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핵 확산 금지 조약 - 인류를 위한 대타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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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94회 작성일 16-02-07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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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폭탄 투하 후 일본 히로시마의 모습.



1945년 8월 6일,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어느 날, 미 공군 소속 <에놀라 게이> 호가 푸른 하늘 위를 날고 있었다. 기장의 어머니 이름을 딴 그 비행기는 단 한 발의 폭탄을 싣고 있었다. ‘작은 소년’, 고요한 히로시마의 아침 하늘로 떨어진 그 폭탄은 거대한 묘비 같은 버섯구름을 피어올리며, 히로시마 시민 15만 명의 목숨을 날려버렸다. 대규모 공습이 되풀이되던 당시에 그 정도의 인명 피해는 그렇게까지 대단하지 않았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그 피해가 단 한 발의 폭탄으로 초래되었다는 것이었다. 사상 최초 원자폭탄의 위력에 세계는 놀라면서도 반신반의했으며, 사흘 만에 또 한 발이 나가사키를 초토화하고서야 그 의심은 풀렸다. 그리하여 미국은 바라던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받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원자폭탄을 쓸 만한 가치가 있었을까? 미국인도 일본인도, 세계의 대부분 사람들이 그런 의문을 지울 수 없었으며, 이 무시무시한 무기가 마치 최초의 화약무기처럼 사방으로 퍼지며 세상을 초열지옥으로 바꾸는 미래를 상상하고 몸서리를 쳤다. 그로부터 여러 나라는 한편으로 핵을 가지려고 애쓰고, 한편으로는 남들이 핵을 갖지 못하도록 애써야 했다.



핵 시대의 도래, 핵 확산의 문제



이런 ‘핵 확산 차단’ 정책은 아직 미국만이 핵을 쥐고 있던 초기 핵 시대에 이미 나타났다. 1946년, 미국이 내놓은 ‘바루크 계획’은 미국이 보유한 핵을 국제 관리 하에 두는 대신 더 이상의 핵 보유국이 나오지 않도록 국제 감시와 사찰을 실시한다는 것이었다. 22년 뒤의 핵 확산 금지 조약과 맥락상 차이가 없었던 이 제안에 소련은 콧방귀를 흥 뀌더니, ‘그로미코 계획’으로 응수했다. 그것은 기존의 핵무기(다시 말해 미국의 핵무기)를 전량 폐기하되, 사찰은 실시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그러자 미국은 원자력법을 제정하면서 ‘어떤 일이 있어도 원자력 기술을 해외로 이전해서는 안 된다’고 단단히 못박았다.

차차 냉전으로 접어들고 있던 두 나라 사이에 타협점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두 나라가 같은 것을 염두에 두고 있음은 분명했다. 기존의 모든 무기를 “재래식”으로 만들어버린 이 놀라운 무기를 어떻게든 우리 손에 넣어야 한다! 그러나 다른 나라들이 갖는 일은 막아야 한다! 우리의 안보 우위가 무너질뿐더러, 세계가 위험에 처하게 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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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미국의 핵실험에서 피어난 버섯구름.



결국 1949년에 소련이 핵실험에 성공함으로써 미국의 핵 독점은 깨졌고, 1년 뒤에는 영국도 핵을 보유했으며, 1953년에는 소련이 수소폭탄 실험까지 성공했다. 그러자 미국은 아이젠하워의 UN 연설에서 ‘핵의 국제 관리’를 제안하고, 국제원자력기구(IAEA) 설립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그런 한편 핵무기를 대량생산하여 절대 우위가 아닌 상대 우위를 극대화하고, 미국의 방위 전략을 핵무기 중심으로 재편함으로써 소련 등 경쟁 국가를 위압하자는 방침도 세웠다. 이른바 ‘대량 보복 전략’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소련을 긴장시켜 역시 핵무기 증산에 박차를 가하도록 했을 뿐 아니라, 동서 진영을 초월하여 너도 나도 핵을 가지려 혈안이 되도록 했음은 그 전략이 미국의 단기적 안보에는 도움이 되었을지라도 장기적 안보, 그리고 국제안보 자체에 악영향을 주었음을 의미한다.

1955년에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제1회 원자력 평화이용회의가 열리고, 1956년에는 IAEA 수립이 확정되면서 ‘핵의 평화적 이용을 위한 국제 관리’라는 이상이 진전되는 듯 했다. 그렇지만 핵 확산은 물밑에서 끊임없이 이루어져서 1960년에는 프랑스가 핵을 보유하고, 그 전후해서 이스라엘도 실질적 핵보유국이 되었으며, 서독, 일본, 스웨덴, 인도, 파키스탄, 그리고 북한도 비밀리에 핵을 보유하려는 노력을 경주 중이었다.

마침내 1964년에 중국까지 핵실험에 성공해서 공식적인 다섯 번째 핵 보유국이 되자, 과거의 바루크 계획을 큰 틀에서 수립하여 더 이상의 핵 확산을 막아야 한다는 인식에 미국뿐 아니라 소련도 깊이 공감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8개국이 참여하는 군축회의(ENDC)가 결성되고, 1965년 거기에 미국이 핵 확산 금지 조약의 첫 번째 초안을 제출하기에 이른다.



진영과 국익이 뒤얽힌 오랜 협상



이렇게 해서 시작된 핵 확산 금지 조약 관련 협상은 1965년 6월부터 1968년 4월까지 끌었다. 너무 간략해서 사실상 초안이라고 할 수 없던 미국 측 초안을 대신하고자 1965년 7월에 제기된 영국과 캐나다의 합작 초안은 ‘기존 핵 보유국의 핵 보유는 인정하되 더 이상의 핵 확산은 금지하고, 핵 보유국은 순차적으로 핵 군축을 한다’는 원칙을 기본으로 하였다. 또한 모든 체결국가(핵 보유국과 비보유국 모두)가 IAEA의 사찰을 받고, 체결국들 중 핵 보유국은 비보유국을 핵 위협으로부터 보호해주며, 체결국들 가운데 미국ㆍ영국ㆍ소련ㆍ프랑스ㆍ중국 5개 핵 보유국뿐 아니라 캐나다ㆍ서독ㆍ인도ㆍ파키스탄ㆍ 이스라엘ㆍ일본이 반드시 비준을 해야만 정식 발효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체결국 모두가 핵 사찰을 받는 것과 비보유국에게 핵우산을 무조건 제공하는 것은 핵 보유국들 입장에서 탐탁치 않았는데, 특히 핵 보유국이 비보유국을 핵으로 보호한다면 ‘서독에 배치된 미국 핵이 이웃한 폴란드를 보호하고, 소련이나 중국의 핵이 한국을 지킨다’는 식의 냉전 논리로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벌어지는 셈이었기에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또한 이미 핵을 실제로 보유했거나 핵 보유 의지가 강했던 이스라엘, 인도 등도 이에 반대하여, 결국 영국-캐나다안은 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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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빈에 위치한 IAEA 본부.



다음으로 8월에 제시된 미국의 두 번째 초안은 핵 확산을 차단하기 위한 조항으로 “개별 국가 사이에 핵무기나 핵 기술을 이전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조항을 마련했는데, 이것이 소련의 신경을 건드렸다. 당시 미국은 ‘다각적 핵전력(multilateral nuclear force)’ 구상을 갖고 있었다. NATO 회원국 병력이 탑승하고 미국의 핵미사일을 탑재하는 잠수함대 다국적군을 결성한다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소련에게 막대한 위협이 되는 한편 영국, 프랑스 등 NATO 회원국들에게 소련의 보복 및 예방 공격이 가해질 위험을 높이는 방안이어서 1962년의 미국, 영국, 프랑스 3자회담에서 무산된 적이 있었다. 핵 확산 금지 조약에서 개별 국가 사이에서만 핵무기 이전을 금지한다면 집단 차원의 이전은 가능하다는 셈이니, 소련이 결사반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로써 미국안도 무산되자 9월에는 소련안이 나왔다. 이는 또 NATO의 집단적 동향을 원천봉쇄하려는 의도가 너무 과하게 작용하여, 개별적이든 집단적이든 핵무기와 핵 기술의 이전을 절대 금지할 뿐만 아니라, 핵전력이 외국에 배치되는 것도 금지하고, 평화적인 핵 기술 이전조차 금지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는 비보유국들에게는 불만스럽기 짝이 없는 내용이었고, 이를 받아들인다면 서유럽에 배치한 핵전력을 당장 철수시켜야 했던 미국도 강력 반대하여, 이 역시 무산되고 말았다.

생각해보면 소련은 바르샤바 조약기구에 소속된 국가들의 핵 개발을 철저히 통제하고 있었으며, 핵 확산 문제는 NATO 회원국들과 제3의 국가들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이는 한쪽에서 보면 미국의 동맹 장악력이 소련만 못하다는 의미였고, 다른 쪽에서 보면 반 소련 진영과 비 소련 진영의 핵전력이 지속적으로 증가한다는 의미였다. 미, 소 양국은 이 문제에 직면하여 서로를 견제하고, 각자의 뒷마당을 단속하였으며, 또 때로는 서로 협력하는 복잡한 상호작용을 되풀이하였다. 그래서 아주 단순한 구도인 이 조약의 문안 작성이 그토록 오래 걸렸던 것이다.

아무튼 겨우겨우 미, 소 사이에 조약안 합의가 이루어진 것은 1967년 8월이었는데, 그 뒤로도 다른 국가들의 이견과 반발 때문에 조약은 성사되지 못하고 시간만 흘렀다. 결국 1968년 6월의 ‘핵 확산 금지 조약 체결을 촉구하는 결의안’이 UN에서 통과된 다음에야 비로소 체결이 현실화되었는데, 그나마 프랑스, 중국 같은 핵 보유국이나 인도, 이스라엘 같은 중요한 ‘비보유국’은 외면하는 가운데 진행된다.



NPT 체제의 수립



핵 확산 금지 조약(Non-Proliferation Treaty, NPT)은 1968년 7월 1일, 미국, 소련, 영국과 비보유국 53개국 대표에 의해 뉴욕에서 체결되었다. 그 내용(요약된)은 다음과 같다.

제1조. 핵무기를 보유한 체결국은 핵무기나 여타 핵폭발 장치를, 또는 그러한 무기나 장치의 관리권을,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누구에게든 양도하지 않는다. 또한 핵무기 비보유국이 그러한 무기 또는 장치를 제조, 획득, 관리하는 일을 어떤 방법으로도 원조, 장려 또는 권유하지 않는다.

제2조. 핵무기를 보유하지 않은 체결국은 핵무기나 여타 핵폭발 장치를, 또는 그러한 무기나 장치의 관리권을,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누구로부터도 양도받지 않는다. 또한 스스로 그런 무기 또는 장치를 제조, 획득하지 않으며, 제조에 필요한 원조를 구하거나 받지 않는다.

제3조. 핵무기를 보유하지 않은 체결국은 원자력의 평화적 사용 여부를 확인받기 위하여 자국의 모든 핵 시설 및 핵 물질에 대하여 IAEA의 핵 사찰을 받는다. 이를 위해 18일 내로 IAEA와 협상을 시작하여 그로부터 18개월 내에 핵안전협정을 체결한다.

제4조. 본 조약의 어떠한 규정도 제1조와 2조의 규정에 위배되지 않는 핵에너지의 생산과 활용의 권리를 침해할 수 없다.

제5조. 적절한 국제적 감시 및 적절한 국제적 절차에 따르는 이상, 핵폭발의 평화적 활용으로부터 발생하는 이익은 허용된다.

제6조. 핵무기를 보유한 체결국은 조속한 시일 내에 핵무기 경쟁 중지 및 핵 군비 축소를 위한 교섭을 성실하게 추진해야 한다.

제7조. 본 조약의 어떠한 규정도 권역별로 비핵지대를 창출하는 지역적 조약을 체결할 수 있는 권리를 침해할 수 없다.

제8조. 모든 체결국은 본 조약에 대한 개정안을 제의할 수 있다. 본 조약에 대한 개정안은 모든 핵무기 보유 체결국과 동 개정안이 배부된 당시의 IAEA 이사국인 체결국 전체의 찬성을 포함하는 체결국 과반수의 찬성투표로 승인된다. 본 조약의 발효일로부터 5년이 경과한 후 본 조약의 목적과 규정이 실현되고 있음을 검토하는 평가 회의를 스위스 제네바에서 개최하며, 그 이후 5년마다 개최한다.

제9조. 본 조약은 모든 국가에 개방된다. 체결국은 비준으로 조약의 효과를 발생시킨다.

제10조. 모든 체결국은 본 조약상의 문제에 관련되는 비상사태가 자국의 지대한 이익을 위태롭게 하고 있을 경우에는 본 조약으로부터 탈퇴할 수 있다. 탈퇴할 경우 3개월 전에 모든 조약 체결국과 UN 안전보장이사회에 통보해야 한다. 또한 본 조약의 발효일로부터 25년이 경과한 후, 본 조약이 무기한으로 효력을 지속할 것인가 또는 일정 기간 동안 연장될 것인가를 결정하기 위한 회의를 소집하며, 체결국 과반수의 찬성에 따라 결정한다.

제11조. 영어, 러시아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중국어로 작성한 본 조약 원본은 기탁국(미국, 영국, 소련) 정부의 문서보관소에 기탁된다. 본 조약의 비준본은 기탁국 정부에 의하여 체결국에 전달된다.



조약의 한계와 불평등



이 조약이 실질적으로 핵무기를 보유할 권리를 기존의 5개 핵 보유국에 한정하고 그 ‘핵 기득권’을 영구화하는 의미를 지니며, 그런 가운데 그 5개국 중 프랑스, 중국이 빠지고 인도, 이스라엘 같은 주요 비보유국(확산이 이미 진행 중이거나 임박했다고 여겨진)에게도 외면된 사실은 이것이 세계의 평화와 인류의 보전을 위해 중요한 진일보라는 일부의 평가를 무색하게 했다.

먼저 핵 확산을 막는다는 목표를 볼 때, 이 조약의 한계는 명확했다. 첫째, 가입하지 않은 국가의 핵 보유를 막을 수 없고, 둘째, 비밀리에 진행되는 핵 개발을 철저히 통제할 수 없으며(IAEA에 신고하지 않은 핵 시설을 사찰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므로), 셋째, 조약을 위반하고 핵 개발이나 핵 확산을 한다고 해서 확실한 제재를 가하기 어렵고, 넷째, 평화적 핵 개발 또는 핵 기술 이전에서 핵무기 개발이 빚어질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하며, 다섯째, 핵 개발 의지가 있는 국가가 조약에서 탈퇴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점에 있었다. 그리하여 NPT 체결 이후에 다섯 나라가 더 ‘핵 클럽’에 가입했고(인도, 파키스탄, 북한, 이스라엘, 남아프리카공화국. 단 이스라엘은 핵 보유를 명확히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남아공은 한때 보유했다가 지금은 폐기했다고 선언했다), 스위스, 대만, 브라질, 아르헨티나, 이집트, 리비아, 사우디아라비아, 이라크, 이란 등이 핵 개발을 추진했거나 지금도 추진 중이며, 독일, 일본, 스웨덴 등은 언제라도 핵무기를 보유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춘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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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PT 체제 현황.



또한 그것은 ‘불평등 조약’이라는 오명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기존 5개국만 핵 보유 권리를 누린다는 점부터 불공평한데다, 핵 사찰의 의무를 비보유국에게만 부과한 점 역시 불만의 대상이었다. 사찰권을 IAEA에게 독점시킨 점도 문제가 되었는데, 프랑스, 서독, 이탈리아,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는 NPT 이전에 수립했던(1958년) 유럽원자력공동체에 의한 독자적 사찰을 받겠다고 고집했다(그것이 NATO 회원국들의 자체 사찰을 의미하므로 자국에 불리하다는 소련의 항의에 따라 이는 허용되지 않았는데, 이는 프랑스 등이 NPT에 가입하지 않기로 결정한 하나의 이유가 되었다).

이런 불만을 무마하고자 NPT는 핵 보유국들의 핵군축 의무와 함께 비보유국들의 평화적 핵에너지 이용에 대한 폭넓은 보장을 마련했다. 그러나 그것 또한 냉전이 끝나기까지 지구를 몇 번이고 파괴할 정도의 핵 보유를 해소하지 못한 데다, 인도처럼 평화적 핵 개발에서 핵무기 개발을 끌어낸 경우가 속출함으로써 과연 NPT의 실효성이 무엇이냐는 비판을 자아내기도 하였다.



NPT 이후



1970년대와 1980년대는 한편으로 미-소간 전략무기제한협정(SALT) 1회(1972)와 2회(1979), UN 군축회의(1978, 여기서 프랑스는 비핵지대 조약에 참여하는 국가에게, 소련은 핵 개발을 추진하지 않는 국가에게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으며 미국과 영국은 NPT나 기타 비핵지대 조약국이 자국을 공격하지 않는 한 핵 공격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미-소간 중거리 핵전력 조약(INTF, 1987) 등 핵군축과 핵무기 사용 자제를 위한 국제적 노력이 이루어진 시대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인도(1974), 남아공(1980)이 새로 핵 보유국이 되었으며, 북한 등의 핵 개발이 물밑에서 진행되고, SALT II가 결렬되는 등(미국은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이유로 이를 비준하지 않았고, 소련은 이런 미국의 태도에 항의를 거듭하다가 탈퇴했다) 핵전쟁의 암운이 가시지 않는 시대이기도 했다.

1990년대 초는 핵전쟁의 우려가 그 어느 때보다 크게 해소되는 듯했던 광명의 시기였다. 사회주의권이 붕괴하고 동서 냉전이 종결되면서 전 세계적으로 평화의 전망이 짙어졌으며, 이에 1990년에는 남아공이 보유한 핵무기의 폐기를 선언하고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도 핵 개발 중단을 선언했다. 1991년에는 미국과 러시아 사이에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 1회)이 체결되고, 남북한 비핵화공동선언이 나왔으며, 인도와 파키스탄도 서로의 핵 시설을 공격하지 않기로 협정을 맺었다. 1992년에는 START I의 리스본 프로토콜이 맺어졌는데, 이는 새로 독립하여 졸지에 핵 보유국이 된 벨로루시, 우크라이나, 카자흐스탄에 있던 구소련의 핵무기들을 미국이 이전 비용을 제공함에 따라 러시아로 이전 또는 폐기하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중국과 프랑스도 NPT 체제를 준수하겠다고 선언함으로써 사실상 NPT에 가입했다. 또한 1993년에는 START II가 체결되고, 핵분열물질생산금지조약(FMCT)이 제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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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 보유국 및 핵 개발국 현황.



그러나 이때 NPT의 권위를 가장 확실히 위협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바로 북한의 핵 개발이었다. 1953년에 소련과 원자력이용협약을 체결하고 1962년에 영변에 핵 시설을 설치한 뒤로 꾸준히 핵 개발을 해온 북한의 핵무기 개발 가능성은 1989년부터 알려지기 시작했다. 북한은 1974년 IAEA에, 1985년 NPT에 가입했으나 이런 저런 이유로 핵사찰을 회피해왔다. 그러다가 1993년에 IAEA의 특별사찰 요구를 거부하고 NPT 탈퇴를 선언해버렸으며, IAEA는 북핵 문제를 UN 안보리에 회부함으로써 ‘북핵 위기’가 한반도와 세계를 긴장시켰다.

북한의 입장에서는 미국을 비롯한 일부 국가들만 핵을 보유할 수 있는데다 미국에 우호적인 인도, 이스라엘 등의 핵 보유는 간섭하지 않는 NPT 체제가 근본적으로 불공평하며, NPT 제10조에 보장된 탈퇴의 자유를 행사했을 뿐이라고 주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과거 인도, 이스라엘, 남아공 등의 핵 보유는 비 NPT 국가들의 일이었기에 어쩔 수가 없었지만 NPT 가입국이 핵 개발을 비밀리에 진행한 예는 이것이 처음이었기에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북한이 세계에서 가장 긴장도가 높은 지역의, 가장 예측 불가능한 국가였으므로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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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평안북도 영변군에 위치한 영변 핵 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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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10월, 백악관에서 북한의 조명록 차수를 접견하는 클린턴 미국 대통령.



한때 미국의 영변 폭격과 제2의 한국전쟁까지 초래할 뻔 했던 북핵 위기는 1994년의 북미기본합의로 일단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북핵 위기는 그 뒤로도 재연되어 마침내 2006년 북한 핵실험에까지 이르렀으며, 1995년에는 체첸 반군이 핵 물질 테러를 시도하기도 했다. 이에 1995년, NPT 제10조에 따라 그 지속 기간을 결정하려 열린 회의에서는 핵 확산 금지 조약을 무기한 지속한다는 데 합의가 이루어졌다. 당시 비핵보유국들은 핵보유국들이 핵 기득권 포기에 분명한 의지를 보여줄 것을 전제로 이에 동의했는데, 이에 따라 1996년에는 포괄적 핵실험 금지조약(CTBT)이 체결, 지상, 지하, 공중, 해저를 막론하고 핵실험을 금지하며 위반 시 강력한 제재 조치를 받도록 함으로써 핵무기의 유지와 개량이 어려워지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핵군축 추가’를 요구한 북한, 인도, 파키스탄 등이 체결을 거부했으며, 미국에서도 공화당이 우세를 점한 의회에서 이 조약의 비준이 부결됨으로써 ‘핵 없는 세상’의 전망은 다시 불투명해졌다.

2000년대에는 미국이 핵 관련 미래를 더욱 암울하게 하는 주역처럼 행동했다. 2001년에 취임한 조지 W. 부시의 미국은 냉전 시대 이후 처음으로 “미국의 핵심 전력은 핵전력”이라는 입장을 천명했으며, ‘핵 없는 세상’을 만들자는 2006년의 UN 결의안에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으로서 거부권을 행사했다. 그리고 레이건의 전략방위구상(SDI)를 계승하는 미사일방어체계(MD)를 구축하기 위해 1972년에 SALT I의 일환으로 이루어졌던 탄도탄미사일 제한(ABM) 협정을 파기해 버렸다. 이에 러시아는 그 보복으로 START에서 탈퇴하여(2001년), 동서 냉전-핵 경쟁의 유령이 되살아난 듯한 광경이 연출되었다. 부시는 2002년에 중국, 러시아, 북한, 이란, 이라크, 시리아, 리비아 7개국을 “전쟁을 예방하기 위해 미국이 선제 핵 공격을 실시할 수 있는 국가”로 지목하여 세계적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또한 NPT 체제의 허점을 보완하기 위해 핵 물질의 수송을 강제 차단하는 내용의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PSI)을 주도했는데, 이로써 2003년에 핵 개발 장치를 싣고 리비아로 향하던 독일 선적의 <BBC 차이나 호>가 차단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실효성이 적은 반면 공연히 국제적 긴장을 부추긴다는 비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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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리비아로 향하던 <BBC 차이나> 호에서 압류한 핵 개발 장치.





핵 없는 세상은 가능한가



2010년대로 접어들면서 핵 시대의 전망은 다시 다소 밝아지고 있다. 부시를 대신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앞서 저버렸던 ‘핵 없는 세상’ 비전을 미국이 주도적으로 실현하겠다고 천명했으며, 2009년에 핵안보정상회의를 주최하고 이후 2년마다 이를 열기로 했다. 그리고 러시아를 다시 다독여서 뉴(New) START를 체결했다. 중국도 오바마의 비전에 공감한다는 뜻을 표명하고 있으며, 아프리카 국가들 사이에서 비핵지대 협정이 체결된 것이나(2009년) 최근 이란 핵 문제가 일단락된 것은 그 노력의 결실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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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3월 대한민국 서울에서 열린 2012 핵안보정상회의(Nuclear Security Summit)에 참석한 각국 정상들.



그러나 아직 길은 멀고, 넘어야 할 산은 많다. 공화당 등 미국 보수파들이 오바마의 대규모 핵전력 감축안은 “미국의 안보 우위를 위협할 뿐 아니라 그만큼 재래식 전력을 강화해야 하므로 과다 방위비 부담을 초래한다”면서 강한 반대 입장을 견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단 잠잠해진 북핵 문제나 이란 핵 문제 등이 또 언제 활화산이 될지도 알 수 없다.

NPT는 여러 가지 모순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수십년 동안 핵 확산을 몇 개 국가 선에서 차단하고 특히 유럽과 일본 등 핵 강국으로서의 잠재력이 뛰어난 국가들의 핵 보유를 억제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진정 ‘핵 없는 세상’을 실현하려면 그것으로는 부족하지 않겠는가? 언젠가는 ‘핵 보유국을 최소화하고 핵 확산을 억제하는’ 조약이 아니라 ‘모든 핵을 일체 폐기하고 더 이상 핵을 제조하지 않는’ 조약을 체결하고, 실행할 날이 올 것인가? 그 실현은 또 다른 무서운 무기의 출현을 동반하지 않을 것인가?

생각해보면 핵무기란 하나의 무기라고 보기에는 강렬한 데뷔 때부터 군사적 의미보다 정치적 의미가 컸다. 그 무서운 위력을 보며 드는 “이를 어떻게든 통제하고 억제해야 하지 않느냐”는 인식, 그것은 부시의 과격한 방식으로든 오바마의 부드러운 방식으로든, 미국 같은 강대국이 이데올로기의 시대를 넘어서 여러 국가들 사이에서 리더십을 갖고 국제 정세를 좌우하는 하나의 명분이 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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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규진 | 서울교육대학교 교수/역사저술가
글쓴이 함규진은 여러 방면의 지적 흐름에 관심이 많다. 정치학을 전공하여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주로 역사와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썼고, 인물이나 사상에 대한 번역서도 많이 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등 서로 대립되는 듯한 입장 사이에 길을 내고 함께 살아갈 집을 짓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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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도서
조약의 세계사 2014.12.22
고대부터 현대까지 64개의 조약으로 읽는 화해와 배신, 강압과 화합 그리고 진보의 역사.

‘지뢰는 과연 쓸모 있는 무기일까?’, ‘난징 조약은 불평등조약인가?’와 같은 흥미로운 물음을 던지며 세계사의 이면을 파고들어 역사와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을 넓힌다. 강화도 조약과 같이 우리 역사 속 조약부터 마스트리히트 조약처럼 생소한 조약, 고대의 히타이트-이집트 조약에서부터 현대에 체결된 리우환경협약까지 역사의 흐름을 바꾸고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계를 형성한 조약을 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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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2013.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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