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애틀랜타의 함락과 셔먼의 초토화 작전 - 남부의 심장 애틀랜타의 함락, 조지아에 울려퍼지는 북군의 행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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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91회 작성일 16-02-07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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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urning, 셰넌도어 초토화 작전



남부는 피터스버그와 리치먼드에 대한 압박을 풀고자 하였고, 늘 그랬듯이 기동력 좋은 부대를 북쪽으로 보내 약탈ㆍ기습하는 방법으로 북군을 괴롭혔다.

그랜트가 오버랜드 작전(Overland Campaign)을 시작한 후 리의 북부 버지니아군과 격전을 벌이고 있을 때, 남군 수뇌부는 얼리(Jubal Early) 중장 휘하의 부대를 시켜 셰넌도어 벨리를 통하여 펜실베이니아를 기습하게 하였다.

얼리의 기습 부대는 펜실베이니아에 나타나 식량을 약탈하고 농장을 불태우면서 워싱턴 정부의 신경을 건드렸다.

남군 기습대에 의한 군사적 타격은 그리 심하지 않았지만 기습당한 지역의 불안감이 고조되었고, 1864년의 대선을 앞두고 있던 워싱턴 정부에서는 상당히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이에 남군의 기습을 막는 임무에 셰넌도어군(Army of the Shenandoah)이 투입되었고, 피터스버그 공방전에 참여하고 있던 맹장 셰리든(Philip Sheridan)이 셰넌도어군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셰리든의 임무는 두 가지였다. 우선 셰넌도어를 통하여 북부를 공격하고 있는 얼리의 부대를 격퇴하고, 셰넌도어를 봉쇄하는 것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셰리든이 받은 명령은 셰넌도어 지역을 봉쇄하는 것도, 그 지역을 점령하는 것도 아니었다. 셰넌도어에 살고 있는 주민들을 모두 쫓아내고 그 지역을 모조리 불태우는 것이었다.

셰년도어는 비옥한 농경 지대였고 그 지역 주민들은 친(親)남부 성향이 강했다. 때문에 그곳을 불태우게 되면 남군이 북부를 기습할 통로가 없어짐은 물론 남부에 얼마 남지 않은 곡창지대도 없어지는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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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넌도어 벨리를 초토화시켜 주민들의 원성을 산 셰넌도어군의 사령관 필립 셰리든.


셰리든은 얼리의 병력과 싸우면서 셰넌도어의 친남부 주민들에게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하였다. 주민들을 직접적인 공격 대상으로 삼아 남군의 식량이 될 수 있는 가축과 곡식을 모두 불태운 것이다.

농장의 창고와 함께 곡식을 가공하는 제분소가 그 다음 목표였고, 북군은 셰넌도어에 있는 곡식 창고와 제분소 역시 모두 불질러 파괴하였다.

그 다음에는 가공품을 만들 수 있는 소규모 공장들을 목표로 삼아 남김없이 부수어버렸다. 마지막으로 셰넌도어에서 외부로 나갈 수 있는 통로인 철로를 모두 뜯어내 주민들이 외부와 연락을 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한때 풍요로웠던 셰넌도어는 불모지로 변하였다. 셰리든의 파괴 행위가 얼마나 철저했던지 그의 작전은 아직도 셰넌도어 사람들에게 “The Burning”이라고 불리면서 기억되고 있다.

셰넌도어가 철저히 파괴되면서 남군은 그 어떤 형태로든 북부를 공격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또한 이후 수도 리치먼드에 가해지는 압력을 덜어낼 수가 없게 된다.


남부의 심장, 애틀랜타를 공략하라



셰넌도어에 대한 초토화 작전도 타격이 컸지만, 셰넌도어가 불타는 것과 거의 동시에 이와는 비교도 안 되는 재앙이 남부를 할퀴고 있었다.

채터누가 작전을 승리로 이끈 그랜트가 포토맥군을 지휘하기 위하여 동부로 떠난 후, 서부에 남아 있던 북군의 지휘는 셔먼(William Tecumseh Sherman)이 맡게 된다.

한편 남군 테네시군(Army of Tennessee) 사령관 브래그(Braxton Bragg)는 채터누가 패전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고 존스턴(Joseph Johnston) 대장이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동부 전선에서도 그렇듯 남부 전선에서도 북군과 남군의 병력 차는 컸다. 채터누가 이후로 북군의 병력은 여러 차례 보강되어 셔먼이 거느린 미시시피 군관구(Military Division of the Mississippi)의 병력은 11만에 달했다.

이에 비하여 존스턴이 이끄는 남부 테네시군 병력은 5만 남짓이었다. 병력이 2배 이상 차이가 나는 상황에서 남군이 공격적인 전술을 펴기란 어려웠다.

반격을 시도했다가 혹시라도 패하게 되면 이 지역의 남군은 그대로 파멸을 맞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남군은 지형을 이용한 방어를 할 수밖에 없었고, 아울러 신중하고 다소 소극적인 존스턴의 성격은 이러한 경향을 더욱 부추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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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시피 군관구를 이끌고 남부의 심장 애틀랜타를 함락시키기 위해 진격을 시작한 윌리엄 셔먼.





11만 북군에 맞서 남부 테네시군 5만 병력을 이끌고 수비전을 펼친 조셉 존스턴.




1864년 5월 초, 셔먼의 진격이 시작되었을 때, 그의 목표는 분명했다. 그것은 남부의 대도시이자 심장부라 할 수 있는 애틀랜타의 함락이었다.

이를 잘 아는 존스턴은 필사적으로 셔먼의 진격을 막으려 하였다. 그러나 병력의 여유가 있는 셔먼은 존스턴의 방어를 무위로 돌렸다. 존스턴의 군이 수비 전선을 구축할 때마다 병력을 나누어 방어선을 우회하였기 때문이다.

양군은 로키 페이스 고원(Rocky Face Ridge, 5월 7일), 레사카(Resaca, 5월 13일), 뉴호프-처치(New Hope Church, 5월 26일), 피켓츠-밀(Picket’s Mill, 5월 27일), 댈러스(Dallas, 5월 26일~6월 1일), 콜브스-팜(Kolb’s Farm, 6월 22일), 케네소 마운틴(Kennesaw Mountain, 6월 27일) 등의 전투에서 승패를 주고 받았다.

북군은 남군을 격멸하는 데 실패했고, 남군은 북군을 막는 데 급급했으며 간헐적으로 보이는 북군의 실책이 있었음에도 이를 기회로 전환하려 하지 않았다.

중요한 사실은 존스턴이 수비전을 하면서 1달 동안 100km가 넘은 거리를 물러났다는 것이다. 북군의 목표가 애틀랜타라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존스턴은 애틀랜타의 최종 수비에 필요한 병력을 보전하려고 하였고, 북군과 결전을 벌이기 보다는 지연전과 후퇴로 애틀랜타의 방어망을 구축하는 데 필요한 시간을 벌려고 했다.

그러나 남부 정부의 관점에서 존스턴의 후퇴는 오히려 북군이 애틀랜타로 가는 길을 터주는 것으로 보였다.

6월 27일에 벌어진 케네소-마운틴의 전투에서는 셔먼의 정면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냈음에도 존스턴이 경질되었고 그 후임으로 후드(John Bell Hood)가 임명되었다.

전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케네소-마운틴을 포함한 매리에타(Marietta) 방면 전투에서는 그나마 남군 지휘관 중에서 전투 경험이 많은 폴크(Leonidas Polk)가 북군의 포격에 전사하면서 남군 테네시군 소속 병사들의 사기가 급감하였다.

남군은 다시 물러나서 애틀랜타 앞의 유일한 장애물이라 할 수 있는 채터후치(Chattahoochee)강에서 북군의 도강을 막고자 하였다.

남군은 채터후치강 페이스 페리(Pace’s Ferry)에 있는 유일한 부교를 파괴하고자 지연 작전을 펼치며 북군을 막았다.

7월 5일, 북군은 남군의 저항을 뚫고 부교가 있는 곳까지 진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남군은 부교에 불을 질러 파괴하려 했지만 실패하였다. 남군은 북군이 부교를 건너기 직전, 가까스로 부교를 연결하는 밧줄을 끊는 데 성공하여 일단 북군의 진공을 막았다.

그러나 7월 8일에 후방에서 북군의 부교가 도착하고 아울러 추가 병력이 다다르면서 북군은 다른 지점에서 도강하여 반대편 강가에 있는 남군 진영을 우회하려 하였다. 결국 남군은 북군에 의한 포위를 피하여 또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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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틀랜타 공격에 앞서 페이스 페리에서 강을 건너고 있는 북군 병력.


마지막 장벽이었던 채터후치마저 돌파당하자 남군은 북군을 상대로 결전을 치를 수밖에 없었다.

결국 7월 20일, 애틀랜타 외곽 풀턴 카운티(Fulton County)에 있는 피치트리-크릭(Peachtree Creek)이라는 조그마한 강가에서 북군 미시시피 방면군 소속 컴벌랜드군(Army of the Cumblerland)과 남군 테네시군(Army of Tennessee)이 본격적으로 격돌하였다.

새로이 테네시군의 지휘를 맡게된 후드(J. Hood)는 북군에 대한 선제공격을 시도하려 하였으나 부대간 연락이 안 되어 공격 병력이 분산되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남군 병력이 북군 방어선을 밀어붙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북군은 물러나면서도 전선을 유지할 수 있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남군의 병력 손실은 누적되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군의 돌격은 힘을 잃고 좌절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병력이 열세였던 테네시군은 피치트리-크릭에서 북군보다 많은 병력을 잃고 패잔병이 되어 황망히 철수하였다.

이제 미시시피 방면군은 압도적인 병력으로 애틀랜타를 에워싸기 시작했으며 상황은 남군에게 너무 불리하였다. 그러나 남군은 남부의 심장인 애틀랜타를 지켜내겠다는 결의로 다시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애틀랜타의 함락과 셔먼의 초토화 작전



병력의 현격한 열세를 절감한 후드는 연방군의 진격을 막지 않고 애틀랜타 방향으로 더 가까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결정적인 순간에 반격으로 전환하여 북군을 궤멸시키려 한 것이다. 그리고 7월 22일에 치텀(Benjamin Cheatham)의 부대로 북군에 대한 정면공격을, 하디(William Hardee)의 부대로 북군 좌측면을 공격하고, 휠러(Joseph Wheeler)의 기병대는 북군의 보급선을 치게 하였다.

휠러의 공격은 성공하여 보급 부대 일부를 격파하였지만 북군의 기민한 조치로 주요 보급품은 모두 안전하게 후방으로 후송되었다.

한편 하디의 좌측 공격은 그대로 돈좌(頓挫, 계획이나 기세가 갑자기 꺽임)되었고, 치텀은 어느 정도 북군을 밀어붙였으나 셔먼이 직접 포병대에 명령을 내려 치텀의 부대를 집중 타격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잠시 밀리던 북군 15군단이 전력을 재정비하여 반격하였고, 결국 치텀 부대의 공격 역시 좌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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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병대와 함께한 셔면. 그는 애틀랜타로 진격하여 시가전을 벌이기보다는 애틀랜타를 고립시켜 남군의 항복을 받아내기를 원했다.


이 전투에서 북군의 사상자는 3,500여 명, 남군의 사상자는 5,500여 명으로, 공격하던 남군은 오히려 북군보다 더 큰 피해를 입었다.

셔먼은 애틀랜타로 진격하여 시가전을 벌이기보다는 애틀랜타를 에워싼 후 보급을 끊어 남군의 항복을 받아내려 하였다.

그러나 북군은 애틀랜타를 완전히 에워싸지는 못하고 북쪽을 중심으로 반원형으로 포진하고 있었다. 남군은 시내 쪽의 수비 병력과 함께 애틀랜타 남쪽 참호선에 배치되어 있었다.

이때 남군의 유일한 생명선은 애틀랜타 남서쪽 메이컨(Macon) 방면에서 애틀랜타로 들어오는 철로였는데, 북군의 관점에서는 이를 파괴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셔먼은 여러 차례 기병대를 보내 철로를 끊고자 하였으나 번번이 남군 기병대에 격퇴당하였다. 그러나 이 철로를 둘러싼 공방전은 게속되었고 1864년 8월 31일, 마침내 북군은 애틀랜타의 유일한 보급로를 끊는 데 성공한다.

보급선이 끊긴 상황에서 더 이상의 농성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후드는 병력을 이끌고 외곽으로 후퇴하였다.

그리나 8월 31일에 애틀랜타 남쪽 외곽의 존스버러(Jonesborough)에서 북군은 6개 군단 병력을 동원하여 2개 군단밖에 남지 않은 후드의 병력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다.

비록 후드의 남군이 전멸되지는 않았지만 심각한 피해를 입었고 다음 날인 9월 1일, 후드는 결국 애틀랜타를 완전히 포기하기로 결정한다.

주력 부대가 후퇴한 마당에 애틀랜타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유력 인사들로 구성된 시민위원회가 셔먼과 미시시피 방면군 지휘관들을 만났고, 민간인과 그들의 재산에 대한 안전 보장을 조건으로 애틀랜타는 북군에 항복한다.

9월 3일에 셔먼은 워싱턴에 “당당하게 승리했음. 애틀랜타는 우리 것이 되었음(Atlanta is ours, fairly won)”이라고 전보를 보냈다. 남부의 심장인 애틀랜타가 북군에 함락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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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틀랜타에 불을 지르고 진격을 계속하는 북군.


그러나 남부, 특히 조지아에 있어 애틀랜타 함락은 재앙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셔먼은 다음 목표를 애틀랜타 다음의 대도시이자 항구인 서배너(Savannah)로 잡았다.

그리고 후방에서의 보급에 의존하는 대신 그가 지휘하는 미시시피 방면군의 병사들에게 필요한 보급품, 특히 식량을 현지에서 구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휘하 군단장에게는 필요할 경우 통과하는 지역에서 가옥과 공장, 농장 등을 불태우고 주요 시설을 파괴할 수 있는 재량권을 주었다.

물론 남부 주민들에 의한 공격 행위가 없을 경우 파괴와 약탈은 최대한 자제하게 되어 있었지만, 북군에 대한 약간의 적대 행위라도 있을 경우 해당 지역은 철저한 파괴와 약탈을 맛보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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셔먼의 조지아 진격을 보여주는 지도. 셔먼의 군은 조지아를 통과하면서 조지아를 철저하게 파괴하여 남부 주민들의 저항 의지를 확실히 꺾어놓았다. <출처: (cc) Hal Jespersen at en.wikipedia.org>


미시시피 방면군 휘하 애틀랜타에서 서배너까지 넓은 지역을 지나면서 각 사단의 지휘관들은 ‘채집’을 위한 병력을 별도로 편성하였다.

이들 채집 부대는 작물이 있는 밭이면 모조리 ‘수확’을 하고, 창고에 있는 식량을 반강제로 꺼내서 가져갔다.

이럴 경우 주민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작물의 가치가 기재된 영수증이 아니라 북군이 식량을 가져갔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확인서’ 한 장뿐이었다.

셔먼은 약탈 명령을 내림으로써 보급의 문제를 해결함과 동시에 남부의 심장부인 조지아주 주민들의 저항 의지를 철저히 꺾으려고 한 것이다.

이와 동시에 애틀랜타 인근의 철도를 모두 뜯어내어 당분간 도시로서의 기능이 불가능하도록 만들었다.

이때 일부 병사들이 뜯어낸 철로를 나무에 대고 굽혀서 묶어버렸는데, 주민들은 이를 셔먼의 나비넥타이에 빗대어 ‘셔먼의 넥타이(Sherman’s Neckties)’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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셔먼의 부대는 애틀랜타 인근의 철도를 모두 뜯어내어 도시로서의 기능을 마비시켰다.





조지아의 철로변에 남겨진 ‘셔먼의 넥타이’.




북군의 초토화 작전은 셔먼이 의도한 그대로 진행되었다. 젊은 장교 시절, 조지아주에 근무한 적이 있었던 셔먼은 이 지역 주민들의 정서를 고려할 때 웬만큼 전황이 불리해지더라도 전쟁을 포기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적군도 적군이지만 전쟁을 지원하는 남부 주민들의 사기를 꺾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는 셔먼이 서배너 점령 후 할렉에게 미시시피 방면군 사령관 명의로 보낸 서신에서 잘 드러난다.


“우리는 적의 군사들뿐만 아니라 적대적인 주민들과도 싸우고 있습니다. 정규군은 물론이고 주민들도 노소(老少)와 빈부(貧富)를 가리지 않고 전쟁의 어려움을 절감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최근 조지아주를 통과하는 본군의 움직임이 이와 관련하여 상당한 결과를 만들어냈습니다. 우리들이 늘 패배하고 있다는 거짓 보도에 속고 있던 수천 명의 사람들은 결국 진상을 알게 되었고, 다시는 이러한 꼴을 겪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We are not only fighting armies, but a hostile people, and must make old and young, rich and poor, feel the hard hand of war, as well as their organized armies.

I know that this recent movement of mine through Georgia has had a wonderful effect in this respect.

Thousands who had been deceived by their lying papers into the belief that we were being whipped all the time, realized the truth, and have no appetite for a repetition of the same experience.

이전 내슈빌, 채터누가의 점령으로 인하여 전쟁 물자 생산에 필요한 남부의 공업 생산력은 급감하였다. 여기에 애틀랜타가 점령되면서 남부는 완전히 수렁으로 빠지게 되었다.

그리고 셔먼이 서배너로 진군하면서 조지아주의 곡창 지대는 북군에 의한 약탈과 방화로 잿더미가 되었다.

조지아주에 대한 초토화 작전은 셰넌도어에서 이루어졌던 셰리든의 파괴 행위와 겹치면서 남부에서는 기본적인 식량 생산마저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비록 직접적인 살인 행위는 없었지만, 혹시라도 남부 민병대나 패잔병들에 의하여 북군 측 피해가 발생할 경우 북군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해당 지역 주민들을 모두 집에서 끌어내어 소개(疏開)하고 집과 곡식들을 남김없이 불질러버렸다. 생업의 수단을 모두 파괴하는 무자비한 대응 앞에서 주민들은 저항할 엄두도 내지 못하였다.

이후 이러한 ‘가혹 행위’가 문제가 되면서 일부 언론에서 비판이 일자 셔먼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한다.


“원래 전쟁은 잔인한 것이고 이는 어찌할 수 없는 것이오. 전쟁이 더 잔인해질수록 오히려 전쟁은 빨리 끝나게 될 것이오!”



War is cruelty. There's no use trying to reform it, the crueler it is the sooner it will be over.

남부에게는 악몽이 된 ‘조지아 행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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셔먼의 조지아주 공격 과정을 보여주는 그림. 북군이 지나간 지역은 집과 농작물이 약탈과 방화에 의해 모두 없어지는 끔찍한 피해를 입었다.


셔먼은 일단의 부대를 남쪽으로 보내어 메이컨 쪽을 치는 듯한 움직임을 보임으로써 이 방면의 남군을 견제하고 후드의 본군을 돕지 못하게 하였다.

후드 역시 일부 병력을 동원해 북군에 대한 유격전을 전개하여 북군의 진격 속도를 늦추려 하였다.

양군의 첫 전투는 11월 22일 메이컨 인근 그리스월드빌(Griswoldville)에서 일어났다. 휠러(J. Wheeler)의 기병대가 소규모 전투를 벌이는 동안 오거스타(Augusta)로 이동하던 조지아 민병대가 우연히 나타나 보다 큰 전투로 발전한 것이다.

그러나 휠러의 기병대는 북군 기병대의 반격에, 그리고 조지아 민병대는 북군의 포격에 큰 피해를 입고 후퇴하였다.

급속히 진군하던 북군은 11월 28일에 오코니(Oconee)강을 건너려다가 다시 휠러가 이끄는 기병대의 습격을 받았다.

이 전투에서 북군 기병대의 지휘관이 포로가 될 뻔했으나 지원 병력이 도착하면서 휠러 기병대는 600명의 사상자를 내고 도주할 수밖에 없었다.

남군은 서배너 인근 여러 지역에 바리케이드와 장애물을 설치하고 북군의 진격을 막으려 하였고, 휠러의 기병대 역시 큰 피해에도 불구하고 다시 북군을 습격했으나, 12월 4일 웨인즈버러에서 패하고 북군은 남군의 바리케이드를 돌파하였다.

12월 10일에 셔먼의 군은 서배너 외곽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남군은 시 외곽에 참호선을 구축하고 1만의 병력으로 단단히 지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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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5년 헨리 클레이 워크가 만든 “조지아 행진곡”의 악보 표지.


셔먼이 서배너로 진격하는 동안 또 하나의 문제는 흑인 노예들이었다. 노예해방이 선언된 후 북군이 들어왔으니 그들은 법적으로 해방이 되었지만, 흑인들의 삶이 당장 나아지는 것은 없었다.

북군의 도착과 점령에 마냥 기뻐할 수도 없었던 것이, 셔먼의 초토화 작전에 따라 북군이 집과 농작물을 불태우고 약탈하며 분탕질하며 다녔기에 셔먼의 군이 통과한 지역에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자신들의 삶의 터전이 모두 불타 없어지는 것을 본 흑인들은 셔먼의 군을 적극적으로 따라나서지 않았다.

일부는 혹시나 하며 북군을 따라나서기도 했으나, 사실 남군을 격파하여 전쟁을 끝내는 것이 급선무였던 셔먼은 흑인들이 따라오건 말건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 때문에 흑인들은 탈진과 노독(路毒)으로 죽는 일이 많았다.

법적으로는 해방이 되었건만 흑인들에게 돌아온 것은 방치와 무관심이었다.

셔먼의 초토화 작전은 남부에 있어 끔찍한 악몽이었다. 그리고 북부 병사들은 반란군을 혼내준다는 생각 때문에 초토화 작전에 적극적이었다.

전쟁이 끝날 때 즈음하여 작곡가 헨리 클레이 워크(Henry Clay Work)는 셔먼의 초토화 작전을 주제로 하는 “조지아 행진곡(Marching through Georgia)”이라는 곡을 발표했다.

노래 자체는 흥겨운 행진곡풍이고 전역한 북군 군인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가 되었지만, 당연하게도 남부에서는 금지곡 수준으로 싫어하는 노래가 되었다. 노래 가사는 다음과 같다.


Bring the good old bugle, boys, we'll sing another song

전우들이여, 나팔을 가져오게. 그리고 다른 노래를 부르세



Sing it with a spirit that will start the world along

온 세상 같이 부르도록 기세 높여 부르세



Sing it as we used to sing it, 50,000 strong

5만 강군이 부르던 그때처럼 부르세



While we were marching through Georgia.

우리가 조지아에서 진격하던 그때처럼.



(후렴)

Hurrah! Hurrah! we bring the jubilee!

만세, 만세. 기쁨을 가져다 준다네!



Hurrah! Hurrah! the flag that makes you free!

만세, 만세. 그대들을 자유케할 깃발 보면서!



So we sang the chorus from Atlanta to the sea

우리는 애틀랜타에서 바다까지 함께 불렀지.



While we were marching through Georgia.

조지아에서 진격하던 그때처럼.
참고문헌〈단행본〉


  • Iver Bernstein, [The New York City Draft Riots: Their Significance for American Society and Politics in the Age of the Civil War]
  • Benjamin Franklin Cooling, [Counterthrust: From the Peninsula to the Antietam]
  • John William Draper, [History of the American Civil War]
  • Joseph E. Johnston, [Narrative of Military Operations during the Civil War]
  • James M. MacPherson, [Battle Cry of Freedom: The Civil War Era]
  • Louis P. Masur, [The Civil War: A Concise History]
  • William T. Sherman, [Memoirs of General William T. Sherman]

 


 




참고문헌〈인터넷〉





김성남 | 안보·전쟁사 전문가
글쓴이 김성남은 전쟁이 인간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가지고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미국 UC 버클리 동양학과를 졸업한 후 연세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국제학 석사를 받고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에 진학하여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 [전쟁으로 보는 삼국지], [전쟁 세계사] 등이 있으며 공저로 [4세대 전쟁]이, 역서로 [원시전쟁: 평화로움으로 조작된 인간의 원초적인 역사]가 있다.


발행2013.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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