 협상론이 힘을 얻기 시작하였다.

공화당은 협상이나 타협은 절대로 불가하다고 맞섰고, 민주당 반전론자들을 ‘카퍼헤드(Copperhead, 미국 남부에 서식하는 독사들)’라고 부르며 적대시하였다.

워싱턴의 수비를 위하여 DC 근교에 주둔하고 있던 매클렐런은 이들 카퍼헤드파와 가까이 지냈고, 차기 대선에서 민주당의 후보로 공공연히 거론되었다.

매클렐런은 그해 7월 대통령에게 공개서한을 보내 “노예제도에 대한 불간섭이 정책이 되어야 한다”고 요구하였다.

이를 본 전쟁 장관 스탠턴(Edwin Stanton)은 몹시 화를 내며 당장 매클렐런을 해임하려 하였다.

그러나 링컨은 매클렐런이 포토맥군의 병사들에게 추앙받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고, 그의 해임이 포토맥군의 사기 저하를 불러올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당장 그만한 장군도 없었기에 링컨은 스탠턴의 건의를 묵살하고 매클렐런의 오만불손을 그저 참아내는 수밖에 없었다.

노예들에 대한 또 다른 타협안은 노예들을 정부가 사들여 자유로 풀어준 후에 이들을 다른 나라로 이주시키는 것이었다. 흑인들을 이주시키자는 주장은 의외로 광범위한 지지를 얻었다.

어떤 공화당 의원은 “솔직히 이주론은 황당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일단 국민들에게 먹혀 들어갈 것이다.”라고 할 정도였다.

실제로 공화당 의원들의 3분의 2가 수도 워싱턴에서 노예를 해방시키는 법안을 통과시키면서 흑인들의 이주를 위한 60만 달러의 예산을 책정할 정도였다.

노예들의 이주지로는 온두라스와 니카라과가 선정되었으나 두 나라 모두 거부하면서 중앙아메리카 이주론은 무산되었다.

1863년에는 453명의 전직 노예들을 아이티 근처에 있는 섬으로 옮겼으나 질병과 기아로 수십 명이 사망하고 생존자들을 다시 미국으로 데려오면서 흑인 이주론은 흐지부지된다.

링컨이 노예들에 대한 타협안을 여러 차례 제시한 이유는 노예해방선언에 필요한 최대한의 지지를 얻어내려고 했기 때문이다.

만약 기존 폐지론자들의 지지에 타협안 제시를 통하여 중간론자들의 지지를 추가로 얻어낼 수 있다면 국내의 정치적인 부담 없이 노예해방을 선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흔히 링컨이 노예해방에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다는 것의 증거로 회자되는 발언이 있다.


“나의 최고 목표는 이 연방을 유지시키는 것이지, 노예제도의 존폐가 아닙니다.

만약 노예들을 해방시키지 않고 이 연방을 유지할 수 있다면 나는 그리할 것이고, 만약 노예들을 해방시킴으로써 연방을 유지할 수 있다면 그러할 것이며, 노예들의 일부를 해방시키고 일부를 노예로 둠으로써 연방을 유지할 수 있다면 역시 그러할 것입니다.

내가 노예제도와 유색인종에 대하여 행하는 모든 일은 이로써 연방을 유지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고, 만약 내가 행하지 않는 일이 있다면 연방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My paramount objective in this struggle is to save the Union, and is not either to save or to destroy slavery.

If I could save the Union without freeing any slave I would do it, and if I could save it by freeing all the slaves I would do it; and if I could save it by freeing some and leaving others alone I would also do that.

What I do about slavery, and the colored race, I do because I believe it helps to save the Union; and what I forbear, I forbear because I do not believe it would help to save the Union.”

링컨의 이 발언은 급진적인 폐지론자이자 <뉴욕 트리뷴(The New York Tribune)>지의 편집장이며 사주(社主)인 호러스 그릴리(Horace Greeley)가 1862년 8월 20일에 칼럼란에 게재한 “2천 만의 기도(A Prayer of Twenty Millions)”에 대한 반박문의 형식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 발언이 노예폐지론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노예해방에 소요되는 비용이라던지 정치적인 과정을 무시한 채 극단적인 주장만 되풀이하고 있던 그릴리에 대한 현실론적인 반박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노예 폐지와 관련하여 중간층의 지지를 끌어들이려는, 한 마디로 ‘정치적’ 발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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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3년 노예해방선언을 발표하는 링컨. 급진적 노예폐지론자인 호러스 그릴리의 칼럼에 대한 반박문을 발표할 당시 링컨은 이미 노예해방선언의 시기를 저울질하고 있었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링컨은 이미 노예제가 남부 사회를 지탱하는 근간임을 깨달은 지 오래였다. 그는 남부의 기반이 되믄 노예제를 철저히 깨부수지 않고는 전쟁에서의 승리도 연방을 재통합하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것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사실 링컨은 위의 반박 칼럼을 게재할 당시 노예해방선언을 할 시기를 저울질하고 있던 중이었다. 링컨은 이때 유럽 국가들, 특히 영국과 프랑스가 이미 노예거래를 불법이라 규정한 사실에 주목하였다.

만약 노예해방선언을 통하여 노예해방이 전쟁의 목적임을 밝힌다면 영국과 프랑스는 명분상 노예제도를 유지하고 있는 남부를 지지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이미 명분은 충분했다. 그러나 노예해방을 남부에 강제할 수 없는 상태에서, 해방선언은 허언(虛言)에 불과한 것이었다. 노예해방선언을 저울질 하던 1862년 7월경 당시, 전세는 북부에 불리하였다. 링컨에게 필요한 것은 더 이상의 명분이 아니라 승전보(勝戰譜)였다.

참고문헌〈단행본〉


  • Iver Bernstein, [The New York City Draft Riots: Their Significance for American Society and Politics in the Age of the Civil War]
  • Benjamin Franklin Cooling, [Counterthrust: From the Peninsula to the Antietam]
  • John William Draper, [History of the American Civil War]
  • Joseph E. Johnston, [Narrative of Military Operations during the Civil War]
  • James M. MacPherson, [Battle Cry of Freedom: The Civil War Era]
  • Louis P. Masur, [The Civil War: A Concise History]
  • William T. Sherman, [Memoirs of General William T. Sherman]

 


 




참고문헌〈인터넷〉





김성남 | 안보·전쟁사 전문가
글쓴이 김성남은 전쟁이 인간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가지고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미국 UC 버클리 동양학과를 졸업한 후 연세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국제학 석사를 받고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에 진학하여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 [전쟁으로 보는 삼국지], [전쟁 세계사] 등이 있으며 공저로 [4세대 전쟁]이, 역서로 [원시전쟁: 평화로움으로 조작된 인간의 원초적인 역사]가 있다.


발행2013.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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