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역사 크림전쟁 (1) - 진격하는 러시아를 막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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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528회 작성일 16-02-07 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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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4년 발라클라바 전투에서 격돌하는 영국군과 러시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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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표


크림전쟁 개요

전쟁 주체


러시아
vs 영국, 프랑스, 오스만투르크, 사르디니아

전쟁 시기


1853~1856

전쟁터


크림반도와 흑해, 백해, 발트해, 동유럽 등등

주요 전투


시노페 해전, 알마 전투, 발라클라바 전투, 세바스토폴 포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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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시간 전만 해도 고결하거나, 비열하거나, 가지가지의 꿈과 욕망에 차 있던 사람들이, 몇 백의 사람들이, 이제는 피범벅이 된 굳은 손발을 팽개친 시체가 되어, 능보에, 참호에, 이슬이 촉촉이 내린 꽃이 만발한 골짜기에, 세바스토폴의 장례 교회의 마룻바닥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 그러나 모든 것은 어제와 그대로였다. 샛별은 사푼 산의 산마루 위에서 반짝이기 시작했다. 깜박이던 별들은 서서히 하얘져 갔다. 불타오르는 듯한 진홍빛 아침 노을이 동쪽 하늘 한쪽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자줏빛의 긴 구름이 엷은 야청빛 지평선을 따라 흩어져 달려갔다. 모든 것은 어제와 그대로였다. 장대하고 아름다운 태양이, 생기에 찬 온누리에 사랑과 행복을 약속하며, 또다시 둥실 떠올랐다.

- 레프 톨스토이, [세바스토폴 이야기]


‘하나된 유럽’, 그 속의 불만



19세기 초, 나폴레옹 전쟁 이후, 빈체제 하의 유럽은 한동안 ‘단결 속의 평화’를 구가하는 듯했다.

1815년에 ‘국제 평화, 세계 질서, 기독교 세계의 안보’를 모토로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이 ‘신성동맹’을 결성했으며, 이후 영국, 교황령(참여 거부), 튀르크(비기독교 국가라 하여 참여를 권유하지 않음)를 제외한 모든 유럽 국가들이 일단 이 동맹에 발을 들여놓았다.

또한 역시 1815년에 본래의 대(對)프랑스 동맹이던 ‘4국 동맹(영국,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도 부활했다.

이후 신성동맹은 다분히 이념적인(가맹국의 행동에 대한 구속 조건을 갖추지 않았기 때문인데, 그래도 헤겔은 이를 유럽 통합 정신의 구현으로 찬양했다), 4국 동맹(1818년에 프랑스를 추가하여 5국 동맹이 되었다)은 실질적인 국제 협의기구가 되어 빈체제 유지에 힘썼다.

1821년에 오스트리아의 지배에 대항해 사르디니아에서 일어난 혁명에 러시아가 병력을 지원해준 일이 한 예였다.

‘단결된 유럽’은 비기독교 제국에 맞서 어깨를 나란히 싸우기도 했다. 1821년부터 1832년까지 벌어진 그리스 독립전쟁에서 영국, 러시아, 프랑스가 오스만튀르크와 싸워 그리스 독립을 성취한 것이다.

그리스는 유럽 문명의 고향과 같은 곳이었기에, 이는 십자군 전쟁 이래 유럽이 거둔 의미심장한 쾌거라고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런 ‘단결’에는 큰 불안 요소가 있음이 분명했다. 바로 두 강대국, 영국과 러시아의 대립이었다.

영국은 ‘유럽 대륙에 단일 패권 세력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전통적인 대외전략에 따라 나폴레옹 타도에 앞장섰으나, 이제는 러시아를 또 다른 패권 세력 후보로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러시아가 주도하는 신성동맹에 가입하지 않으면서 4국 동맹을 주도하고, 종전의 적인 프랑스도 그 동맹에 끌어들인 것은 확실히 러시아를 견제하는 자세 때문이었다.

러시아가 오스트리아를 도와 이탈리아 혁명 진압에 병력을 보내고, 남아메리카의 옛 식민지를 되찾으려는 스페인을 지지하는 등의 행동도 러시아 입장에서는 구체제 유지-복원이라는 빈회의의 대의에 충실한 것뿐이라지만, 영국의 눈에는 야심 가득한 세력 팽창 시도로 보였다.

당시 크게 성장하고 있던 영국의 언론도 ‘러시아 공포증’ 확산에 한몫했다.

언론은 러시아의 야심을 경계해야 한다는 종말론적, 음모론적 보도로 꾸준히 독자를 자극했는데, [표트르 1세의 유훈]이라는 문서가 발견되었다는 특집 보도가 그 최고봉이었다.

수준 낮은 위조문서일 뿐이었던 이 [유훈]은 ‘러시아는 장차 유럽을 정복해야 한다. 그리고 나아가 전 세계의 지배자가 되어야만 한다’는 내용으로 꾸며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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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위협을 코믹하게 표현한 삽화. 이는 크림전쟁 뒤인 1877년도의 것이지만, 러시아가 팽창주의 야욕을 거두지 않고 있으며 특히 튀르크가 그 ‘먹이’가 되고 있다는 인식을 나타내고 있다.



이런 영국에 러시아도 불만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겉보기로는 러시아가 유럽의 지도자가 되면서 건국 이래 최대의 영광을 누리는 듯 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영국이 국제 질서의 균형자 노릇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 독립전쟁만 해도 러시아로서는 유럽 문명의 고향을 되찾는다는 명분 외에 ‘그리스 정교의 보호자’로서 이교도들의 손에서 신도들을 구한다는 명분도 가졌지만, 독립된 그리스는 대체로 친영국적인 정부를 수립하고 말았다.



동방의 위기



그러나 영국과 러시아, 그리고 당시 유럽의 세력 균형에 가장 큰 변수가 되었던 것은 튀르크였다.

18세기 이래 계속 내리막이었던 오스만튀르크는 이제 유럽과 아프리카에 뻗쳤던 세력권을 대부분 상실하고, 튀르크의 본거지를 지킬 힘조차 의심받고 있었다.

유럽 각국은 저마다 튀르크에게서 영토와 이권을 빼앗으려 하면서도, 자칫 제국 자체가 붕괴하여 동방이 대혼란에 빠지거나 다른 나라가 동방의 패권을 거머쥐는 일을 경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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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의 무하마드 알리. 튀르크 제국의 이집트 태수 자격이었으나, 사실상 이집트의 통치자로서 튀르크에 반기를 들었다.



그런데 그리스 독립전쟁이 마무리되자마자, 사실상 독립 상태에 있던 이집트의 무하마드 알리(Muhammad Ali)가 시리아까지 세력을 확장할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 1832년에 ‘그리스 독립전쟁에 이집트 병력을 지원해준 대가로 시리아를 내놔라’고 튀르크 조정에 요구하고, 이것이 거부되자 전쟁에 들어갔다.

코냐 전투에서 이집트군이 튀르크군을 대파하면서 독자적으로 시리아를 지킬 수 없음을 깨달은 튀르크는 유럽 각국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응한 나라는 러시아뿐이었다.

하지만 러시아가 1833년에 흑해 함대를 파견하여 튀르크를 돕고 나서자, 영국과 프랑스도 허겁지겁 함대를 파견했다.

튀르크를 돕자는 뜻이 아니라 러시아가 자칫 튀르크를 지배하에 둘 지도 모르는 상황을 방지하려는 뜻이었다.

외국의 중재로 이집트가 시리아에서 물러나기로 하고 튀르크의 위기가 해소되자, 러시아는 튀르크와 비밀리에 운키아르 스켈레시 조약을 맺어 상호방위 동맹을 수립하면서 다른 외국 군함에게 튀르크의 항구를 8년간 폐쇄하기로 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영국과 프랑스는 강력히 반발했으며 ‘우리는 이 조약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러시아는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와 3국 동맹에 합의하고, 다시 오스트리아와 뮌헨그레츠 협정을 맺어 중부 유럽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정책을 지지하는 대신 튀르크에 대한 러시아의 정책을 지지받기로 했다.

영국도 이에 맞서 프랑스, 포르투갈, 스페인과 새로 4국 동맹을 맺었다. 바야흐로 튀르크를 둘러싸고 유럽 주요 열강 사이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졌으며, 흑해에 파견된 러시아와 영국, 프랑스의 함대도 그대로 남았다.

1839년에 이집트와 튀르크는 다시 시리아를 놓고 충돌한다. 당시 튀르크는 마흐무드 2세의 서구식 개혁으로 면모가 일신해 있었으나, 이번에도 이집트군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서구 열강은 이번에도 개입했는데, 다만 러시아가 입장을 분명히 하지 않는 가운데 영국은 튀르크를, 프랑스는 이집트를 지원함으로써 서로 보조가 어긋났다.

1840년에 이집트가 시리아의 남부를 차지하되 나머지 점령지는 튀르크에 돌려주도록 하는 내용으로 영국,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이 합의안을 내놓자 이집트는 프랑스를 믿고 거부했으나, 영국이 곧바로 실력 행사에 들어가고 프랑스가 한 걸음 물러섬으로써 결국 굴복했다.

다시 프랑스와 다른 유럽 4개국이 협상 테이블에 앉아 튀르크 문제를 논의한 결과, 1841년에 해협 조약을 체결하여 튀르크가 평상시에는 흑해로 진입하는 다르다넬스, 보스포루스 해협을 폐쇄하도록 만들었다.

즉 어떤 유럽 국가도 해군으로 튀르크를 공략하지 않도록 합의한 것이다. 이것으로 한때 유럽이 영국과 러시아를 중심으로 두 진영으로 나뉘어 대전이라도 치를 듯했던 상황은 마무리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전쟁의 불씨는 몇 년 뒤 다시 한 번, 이번에는 러시아와 프랑스 사이에서 피어올랐다.



과거의 적들과 손잡고 과거의 전우와 싸우다



문제는 ‘성지’ 팔레스타인의 관할권에 있었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성지인 이 땅에 대해 러시아는 그리스 정교의 보호자 자격을 내세우며 현지의 기독교 성직자와 교회에 대한 보호권 명목으로 사실상의 관할권을 튀르크에게서 용인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 권한의 정확한 한계와 법적 근거는 분명하지가 않았는데(1774년에 러시아와 튀르크가 맺은 조약에 아주 짧고 모호하게 표현되어 있는 조항이 전부였다), 1851년에 새로 나폴레옹 3세가 집권한 프랑스 쪽에서 ‘그러고 보니 우리도 18세기에 튀르크와 비슷한 협약을 맺었다’며 팔레스타인의 가톨릭 교도들을 보호하기 위한 관할권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당시 팔레스타인의 가톨릭 교도는 그리스 정교도의 십분의 일에도 못 미쳤던 만큼 다소 무리한 요구였으나, 튀르크는 프랑스의 위협이 두렵기도 하고, 러시아의 과도한 관할권 행사가 못마땅하기도 해서 이를 수락했다(1852년).

그러자 당연히 발끈한 러시아의 니콜라이 1세는 러시아 남부 주둔군에 동원령을 내리고, 흑해 해군을 경비 태세에 들어가도록 했다.

그리고 러시아 주재 영국 대사와 면담하다가 “우리가 손잡고 튀르크를 분할합시다. 세르비아, 불가리아를 독립시키고, 이집트는 영국령으로 하는 게 어떻소?”라고 말했다.

그 말이 얼마나 진지한 것이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데, 아무튼 그 소식을 접한 런던은 화들짝 놀랐다. 특히 오래 전부터 대표적인 반러시아론자로 유명했던 파머스턴 외무장관은 러시아가 드디어 본색을 드러냈다며 치를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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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 팔레스타인의 가톨릭 교도들을 보호하기 위한 관할권을 튀르크에 요구하면서 러시아 차르와 겨루었으며 적극적으로 크림전쟁에 뛰어들었다.





러시아의 니콜라이 1세.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의 황제로, 대내적으로는 권위적, 대외적으로는 팽창 지향적인 정책을 폈다.




아무튼 러시아는 1853년 초 멘시코프를 콘스탄티노플에 파견해 프랑스에 대한 관할권 허가를 철회하도록 종용했다.

이에 프랑스는 그리스의 살라미스까지 해군을 출동시키고, 영국도 반러시아론자 스트래드퍼드(Stratford Canning)를 튀르크 주재 대사로 파견했다. 스트래드퍼드는 결국 멘시코프가 빈손으로 콘스탄티노플을 떠나게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러시아가 ‘다뉴브 공국’으로 불리는 발칸 반도의 왈라키아와 몰다비아에 병력을 보내자(이 지역은 15세기 말부터 튀르크 제국에 속한 자치령이었는데, 러시아와 튀르크의 꾸준한 영토권 마찰이 있어왔다), 이번에는 오스트리아가 나섰다.

러시아의 행동이 자칫 발칸 전역에서 분쟁을 일으킬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우호 관계에 있는 러시아와 정면으로 맞설 수 없던 오스트리아는 1853년 7월에 빈에 영국, 러시아, 프랑스 대표들을 초청하여 중재회의를 열었다.

성지 관할권에 대해서는 러시아의 체면을 세워주고, 대신 러시아는 튀르크나 다뉴브에 대한 침공을 포기한다는 선에서 대략 합의되었으나 스트래드퍼드가 아주 사소한 문제를 꼬집고 나서면서 회담은 결렬되었다.

오스트리아는 이후에도 거듭 중재안을 내놓았고 사태가 생각보다 심각함을 깨달은 러시아도 이에 호응했으나, 영국의 강경한 태도에 번번이 무산된다.

1853년 10월, 영국의 부추김에 따라 튀르크는 러시아에 전쟁을 선포했으며 많은 경우 이때를 크림전쟁의 시작으로 본다(그러나 유럽 세력끼리의 격돌은 그 뒤 1년이나 지나서 시작되었기에, 기점을 1854년으로 잡기도 한다).

1854년 1월에 영국과 프랑스의 해군이 흑해에 진입했으며, 3월에는 영국, 프랑스와 튀르크의 동맹이 체결되었다. 이로써 불과 얼마 전, 그리스 독립을 위해 러시아와 손잡고 튀르크와 싸웠던 두 나라는 이제 편을 바꾸어 어제의 전우와 맞서게 되었다.

6월에는 오스트리아도 러시아에 최후통첩을 했는데, 러시아와 실제로 싸우기보다는 압박하려는 목적이었고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이후에도 종전 때까지 군대를 움직이지 않았다.

9월에는 영국, 프랑스 원정군이 크림 반도에 상륙, 10월에 세바스토폴 공략을 시작했다. 이제는 정말 전쟁이었다. ‘기독교 유럽의 대동단결’을 내걸었던 신성동맹도, 빈체제도 결정적으로 옛날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참고문헌


  • William Howard Russell, [The War, From the Landing at Gallipoli to the Death of Lord Raglan](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2)
  • David Wedgwood Benn, "The Crimean War and Its Lessons for Today"([International affairs]. vol. 88 no. 2. 2012)
  • Brian James, "Allies in Disarray: the Mystery of Why the Crimean War Ended so Suddenly, With Few of the Allies' War Aims Achieved"([History Today] vol. 58 no. 3, 2008)
  • 레프 톨스토이, [세바스토폴리 이야기: 전쟁 소설집](인디북, 2004)
  • 버나드 몽고메리, [전쟁의 역사](책세상, 2004)
  • P. R. 파머-J. 콜튼, [서양근대사](삼지원, 1985)
  • 이에인 딕키 외, [해전의 모든 것](휴먼앤북스, 2010)
  • 마르틴 반 크레펠트, [보급전의 역사](플래닛미디어, 2010)
  • 에릭 두르슈미트, [아집과 실패의 전쟁사](세종서적, 2001)
  • 리튼 스트레이치, [빅토리아 시대의 명사들](경희대학교출판부, 2003)
  • 김용구, [세계외교사](서울대학교출판부, 2006)
  • 원태재, “크리미아 전쟁과 영국 군사개혁” [사학지] 23호.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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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규진 | 서울교육대학교 교수/역사저술가
글쓴이 함규진은 여러 방면의 지적 흐름에 관심이 많다. 정치학을 전공하여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주로 역사와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썼고, 인물이나 사상에 대한 번역서도 많이 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등 서로 대립되는 듯한 입장 사이에 길을 내고 함께 살아갈 집을 짓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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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2014.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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