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진주만 공격 - 태평양 전쟁의 막이 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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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66회 작성일 16-02-07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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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12월 7일 피격 당한 진주만. 침몰하여 불타고 있는 미국 전함 웨스트 버지니아.



1941년 여름부터 미국과 일본의 관계는 최악을 행하여 줄달음 치고 있었다. 미국과 일본은 미 제독 페리의 내항으로 외교 관계를 수립하고 일본은 국가 현대화에 여러 가지로 미국의 도움을 받았었다.

러일 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난 뒤에 두 국가는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상대방을 가상적으로 설정하고 혹시 있지도 모를 전쟁에 대비한 준비들을 했지만 여전히 두 국가 사이는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1931년 만주 사변이 일어나 괴뢰 만주국이 생기고 1937년 중일 전쟁이 터지자 미국 영국 등의 서방국들은 일본의 침략 정책이 자신들이 동남 아시아에 소유하고 말라야, 필리핀, 네덜란드령 동인도 등이 위협 받을 수 있다고 보고 중국을 응원했다.

일본과 미영의 갈등이 깊어갔지만 일본 정부를 압도하고 있던 도조 히데키(東條英機)의 통제파는 오히려 확전을 주도하며 상황을 악화시켜 나갔다.

장개석을 압박하던 일본은 독일과 동맹조약을 맺고 더욱 자신을 얻어 당시 독일의 괴뢰 정부였던 프랑스 식민지 베트남의 남쪽 사이공 일대에 병력을 파견했는데 미국, 영국, 네덜란드 등은 자기들의 세력권이라고 믿던 동남아시아의 중심부로 일본 군대가 들어왔던 격인지라 이를 중대한 위협으로 간주했다.

미국과 영국, 그리고 네덜란드는 1941년 7월 일본에 석유와 고무, 고철 판매를 중단 선언을 하였다.

특히 석유 수출 금지는 일본에게 전쟁 수행은커녕 함대의 유지조차 할 수 없었고 산업마저 타격을 받는 치명적인 제재였다.

일본은 바로 루즈벨트 대통령과 친교가 있던 구루스 사부로(来栖三郎)해군 제독을 수반으로 한 협상 대표단을 미국으로 보내 협상을 시도했으나 상대가 서로 양보를 하지 않아 진척이 없었다.

미국의 금수 조처로 일본 내에 대미개전의 여론이 비등했으며 호전적인 정책은 수상 도조 히데키와 육군 등의 군벌들이 주도하고 있었다. 해군이 주도한 반대 의견도 있었지만 어쩔 수 없이 미일 전쟁은 피할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달았다.



일본 해군의 진주만 공격 작전 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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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군국주의의 대표인물 도조 히데키(1884~1948)





일본 해군 제독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 1884~1943)




미국과의 전쟁을 반대했었던 일본 해군 제독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 1884~1943)는 할 수 없이 개전에 동의하고 개전과 동시 미국에 일격을 가할 작전 계획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그는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했었기 때문에 미국의 거대한 공업 생산력을 잘 알고 있었다. 당시 일본의 생산력은 미국의 단 10분의 1에 지나지 않았다.

야마모토는 미국과의 전쟁을 장기로 끌어가 봐야 승산이 없으니 적 주력을 기습 일격에 섬멸해버리고 전쟁을 진행하다가 러일전쟁 때 대마도 해역에서 일본 함대가 러시아 함대를 전멸시키듯 미국 함대와 결전을 벌여 승리한 후에 유리한 입장에서 협상으로 전쟁을 마무리한다는 구상이었다.1)

결국 야마모토의 구상은 헛된 꿈으로 끝났고 일본은 태평양 전쟁에서 전국토가 초토화 되는 수준으로 대패하였다. 대군(大軍)의 적 앞에 전략의 묘수 없다는 말이 상기되는 상황이지만 이때 야마모토는 어쩔 수가 없었다. 그의 초심대로 일본은 해서는 안 되는 전쟁을 시작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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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기습의 목표로서 노린 것은 하와이에 있던 미국 태평양 함대였다.

태평양 함대는 일본과의 관계가 험악해지자 미국 본토 서해안 샌디에고(San Diego)에 있다가 하와이로 전진 배치된 함대로서, 동해안을 근거지로 하는 대서양 함대와 같이 미국의 2대 주력함대중 하나였다.

야마모토는 이 구상을 신임하던 부하이며 제11항공함대 참모장인 오니시 다키지로2)(大西瀧治郎)소장에게 알려주고 하와이 기습 작전을 수립해보도록 하였다. 이 때가 진주만 기습보다 거의 일년전인 1941년 1월 이었다.

오니시는 야마모토가 내려준 과제를 다시 그의 능력 있는 부하 제1항공전대 겐다 미노루(源田実) 중좌에게 주면서 그에게 진주만 기습 작전안을 짜보도록 지시하였다.

겐다는 야마모토가 신임하던 연합함대 참모 부장 구로지마 가메토(黒島亀人) 대좌와 같이 연구에 들어갔다.

오니시 제독(大西 瀧治郎)은 해군 항공병과의 리더로서 나중에 가미가제 자살 특공 작전을 실행에 옮긴 인물이다. 일본 패전직후 자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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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먼저 영국의 일본 대사관 무관과 이태리 주재 무관을 통해 1940년 이탈리아 타란토 항내의 이탈리아 해군 함대를 기습했었던 영국 항모부대의 공격 작전을 집중적으로 연구하였다.

이 사례는 일본 기동 함대가 하와이를 공격하는 작전 수립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 하와이 기습 작전을 수립하면서 계속 하와이가 관계 된 정보를 수집하였고 필요한 출동 장비들을 정비 획득 또는 개발했다,



신형 어뢰와 폭탄의 개발



진주만 기습을 위해서 해결한 기술적 문제도 두 가지가 나타났다. 그 한 문제는 해면에 어뢰를 투하 직후 수면 아래 깊숙이 잠기는 문제의 해결이었다.

투하 된 어뢰는 낙하의 충격으로 일단 5-60미터의 깊이로 잠수했다가 다시 어느 정도 떠올라 적함으로 돌격해 가는 과정을 거친다.

진주만의 수심은 단지 12미터에 지나지 않아 기존 어뢰를 사용할 수가 없었다. 기존 어뢰를 투하하면 어뢰는 얕은 진주만의 해저에 박힐 판이었다.

그래서 작전 입안자인 겐다 중좌는 어뢰 사용을 포기하고 모두 폭탄만을 사용해서 진주만의 함대를 공격하는 방법까지도 검토해보기도 했었다.

그러나 폭격의 명중률이 예상 밖으로 안 좋아 어뢰를 사용 하는 쪽으로 다시 작전을 구상했다.

해군 기술진은 어뢰에 자이로 장치를 달아 투하 된 자세를 안정시켜서 어뢰가 해면에서 뒹구는 현상을 제거하고 투하 시 물속 깊이 잠기는 것을 방지하였다.

흔히 알려지듯 단지 어뢰 꼬리에 베니아 합판으로 만든 대형 날개만 다는 정도로는 진주만의 얕은 바다에서 어뢰가 깊이 가라앉는 현상을 막지는 못했다. 날개 뿐 아니라, 자이로 장치도 필요하였던 것이다.

두 번째는 전함의 두꺼운 장갑을 뚫고 함체 깊숙이 관통하여 폭발하는 대형 폭탄의 개발이었다. 미군의 전함을 일격에 파괴하기 위해서는 대형의 폭탄이 필요하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신형폭탄의 개발에 시간적 제한을 가진 해군 연구진은 전함 나가토(長門)형 전함의 400mm 주포탄을 항공용으로 개량하여 사용하기로 하였다. 이 폭탄의 무게는 800kg이나 되어 기체가 큰 97식 함공기가 적재하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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겐다 미노루(1904-1989년). 전후에 일본 항공자위대 막료장(참모총장)을 지냈고 일본 자민당 소속 참의원으로 정치 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후치다 미쓰오(淵田美津雄, 1902~1976)는 겐다 미노루와 같이 오니시 소장이 가장 아끼는 부하로서 진주만 공격 이후 호주의 다윈 항과 영국령 실론 폭격 때도 지휘관으로 참전했었다. 전후 전도사가 되어 한국에도 다녀간바 있었다.






항공모함 주력의 진주만 기습부대 편성



항공모함(이하 항모라 약칭 한다, 참고로 일본에서는 공모(空母)라 약칭한다) 6척을 동원한 부대 편성은 기본적으로 결정되어 있었다. 기동함대를 이끌 지휘관은 나구모 주이치 (南雲忠一) 중장이 내정되었다.

공격 항공대를 총지휘할 지휘관은 어뢰 공격의 명수 후치다 미쓰오 (淵田美津雄) 중좌가 임명되었다.

조종사들은 비행시간이 800 시간이 넘고 중국 전선에서 실전 경험을 쌓은 베테랑들만을 엄선하였다. 그 때까지 이렇게 항모들을 주력함대로서 구성한 함대의 출동은 없었다.

당시 해전이란 대형 함들이 함포로서 하는 것이라는 개념이 지배적이었고 항공기로서 적 함대를 공격 하는 개념이 아직 대부분의 지지를 받고 있지 못할 때였다.3)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최종 편성한 하와이 공격 기동부대의 편성은 아래와 같다.

역설적이나, 일본 해군은 해상 항공 작전의 선구자로서 본격적인 항모 시대를 열었지만 적국 항모 부대에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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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항공함대(통상 기동부대로 불림)

사령관 나구모 주이치(南雲 忠一) 중장

  제1항공전대

사령관 나구모 주이치 직솔. 항모 아카기(赤城), 가가(加賀).

  제2항공전대

사령관 야마구치 다몬(山口多聞)소장. 항모 히류(飛龍), 소류(蒼龍).

  제5항공전대

사령관 하라 주이치(原忠一)소장. 항모 쇼가쿠(翔鶴), 즈이가쿠(瑞鶴).

그리고 항모 부대를 엄호하며 하와이까지 동행 출동했던 두 척의 전함과 두 척의 순양함을 위시한 구축함, 유조선들로 편성 된 호위 함대가 있었다.

  제3전대

사령관 미카와 군이치(三川軍一) 중장. 전함 히에이(比叡), 기리시마(霧島).

6 척의 항공모함이 동원할 수 있는 함재기의 최대 가능 숫자는 399기였다. 더 세분해서 들여다보면 영식 함상 전투기(제로 전투기)가 120기, 99식 함상 폭격기가 135기, 97식 함상 공격기가 144기다.

일본 해군에서는 이들 함재기들을 간단한 약식 명칭으로 불렀다. 영식 함상 전투기를 함전(艦戰), 99식 함상 폭격기를 함폭(艦爆), 97식 함상 공격기를 함공(艦攻)으로 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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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식 함상 폭격기





97식 함상 공격기





영식(제로) 전투기




한편 이런 과정을 통해 작전이 확정되는 동안 항모 조종사들은 하와이와 지형이 비슷한 규슈 가고시마현 가고시마 만을 중심으로 일대 12곳에서 이동하면서 집중 훈련을 하였다.

훈련을 통해서 얻는 결과 중에 중요한 지휘방법 변화가 있었다. 종래 함이나 기지에서 통제하던 전투 지휘를 일선에서 항공대 지휘관이 하도록 바뀐 것이었다.



일 기동함대의 출동



가고시마현에서 훈련을 마친 함대는 같은 규슈의 오이다겐(佐伯湾)에서 이동 집결하여 최종 연습을 하고 11월 18일 사할린의 단칸만으로 이동하였다.

1941년11월1일, 도조 내각은 대미 개전을 결정하고 그 개전 일을 12월 8일(일본시간)로 결정하였다. 일본 천황 히로히토는 11월 5일 내각이 결정한 대미 개전을 재가하였다.

그는 이를 재가 했지만 최후의 순간까지 미국에 파견한 구루스 대사의 외교적 노력을 다하도록 지시하였다.

전운(戰雲)은 빠르게 접근해왔다. 미국에서도 일본과의 전쟁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믿는 국민들의 숫자가 52% 가 넘었다. 미 육군과 해군은 태평양 지역 지휘관들에게 경계를 강화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많은 미군의 고위층 등은 일본이 하와이를 직격 할 가능성은 낮고 필리핀을 강습하리라고 보고하였다. 그런 만큼 일선 부대는 기습에 대비한 완벽한 준비를 하지 않았다.

1941년 11월 26일 일본의 나구모 주이치(南雲忠一)중장이 지휘하는 6 척의 항공모함 기동부대가 일본령 사할린 군도 단칸 만을 떠나서 추위가 몰려오는 북태평양을 건너 하와이 공격을 위해서 출동했다.

북태평양 항로는 원래 오고 가는 선박이 드문 항로라서 일본 해군의 기동부대가 발각되지 않고 접근 할 수가 있었다.

출동 전 조종사와 항공대원 승조원들에게 미국과 일본 사이에 전쟁이 발생할 것이며 전쟁은 기동부대의 하와이 공격으로 시작된다는 사실이 발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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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기동함대의 기함 아카기





니이다카야마(新高山)노보레



12월 2일 대본영은 북태평양에서 하와이를 향하여 가고 있는 기동부대에게 암호 전문을 보냈다. “니이다가야마 노보레 1208. 신고산4)에 올라라"라는 뜻이다. 미국과의 협상을 결렬로 끝날 것이니 예정대로 12월 8일 진주만 공격을 시작하라는 암호 명령서였다.

니이다카야마(新高山)은 당시 일본 지배지 중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서 일본의 식민지였던 타이완에 있다. 현재는 옥산(玉山)이라고 불리며, 높이는 동북 아시아에서 제일 높다. 해발 3,952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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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원 | 전사연구가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시라큐스 경영대학원에서 MBA를 취득했다. 장교로 군 복무, 기갑부대 전차 소대장을 지냈다. ‘울프 독’이라는 필명으로 전사와 역사를 다룬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 국방부 정책·정보 블로그(N.A.R.A.)에 기고하고 있으며, 저서로 [공격 마케팅]이 있다


제공

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



발행2013.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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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야마모토의 구상은 헛된 꿈으로 끝났고 일본은 태평양 전쟁에서 전국토가 초토화 되는 수준으로 대패하였다. 대군(大軍)의 적 앞에 전략의 묘수 없다는 말이 상기되는 상황이지만 이때 야마모토는 어쩔 수가 없었다. 그의 초심대로 일본은 해서는 안 되는 전쟁을 시작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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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니시 제독(大西 瀧治郎)은 해군 항공병과의 리더로서 나중에 가미가제 자살 특공 작전을 실행에 옮긴 인물이다. 일본 패전직후 자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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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설적이나, 일본 해군은 해상 항공 작전의 선구자로서 본격적인 항모 시대를 열었지만 적국 항모 부대에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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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이다카야마(新高山)은 당시 일본 지배지 중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서 일본의 식민지였던 타이완에 있다. 현재는 옥산(玉山)이라고 불리며, 높이는 동북 아시아에서 제일 높다. 해발 3,952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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