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북대서양 조약 - 미국과 유럽의 맞잡은 손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댓글 0건 조회 457회 작성일 16-02-07 08:46

본문















14548024193443.png




“발트 해의 슈체친으로부터 아드리아 해의 트리에스테까지, 대륙을 가로질러 철의 장막이 쳐졌습니다. 그 뒤로는 유서 깊은 고대국가들의, 중부와 동부 유럽 국가들의 수도들이 있습니다. 바르샤바, 베를린, 프라하, 비인, 부다페스트, 베오그라드, 부쿠레슈티, 소피아. 모든 유명한 도시들과 그 주변 지역의 많은 인구가 소련의 영향권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거기서는 모든 것이 이런 저런 방법을 통해 소련의 지배하에 있을 뿐 아니라, 갈수록 증가하는 모스크바의 통제에 의해 묶여 있습니다. …… 우리 영연방, 거기에 미국의 국민들이 힘을 합쳐 하늘에서, 바다에서, 지상의 모든 곳에서 과학, 산업, 도덕의 모든 면에서 협력한다면 불순한 야망이나 모험을 유도하는 동요와 위태로운 힘의 불균형은 해소될 것이고, 확고한 안보만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국제연합 헌장을 준수하며, 남의 땅과 재산을 탐내지 않고, 또한 남의 사상을 억압적으로 통제하려 하지 않고, 차분히 앞으로 나아간다면, 또한 영국의 도덕적, 실제적 힘과 신념이 미국의 우정 어린 교제와 연결된다면, 미래는 밝을 것입니다. 우리뿐 아니라 모두에게, 우리 시대뿐 아니라 향후 1세기 동안 말입니다.”
- 윈스턴 처칠, 1946년 풀튼 대학교에서의 ‘철의 장막’ 연설


‘안보동맹’이냐, ‘안보기구’냐



전후 국제경제질서의 큰 틀을 세운 것이 브레턴우즈 협정(1944)이었다면, 국제안보질서의 큰 틀은 북대서양 조약(1949)으로 세워졌다고 볼 수 있다. 두 조약에 5년의 시간차가 있는 것은, 경제 문제가 군사보다 절박했으며, 추축국에 맞서 붙잡았던 소련과의 손을 놓고 옛 추축국들과 손잡는 일이 그만큼 틈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14548024201826




1925년 스위스 로카르노에서 조약 체결 당시 독일, 영국, 프랑스 대표의 모습(왼쪽부터).



그리고 서방 측 국제안보질서안에 두 가지 개념, 즉 미국과 서유럽의 안보동맹과 유럽 자체의 집단안보기구라는 개념이 상충되면서 공존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유럽이 단결하여 공동안보기구를 세우고, 독일 같은 패권국이 일어서려 하면 집단으로 억제하자는, 장기적으로 유럽 통합까지 염두에 둔 구상은 이미 제1차 세계대전 직후에 나왔다. 1920년에 설립된 국제연맹이 그런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데다, 프랑스의 브리앙 수상은 1925년에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벨기에 사이에 집단안전보장 체제를 수립하기로 하는 로카르노 조약, 1928년에는 국제 문제를 전쟁을 통해 해결하지 않기로 하자는 켈로그-브리앙 조약을 맺고 독일을 국제연맹에 가입시켰다. 그리고 1929년에는 ‘범유럽연합’ 구상을 내놓았다.

하지만 1차 대전 후 국제무대의 최대 실세로 떠오른 미국이 빠진 채인 그런 체제는 모래성일 수밖에 없었고, 베르사유 체제의 강박을 유럽 국가들끼리 해결하지 못하는 사이에 터진 대공황은 국제협력을 더욱 어렵게 했다. 여기에 자유 가입-만장일치 체제였던 국제연맹이 개별 회원국들의 돌출 행동과 탈퇴를 막기에 역부족임이 드러나면서, 결국 또 한 차례의 세계대전이 불가피해졌다. 그리고 다시 수립된 국제연합은 국제연맹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안전보장이사회를 설치했지만, 그것은 동시에 미국과 소련의 의견이 갈릴 경우 행동이 원천 봉쇄된다는 문제를 안고 있었다.

그리하여 한편으로는 유럽 국가끼리 자체 안보기구를 마련하자는 의견이 1945년, ‘마셜 플랜’에 따른 원조금을 배분하기 위해 발족한 유럽경제협력기구(OEEC)에서부터 나왔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소련의 야심에 맞서 영ㆍ미를 비롯한 자유 국가들끼리 뭉치자는 ‘대서양 동맹’안이 1946년, 처칠의 ‘철의 장막’ 연설에서 처음 공표되었다.



‘철의 장막’에서 ‘베를린 봉쇄’까지



영국의 대서양 동맹안에 대해 미국은 일단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일찍이 조지 워싱턴이 “유럽 문제에는 개입하지 않는 게 좋다”고 유시했었고, 제퍼슨 이래 어떤 국가와도 쌍무적 방위 동맹을 체결하지 않는 고립주의 전통을 이어온 데다, F. 루스벨트 이래 소련과 구축해온 협력 관계에 미련이 남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유럽에 ‘철의 장막’이 드리워졌을 뿐 아니라 소련군이 1946년 3월로 예정되었던 이란 점령지에서의 철수를 미루고, 그리스와 터키까지 소련의 사주에 의한 반란으로 공산화될 상황에 처하자 반공ㆍ반소 정책으로의 전환이 불가피했다. 결국 1947년 3월, 트루먼 대통령은 의회 연설에서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기 위해, 정부 전복의 위험에 처한 국가들을 원조할 것이다”라고 천명, 이른바 ‘트루먼 독트린’을 내세웠다.

비슷한 시기에 영국과 프랑스는 덩케르크 조약을 맺었다. 이 상호방위조약은 독일이 다시 말썽을 부리지 못하도록 공동 억제ㆍ대응한다는 목표를 우선했으나, 범유럽 집단안보체제의 구축도 염두에 둔 것이었다. 그리하여 1948년 3월에는 영국, 프랑스에다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의 이른바 ‘저지대 국가들’이 동참하는 공동안보체제가 브뤼셀 조약으로 수립된다. 그 한 달 전에는 체코슬로바키아가 소련의 압력하에 공산화되었으며, 이에 자극받은 트루먼은 ‘공산화에 맞서기 위한 유럽 연합체제를 지지한다’는 선언을 했다. 그리고 미국이 참여하는 범유럽 안보기구 창설안을 만들도록 지시했으며, 그것은 시어도어 애킬리스가 주관한 팀에 의해 4월 1일까지 마련되었다. 그것이 바로 북대서양 조약의 초안이다.





14548024216793




1948년 6월 베를린 봉쇄 당시 생필품을 공수하는 미국 비행기를 환영하는 서베를린의 시민들.



같은 해 6월에는 소련이 동독 내에 고립된 서베를린으로 가는 통로를 차단하는 ‘베를린 봉쇄’를 단행했다. 서방의 서독 경제개혁에 반발해 취해진 이 조치는 냉전이 자칫 열전으로 비화될지 모른다는 극도의 긴장감을 서방 국가들 사이에 퍼뜨렸다. 또한 북대서양 조약으로 가는 길을 막고 있던 최후의 걸림돌인 미국 정계의 고립주의 경향과 프랑스를 비롯한 서유럽 국가들의 독일(서독)에 대한 의구심이 이로써 끝내 무마되었다. 미국 의회는 미국이 집단안보기구에 가입해도 된다는 ‘반덴버그 결의안’을 통과시켰고, 프랑스는 미국, 영국과 가진 런던 회담에서 서독 정부 수립을 요청하는 ‘런던 선언’에 합의했던 것이다.



북대서양 조약







14548024232842




북대서양 조약의 체결 장면. 가운데 앉아서 서명하는 이가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다.



1949년 4월 4일, 마침내 워싱턴에서 북대서양 조약이 체결되었다. 브뤼셀 조약의 당사자인 영국,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에 미국, 캐나다, 이탈리아, 포르투갈, 노르웨이, 덴마크, 아이슬란드가 동참하는 형태가 된 이 조약문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 제1조. 체결국들은 UN 헌장의 정신에 따라 평화적 수단으로 국제평화와 안보, 정의를 도모한다.
  • 제2조. 체결국들은 서로의 민간 기구의 호혜적인 교류를 촉진하고, 서로 경제 분쟁을 삼가며, 경제협력을 도모한다.
  • 제3조. 체결국들은 개별 또는 집단적인 무력 공격에 대항할 전력을 개별적 또는 집단적으로 발전시킨다.
  • 제4조. 체결국들은 그 어느 국가라도 영토의 보전이나 정치적 독립이 위협받는 경우나 기타 안보 문제에 직면했을 때, 문제 해결을 위해 협의한다.
  • 제5조. 체결국들은 유럽과 북아메리카의 어느 체결국이든 무력 공격을 받았을 때 그것을 전체 체결국들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한다. 그 경우 UN 헌장 제51조에 의거한 개별적 또는 집단적인 자력 구제에 들어간 체결국에 나머지 체결국들이 지원하며, 필요하다고 여겨지면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북대서양 지역에 평화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런 무력 사용은 곧바로 UN 안전보장이사회에 통보되어야 하며, UN 안전보장이사회가 분쟁 해결을 위한 수단을 취했을 때 중단되어야 한다.
  • 제6조. 제5조에 언급된 평화 회복 노력의 원인이 되는 상대의 무력 공격은 체결국들의 유럽 및 북아메리카의 영토, 그리고 프랑스령 알제리, 체결국의 유럽 주둔군, 그밖에 체결국들의 주권이 미치는 도서 지역 및 해상의 선박에 가해진 것이다.
  • 제7조. 이 조약은 어느 경우에도 UN 헌장의 내용과 UN 안전보장이사회의 활동을 침해하지 않는다.
  • 제8조. 체결국은 향후 상호간이나 제3국과의 어떤 관계 및 조약도 이 조약에 위배되지 않도록 한다.
  • 제9조. 체결국은 이 조약의 실행을 위한 이사회를 구성한다. 이사회는 군사위원회를 비롯한 필요한 산하기구를 둘 수 있다.
  • 제10조. 체결국들은 이 조약의 목적과 북대서양 지역의 안보에 도움이 되는 한 유럽 국가들의 추가 가입을 만장일치로 결정한다. 가입은 미국에 통보하여 절차를 밟는다.
  • 제11조. 이 조약의 비준과 실행은 각국의 헌법 절차에 따라야 하는데, 미국부터 비준 절차를 시작하며, 과반수 체결국들의 비준이 완료된 시점에서 조약 내용이 효력을 갖는다.
  • 제12조. 이 조약 발효 후 10년이 지나면, 체결국 일부의 요구에 따라 그 내용의 개편에 대해 협의할 수 있다.
  • 제13조. 이 조약 발효 후 20년이 지나면, 체결국은 미국에 탈퇴를 통보할 수 있다.
  • 제14조. 영어와 프랑스어로 작성된 이 조약 원본은 미국 국립문서고에 보관되며, 각국은 복사본으로 비준을 필한 뒤 제출한다.



조약을 둘러싼 대립과 갈등







14548024241403




미국이 보관 중인 북대서양 조약문.



조약 제5조와 7조에 나타나 있듯, 이 북대서양 조약과 그에 따라 수립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는 UN과 대립하지 않으며 UN을 보완한다는 뜻을 표방했다. 그러나 제5조는 무력 공격에 대한 자위권 행사와 연계된 공동 대응의 형태로, UN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를 기다리지 않고 무력 사용을 할 수 있는 권한을 미국과 그 동맹국들에게 부여했다.

그런데 ‘무력 공격(armed attack)’이라는 용어의 해석을 둘러싸고 미묘한 문제가 자리했다. 과거에는 보통 전쟁이 안보 동맹의 관심사가 되었다. 그러나 무력 공격이란 무엇인가? 반드시 선전포고와 군대의 동원까지 이르지 않은 소규모 충돌이라도, 가령 소수 극렬분자의 테러 공격도 무력 공격의 범주에 들 수 있었고, 그 경우에 전쟁 결정은 반드시 의회의 승인을 필요로 하도록 한 미국 헌법의 제한에 상관없이 대통령이 곧바로 사실상의 전쟁 개시를 결정할 수 있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었다. 실제로 NATO의 첫 무력공격-공동 대응 시나리오는 2001년의 9ㆍ11 테러에서 비로소 현실화되었다. 이는 경우에 따라서는 제1차 세계대전의 불씨가 된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처의 암살 같은 사건도 민주적 제어 절차 없이 전면 핵전쟁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우려할 만한 사안으로,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격론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애치슨 국무장관을 비롯한 미국 정부 각료들은 그런 우려의 목소리에 대해 오히려 ‘미국이 해외 분쟁에 불가피하게 휘말리지 않을 수 있도록 근거가 마련되었다’고 설득했다. “UN 헌장 제51조에 의거한 개별적 또는 집단적인 자력 구제에 들어간 체결국에 나머지 체결국들이 지원하며, 필요하다고 여겨지면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북대서양 지역에 평화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제5조의 문구를 곱씹어 보라는 말이었다. 즉 유럽 등 체결국의 UN 헌장 51조에 걸맞지 않은 자력 구제에는 도움을 줄 의무가 없으며, 그것도 단지 ‘지원’이지 ‘전력을 다한 구원’이 아니기 때문에(앞선 브뤼셀 조약에서는 “체결국 중 어느 국가든 무력 공격을 당하면 나머지 체결국들은 전력으로 구원에 나선다”라고 명시되어 있었다), 반드시 병력 동원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며 상황에 따라 경제 지원이나 비전투원 지원 등으로 생색을 내면 그만일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무력 사용은 불가피한 대안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필요하다고 여겨지면” 동원할 수도 있는 카드의 하나였다. 이러나 저러나, 미국 행정부가 전보다 국내외적으로 훨씬 큰 재량권을 갖고, ‘세계의 경찰’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근거가 이 북대서양 조약 제5조에 따라 마련된 셈이었다.

아울러 제6조에서 그 무력 공격의 대상에 체결국들의 본토뿐 아니라 식민지 및 해외 주둔 병력까지 포함함으로써 강대국들의 제국주의 질서를 유지하려는 것이라는 비판을 받았으며, “체결국들은 이 조약의 목적과 북대서양 지역의 안보에 도움이 되는 한 유럽 국가들의 추가 가입을 만장일치로 결정한다”는 제10조의 내용도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만장일치로 결정한다는 규정은 룩셈부르크처럼 작디작은 나라가 서방세계 전체의 운명을 좌우할 수도 있다는 여지를 남겼고, 추가 가맹국 후보를 ‘유럽 국가’로 한정함으로써 터키나 이스라엘 같은 국가의 입장을 난처하게 했던 것이다. 또한 프랑코 독재 치하의 스페인은 가입이 한동안 거절되었는데, 그렇다면 역시 권위주의 정권이 들어선 포르투갈의 가입은 뭐냐는 볼멘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제8조도 문제가 되었다. 소련은 1942년에 영국과, 1944년에 프랑스와 맺은 공수동맹을 들먹이며 북대서양 조약이 그 동맹 관계와 상충된다고 거세게 항의했다. 그 동맹 조약들에는 ‘앞으로 서로를 위협하는 내용의 동맹을 그 누구와도 맺지 않는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탈리아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항복하며 맺은 조약에서 이탈리아 군 병력 규모를 제한했던 점도 꼬집었다. 그것은 “체결국들은 개별 또는 집단적인 무력 공격에 대항할 전력을 개별적 또는 집단적으로 발전시킨다”는 제3조와 어긋나지 않는가? 이런 소련의 항의에 대해 NATO는 제8조의 조항이 어디까지나 “향후의” 조약에 대해서만 구속하며, 이탈리아가 조약기구에 가입했다고 해서 병력 증강의 자율권을 얻은 것은 아니라는 식으로 변명했으나 소련의 불신을 해소할 수는 없었다.

이 밖에 제11조, 13조, 14조 등에서 이 조약이 미국 위주로 마련되었음이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었다. 제11조에서 조약의 비준과 실행은 각국의 헌법 절차에 따른다고 했는데 어느 나라는 간단하고, 어느 나라는 복잡했던 각국의 헌법 절차가 가져올 문제도 지적되었다. 그러나 이 조약이 체결된 바로 다음 날에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체결국 8개국이 미국에 군사원조를 요청한 것을 보더라도, 당시 서유럽 국가들은 미국의 도움이 없다면 자국의 안전을 보장하기 어렵다고 여기고 있었으므로 미국 위주로 판이 짜이는 일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 상원은 7월 21일에 82대 21로 조약을 비준해주었다.



NATO에 가입하려는 소련, 떠나려는 프랑스



NATO는 이사회를 두는 한편 미국, 영국, 프랑스가 상임그룹(Standing Group)이 되어 의사결정을 주도하게 되었다. 본부는 브뤼셀에 두고, 9월에 제9조의 규정에 따라 군사위원회가 출범했다. 1952년에 신설된 사무총장직은 영국군 장군인 헤이스팅스 이스메이가 처음 맡았다.

NATO가 처음으로 마주친 군사 문제는 묘하게도 북대서양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지역인 한국에서 벌어진 전쟁이었다. 표면적으로는 한반도의 내전일 뿐인 이 전쟁이 서방 국가들의 눈에는 소련의 대리 침략전으로 비쳤다. 극동이 무너진다면 다음 차례는 유럽이 아닐까? 이에 그들은 1950년 12월에 60개 사단 규모의 ‘유럽방위군’을 창설하기로 했다. 그래도 소련을 자극할 위험과 조약의 권한 문제 때문에 NATO 차원에서 한국전쟁에 개입하지는 않았지만, 벨기에, 룩셈부르크가 소규모나마 병력을 파병하고 덴마크, 이탈리아, 노르웨이도 의료 지원단을 보내는 등 성의를 보인 것은 NATO 회원국으로서의 입장이 작용한 결과였다. 그리고 터키는 1만 5천, 그리스는 1만여의 병력을 한국에 파견하여 미국, 영국, 캐나다에 뒤이은 대규모 파병국가가 된 저변에는 NATO 회원국이 되려는 의지가 있었다. 그 대가라고 할지, 한국전쟁에서 수백 명의 전사자를 낸 이 두 나라는 1952년에 마침내 첫 추가 회원국으로 NATO에 가입할 수 있었다.





14548024252180




1980년대 유럽의 군사적 대립구도. 파란색은 NATO 회원국, 붉은색은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회원국이다. 알바니아(붉은 사선)는 1968년에 바르샤바 조약기구를 탈퇴했으나 실질적으로는 협력 관계를 유지했다.



1952년 이후로는 동서간에 핵무기 개발 경쟁이 본격화되면서 그동안 재래식 무기 위주였던 NATO의 전략도 핵무기 위주로 바뀌게 되었다. 그러나 적어도 겉으로는 1950년대 초까지도 양 진영의 대립이 ‘당연한 현실’은 아니었다. 1954년, 소련이 유럽의 안보에 기여하고 싶다며 NATO 가입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NATO는 격론 끝에 이를 거절했으며, 이듬해에는 1950년에 처음 결의된 이래 오랫동안 미뤄져온 서독의 가입을 성사시켰다. 그러나 서독의 가입이 NATO 자체적인 틀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1954년 8월 30일에 프랑스 의회에서 비준이 부결됨으로써(프랑스의 독립성을 강조하고 독일 재무장을 경계하는 드골주의 우파와, 소련에 대한 압박을 경계하는 좌파의 보기 드문 협력의 결과였다) ‘유럽방위공동체’가 무산되자, 곧바로 과거 브뤼셀 조약에 따라 성립했으나 유명무실했던 ‘서유럽공동체’를 개편하면서 여기에 서독도 포함시킨다는 내용이 새롭게 추진된 것이다. 10월에 체결된 파리 협약이 이듬해 4월, 프랑스마저 비준에 성공함으로써 재무장한 서독을 포함한 반공 동맹체제가 강화되자, 소련은 1955년 5월에 바르샤바 조약기구를 발족하여 대항하였다. 이로써 냉전 대립 구조가 완성되었다.





14548024259023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이 된 그는 프랑스의 독자성을 강화하려 노력했다. <출처: (cc) Maximus0970 at en.wikipedia.org>



회원국들의 개별 국가이익이 NATO 전체의 이익과 반드시 부합하지는 않으며, 미국의 입장과 서유럽의 입장도 한결같지 않다는 점 때문에 NATO는 냉전이 한창인 시절에도 간간이 위기를 맞이했다. 1956년에 이집트의 나세르가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한다고 선언하면서 벌어진 ‘수에즈 문제’와 뒤이은 제2차 중동전쟁에서 소련을 의식한 미국이 소극적으로 대응하자, 실망한 영국과 프랑스는 독자적으로 개입 강도를 높이려 했으나 결국 중동에서 발을 뺄 수밖에 없었다. 이는 서유럽, 특히 프랑스에서 미국에 대한 불신을 고조시켰다. 1959년에 집권한 샤를 드골 프랑스 대통령은 프랑스 지중해 함대를 NATO 지휘범위에서 빼내고, 미국 핵의 프랑스 배치를 막았으며, 1960년에는 영국에 이어 독자적 핵 개발에 성공했다. 그리고 마침내 1966년에는 NATO 회원국으로는 남되 모든 군사력을 NATO에서 빼냄으로써 사실상의 탈퇴를 단행했다. 또한 1963년의 키프로스 사태에서는 전통적인 앙숙, 그리스와 터키가 서로의 입장을 고집하면서 자칫 NATO 회원국끼리 전쟁을 벌이는 사태 일보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냉전을 넘어 미래로?



서로 상대를 가루로 만들고도 남을 전력을 갖춘 채 NATO와 바르샤바 조약기구가 노려보던 냉전은 결국 노려보기만 하다가 끝났다. 과도한 군비경쟁이 소련 경제를 장기적으로 거덜 내는 바람에 동쪽 진영이 제풀에 주저앉았다는 점이 크고, 뒤늦게 이를 극복하고자 군비축소와 경제회생을 추진했던 고르바초프의 개혁은 혼란과 반발을 가져와 오히려 소련의 명을 더 단축시키고 말았다.





14548024269665




NATO의 확장. 색깔별로 각각 다른 연도에 가입하였다. 사회주의권의 몰락 이후 1991년 바르샤바 조약기구가 해체되면서 회원국들 상당수가 NATO에 가입했다.



사회주의권의 몰락으로 냉전이 끝나자 NATO도 유명무실해지지 않을까 싶었지만, 현실은 그 반대로 전개되었다. 1991년 바르샤바 조약기구가 해체된 다음, 그 회원국들 상당수가 NATO에 가입한 것이다. 체코, 헝가리, 폴란드는 1999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 슬로베니아, 슬로바키아, 루마니아는 2004년, 알바니아, 크로아티아는 2009년에 각각 가입했다. 이런 NATO의 확장을 미국은 자신의 영향권이 동구권까지 확대되는 것으로 이해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로써 사실상 NATO가 ‘대서양 동맹’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으면서 ‘범유럽 집단안보체제’로서의 성격이 강해졌다고 할 수 있다. 유럽 회원국들은 1992년의 보스니아 내전, 1999년의 코소보 분쟁에서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활약했으며, 2001년의 9ㆍ11 테러 때도 미국을 전폭 지지하겠다고 했으나 뒤이은 ‘테러와의 전쟁’에서는 미국과 다른 목소리를 내기도 하는 모습을 보였다. 2009년에 프랑스가 군사력을 다시 NATO에 돌림으로써 NATO의 유럽적 정체성은 더 커진 것으로 보인다.





14548024284050




1999년 NATO군 소속으로 코소보에서 작전 중인 독일군. <출처: (cc) Nick Macdonald at en.wikipedia.org>



아직도 미국의 군사력은 다른 유럽 국가들의 군사력을 합친 것보다도 훨씬 월등하며, 따라서 NATO라는 틀이 앞으로도 유지될 가능성도 높다. 그러나 세계대전이 다시 일어날 전망이 크지 않으면서 미국을 상대로 하는 유럽 외 지역에서의 국지전에 유럽이 어쩔 수 없이 말려드는 상황이 계속된다면, 다른 대안이 강구될 수도 있다. 그것은 유럽연합이 자체의 정치적 통합을 어느 정도까지 달성할 수 있는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14548024287161

함규진 | 서울교육대학교 교수/역사저술가
글쓴이 함규진은 여러 방면의 지적 흐름에 관심이 많다. 정치학을 전공하여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주로 역사와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썼고, 인물이나 사상에 대한 번역서도 많이 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등 서로 대립되는 듯한 입장 사이에 길을 내고 함께 살아갈 집을 짓는 것이 꿈이다.

저자의 책 보러가기
|
인물정보 더보기



14548024303254

출간도서
조약의 세계사 2014.12.22
고대부터 현대까지 64개의 조약으로 읽는 화해와 배신, 강압과 화합 그리고 진보의 역사.

‘지뢰는 과연 쓸모 있는 무기일까?’, ‘난징 조약은 불평등조약인가?’와 같은 흥미로운 물음을 던지며 세계사의 이면을 파고들어 역사와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을 넓힌다. 강화도 조약과 같이 우리 역사 속 조약부터 마스트리히트 조약처럼 생소한 조약, 고대의 히타이트-이집트 조약에서부터 현대에 체결된 리우환경협약까지 역사의 흐름을 바꾸고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계를 형성한 조약을 알아본다.

책정보 보러가기


발행2013.11.18.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