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앤티텀 전투와 북군의 남진 - 북군, 남군을 완파할 기회를 놓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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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93회 작성일 16-02-07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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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보이지 않는 변수에 의해 결정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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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릴랜드에서 마주하게 된 로버트 리(왼쪽)와 조지 매클렐런(오른쪽). 수적으로 우위에 있었으나 지나친 조심성으로 주저하던 매클렐런에게 천금과 같은 기회가 찾아왔다. 남군 장교들이 분실한 리의 작전명령서가 매클렐런의 손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1862년 여름의 북부 버지니아 원정에서 포프의 북군을 완파한 리의 남군은 병사들이 지쳤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하여 북진하였다.

일단 계속되는 전투로 피폐해지고 있는 버지니아에서 군을 옮김과 동시에 메릴랜드와 펜실베이니아를 공략하여 민심 이반을 유도하려 한 것이다.

아울러 북군을 연파할 경우 북부 주민들의 사기를 저하시킴은 물론, 1862년 11월의 북부 총선에서 반전론자들의 입지가 강화되어 남부와 협상에 임할 것이라는 계산도 깔려있었다.

물론 남부의 일부 여론은 북부 수도 워싱턴 DC를 공격할 것을 주문하였으나, 워싱턴은 이전에 매클렐런이 구축한 방어망으로 단단히 보호되고 있는 데다 매클렐런의 포토맥군도 근방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리는 워싱턴 공략은 득보다 실이 더 크리라 판단하고 군을 북쪽 방향으로 돌렸다.

1862년 9월 3일 버지니아주 센터빌을 출발한 리는 메릴랜드에 진입하면서 남군은 메릴랜드를 점령할 의도가 없으며 해방군으로서 왔음을 선언한다.

같은 시기에 남부 정부도 남군의 북진은 자신들을 위협하는 북부에 대한 ‘방어적 공격’일 뿐 점령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성명을 내놓았다.

아울러 메릴랜드에 진입하면서 리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전술을 다시 전개한다.

수적으로 비슷하거나 월등한 적이 근방에 있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군을 분산시킨 것이다.

자신의 군이 북군보다 빠르게 기동한다는 전제하에 중요 전술목표 여럿을 동시에 확보함은 물론 적군에게 자신의 움직임을 알지 못하게 하여 중요한 순간에 적을 여러 방향에서 타격하려는 작전이었다.

이는 나폴레옹이 자주 구사한 분진합격(分進合擊)을 연상시키는 기동이었다.

일단 리는 군을 네 개의 군단으로 나누어 롱스트리트(James Longstreet)의 군단을 분스버로(Boonsboro)로 보내어 북부 민병대를 소탕하게 하였다.

그리고 셰넌도어의 영웅인 잭슨(Stonewall Jackson)을 메릴랜드와 버지니아 경계에 있는 하퍼즈페리(Harpers Ferry)로 보내어 막대한 양의 물자를 비축하고 있는 북군의 보급기지를 공격하게 한다.

스튜어트(Jeb Stuart)와 힐(D.H. Hill)의 부대는 후방인 사우스마운틴(South Mountain)에 배치하여 혹시라도 있을 북군의 공격에 대비하여 후위를 방어하게 하였다.

매클렐런의 움직임은 버지니아 반도 원정에서와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조심스러웠다.

이때 리의 병력은 약 5만 5천이었고, 매클렐런은 8만 7천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어 북군이 수적인 우위를 지니고 있었으나, 매클렐런은 적의 병력을 과장하는 고질적인 버릇 때문에 리가 11만 대군을 거느리고 있다고 추측하였다.

이 때문에 매클렐런은 리가 움직이기 시작한 지 4일이 지난 9월 7일에 이르러서야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물론 리도 적 앞에서 병력을 나누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다음과 같은 말로 참모들의 우려를 일축하였다.


“제군들이 매클렐런을 잘 아는가? 그는 장군으로서 능력이 있기는 하지만 너무 조심스러운 경향이 있어… 그의 군은 지금 사기가 형편없고 혼란에 빠져 있어서 최소한 3주나 4주 동안 공격적인 작전은 엄두도 내지 못할 것일세…

그때쯤이면 나는 이미 서스쿼해나(Susquehanna, 펜실베이니아에 있는 강) 강변에 가 있을 것이야.”

그러나 전쟁은 대개 보이지 않는 변수에 의하여 결정된다는 클라우제비츠의 말은 또 다시 입증된다.

9월 13일에 남군이 머물고 간 지역을 정찰하던 북군의 기병대가 남군 장교들이 분실한 리의 작전명령서를 찾아낸 것이다.

정찰대로부터 명령서를 받은 매클렐런은 “이제야 보비 리(Bobbie Lee)를 혼내줄 수 있게 되었다”며 희희낙락하였다.


남과 북, 샤프스버그에서 조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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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5년, 앤티텀 전투 이후 하퍼즈페리(Harpers Ferry)의 모습. 남군은 하퍼즈페리의 보급창을 빼앗아 엄청남 양의 물자를 확보하였지만 남군의 1차 북진 시도는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리의 작전명령서를 손에 놓은 것은 매클렐런으로서는 대단한 행운이었다. 9월 13일경 이미 남군은 북부 영역에 진입하여 중요 보급기지인 하퍼즈페리를 집중 공격하고 있었다.

하퍼즈페리 요새를 지키고 있던 북군의 마일스(Dixon Miles) 대령은 무능도 무능이거니와 남군을 얕잡아보고 있었다.

하퍼즈페리는 주변의 고지에 둘러싸인 강변에 위치해 있어서 제대로 수비하려면 기지 자체보다는 고지를 확보하는 것이 보다 중요했다.

그러나 마일스가 한 개의 고지에만 약간의 병력을 두었을 뿐 고지 수비를 등한시 하는 바람에, 9월 14일경 주변 세 개의 고지는 모두 남군에게 점령당하였다.

남군은 이 고지들에 포를 끌어올려 기지를 포격하였고, 9월 15일에는 보병에 의한 돌격이 시작되었다.

공격을 견디다 못한 요새는 항복하였고 무려 12,000이나 되는 기지 병력이 포로로 잡혔다.

공격을 지휘하였던 잭슨(Stonewall Jackson)은 불과 250여 명의 사상자밖에 내지 않으면서 많은 포로와 엄청난 양의 물자를 얻은 것이다.

이런 대승에도 남군은 전혀 안심할 수 없었다. 리의 작전명령서를 입수한 매클렐런의 포토맥군이 평소와는 다르게 의외로 빠른 추격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빠르다”라는 것은 상대적이어서 사실 매클렐런은 명령서를 입수한 후 군을 재정비한다는 명목으로 18시간을 움직이지 않았다.

일군(一軍)을 급파하여 나누어진 리의 군에 대한 각개격파를 시도하는 대신에 매클렐런은 포토맥군 전부를 움직였고, 포토맥군의 움직임을 목격한 메릴랜드의 친남부 농부 한 명이 말을 달려 리의 군에 이를 알렸다.

리는 자신의 계획이 탄로났음을 알고 서둘러 나누어진 부대들에 연락하여 병력을 다시 집합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9월 14일에 포토맥군의 선봉 부대가 사우스마운틴의 산 고개들을 지키고 있던 남군 부대들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남군은 열심히 싸웠지만 병력의 열세(북군 28,000 대 남군 18,000)를 극복하지 못하고 세 개의 산 고개를 모두 북군에 넘겨주었다.

그러나 사우스마운틴에서 남군의 분전은 리에게 병력을 다시 모을 귀중한 시간을 벌어주었다.

이 전투에는 후일 19대 대통령이 되는 러더포드 B.헤이스(Rutherford B. Hayes)와 25대 대통령이 되는 윌리엄 매킨리(William McKinley)가 제 23 오하이오 의용연대(23rd Ohio Volunteers Regiment)의 장교로 참가하였다.

비록 시간을 벌었다고는 하나 남군 후위가 예상외로 빨리 공격을 당한 상태여서 남군은 아직 분산된 병력들이 복귀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매클렐런이 사우스마운틴에서의 승리 후 빠르게 움직였으면 롱스트리트와 잭슨의 부대가 귀환하기 전에 리의 본대를 들이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매클렐런은 다시 늑장을 부리면서 대열을 정비하는 데 하루를 썼다. 특히 사우스마운틴에서 하퍼즈페리는 그리 멀지 않았는데도 하페즈페리를 구원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아 결국 하퍼즈페리의 함락을 사실상 방관하였다.

9월 16일에 메릴랜드주 샤프스버그(Sharpsburg)에서 양군이 조우하였을 때, 리의 병력은 불과 18,000명에 불과하였다.

하퍼즈페리를 점령한 남군 부대가 열심히 달려오고 있었지만, 아직 전투 지역에 도착하기 전이었다.

남군은 북군이 들이닥치기 전에 전투를 준비할 시간도 부족하여 많은 노동력이 소요되는 참호를 파기보다는 주변의 바위와 나무, 관목 등 장애물을 최대한 활용하여 나머지 병력이 도착할 때까지 ‘지키는 전투’를 할 계획이었다.

매클렐런은 세 개의 군단을 우측에 집중시켜 이를 주공(主攻)으로 하고 번사이드(Ambrose Burnside)의 9군단을 좌측에 배치하여 조공(助攻)을 맡겼다.

혹시라도 리가 주공을 막기 위하여 병력을 이동시키는 것을 막기 위한 견제책이었다. 아울러 매클렐런은 무려 4개의 보병 사단과 기병대 전체를 예비대로 두어 남군 전선에 돌파구가 생길 때 투입할 생각이었다.

이론적으로는 흠잡을 데 없는 작전이었으나 전투는 메클렐런의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남북 전쟁 최대의 인명 손실을 기록한 앤티텀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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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9월 17일 벌어진 앤티텀 전투. 치열한 전투 끝에 북군이 승리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링컨은 노예해방선언을 발표할 수 있었다.


9월 17일 아침에 공격이 시작되었을 때, 매클렐런은 주공을 담당한 병력을 움직이고자 하였으나, 명령이 매끄럽게 전달되지 못하여 한꺼번에 우세한 병력으로 남군 좌익을 들이치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축차 공격이 되고 말았다.

이 때문에 남군 좌익은 위태위태하기는 하였지만 그런대로 북군의 공격을 버틸 수 있었다. 아울러 조공을 맡은 번사이드도 이해하기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번사이드가 맡은 지역에는 앤티텀강을 건널 수 있는 다리가 하나밖에 없어 이를 차지하기 위하여 병력을 다리에 집중시켰다.

문제는 남군도 그 사실을 알고 있어 다리 인근에 수비 병력을 집중시킨 것이다.

사실 멀지 않은 곳에 물이 얕고 강폭이 좁은 곳이 여러 군데 있었고 이를 통하여 충분히 압도적인 병력을 도강시킬 수 있었건만, 번사이드는 다리에 대한 정면공격만을 고집하였다.

이 때문에 남군 우익은 북군의 공격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고, 리는 우익으로부터 한 개 사단을 차출하여 병력이 열세인 남군 좌익에 대한 북군의 주공을 막을 수 있었다.

남군 좌익은 병력의 현격한 열세 속에서 지쳐가고 있었다. 잭슨이 맡고 있던 좌익은 저돌적인 후커(Joseph Hooker) 소장 휘하 북군 1군단의 맹공에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었으나, 리가 보내준 병력으로 버텨낼 수 있었다.

리가 보내준 병력은 북군 1군단의 측면을 공격하여 이를 깨뜨렸다. 그러나 곧장 북군 12군단에 의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12군단은 잠시 남군의 전선을 돌파하였으나 이내 격퇴되었다. 그러자 그 다음에는 북군 섬너(Bull Sumner) 소장 휘하의 북군 사단이 공격을 하여 남군 전선이 다시 돌파되었고, 남군 좌익이 일시적으로 위기에 처하였으나 때마침 하퍼즈페리 방면에서 일단의 남군 병력이 도착하면서 북군의 돌파는 격퇴되고 돌파 지역은 다시 복구되었다.

이 상황에서 매클렐런은 이해하기 힘든 모습을 보였다. 매클렐런은 4개 사단을 예비대로 가지고 있었음에도 남군 좌익에 돌파 지역이 생겼을 때 군을 투입하지 않아 남군을 궤멸시킬 기회를 놓치고 만 것이다.

또 다른 결정적인 기회는 중앙에서 돌파를 시도하는 북군과 이를 막으려는 남군의 전투에서 나왔다.

남군은 수차례 북군의 돌파 시도를 좌절시켰지만 이를 막는 과정에서 남군 역시 엄청난 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 지역은 이후 ‘블러디 레인(Bloody Lane)’, 즉 ‘피의 통로’라고 불리게 된다.

더 많은 병력과 화력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북군의 공격에 남군의 전선이 무너지고 샤프스버그 방면으로 무질서한 후퇴가 시작되었다.

이때가 매클렐런이 예비대를 투입할 두 번째 기회였으나, 매클렐런은 리가 보유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남군 예비대의 반격을 두려워하여 자신의 손에 쥔 카드를 펼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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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티덤 크릭(Antietam Creek) 근처 덩커 교회(Dunkers Church)에 쓰러져 있는 양군의 시신. 앤티덤 전투는 미국 전사(戰史)상 가장 많은 미국인이 전사한 전투로 기록되고 있다.





‘피의 통로(Bloody Lane)’에 쓰러져 있는 사상자들. 공방전 속에 북군은 예비대를 투입해 남군을 궤멸시킬 기회가 있었으나 매클렐런의 지시로 두 번째 기회를 잃고 만다.




세 번째 기회는 번사이드의 군단이 마침내 남군의 치열한 수비를 뚫고 앤티텀강의 다리를 건넜을 때였다.

계속되는 북군의 공격에 밀린 남군은 여기에서도 무질서한 후퇴를 할 수밖에 없었고, 마침 핏츠포터(John FitzPorter) 소장의 5군단이 예비대로 대기하고 있었지만, 리의 ‘유령 예비대’를 두려워한 매클렐런은 여전히 예비대 투입을 거부하였다.

예비대 없이도 번사이드의 사단이 남군 우익을 격파할 수 있을 듯 보였으나, 때마침 하퍼즈페리 방면에서 힐(A.P Hill)의 사단이 도착하면서 번사이드의 공격마저 격퇴된다.

9월 17일 내내 치열하게 벌어진 전투에서 양군의 사상자는 2만 3천에 달하였다. 단일 전투로는 미국 전사(戰史)상 최대의 피해였으며, 1944년 노르망디상륙작전 당시 미군 사상자 수의 4배에 달하였다.

전술적으로는 무승부였지만 남군도 끔찍한 피해를 입어 더 이상 메릴랜드에서 작전을 수행할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다음 날 18일에는 양군 모두 대치 상태에서 움직이지 않다가 18일 저녁에 리가 남군의 후퇴를 명한다.

리의 1차 북부 원정은 실패로 돌아갔고, 남군은 셰넌도어 벨리 방면으로 힘없이 물러났다. 매클렐런은 여전히 리의 ‘예비대’를 두려워하여 적극적인 추격을 명하지 않는다.

그는 워싱턴에 보낸 전보에서 북군이 ‘대승’을 거두었음을 강조하였다. 이로써 리의 북진은 격퇴되었고 북군은 전략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리의 공격이 좌절로 돌아간 것을 본 영국과 프랑스는 잠시 남군에 대한 인정을 보류하기로 하였다.

이 틈을 타 링컨은 노예해방선언(Emancipation Proclamation)을 발표한다. 노예해방선언은 단지 선언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노예제도는 남부를 사회ㆍ경제적으로 지탱하는 기둥과 같은 것이었다.

링컨이 노예해방선언을 발표하고 노예제를 부정함으로써 남북 전쟁은 단지 반란군 진압 이상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

노예제 그 자체를 붕괴시킴으로써 남군을 꺾는 것을 넘어, 남부를 사회ㆍ경제적으로 완전히 파멸시키겠다고 선언한 것이었다.

아울러 남부가 ‘노예사회’라는 것을 대외적으로 천명하여 만약 유럽 국가들이 ‘노예국가’인 남부를 인정하면 결국 노예제를 인정하는 것이 되어버렸다.

즉, 유럽 국가들에 대한 도덕적인 부담을 높임으로써 남부에 대한 외교적 지원을 차단한 것이었다.

비록 앤티텀에서의 전략적 승리가 노예해방선언을 가능케 하였지만, 매클렐런은 여러 차례 예비대의 투입을 주저함으로써 남군을 완파할 기회를 놓쳤다.

원래 링컨을 비롯한 워싱턴 정부의 명령은 기회가 된다면 리의 ‘반란군’을 궤멸시키라는 것이었다.

매클렐런은 자신이 메릴랜드를 침공한 반란군을 막아냈다고 자랑했지만, 워싱턴의 전쟁부(War Department)는 소극성으로 말미암아 리의 군을 격멸할 기회를 놓친 매클렐런을 곱게 보지 않았다. 결국 얼마 안가 매클렐런은 포토맥군 사령관 자리를 내어놓게 된다.


두 명의 사령관과 북군의 남진, 실패로 끝나다



결국 매클렐런은 사령관에서 물라나게 되었고 그 자리에는 보다 호전적인 성격의 번사이드(Ambrose Burnside)가 임명되었다.

매클렐런은 번사이드가 일리노이주에서 철도 회사의 재무이사로 있을 때부터 막역한 사이였고, 이 때문에 번사이드는 지휘권 인수를 망설였다.

그러나 만약 자신이 군을 맡지 않을 경우 개인적으로 싫어하던 후커(Joseph Hooker) 소장의 임명이 유력하다는 말을 듣고서야 사령관직을 수락하였다.

매클렐런이 포토맥군의 사령관직을 내려놓게 되자 포토맥군 내의 분위기는 험악해졌다. 포토맥군을 혼자 창설하다시피 하고 훈련시켜 정예군으로 만든 매클렐런은 병사들 사이에서 인기가 매우 높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정치군인이고 야심이 많다 하지만 매클렐런이 군인의 본분까지 망각한 것은 아니었다.

통수권자인 대통령의 해임 명령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고별사에서 “나를 따르듯이 새로이 임명된 번사이드 장군을 따라주기 바란다”고 강조하며 병사들의 술렁임을 진정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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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클렐런의 사임 후 포토맥군을 맡은 번사이드(Ambrose Burnside). 그가 지휘한 프레데릭스버그 전투는 13,000명의 사상자를 낸 북군의 대패로 마감되었다.


링컨과 워싱턴 행정부는 1862년 11월 7일부로 포토맥군을 맡게 된 번사이드에게 남군을 빨리 추격할 것을 명하였고, 번사이드는 빠른 진격으로 남군 본대가 수도인 리치먼드로 들어가는 것을 막는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는 고립된 남군 병력을 에워싸 격파할 심산이었다. 이에 번사이드는 군을 이끌고 재빨리 래퍼핸녹(Rappahannock)강을 도강하여 남군의 퇴로를 막으려 하였다.

11월 15일에 군을 출발시킨 번사이드는 일주일 전 부임하자마자 부교의 수송을 명하였으니, 포토맥군이 래퍼핸녹강의 팰머스(Falmouth)에 당도할 때쯤이면 강을 건널 부교가 도착해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11만의 대군이 팰머스에 도달하였을 때 도강에 필요하는 부교들은 그 근처에도 없었다.

일단 번사이드가 보급 책임자들에게 정확히 어디에서 도강할 것인지 언질을 하지 않은데다 많은 물자를 수송하는 데 따르는 절차상의 문제, 그리고 수송 책임자들의 늑장으로 부교들은 아직 포토맥강 상류 부근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부교가 없음에도 번사이드 휘하의 섬너는 강 건너 프레데릭스버그(Fredericksburg)의 남군 병력이 5백에 불과하니 부교 없이 일부 병력을 도강시켜 프레데릭스버그 앞의 고지를 점령하고 남군 병력을 몰아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아직 강물이 높은 수준이 아니니 도강을 강행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번사이드는 의외로 많은 비가 내려 예전보다 강물이 불어난 데다 더 많은 비가 내릴 경우 도강한 부대가 고립될 수 있다며 섬너에게 그대로 대기할 것을 명하였다.

리는 북군이 강을 빨리 건널 것으로 예상하고, 리치먼드 바로 북쪽의 노스애너(North Anna) 강가에서 번사이드의 군을 막으려 하였다.

그러나 번사이드가 아직 강을 건너지 않은 것을 보고 프레데릭스버그에 방어진을 구축하였다.

번사이드가 부교를 기다리는 사이 11월 23일에 롱스트리트의 군단, 11월 29일에는 잭슨의 부대가 프레데릭스버그에 도착하였고, 강을 건너 리치먼드를 기습한다는 북군의 계획은 물 건너간 일이 되고 말았다.

11월 25일에 부교 한 개가 도착하기는 했지만 북군 병력이 신속하게 도강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였다. 부교가 도착할 때쯤 팰머스 건너편의 프레데릭스버그에는 75,000명의 남군 병력이 북군의 진격로를 가로막고 있었다.

이제 북군은 딜레마에 처하게 되었다. 도강을 하자니 남군이 벼르고 있고, 그렇다고 이제 와서 다른 도강 지점을 찾기도 힘들었다. 더군다나 워싱턴 정부는 빠른 공격을 주문하고 있었다.

링컨은 번사이드가 다른 도강 지점을 찾으리라 예상하였지만, 번사이드는 부교가 완성된 후 남군이 기다리고 있는 정면으로 병력을 밀어넣었다.

프레데릭스버그를 일시 점령한 북군은 남군이 기다리고 있는 메리스-하이츠(Marye’s Heights) 고지로 진격하였으나 고지에서 이루어지는 남군의 사격에 끔찍한 피해를 입었다. 그러면서도 북군은 돌파를 노리며 인해전술로 밀어붙였다.

그러나 고지 앞의 지형은 늪과 얕은 골짜기로 이루어져서 북군의 진격로는 한정되어 있었다. 남군의 사격은 북군의 제한된 진격로에 집중되어 더 큰 피해를 불러왔다.

전투 사흘째인 12월 13일에 미드(George G. Meade)의 사단이 고지에 도달하여 남군의 우익을 형성한 부대간에 약 600미터 정도의 간격이 있음을 발견하고, 이를 통하여 일시적인 돌파구를 만들었다.

그러나 후속 부대를 이끌던 프랭클린 소장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미드의 돌파를 돕지 않았고 북군이 만들어낸 유일한 돌파구가 복구되면서 미드의 사단은 양면 공격을 당하여 심각한 피해를 입고 황망히 후퇴하였다. 프레데릭스버그 전투는 13,000명의 사상자를 낸 북군의 대패로 마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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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데릭스버그에서 북군은 인해전술로 밀어붙였으나 남군의 양면 공격에 끔찍한 피해를 입고 후퇴하였다.


이 패배로 인하여 번사이드는 군을 물리는 수밖에 없었다. 1863년 1월에는 겨울치고 의외로 따뜻한 날씨가 이어졌고 도로는 진창으로 변하였다.

북군의 후퇴는 고행길이었고 포토맥군의 사기는 급락하였다. 그리고 포토맥군 내부에서는 번사이드의 자리를 노리는 지휘관들의 정치적인 암투까지 이어졌다.

번사이드는 자신이 포토맥군에 대한 장악력을 잃은 것을 알게 되었고 링컨도 포토맥군 내의 이상 기류를 감지하였다.

번사이드는 결국 사직서를 제출하고 링컨은 번사이드의 사직을 받아들였다. 1863년 1월 26일, 포토맥군의 새로운 수장으로 후커(Joseph Hooker) 소장이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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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맥군의 새로운 사령관으로 임명된 조세프 후커(Joseph Hooker). 호전적이고 성미가 급해 ‘싸움꾼’이란 별명의 그 역시 챈슬러즈빌에서 리에게 대패한다.


워싱턴 수뇌부는 남부 수도에 집착했던 이때까지의 전략 목표를 바꾸어 리의 북부 버지니아군을 격멸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포토맥군의 새로운 수장이 된 후커는 번사이드보다도 저돌적인데다 성미가 급하고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는 인물이었다.

워싱턴 정부는 리의 군을 격파하기 위해서는 보다 공격적인 인물이 필요하다고 여겼고, 이 때문에 호전적인 후커를 포토맥군의 수장으로 임명한 것이다.

후커는 호전적인 성품에 걸맞는 과감한 작전을 세웠다. 이전 번사이드가 전진기지로 삼았던 팰머스에 본부를 마련한 후, 일단 기병대를 버지니아 깊숙이 진격시켜 남군의 이목을 그곳을 돌린 다음, 리치먼드로 빨리 진격하는 척하여 리의 군을 유인하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본대는 래퍼핸녹강을 크게 우회하여 북부 버지니아군의 후방으로 돌고, 팰머스에 남겨진 부대가 빠르게 도강하여 북부 버지니아군의 전방을 들이쳐 양면 공격으로 리의 군단을 격멸한다는 개념이었다.

후커는 인기에도 민감해서 병사들의 복지에 신경을 많이 쓴 편이었고 휴가 제도, 군 병원, 그리고 식료품 보급 체계를 개선하여 병사들 사이에서 인기는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후커의 작전은 그의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버지니아를 습격하라고 보낸 기병대는 남군 시설에 대한 피해도 입히지 못하고 오히려 많은 수의 마필(馬匹)만 잃고 돌아왔다.

호전성으로 이름이 높아 ‘싸움꾼 조(Fighting Joe)’라는 별명을 가진 그였지만, 후커는 정작 리와 싸워야 할 순간이 왔을 때 소극적으로 돌변했다.

5월 1일에 그의 정찰대가 남군 병력을 만나 소규모 전투를 벌였을 때 그는 진격속도를 높여서 남군의 후방에 침투하기보다는 챈슬러즈빌이라는 조그마한 마을에 군을 멈추고 남군을 기다렸다.

물론 리는 자신의 군보다 병력이 많고 편안하게 기다리고 있는 적과 정면으로 맛붙는 짓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군을 둘로 나누어 잭슨의 부대에 우회기동을 명하였다. 5월 2일 새벽에 멀리 우회한 잭슨의 군은 후커의 측면을 들이쳤다.

후커는 남군의 포격에 부상을 입고 기절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깨어난 후 일시적으로 지휘권을 옮기라는 참모들의 건의를 묵살하여 결과적으로 전투의 원활한 수행을 방해하였다.

5월 3일에는 증원군이 오면서 군의 붕괴는 막았지만 포토맥군은 방어진지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리의 군이 후커의 본대에 집중하는 사이, 북군의 조공을 맡았던 세지윅(John Sedgwick) 소장의 부대가 프레데릭스버그에서 메리스하이츠를 지키고 있던 남군 병력을 격파하고 고지를 점령하였으나, 리의 본대에서 구원 병력이 도착하면서 북군의 모처럼의 승전도 결국은 무위로 돌아갔다.

이 전투에서 17,000의 사상자를 낸 후커는 포토맥군의 철수를 명령한다. 북군의 남진은 실패하고 리는 다시 한번 북군을 맞아 대승을 거둔 것이다.

그러나 남군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챈슬러즈빌에서 남군에는 13,000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는데, 비율적으로는 오히려 패한 북군보다도 심한 피해를 입은 것이었다.

사상자 중에는 후커의 군에 대한 기습 작전을 성공시킨 잭슨도 포함되어 있었다.

잭슨은 혹시라도 후커가 반격을 하지 않을까 우려하여 기습이 성공한 후 최전방으로 정찰을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같은 남군 병사들로부터 총격을 받고 중상을 입었다. 북군으로 오인받았기 때문이다.

잭슨은 왼팔을 절단하고 치료받는 과정에서 폐렴에 걸려 5월 10일 사망하였다.

그러나 심각한 병력의 패해와 잭슨의 병사에도 불구하고, 리는 남군이 승리한 여세를 몰아 계속해서 북군을 몰아붙여야 한다고 생각했고 재차 북진을 결심하게 된다.

참고문헌〈단행본〉


  • Iver Bernstein, [The New York City Draft Riots: Their Significance for American Society and Politics in the Age of the Civil War]
  • Benjamin Franklin Cooling, [Counterthrust: From the Peninsula to the Antietam]
  • John William Draper, [History of the American Civil War]
  • Joseph E. Johnston, [Narrative of Military Operations during the Civil War]
  • James M. MacPherson, [Battle Cry of Freedom: The Civil War Era]
  • Louis P. Masur, [The Civil War: A Concise History]
  • William T. Sherman, [Memoirs of General William T. Sherman]

 


 




참고문헌〈인터넷〉





김성남 | 안보·전쟁사 전문가
글쓴이 김성남은 전쟁이 인간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가지고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미국 UC 버클리 동양학과를 졸업한 후 연세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국제학 석사를 받고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에 진학하여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 [전쟁으로 보는 삼국지], [전쟁 세계사] 등이 있으며 공저로 [4세대 전쟁]이, 역서로 [원시전쟁: 평화로움으로 조작된 인간의 원초적인 역사]가 있다.


발행2013.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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