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내리막으로 향하는 남부의 운명 - 북군, 남부의 수도 리치먼드를 향해 진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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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89회 작성일 16-02-07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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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세에 몰린 남부 VS 총력전에 돌입한 북부



북군이 게티즈버그에서 거둔 승리는 흔히 남북 전쟁의 분수령으로 간주된다. 리의 2차 북진은 프레데릭스버그와 챈슬러즈빌에서 북군을 격파한 후 그 승세를 타고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리는 북진을 위하여 7만 2천이라는, 그야말로 없는 병력을 긁어모아 병사들을 동원했는데, 게티즈버그에서 무려 2만 3천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는 물론 낙오병이나 질병으로 전투 불능이 된 병력은 포함하지 않은 숫자이다.

다행히 북군 사령관인 미드(George G. Meade)가 퇴각하는 남군을 추격하는 데 소극적이어서 남군은 무사히 후퇴할 수 있었지만, 이 전투를 계기로 남군은 본격적으로 병력 부족에 시달리게 되었다.

물론 북군 역시 2만 3천의 사상자를 내기는 하였지만, 기본적으로 남부보다 인구가 많고 이민자가 지속적으로 유입되던 북부에는 병력 자원이 아직 충분한 상태였다.

다시 말하지만 아무리 승세를 탄 것이기는 해도, 리의 북진은 전체적인 국면으로 보았을 때 북군을 무너뜨리려는 적극적인 공세라기보다는, 실질적으로 포위당한 상태에서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한 남부의 몸부림이었다.

이미 북부는 우수한 해군력으로 남부를 에워싼 상태였다. 버지니아와 노스캐롤라이나의 해안 곳곳에는 북군의 거점이 있었다.

북군은 뉴올리언스를 점령하고 미시시피강의 마지막 거점인 빅스버그를 점령하기 직전이었다. 또한 북군은 켄터키와 테네시를 장악하고 남부의 중심부인 조지아와 애틀랜타로 진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우세한 병력 자원을 바탕으로 남부 여러 곳에서 남군을 위협할 수 있었던 북군에 맞서, 리는 없는 병력을 집중시켜 큰 승리를 노려야 했다.

결국 모든 것이 남부에게 불리한 상황에서 리가 노린 것은 유럽 국가들의 지원을 끌어들이고 워싱턴 정부를 협상 테이블로 이끌어낼 ‘한판 싸움’에서의 승리였다.

게티즈버그에서의 패배는 리가 노린 회심의 일격이 실패로 돌아갔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 싸움 이후 남부는 열세를 만회하지 못하고 북부의 인구와 물량에 확실히 밀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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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끝간 데 없이 길어지고 확실한 승리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가운데 가난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징집이 강화되자 곳곳에서 징집에 반대하는 봉기가 일어났다.


계속해서 전시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북부 또한 내부 사정이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링컨은 1863년 3월 13일에 징집령에 서명하였는데, 이 법안의 골자는 할당된 지원병 숫자(Quota)를 충당하지 못하는 주(州)에서 징집으로 모자라는 숫자를 채우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계속해서 사람들을 군대로 끌어가면서도 확실한 승리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불만이 불거지기 시작하였다.

결국 1863년 6월에 오하이오주의 홈스 카운티(Holmes County)에서 징집에 반대하는 주민들이 봉기하였다.

이들은 야포를 탈취하여 어설프게 요새까지 만들고 저항하였으나, 주지사가 보낸 연방군 420명에 의하여 진압되었다.

이어 1863년 7월에는 뉴욕 맨해튼에서 징집령에 반대하는 대규모 폭동이 일어났다. 물론 그 원인은 훨씬 더 복잡했지만, 돈이 있는 자들이 300달러를 내고 대리인들을 세워 징집을 피할 수 있는 조항이 문제가 되었다.

돈 있는 자들은 대리인을 세우거나 죽을 위험이 적은 해군, 또는 비전투 지역 주둔 부대에 지원하는 등의 방법으로 전장에 나가는 것을 회피하였다.

이 때문에 하층민들과 이민자들 사이에서 ‘가난한 자들만 전쟁에 나가 죽는다’는 분위기가 만연했고, 1863년 7월 13일 맨해튼 47가 근처에 모여 있는 ‘의용소방대’를 포함한 500명의 군중이 징병 사무소를 습격하면서 폭동이 시작되었다.

이미 시작부터 경찰의 대응 수준을 넘어선 규모였고 설상가상으로 근처에 군 병력이 없어 폭동은 맨해튼 전체로 번졌다.

연방 정부는 게티즈버그 이후 후퇴하고 있던 남군을 추격하기 위한 병력의 일부를 차출하여 뉴욕에 투입하였다.

수천 명의 연방군 병력이 맨해튼에 도착하여 폭동을 일으킨 군중에 발포하고, 총검으로 격투를 벌이기에 이르렀다.

뉴욕 포구에 정박해 있던 연방해군 함선들 역시 동원되어 군중에 포격을 가하였다. 이러한 무자비한 진압작전 끝에 3일 후인 7월 16일에 겨우 폭동이 진정되었다(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2002년 영화 <갱스 오브 뉴욕(Gangs of New York)>는 바로 이 드래프트 폭동(draft riot)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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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3년 7월, 뉴욕 맨해튼 한복판에서 벌어진 드래프트 폭동. 연방군 병력이 군중을 향해 발포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링컨 대통령은 1863년 9월 15일에 의회의 승인을 얻어 계엄령을 선포하면서 유사시 ‘인신보호권(Habeas Corpus)’을 정지시킬 수 있는 권한을 얻었다.

인신보호권이란 근대 민주정의 기본적인 권리로서, 정부 권력이 정당한 법적 절차 없이 시민을 체포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기본적인 권리조차 유사시 철폐될 수 있다는 것은 워싱턴의 연방정부가 총력전으로 돌입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로즈크랜스, 채터누가에 무혈입성하다



리가 게티즈버그에서 패하고 빅스버그가 그랜트에게 함락되고 있을 때, 서부에서는 또 다른 북군 장군이 승전보를 올리고 있었다.

브래그의 테네시군(Confederate Army of Tennessee)은 북군 로즈크랜스(William Rosecrans) 소장의 컴벌랜드군에 밀리면서 테네시주를 북군에 온전히 내준 상태였다.

당시 테네시주 머프리스버러(Murfreesboro)에 있던 북군 컴벌랜드군 사령관 로즈크랜스는 총사령관 할렉(Halleck)의 거듭되는 공격 독촉과 진격하지 않으면 병력을 빼서 그랜트에게 주겠다는 위협에도 아랑곳 않고 6월 내내 진격을 위한 준비를 착실히 하고 있었다.

1863년 6월 24일 마침내 로즈크랜스는 테네시 동부를 향하여 진격을 시작하였다. 브래그의 테네시군은 북군의 진격로 앞에 전선을 구축하였으나 로즈크랜스의 군은 재빠른 우회기동을 통하여 전선을 돌파하였다.

브래그의 지휘 능력을 의심한 일부 남군 장성들이 전선의 병력을 성급히 철수시킨 탓에 브래그는 전선을 포기하고 테네시주 털러호마(Tullahoma)로 물러났다.

브래그는 이곳에서 전선을 재정비하려 하였으나 여전히 그가 미덥지 못했던 부하 장성들은 전선을 유지하는 것이 어렵다며 브래그에 반발하였다.

부하 장성들과 싸우다가 군을 분열시킬 것을 두려워 한 브래그는 털러호마도 포기하고 채터누가(Chattanooga)로 물러났다.

로즈크랜스의 철저한 준비성 덕분에 최소한의 병력 소모로 큰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워싱턴 정부의 반응은 시큰둥하였다.

승전보에 급급한 정부의 관점에서는 로즈크랜스가 늑장을 부리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전쟁상(戰爭相, Secretary of War) 스탠턴은 “리의 군은 궤멸되었고 그랜트 역시 큰 승리를 거두었소. 당신과 당신의 위대한 군대는 이 반란에 결정타를 날릴 기회를 목전에 두고 있소. 이 기회를 잡지 않겠다는 말이오?”라는 전보를 보내며 로즈크랜스를 힐난하였다.

큰 공을 세웠음에도 치하는커녕 비난을 받자 로즈크랜스는 발끈하여 다음과 같이 반박하였다.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 우리의 위대한 병사들은 테네시 중부에서 반란군을 깨끗이 몰아냈습니다.

우리의 위대한 병사들을 대신해서 말씀드리자면 승전보가 (병사들의) 피로 쓰여지지 않았다고 해서 이런 큰 승리를 무시하는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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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상 에드윈 스탠턴(Edwin M. Stanton). 로즈크랜스의 철저한 준비를 늑장이라 생각해 그를 힐난하며 대립각을 세웠다.





월리엄 로즈크랜스(William Rosecrans) 소장. 털러호마 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지만 순간의 실수로 치카마우가에서 대패한다.




1864년의 대선을 위하여 계속되는 승리가 필요했던 연방정부는 계속해서 진격을 독촉하였다.

그러나 제대로 된 길도 없는 데다 험한 산들과 깊은 강이 번갈아 나오는 지형인 동부 테네시를 가로질러 진격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로즈크랜스는 정부의 독촉을 적당히 무시하면서 보급선을 확보하고 수송 역량을 강화한 후 8월 16일에야 다시 진격을 시작하였다.

일단 진격을 시작하자 작전은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일단 병력을 여러 방면으로 나누어 동시다발적으로 진격시켰다.

그리고 우선 와일더 (John T. Wilder) 대령 휘하 1개 여단을 채터누가 방면으로 급파하였다.

급속 행군으로 8월 21일에 채터누가 인근에 도착한 와일더의 여단은 동북쪽 방면에서 시내를 포격하였다.

여단이 보유한 포의 수가 얼마 안 되어 포격은 심하지 않았지만 느닷없이 날아오는 포탄에 주민들은 혼란에 빠졌고, 강 포구에 있던 연락선 두 척이 침몰하였다.

동북쪽은 채터누가로 들어오는 도로가 있는 곳이라 브래그는 동북에서 북군의 공격이 있으리라 생각하고 병력을 재배치하였다.

그러나 북군의 규모가 얼마인지 확실치 않아 공격을 못하고 있던 중, 9월 8일에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접하게 된다.

로즈크랜스의 본군이 채터누가 서남쪽 외곽에 나타났다는 것이었다. 와일더의 양동부대를 이용한 성동격서(聲東擊西)가 성공한 것이다.

양면 공격을 받을까 두려워 한 브래그는 재빨리 군을 채터누가에서 빼내어 조지아주로 철수시켰고, 이로써 로즈크랜스의 군은 채터누가에 무혈입성(無血入城)하였다.

빅스버그와 함께 채터누가의 함락 소식은 수세에 몰린 남부의 관점에서는 또 한 번의 중대한 타격이었다. 중부와 동부를 잇는 교통의 요지임은 물론, 채터누가는 남부에서 몇 안 되는 코크스(coke)와 철강의 생산지였다.

그렇지 않아도 빈약한 남부의 무기 생산은 더욱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더 큰 문제는 이제 북군이 남부의 경제적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조지아주의 문턱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동부에서는 리(Lee)의 작전 능력으로 북군과 대등하게 싸우고 있었지만, 서부에서는 남부가 미주리, 아칸소, 켄터키, 테네시 등을 북군에 내주면서 속절없이 밀리고 있었던 것이다.


내리막길을 타는 남부의 운명, 채터누가의 전투



이제 테네시주를 전부 내주고 조지아주를 위협받게 된 남부로서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어떤 형태로든 반격을 시도해야만 했다.

남부 정부는 브래그(Braxton Bragg)가 맡고 있던 테네시 군관구(Department of Tennessee)와 버크너(Simon Buckner)의 동부 테네시 군관구(Dept. of East Tennessee)를 합치는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버크너 휘하의 군사들은 모두 브래그의 군에 소속되었고, 여기에 동부전선의 롱스트리트(James Longstreet) 휘하 2개 사단이 더해지면서 7만이 넘는 대군이 만들어졌다.

남부 정부는 새로이 증원된 병력으로 브래그가 로즈크랜스의 북군을 공격하여 테네시를 되찾을 것을 주문하였다.

그러나 브래그는 공세에 요구되는 보급과 수송 문제를 들어 전쟁부(War Department)의 요구를 거부하였다.

어차피 교통과 수송이 어려운 지역이니 차라리 굳건히 방어선을 구축하고, 오히려 북군의 보급선을 늘어뜨리는 것이 낫다는 것이 그의 의견이었다.

채터누가를 함락시킨 로즈크랜스는 그의 군을 합친 다음 조지아주로 진공을 개시한다. 브래그의 군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후퇴하고 있다는 정보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은 본군을 거느리고 채터누가에 있는 동안 우측에 있던 토머스(George H. Thomas)의 군으로 피전-마운틴(Pigeon Mountain)에 있던 브래그 군의 좌측을 공격하게 하였다.

브래그는 뒤늦게 북군이 나뉘었다는 것을 알고 휘하 하인드먼 (Thomas Hindman)과 힐의 부대로 토머스의 군을 상대하게 하였다. 북군과 남군은 여러군데서 소규모 전투를 벌였지만 승부는 쉽게 가려지지 않았다.

소규모 전투를 통하여 북군이 분산되어 있음을 확신하게 된 브래그는 채터누가에 있는 로즈크랜스의 본군에 대한 공격에 나선다. 전투는 채터누가 5km앞쪽 치카마우가(Chickamauga) 강에서 벌어졌다.

채터누가 인근까지 진격한 브래그의 군은 9월 19일 로즈크랜스 군에 대한 정면공격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다음 날에도 좌우측 공격에 모두 실패한 브래그는 롱스트리트로 하여금 8개 여단의 병력으로 북군의 중앙을 공격하게 하였다.

바로 이때, 로즈크랜스는 일부 정찰병들로부터 전선에 공백이 생겼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된다.

전선 좌측에 틈이 벌어졌으니 이를 메꾸어야 된다고 생각한 로즈크랜스는 일부 병력을 좌측으로 이동시켰다.

중앙의 병력을 맡고 있던 북군 지휘관 우드(Thomas Wood)는 로즈크랜스의 명령이 이상하다고 여겼지만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기 위해 좌측에 있던 브래넌(John Brennan)의 뒤로 이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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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크랜스의 실수로 위기에 처한 북군을 구한 조지 토머스(George H. Thomas). 치카마우가 전투로 그에게는 ‘치카마우가의 큰 바위’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그런데, 사실 좌측의 공백은 없었다. 부정확한 정보였던 것이다. 그리고 로즈크랜스는 심신이 지친 상태에서 부정확한 정보에 대한 재확인 없이 그대로 일선 지휘관에게 하달한 것이다.

오히려 우드의 병력이 이동하면서 북군의 중앙에 공백이 생겼고, 때마침 이 방면으로 이동하던 롱스트리트 부대가 이 공백을 그대로 들이쳤다.

북군 중앙 부대들은 이 공격에 그대로 허물어지고 북군은 일순간 크나큰 위기에 처하고 말았다.

다행히 로즈크랜스의 본대가 황망히 후퇴하는 동안 토머스가 나머지 병력을 수습하여 북군 전선 좌측에 있던 말발굽 모양의 고지인 호스슈-릿지에 방어선을 재구축한다.

남군은 토머스의 방어선을 뚫으려고 여러 차례 공격을 시도해보았지만 실패하고, 이 틈을 타 로즈크랜스의 본대는 무사히 채터누가로 후퇴할 수 있었다(이 전투로 토머스는 ‘치카마우가의 큰 바위(The Rock of Chickamauga)’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본대가 빠져나갈 시간을 벌어준 토머스의 군 역시 호스슈-릿지에서 철수하여 채터누가 인근에 방어선을 재구축하였다.

남군은 서부전선에서 얼마 안되는 큰 승리를 거두었고, 채터누가 근처의 고지를 점령하면서 채터누가를 포위하게 된다.

브래그는 로즈크랜스에게 내준 채터누가를 재점령하고 테네시를 회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브래그의 일시적인 희망이 절망으로 변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워싱턴 전쟁부는 로즈크랜스의 패배 이후 빠르게 대응하여 동부에서 후커 소장 휘하 15,000명을 테네시로 급파하였다.

그리고는 그랜트에게 연락을 취하여 셔먼 휘하 2만을 채터누가 방면으로 보냈다. 9월 29일, 전쟁부는 그랜트에게 직접 채터누가 방면으로 향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전쟁부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하여 재빠른 연락을 취하였지만 북군에게 있어 채터누가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패배를 당한 로즈크랜스가 공황 상태에 빠지면서 두문불출하였고, 이 틈을 탄 남군이 로즈크랜스의 컴벌랜드군의 주요 보급로인 테네시강을 봉쇄하였던 것이다.

포위된 채터누가의 북군은 보급로마저 끊겨 식량과 탄약이 떨어질 위기에 처하였다.

그랜트는 10월 26일 보급로 재확보를 위한 ‘크래커 라인 작전(Cracker Line Operation)’을 개시한다.

결국 치카마우가 전투 후 거의 한 달이 지나서야 북군 구원대가 브라운즈-페리(Brown’s Ferry)의 전투에서 남군 봉쇄 부대를 격퇴하면서 다시 북군의 보급로가 열렸다. 이후 와우햇치(Wauhatchie)에서 후커가 반격을 시도하는 남군을 재차 격퇴하면서 남군의 봉쇄는 완전히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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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급로가 끊겨 봉쇄되었던 북군은 그랜트의 보급로 재확보 작전이 승리함에 따라 남군의 포위에서 벗어났다. 이후 그랜트는 채터누가 남쪽의 룩 아웃 마운틴과 미셔너리 등선에 포진하고 있던 남군을 공략하기 위한 작전을 계획한다.


남군의 봉쇄를 돌파하고 채터누가 방면의 작전권을 인수한 그랜트는 셔먼이 2만 병력을 거느리고 나타나기를 기다렸고, 11월 중순경 셔먼이 도착하자 본격적인 반격을 계획한다.

그러나 남군은 채터누가 남쪽의 룩-아웃 산맥(Lookout Mountains)과 미셔너리 등선(Missionary Ridge) 등의 고지에 포진하고 있어 공략이 쉽지 않았다.

후커는 “싸움꾼 조(Fighting Joe)”라는 별명에 걸맞게 공격적인 계획을 세웠고, 룩-아웃 산맥 끝머리 강변 저지대에서 돌파에 성공함으로써 산 정상에 있던 남군을 후퇴하게 만들었다.

한편 다음 날 미셔너리 고지의 승패는 불분명한 명령 전달에 의하여 결정되었다.

중앙부를 막고 있던 남군은 북군이 공격하면 위치를 사수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일부는 전세가 어려워지면 후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공격이 시작되자 토머스의 북군은 고지 아래까지만 확보하라는 명령을 무시하고 치카마우가의 패배를 설욕하겠다며 고지를 오르기 시작하였다.

이에 중앙을 지키고 있던 일부 남군 부대가 북군의 수적 우위에 눌려 후퇴하자 다른 부대들도 이를 따라 물러나기 시작하였다.

북군은 남군 포대의 쏟아지는 포격에도 아랑곳없이 그들을 막으려는 일부 남군 병력을 격파하고 고지를 점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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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령이 없었음에도 용기와 혈기를 앞세워 미셔너리 등선(Missionary Ridge)의 남군 방어선을 돌파하고 있는 북군. 결국 고지를 점령하고 전투에서 승리한 북군은 조지아주로 진격할 수 있었다.


룩-아웃 마운틴에 이어 지형상 최적의 방어 위치인 미셔너리 등선까지 빼앗긴 남군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브래그는 다시 조지아로 물러나야 했다. 북군이 이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북군은 다시 조지아주에 대한 진공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셔먼에 의한 초토화 작전의 시발점이 된다.


그랜트, 동부에 등장하다



1864년이 시작되면서 북군은 루이지애나주를 모두 장악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하여 레드-리버 작전(Red River Campaign)이라 명명된 원정을 개시한다.

이미 점령한 아칸소와 뉴올리언스에 이어 미시시피강 하류를 확보함으로써 전함들의 원활한 항행을 보장하려 한 것이다.

북군의 초토화 작전은 동부에서 시작되었다. 북군은 이 작전을 위하여 뱅크스(Nathaniel Banks) 휘하 3만의 병력을 동원하였다.

이에 맞서는 남군의 테일러(Richard Taylor)에게는 1만의 병력밖에 없어 북군의 완승이 예상되었으나, 의외로 뱅크스는 테일러의 기동전술에 말려들어 맨스필드(Mansfield)와 플레전트-힐(Pleasant Hill) 등지에서 대패하고 북군의 루이지애나 점령전은 실패로 끝난다.

이로 인하여 남부의 마지막 대항(大港)이라 할 수 있는 앨라배마 모빌(Mobile)에 대한 공격이 지연되어 남부는 약간이나마 해상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승리에도 남군에 불리한 전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1864년 3월, 서부에서의 승리를 이끈 그랜트가 드디어 동부로 진출하여 동부의 주력군인 포토맥군을 맡게 되었다.

아직도 공식적인 수장은 미드(George G. Meade)였지만, 실질적인 지휘는 그랜트가 하였다. 이와 더불어 전쟁 장관 스탠턴은 여러 방면에서 남부를 동시에 공략한다는 대전략을 수립하였다.

이전에는 각 전선의 병력이 따로 움직였다면 이제는 북군의 움직임 전체를 총괄하게 되는 것이다.

이 작전에 의거하여 북군은 ① 남부 수도 리치먼드 직공 ② 남군 주요 보급지인 셰넌도어 밸리 공략 ③웨스트 버지니아를 통한 우회기동 ④ 조지아 방면 공격 그리고 ⑤ 엘러배마 모빌 항(港)에 대한 공격을 동시에 전개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 맞선 남부의 공식적인 작전은 ‘버티기’였다. 물자와 인력이 부족한 남부가 북부에 공세를 취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따라서 남부의 유일한 희망은 북부의 물량공세에 맞서 완강하게 버텨 북군 측의 손실을 노리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혹시라도 전쟁에 지친 북부의 주민들이 1864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혹시라도 민주당 평화파(peace Democrat)를 대통령으로 선출할 수도 있다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민주당 평화파라면 협상이 어느 정도 가능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찌되었건 군사적인 승리가 아니라 ‘죽어라 버티기’를 통한 기사회생에 목을 매달고 있을 정도로 남부의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그랜트의 포토맥군은 신병 모집과 징집을 거쳐 다시 10만이 넘는 대군이 되어 있었다. 이에 비하여 리의 병력은 6만 남짓, 그랜트의 주공(主攻)을 막기에도 벅찬 병력이었고, 북군의 다방면 공세에 맞서 병력을 나누어줄 여유란 전혀 없었다.

그랜트는 목표가 리치먼드임을 굳이 숨기지 않았고, 기발한 작전이라던가 기묘한 우회기동 같은 것 없이 우직한 정공법을 택하였다.

1864년 5월 4일, 동부전선의 운명을 결정하게 되는 오버랜드 작전(Overland Campaign)이 시작되었다.

그랜트는 버지니아주 스포칠베이니아 카운티(Spotsylvania County)를 뒤덮고 있는 울창한 숲 지대를 통과하여 리치먼드로 향하려고 하였다.

그랜트는 빠른 진군으로 남군이 도착하기 전에 숲 지대를 빠져나갈 심산이었다. 반면 리는 북군이 개활지로 나오게 되면 자신이 불리하리라 생각하여 일부러 숲 지대에서의 충돌을 유도하였다. 남군은 북군을 가로막는 데 성공하였고 리의 계산은 잘 들어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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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주 스포칠베이니아 인근의 숲 지대인 윌더니스(The Wilderness)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는 북군과 남군. 전투는 많은 사상자를 낸 채 무승부로 끝났지만, 그랜트는 계속해서 리치먼드 방향으로 진격한다.


5월 5일, 북군 워런(Gouverneur K. Warren)의 5군단 병력이 이웰(Richard Ewell)의 남군과 격돌하고, 조금 떨어진 도로에서는 게티(George Getty)의 북군 6군단과 핸콕(William Hancock)의 북군 2군단이 남군 힐(A.P. Hill)의 부대와 충돌했다.

전투가 시작되었을 무렵 북군은 7만 대 4만으로 병력의 우위를 점하고 있었지만, 많은 병력이 울창한 숲 지대에서 기동하기는 어려웠다.

그리고 숲에서는 피아(彼我)를 구분하기가 쉽지 않았고, 오인 사격도 잦았으며, 포격에 의하여 잡목에 불이 붙으면서 숨어 있던 병사들이 타죽는 등 한 마디로 지저분한 난전(亂戰)이 되었다.

5일의 전투는 양측 모두에게 막대한 사상자(북군 1만 7000, 남군 1만 2000)만을 남긴 채 승패 없이 무승부로 끝났다.

다음 날 아침 다시 재개된 전투에서 북군 핸콕 군단의 빠른 공격으로 인하여 남군 우익이 무너질 뻔했지만, 때마침 롱스트리트(James Longstreet)의 부대가 도착하면서 북군의 공격을 가까스로 막아내었다.

이 와중에서 롱스트리트가 중상을 입고 후송되었고, 전선이 안정되면서 잠시 소강상태에 빠진다.

그랜트는 5월 7일에 전투를 중지하고 일부 견제 병력만 남긴 채 병력을 남동쪽으로 이동시킨다.

북군이 숲 지대에서 기습을 당하기는 했지만, 반대로 숲이 남군의 기동 역시 방해하기 때문에 남군보다 빨리 리치먼드 쪽으로 이동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었다.

이전의 북군 지휘관들이 병력을 북쪽으로 철수시킨 것과 달리 오히려 적진 더욱 깊숙이 들어가기로 한 것이다.


리치먼드로 가는 험난한 여정



리는 병력을 옮겨 스포칠베이니아 인근의 고지인 로렐-힐(Laurel Hill)에 군을 포진시키고 북군의 진로를 가로막는다. 남군은 로렐-힐 인근에 6km가 넘는 참호선을 구축했다.

이 때문에 북군은 공격하기가 매우 어려웠지만, 스포칠베이니아가 남부 수도 리치먼드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는 만큼 피해갈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그랜트는 5월 8일에 워런 소장과 세지윅(John Sedgwick) 소장의 병력으로 남군 참호선에 대한 정면공격을 시도한다.

그러나 공격이 실패하자 그랜트는 병력을 재정비한 후 5월 10일에 재차 공격을 명한다.

이번에는 이틀 전 전투의 실패를 교훈 삼아 남군의 참호선 중 앞으로 반원을 이루면서 튀어나와 ‘뮬 슈(Mule Shoe, 나귀 발굽)’라고 불린 부분에 병력을 집중하였다.

남군 참호선은 이번에도 북군의 공격을 버티어냈지만, 뮬-슈의 남군 병력은 북군의 공격에 상당히 흔들리고 있었다.

5월 12일, 그랜트는 뮬-슈 방면에 핸콕의 병력을 보강하여 공격을 재개하였다. 일시적으로 참호선이 뚫리면서 공격이 성공하는 듯 보였으나, 남군 지휘부가 병력을 수습하여 반격하면서 북군의 돌파구가 다시 메워졌다.

뮬-슈의 서쪽 측면에서는 24시간 내내 백병전을 포함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워런과 번사이드(Ambrose Burnside)에 의한 조공(助攻)도 이루어졌으나 전선 돌파에 실패하였다.

5월 18일, 그랜트가 마지막으로 최종 공격에 나섰지만 남군의 저지선은 뚫리지 않았다. 5월 19일에는 남군의 반격이 있었지만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병력만 낭비하는 결과만 가져왔다.

그랜트는 이내 계획을 수정하여 스포칠베이니아 공격을 취소하고 대신 남동쪽으로 우회하여 5월 21일에 리의 측면을 공략할 것을 계획하였다.

그랜트는 남군이 다음 방어를 하기 위해 최적의 위치인 노스애너(North Anna) 강가로 향할 것이라 여기고 군을 빠르게 이동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의 군대가 노스애너강에 도착하였을 때는 이미 리의 군사들이 강 건너편을 장악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남군이 아직 방어진지를 구축한 상태가 아니었던 까닭에 북군은 기습을 결정하였고, 워런과 핸콕의 부대가 각각 도강에 성공하여 교두보를 확보하였다.

남군은 북군 교두보를 밀어내려 반격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남군은 이에 약간 뒤로 물러났고, 리는 역(逆) ‘V’자형의 참호를 구축하게 하였다. 북군이 공격할 때 자연스럽게 북군의 병력을 분산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이 조치는 효과적이어서 남군은 5월 24일 감행된 북군의 정면공격을 격퇴하였다.

북군 준장 레들리(James Ledlie)의 부대는 역 V자 참호의 끝부분을 공격해보았으나 이 역시 실패하였다. 남군의 원래 계획은 북군을 격퇴시킨 다음 즉각 반격을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북군의 공격이 끝났을 때 마침 사령관 리는 장염으로 인한 복통에 시달리는 중이었고, 지휘관을 잃은 남군은 반격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치열했던 노스애너의 전투 역시 무승부로 끝났다. 그랜트는 지친 포토맥군에게 다시 남동쪽으로 이동할 것을 명하였다. 이어 베데스다(bethesda)에서 다시 전투를 벌이지만 이 전투 역시 무승부로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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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 동안 치열하게 벌어졌던 콜드 하버(Cold Harbor) 전투는 양측 모두에게 어마어마한 피해를 가져온 채 무승부로 끝났다. 이 전투에서 북군은 남군의 참호선을 번번이 뚫지 못하고 1만 3천의 사상자를 냈고, 리치먼드로 가는 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양군이 다시 격돌한 것은 콜드-하버(Cold Harbor) 전투였다. 1864년 6월 초에 약 2주일간 벌어진 전투에서 그랜트의 군은 남군의 참호선을 돌파하고 리치먼드로 향하려 했지만, 강고한 참호선에 대한 돌격은 무의미한 자살행위라는 사실만 철저히 깨달아야 했다.

이 전투에서 북군은 1만 3천의 사상자를 내었고, 리치먼드로 향하는 길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랜트는 굴하지 않고 군의 방향을 다시 틀어 리치먼드 남쪽의 피터스버그(Petersburg)로 향한다. 피터스버그는 리치먼드로 통하는 유일한 항구이자 보급 통로였다.

만약 북군이 피터스버그를 점령하게 되면 리치먼드를 고사시킬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이로써 남북 전쟁의 끝머리를 장식하는 피터스버그의 공방전이 벌어지게 된다.

참고문헌〈단행본〉


  • Iver Bernstein, [The New York City Draft Riots: Their Significance for American Society and Politics in the Age of the Civil War]
  • Benjamin Franklin Cooling, [Counterthrust: From the Peninsula to the Antietam]
  • John William Draper, [History of the American Civil War]
  • Joseph E. Johnston, [Narrative of Military Operations during the Civil War]
  • James M. MacPherson, [Battle Cry of Freedom: The Civil War Era]
  • Louis P. Masur, [The Civil War: A Concise History]
  • William T. Sherman, [Memoirs of General William T. Sherman]

 


 




참고문헌〈인터넷〉





김성남 | 안보·전쟁사 전문가
글쓴이 김성남은 전쟁이 인간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가지고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미국 UC 버클리 동양학과를 졸업한 후 연세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국제학 석사를 받고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에 진학하여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 [전쟁으로 보는 삼국지], [전쟁 세계사] 등이 있으며 공저로 [4세대 전쟁]이, 역서로 [원시전쟁: 평화로움으로 조작된 인간의 원초적인 역사]가 있다.


발행2013.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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